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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307화 (307/1,567)

307화. 군자는 괜한 수고를 하지 않는 법이다. (2)

"대가리이이이이이이이!"

조걸의 검이 호쾌하게 내리쳐졌다.

콰앙!

"끄륵."

막아 내는 상대의 허리가 뒤틀린다.

조걸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깔끔한 돌려차기로 상대의 발목을 후려갈겨 버렸다.

"아악!"

상대의 몸이 허공으로 붕 떠오른다. 물론 그 틈을 놓칠 조걸이 아니었다.

"으랴아아아아아앗!"

조걸의 검이 상대를 시원하게 후려쳐 날려 버린다.

"아아아아아악!"

비무대를 넘어 저 먼 곳까지 날아간 상대의 아련한 비명만이 소림 전체에 울려 퍼졌다.

"승자는 화산의 조걸이오!"

"허억! 허억! 허억!"

조걸이 가쁜 숨을 내쉬었다.

마지막은 호쾌했지만, 결코 쉬운 승부는 아니었다. 한순간이라도 방심했다면 졌을 것이다.

'갈수록 쉽지 않네.'

구파는 구파. 오대세가는 오대세가.

남는 이들이 적어질수록 상대의 수준이 올라간다. 방금 그가 상대했던 모용세가의 모용도(慕容島)만 하더라도, 다시 붙는다면 반드시 이길 수 있다고 장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어쨌든 이겼으면 됐지!'

청명이 그랬던가?

이겨서 얻을 것이 없어도 일단은 이겨 놓고 봐야 한다고. 조걸은 그 말에 백번 공감했다.

굽혔던 허리를 펴자 관중들의 환호가 쏟아졌다.

"화산이 모두 이겼다!"

"세상에 정말 다 이겼어! 정말 강하다!"

"이러면 십육강에 화산에 넷이나 남는 건가? 허허헛! 내 살다 살다 이런 걸 두 눈으로 보게 될 줄이야!"

관중들이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이젠 단호하게 말할 수 있다.

이건 절대 요행이 아니다.

"천하의 명문이라고 거들먹거리던 이들이 다들 얼굴을 못 들겠는걸. 화산에서 저만한 고수들을 넷이나 배출하다니."

"넷이라니. 다섯이지?"

"응? 왜 다섯인가?"

"아, 이 사람아! 화정검이 있지 않은가! 부상으로 기권했다고는 하지만, 천하의 기재로 불렸던 종남의 진금룡을 이겼는데 어떻게 그를 뺄 수가 있나."

"으음! 듣고 보니 그렇군."

"게다가 듣자 하니 화정검 백천의 배분이 저들 중 가장 높다던다. 문파의 대제자가 사질들보다 약할 리는 없잖은가?"

"화산신룡 하나만 해도 충분히 어깨에 힘을 줄 수 있을 텐데, 화산신룡에 못지 않은 고수가 넷이라니. 화산파의 앞날이 아주 창창하겠구만!"

"이제는 우승만 하면 되는 게지, 우승만!"

모두의 눈에 기대가 어렸다.

이쯤 되면 내친김에 화산이 우승하는 모습을 보고 싶어진다. 기존의 강자들이 뻔한 우승을 하는 것보다는 그게 몇 배는 더 재미있을 테니까.

그리고 어쩌면 이런 기대가 그저 기대에서 끝나지 않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아오, 진짜 힘들었어요."

자리로 돌아오며 투덜투덜대는 조걸을 본 윤종이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비무 한 번으로 엄살이 왜 그렇게 심하더냐?"

"……사형."

"음?"

"내가 다른 사람은 몰라도 사형한테는 그런 말 듣고 싶지 않습니다. 사형은 부전승으로 편하게 올라갔잖아요."

윤종이 빙그레 웃었다.

"그렇다고 부전승으로 올라가라는데 내가 싸우겠다고 나설 수는 없잖느냐?"

"끄응."

조걸이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본래 부전승으로 올라갔어야 하는 이는 청명이다. 하지만 부정을 방지한다는 이유로 대진표를 재추첨해 다시 짜다 보니 뜬금없이 윤종이 부전승으로 올라가게 되어 버렸다.

그냥 비무를 한 번 더 치르게 되었다면, 당연히

'이 땡중 새끼들이 어디서 개 같은 수작질이야!'

하고 외치며 대웅전으로 달려갔을 청명이다. 하지만 다행히 화산의 윤종이 부전승을 얻은 덕분에 적당히 이해하고 넘어갈 수 있었다.

"대체 왜 이런 짓을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다 큰 뜻이 있는 것 아니겠느냐?"

윤종이 빙그레 웃었다.

"소림은 강호의 큰 어른과도 같다. 그리고 부정을 방지한다는 것은 어찌 보아도 좋은 일이지. 확정된 대진으로 대회를 계속 치른다면 친분으로 결과를 바꾸거나, 돈으로 매수하는 일이 벌어지지 않는다고 확신할 수 있겠느냐?"

"……그냥 사형이 득 봐서 좋아하는 것 아닙니까?"

