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6화. 군자는 괜한 수고를 하지 않는 법이다. (1)
검이 튕겨 나가며 훤히 비어 버린 유이설의 머리를 향해 팽경의 도가 떨어져 내린다.
금방이라도 유이설의 머리가 팽경의 도에 갈라질 것만 같은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다.
화산의 제자들이 비명을 지르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파아앙!
튕겨 나갔던 유이설의 검이 빛살처럼 날아들어 팽경을 도를 후려친다.
쾅! 쾅! 쾅! 쾅! 쾅!
한 번. 두 번. 세 번. 그리고 또다시!
순식간에 팽경의 도를 향해 십이 연격이 떨어졌다.
한 번의 검격으로 팽경의 도를 밀어 내는 건 불가능하다. 하지만 여러번을 일거에 날릴 수 있다면 그 힘을 감당하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콰앙!
마지막 열두 번째 검격이 도를 후려치는 순간 팽경의 어깨가 젖혀졌다. 그리고 백 근에 달하는 도가 뒤로 튕겨 나갔다.
'뭐?'
미처 경악할 틈도 없이 유이설의 검이 팽경의 목을 찔러 들어왔다.
"쾌(快)."
청명이 낮게 중얼거렸다.
쾌는 빠름.
"큭!"
팽경이 몸을 옆으로 뒤집으며 날아드는 검을 피했다. 하지만 미처 완벽하게 피하진 못했다. 그의 어깨가 쭉 갈라지며 핏물을 뿜어냈다.
그 순간 허공에서 뚝 멈춰 선 유이설의 검이 몸을 비튼 팽경의 허리를 강하게 후려쳤다.
쿵!
가까스로 유이설의 검을 도면으로 막아 낸 팽경의 몸이 아이에게 걷어차인 공처럼 바닥을 나뒹굴었다.
"패(覇)."
패는 강함.
"빌어먹을!"
검수의 강격(强擊)에 바닥을 굴렀다는 자괴감 때문인지, 팽경은 분에 겨운 고함을 내지르며 몸을 벌떡 일으켰다.
하지만 몸을 일으킨 그가 본 것은 수십 개의 검영을 그리며 날아드는 유이설의 검이었다.
"변(變)."
변은 변화.
미처 허리를 다 세우지도 못한 팽경은 다시 바닥으로 몸을 굴려야 했다.
나려타곤(懶驢打滾).
게으른 당나귀가 바닥을 구른다는 말. 무인이 적의 공격을 피하기 위해 바닥을 구르는 것을 의미한다. 체면을 중시하는 무인들이 가장 꺼려 하는 신법이기도 하다.
바닥을 몇 번이나 구르고야 유이설의 사정권에서 벗어난 팽경이 이를 악물고 몸을 일으켰다.
"이……. 이 빌어먹을……."
정신을 차릴 수가 없다.
분명 상대는 그보다 강하지 않다.
검에 실린 내력은 그의 도에 실린 내력에 미치지 못하고, 가진 힘은 그의 반도 되지 않는다.
속도야 저쪽이 빠르다고 해도, 힘이 실린 속도와 힘이 실리지 않은 속도 중 어느 것이 더 우월한지는 너무도 뻔한 일이 아닌가?
그런데도 이상하게 한시도 우위를 점할 수가 없다.
'흥분하지 마라.'
팽경이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입술이 터지며 핏물이 주르륵 흘러내린다. 하지만 입술에서 느껴지는 아찔한 통증 덕에 노기로 가득 찼던 머리가 조금 맑아지는 느낌이었다.
'힘으로는 내가 우위다. 그걸 이용해야 한다.'
이대로 계속 상대의 공격을 받는 건 불리하다. 유이설의 검은 신출귀몰하기 짝이 없어 완벽하게 방어해 내기가 힘들다.
차라리 공격. 그래, 공격이 우선이다.
스슷.
팽경의 발이 먹이를 노리는 비호처럼 바닥을 스치며 내달렸다. 그 커다란 덩치에 어울리지 않는 유려하고 재빠른 보법.
기회를 노리던 그는 일시에 거리를 좁히며 빠르게 도를 휘둘렀다.
힘을 버리고 속도를 취한 도.
어설프게 힘으로 찍어 누르려다가는 되레 당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그는 자신이 펼칠 수 있는 최고의 쾌도(快刀)로 유이설의 손목을 노렸다.
오호단문도.
기호추록(飢虎追鹿).
굶주린 호랑이가 사슴을 쫓듯, 팽경의 도는 더없이 빠르고 더없이 경쾌했다.
순식간에 다섯 번의 도격이 유이설의 검을 노리고 날아들었다.
몸을 쫓을 수 없다면 검을 쫓는다.
저 검을 부러뜨리는 순간 승부는 갈린 것이나 다름없으니까.
하지만 유이설의 눈은 날아드는 도격을 보면서도 그저 낮게 가라앉을 뿐이었다.
카앙! 카앙!