"크흐흐흠. 그럴 리가."

윤종이 크게 헛기침을 했다.

"나도 나의 검을 증명하고 저들 앞에 선보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 하지만 기회가 주어지지 않으니 참으로 안타깝구나."

"사형."

"응?"

"입에 침이나 바르십쇼."

"이미 발랐다."

"……."

윤종의 입에 더없이 자애로운 미소가 드리워졌다.

이만한 대회에서 싸우지도 않고 꽁으로 승을 쌓는 게 어디 쉬운 일이던가?

착하게 살면 하늘에서 복을 내린다더니.

'하늘이 내게 복을 내리시는구나.'

그럴 만도 하지.

사실 그가 그동안 겪은 고생을 어찌 말로 다 할 수 있겠는가?

하필 그는 청자 배의 대사형이고, 하필 저 청명 놈은 청자 배의 막내로 화산에 들어왔다.

그간 그가 겪었던 고통을 감안한다면 염라대왕도 '너는 이미 현생에서 지옥을 겪었으니 굳이 지옥으로 갈 필요가 없다'며 눈물을 쏟을 것이다.

그러니 이 정도 복쯤은 괜찮지 않겠는가?

"너무 좋아하지 마십시오. 대진표가 멋대로 바뀐다는 건, 다음에 누굴 만날지 모른다는 소리 아닙니까?"

"나는 누구를 만나도 자신 있다."

"그러다가 저라도 만나면 어쩌시려고요?"

"그럼 그날이 청자 배의 위계를 다시 굳건히 하는 날이 되겠지."

"……끄으으응."

조걸이 이를 빠득빠득 갈았다.

반질반질한 얼굴로 허허 웃음을 짓는 윤종을 보고 있자니 속이 뒤집히는 느낌이다.

"세상일이 다 그리 쉽게 풀릴 리가 있습니까?"

"하지만 지금까지는 그저 잘 풀렸지. 소림에 온 이후로는 말이다."

"끄응."

윤종이 빙그레 웃었다.

"아무래도 소림이 내게 좋은 기운을 주는 모양이구나. 결승 정도는 노려 봐야겠어."

윤종이 더없이 호탕하게 웃어 젖혔다.

더없이 호탕하게.

* * *

"……."

결승…….

어, 그래. 결승이라고 했었는데.

윤종이 고개를 슬쩍 돌렸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관중들이었다. 모두 뭔가 안쓰러운 시선으로 그를 바라본다.

"……."

그다음으로 눈에 들어온 것은 화산의 사형제들이었다. 모두가 그를 보며 혀를 차고 있었다.

가장 앞에 앉은 조걸은 만면에 회심의 미소를 내건 채 낄낄대고 있었다.

'저 새끼…….'

좋아 죽는 조걸의 모습을 보고 있으니 속이 뒤집어진다. 생각 같아서는 당장 뛰어 내려가 저놈의 주둥아리를 후려갈겨 버리고 싶지만…….

안타깝게도 지금의 윤종에게는 그럴 만한 여유가 없었다.

이유?

이유는 무척 간단하다.

그의 떨리는 눈이 비무 상대에게로 향했다.

'부전승이라 좋아했더니.'

이 개 같은 놈들!

이러면 부전승이 무슨 의미가 있나!

건너편에 선 놈이 빙글빙글 웃더니 입을 열었다.

"쫄지 마, 쫄지 마."

"……."

"뭐 별거 있겠어? 그냥 적당히 칼이나 휘두르는 거지, 뭐."

놈의 입꼬리가 말려 올라간다.

"다만……."

놈이 검집째 검을 틀어쥐는 모습을 본 윤종의 등골에는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이왕 좋은 기회를 잡은 김에 어디 사형 실력이 얼마나 늘었는지 제대로, 아주 제.

대.

로 확인해 볼까?"

"……."

마귀처럼 웃는 청명의 모습에 윤종은 끝내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뭐?

하늘이 복을 내려?

지랄하고 자빠졌네.

'왜!'

사람이 열여섯씩이나 있는데 왜 하필 저 마귀 놈이 걸리나!

아니!

이 소림 땡중 놈들도 생각이란 게 있어야지! 같은 문파 사람은 최대한 안 붙이는 게 기본 아니냐고!

그리고 설사 같은 문파끼리 붙는다 쳐도! 조걸도 있고 사고도 있는데. 왜! 왜 하필 저 망할 놈이 그의 상대인 것인가?

윤종이 젖은 눈으로 단상 위를 바라보았다.

이쪽을 무척 안쓰러운 얼굴로 보는 현종과 눈이 마주쳤다.

'장문인.'

그런데 언제 눈이 마주쳤냐는 듯, 현종마저 슬그머니 시선을 돌렸다.

"……."

세상 안쓰러운 시선들이 모두 윤종에게로 쏟아졌지만, 그건 전혀 위로가 되지 못했다.

왜냐면…….

"낄낄낄낄."

정작 그를 안쓰럽게 여겨야 할 놈이 재미있어 죽겠다는 듯 낄낄대며 다가오고 있기 때문이었다.