검이 날아드는 도를 정확히 막아 낸다. 충돌할 때마다 검이 뒤로 밀려났지만, 결코 튕겨 나가지는 않는다.
하지만 근본적인 차이는 존재하는 법.
검과 도가 섞일 때마다 유이설의 몸이 조금씩 밀려나고, 검 역시 조금씩 느려졌다.
'이때다!'
기회를 잡았다고 생각한 팽경은 이를 악물고 가진 내력을 모조리 도에 밀어 넣었다.
그의 필살의 절기, 오호단문도의 오호난무(五虎亂舞)가 펼쳐졌다.
도에 실린 붉은 도기가 허공에 다섯 줄기의 유성을 그려 낸다.
마치 전력으로 질주하는 다섯 마리의 붉은 비호(飛虎)를 보는 것만 같은 광경이었다.
다섯 개의 도기가 금방이라도 유이설을 부숴 버릴 듯 빠르게 날아든다.
하나 그 순간.
스르르륵.
유이설의 검이 유려하고 부드러운 곡선을 그려 내었다. 슬며시 내밀어진 검이 날아드는 도기의 옆면에 맞닿았고, 이내 도기를 부드럽게 옆으로 밀어 낸다.
콰앙! 콰앙! 콰앙!
다섯 줄기의 도기가 모두 그 방향을 틀며 유이설의 몸을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나갔다.
"유(柔)."
유는 부드러움.
팽경의 눈이 부릅떠졌다.
도무지 이 상황을 받아들일 수 없는 듯 경악한 기색을 숨기지도 못했다. 그런 그를 향해 유이설은 틈을 주지 않고 검을 휘둘렀다.
'마, 막아야……!'
그리고.
팽경은 보았다.
자신을 향해 날아드는 유이설의 검 끝에서 붉은 매화가 줄기줄기 피어나는 모습을 말이다.
검기로 만들어진 매화의 문양은 무엇이 진짜 검이고 무엇이 그저 환상인지 구분할 수 없을 만큼 화려하게 피어났다.
"아……."
반사적으로 휘둘러진 도는 그저 허공을 가를 뿐이었다.
매화의 형상과 함께 도(刀)를 스쳐 지난 유이설의 검이 팽경의 목 바로 앞에서 멈춰 섰다.
"……."
따끔한 통증과 함께 팽경의 목울대에서 한 방울의 피가 흘러내린다.
자신의 목을 겨눈 검을 바라보던 팽경은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졌소."
"좋은 승부."
유이설이 검을 회수해 검집에 밀어 넣고는 팽경을 향해 포권 했다.
이윽고 장내에 폭발적인 함성이 터져 나왔다.
"환(幻)."
환은 미혹하는 것.
청명이 포권을 하는 유이설을 보며 나지막하게 말했다.
"검이라고 해서 다 같은 검이 아니야. 모든 검법은 각각 추구하는 검의(劍意)가 있는 법이지."
백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형들은 그저 더 정교하게 초식을 펼치고, 더 빠르고 강하게 검을 휘두르는 것에만 집착하지. 하지만 검은 그게 전부가 아니야."
청명은 사뭇 진지했다. 평소의 장난기가 쏙 빠지니 다른 사람 같기도 했다.
"쾌검. 패검. 변검. 유검. 환검. 중검(重劍). 그 외에도 수많은 검의가 있다. 검은 결국 그 검의를 얼마나 이해하느냐에 달려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야."
백천이 무거운 눈으로 청명을 바라보았다.
청명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이런 이야기를 그들에게 한 적이 없었다. 지금까지는 그저 몸을 단련하고 기본을 지키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말해 왔으니까.
하지만 지금 청명의 말하는 것은 말 그대로 검의(劍意). 더 높은 곳으로 향하기 위해 검수가 알아야 할 것들이다.
"생각해. 자신이 쓰는 검이 어떤 것인지. 화산의 검은 쾌와 변. 그리고 환을 기본으로 한다."
"빠르게 변화하며 상대를 미혹한다는 건가."
"그래. 그게 화산의 검이다. 그럼 무당은?"
"부드럽다."
"그래. 유검이지."
청명이 모두를 돌아보며 말했다.
"점창의 사일검법(射日劍法)은 극단적인 쾌검을 추구하고, 종남의 천하삼십육검은 무거움과 변화를 기본으로 한다. 중검이자 변검."
어느새 유이설이 비무대에서 내려오고 있었다.
청명은 그녀에게로 시선을 던졌다.
"하나 검수라면 자신의 검에 담긴 검의뿐 아니라 세상 모든 검의에 통달할 수 있어야 한다. 내가 쾌검을 주로 쓴다 해서 중검을 쓰지 못한다면 반쪽짜리에 불과하다는 뜻이야."
"그럼 사매는……."
"그래. 사고는 쌓고 있다. 그 오랜 시간 동안 차근차근. 그 모든 검을."
청명이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검은 더없이 단순하지만, 한없이 난해하지. 그럼에도 도전하고 이해한다. 언제나 더 높은 경지를 추구하기를 멈추지 않는다."
청명의 고개가 천천히 끄덕여졌다.
"그게 검수라는 거다."
"……."
백천의 가슴 한구석이 일렁였다.
이건 단순한 강함과는 또 다른 이야기다.
검을 든 자. 누구나 검의 극의를 추구한다. 하지만 그 멀고도 어려운 길을 끊임없이 걷고 또 걷는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이송백인가?'
아니.
이송백이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묵묵히 버텨 내는 '인내하는 이'라면, 유이설은 구도자(求道者)의 그것과도 같다.
화산의 검이 도를 추구하는 검이라 볼 때, 유이설의 검이야 말로 진정한 화산의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부끄럽구나.'
백천이 살짝 얼굴을 붉혔다.
화산의 매화를 펼쳐 내었다는 자부심이 있었다. 하지만 그가 자신의 성취에 만족하고 있을 때, 유이설은 그저 묵묵히 검을 쫓고 있었다.
백천은, 그 모습이 너무도 눈이 부시게 느껴졌다.
"……너무 완벽해서 말이 안 나오네."
옆에서 윤종이 멍하니 중얼거리는 소리에 청명이 피식 웃었다.
"완벽한 검은 없어. 완벽해 보이는 검만 있을 뿐이지. 저 검도 더 강한 자를 만나는 순간 허점투성이가 된다."
"으음."
"그러니 끝이 없는 거지. 검이라는 건."
청명의 말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성적.
어쩌면 다시는 이루지 못할 성과와 쏟아지는 환호.
그 모든 것들은 은근히 스며들어 화산 제자들의 마음속에 자만심을 만들어 냈다.
하지만 유이설의 검과 청명의 말은 그들의 마음에 스며든 자만심을 모두 날려 버리기에 충분했다.
청명은 고민에 빠져든 사형제들을 보며 속으로 웃었다.
'답지 않은 짓을 했네.'
유이설을 검을 보고 있으니 절로 흥이 올라 과한 설명을 해 버렸다. 아직 이 병아리들에게는 조금 이른 이야기일 것을 알면서도.
하나.
언젠가 이들이 그가 했던 말의 의미를 진정으로 깨닫는 날이 올 것이다. 그러면 그때 화산의 검은 더욱 깊어질 것이다.
문파란 그런 것.
한두 사람의 힘만으로는 한계가 있다. 모두가 같은 곳을 보면서도 모두가 다른 검을 추구한다. 그 검과 검이 모여 치열하게 겨루고 발전하기를 반복할 때, 진정으로 하나의 문파가 되는 법이다.
'아직 까마득하게 먼 이야기지만.'
언젠가는 그럴 수 있겠지.
과거의 화산이 그랬던 것처럼.
언젠가는.
자리로 돌아온 유이설을 가장 먼저 맞이한 건 당연히 당소소였다.
"사고."
당소소는 물수건을 들고 살짝 울먹이며 유이설을 바라보았다.
뭔가 만감이 교차하지만 그 마음을 말로 표현하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잘 봤어?"
"네, 사고. 너무…… 너무 멋졌어요."
유이설이 작게 고개를 내젓는다.
"어설펐어."
"네?"
"무게 배분이 어설퍼. 몸이 뒤로 쏠려 있는 느낌. 하체 수련이 부족한 거겠지."
"……."
"손끝에 힘이 과도해. 여전히 부드럽지 못해. 계속 생각하는데도 자꾸만 같은 실수를 저질러. 이래서는 안 돼."
화산의 제자들이 질린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무표정한 얼굴로 반성을 늘어놓는 모습을 보고 있으니 뭔가 속이 답답하게 조여 오는 느낌이다.
심지어 청명조차도 이건 좀 감당이 안 된다는 듯 입을 다물었다.
"그, 그래도 이겼잖아요!"
"승패는 중요하지 않아. 나는……."
유이설의 시선이 먼 하늘로 향했다.
그렇게 한동안 말없이 먼 하늘을 바라보다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해야 하는 건 완성. 완벽한 매화."
"……."
"아직 멀었어. 너무."
그녀를 지켜보던 모두가 알 수 없는 기분을 느꼈다.
미묘한 아련함과 알 수 없는 서글픔.
그 감정의 정체를 찾을 겨를도 없이, 유이설은 청명에게로 시선을 획 돌렸다.
"대련!"
"……응?"
"미숙해. 대련으로 확인한다."
"……왜 또 나야?"
"아무리 휘둘러도 안 죽잖아. 살초를 써도 돼. 마음껏."
"……."
청명이 천천히 고개를 돌려 백천을 바라보았다.
"사숙, 내가 아까 하나 말하지 않은 게 있는데."
"……뭐?"
"보통 극단적으로 검을 파고드는 인간은 하나같이 제정신이 아니게 돼."
"……."
"조심해, 사숙."
"……."
하여튼 이 문파에는 멀쩡한 놈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실감하는 백천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