"……청명아."

"응?"

"아무래도 잊은 모양인데, 나는 네 사형이다."

"알아. 안 잊었어."

"아니. 잊은 것 같은데……."

윤종이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는 짐짓 침착하게 말했다.

"생각해 봐라. 네가 여기서 나를 개 패듯이 패 버리면 화산을 보는 다른 이들이 뭐라 생각하겠느냐?"

"저기 화끈하네?"

"……."

"아니면…… 저기 참 실력 위주로 돌아가네?"

"……개차반이라고 하겠지."

"아, 그런가?"

청명이 입꼬리를 씨익 말아올린다. 불길하기 짝이 없는 웃음이었다.

저놈이 저렇게 웃는 날에는 분명히 사건 사고가 생긴다!

"……그러니 서로 상처를 입히지 말고 적당히 하는 건 어떠냐?"

청명이 오, 하며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말이야, 사형."

"어, 진짜?"

이놈이 말귀를 알아먹을 때가 다 있…….

"그런데, 사형."

"응?"

"사형이야말로 하나 잊은 모양인데."

"……응?"

청명이 검을 바닥으로 내리쳤다.

콰아아아앙!

단단한 청석으로 만들어진 비무대가 마치 진흙 바닥처럼 짓뭉개졌다.

"……."

씹어뱉는 듯한 청명의 말이 이어졌다.

"화산에 대충이 있던가?"

"……."

"어디 아직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게 대충을 논해! 대충을! 나 때……."

"그래. 너 때는 안 그랬겠지."

"어, 맞아."

"……그리고 내가 연상이야. 이 미친놈아."

"쌈 잘하면 형이지."

윤종이 얼굴을 감쌌다.

'이 문파는 근본부터 뭔가 잘못되어 있어.'

하지만!

윤종은 천천히 검을 뽑았다.

"잊지 마라, 청명아."

"응?"

"나는 네 사형이고, 청자 배의 대사형이다. 그래. 언제고 한 번은 이런 날이 올 줄 알았다. 나라고 언제까지 네놈에게 휘둘릴 수는 없지!"

"호오오오?"

결의에 가득 차 검을 뽑는 윤종을 보며 청명이 묘하게 웃었다.

"해보겠다고?"

"이길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사고가 그랬고, 사숙이 그랬듯이 나도 나 자신을 증명해야겠지! 너라면 그 상대에 부족함은 없을 터!"

윤종의 눈에 의기가 가득 차올랐다.

"와라. 나도 언젠가는 화산을 이끌어야 할 몸! 의지만은 지지 않는다는 걸 보여 주마."

"크으으으!"

청명이 감동했다는 듯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그렇지."

그가 윤종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내가 사형을 과소평가한 모양이야. 운남에서 보여 줬던 모습도 그렇고, 확실히 사형은 당당한 화산의 제자로서 부족함이 없는 사람이지."

윤종의 입가가 씰룩였다.

저 칭찬에 인색한 청명에게서 저런 말을 듣는다는 건 꽤 의미가 큰 일이다.

청명이 중얼거렸다.

"의지만은 지지 않는다라."

그러더니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래. 그럼 나도 제대로 상대를 해 줘야겠지."

"응?"

스르르릉.

"……."

청명이 천천히 검집에서 검을 뽑기 시작했다.

"청명아?"

너 왜 갑자기 검은 뽑고 그러니?

사람 불안하게?

검집을 옆구리에 찬 청명이 검을 들어 윤종을 겨누었다.

"무인이 의지를 증명하겠다고 하면 전력으로 상대해 주는 게 예의지! 걱정하지 마, 사형! 내가 정말 최선을 다해 줄 테니까!"

"……."

이걸 기뻐해야 하는건가?

어?

기뻐해야 하냐고.

그 순간 청명에게서 말 그대로 칼날 같은 기세가 뿜어지기 시작했다.

서 있기도 힘들 만큼 어마어마한 그 기세를 정면으로 받은 윤종의 몸이 절로 오그라들기 시작했다.

"자, 간다!"

상황을 주시하던 심판이 번쩍 손을 들어올렸다.

"그럼 시작……."

"심판!"

그때 별안간 윤종이 고개를 획 돌려 심판을 불렀다.

"음?"

그리고 단호하게 소리쳤다.

"기권이요!"

"……."

"……."

소림 전체에 묘한 정적이 흘렀다.

윤종은 썩은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청명과 심판의 시선을 슬쩍 피했다. 그리고 점잖게 중얼거렸다.

"군자는 괜한 수고를 하지 않는 법이다."

"……사형 도사 아냐? 도사가 뭔 군자?"

"……."

나도 살아야지.

나도.

비무대 아래서 그 광경을 지켜보던 백천이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걸아."

"예, 사숙!"

"저 새끼 끌고 와라."

"예!"

뿌드득 이를 간 백천은 목을 좌우로 꺾었다.

"내가 저걸 사질이라고."

문파 꼴 잘 돌아간다.

아주 잘 돌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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