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1화. 명문은 대가리가 없대? (1)
소림은 천하에서 가장 큰 사찰 중 하나다.
강호에서 소림이 가지는 위상도 거대하지만, 중원에서 소림이 가지는 위상도 그에 못지않다.
달마가 중원에 선종을 전수한 이래로, 소림은 불문의 성지이자 천하에서 가장 많은 이들이 다녀가는 절이 되었다.
당연히 그 규모 역시 천하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을 만큼 거대하다.
그런데 그 거대한 소림사가 지금 발 디딜 틈 없이 사람으로 꽉 차 있었다.
"아! 밀지 마쇼!"
"넘어간다니까, 이 사람들아!"
"의자 가지고 온 사람 누구야! 이 좁은 데 의자를 가지고 와? 제정신이야?!"
비무에 참가하기 위해 온 이들의 수도 적지 않았지만, 비무를 구경하기 위해 몰려든 이들에 비하면 조족지혈에 불과했다.
"이렇게까지 봐야 하나?"
"모르는 소리! 이런 대회는 백 년 내에 없었네! 지금 보지 않으면 앞으로 백 년 동안 다시 볼 수 있단 보장이 없다는 소리야! 목이 부러지는 한이 있어도 봐야지!"
비무대회 첫날부터 소림은 발 디딜 틈 없이 가득 찼다. 때문에 일천에 달하는 소림의 승려들이 모두 동원되고도 사람들을 통제하는 데 애를 먹고 있었다.
"와, 사람 진짜 많다."
조걸이 눈을 휘둥그레 뜨며 두리번거렸다.
비무에 참가하는 이들이 대기하는 곳과 구경꾼들이 있는 곳은 붉은 색 줄로 완전히 구별되어 있었다. 덕분에 비무에 참가한 문파들은 저 인파에 떠밀리지 않고 나름 편히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저기 저 비무장에서 대회를 하는 겁니까?"
"그렇지."
윤종의 대답에 조걸이 눈을 가늘게 뜨고 비무장을 바라보았다.
"생각보다 비무장이 작네요. 소림이라고 해서 뭔가 다를 줄 알았는데."
"걸아."
"예, 사형."
"옆을 봐라."
"예?"
조걸의 시선이 옆으로 돌아갔다. 빽빽하게 들어찬 인파의 앞쪽으로 눈앞의 비무장과 비슷한 비무장이 몇 개 더 보인다.
"……저걸 다 쓰는 겁니까?"
"그런 모양이다."
"뭐 그렇게까지……."
윤종이 어깨를 으쓱했다.
"백금첩을 받은 문파만 스무 곳 가까이 된다. 그럼 그곳에서 참가하는 이들만 해도 사백 명이다. 거기에 금첩과 은첩, 동첩까지 포함한다면 참가하는 후기지수가 천 명은 훌쩍 넘을 것이다."
"천 명이요?!"
조걸이 입을 쩍 벌렸다.
윤종이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니 배첩이 필요한 것이지. 참가하고 싶은 이들은 모조리 참가시켰다가는 예선만 석 달 보름 치러야 할 테니."
"우와……."
새삼 이 대회의 영향력을 실감하는 조걸이었다.
'그나저나 참가자만 천 명이라니.'
그 많은 이들이 언제 다 비무를 치른단 말인가?
"대충 이틀에 걸쳐 예선전을 할 모양이더구나. 예선이 끝나면 중앙의 대연무장으로 옮겨 본선을 치른다고 했다. 본선에는 백여 명 정도가 남겠지."
"백 명이라."
조걸이 허리춤의 검을 꼭 움켜잡았다.
'백 명 안에는 반드시 들어야 해.'
될 수 있는 한 높이 올라가는 게 목적이기는 하지만, 비무라는 건 반드시 실력대로 순위가 결정되지는 않는다.
우승자를 1회전에서 만난다면 그냥 1회전 탈락이 최종 성적이 되어 버리는 게 이런 비무의 맹점이 아닌가?
혹여 운이 좋지 않아 초반에 탈락하는 상황이 벌어지기라도 한다면?
'상상도 하기 싫다.'
저 아귀 같은 놈이 내내 물어뜯을 것이다. 대회가 치러지는 내내, 화산으로 돌아가는 내내, 심지어 화산에 돌아가서도!
"끄응. 지면 청명이 놈이 나를 갈아 마시려고 할 텐데……."
"겨우 그게 걱정이냐?"
"예?"
"타 문파의 정예들과 싸우게 생겼는데 그건 걱정이 안 되는 모양이구나."
윤종의 말에 조걸이 슬쩍 비무대 주위를 돌아보았다.
형형한 안광을 뿜는 명문의 제자들이 다들 의욕 가득한 얼굴로 대기하고 있다. 그들이 내뿜는 기세만으로도 얼마나 엄정한 문풍(門風) 아래서 수련해 왔는지를 짐작할 수 있었다.
과거의 조걸이었다면 저들을 보며 기가 죽었을 것이다. 감히 비교도 할 수 없는 명문의 제자들이니까.
지금은 조금 달라졌냐고?
'딱히.'
화산의 위상이 굉장히 올라간 것은 사실이지만, 조걸은 아직 그 달라진 위상을 크게 실감한 적이 없었다.
화산의 제자라고 해서 선망의 시선을 보내는 이도 없고, 딱히 특별대우를 해 주는 이도 없으니까.
그런데도 뭐랄까…….
"사형."
"응?"
"이렇게 말하면 좀 이상하게 들릴 것 같은데, 쟤들 엄청 만만해 보이지 않습니까?"
슬쩍 다른 참가자들에게 눈길을 준 윤종이 피식 웃는다.
"당연히 만만해 보일 수밖에."
"그래도 명문대파의 제자들인데."
"저기에 청명이 같은 놈이 하나라도 있겠냐?"
"……그런 놈은 세상에 두 명 존재할 수 없습니다."
"내 말이 그 말이다. 매일같이 청명이 놈과 드잡이하며 산 우린데 누구에게 겁을 먹겠느냐? 삼두육비(三頭六臂)의 괴물을 본다고 해도 깰 대가리가 셋이라고 좋아할 판에."
"듣고 보니……."
청명 덕분에 겁 대가리가 사라진 화산의 제자들이었다.
"그래서 비무는 언제 시작한답니까?"
"저기 나오는구나."
윤종이 앞쪽을 가리켰다.
그 손짓을 따라 시선을 돌리니 비무장 위로 걸어 나오는 소림승이 보인다.
그는 경건한 자세로 반장을 하더니, 고개를 들어 비무대 앞에 모인 이들을 바라보았다.
그 동작 하나만으로 소란하던 장내가 순식간에 조용해진다.
시선을 모은 소림승이 묵직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귀한 시간을 내어 비무에 참가해 주신 각 문파의 문도 분들과 이 천하비무대회를 지켜보러 와 주신 여러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소승은 소림의 공초(空超)라 합니다."
공초라는 말에 장내가 웅성거린다.
"그럼 저분이?"
"부동권(不動拳), 공초!"
소림의 공자 배 중에서도 권으로 이름 높은 이가 바로 부동권 공초다. 드물게 강호행을 할 때마나 드높은 무공과 협의로 수많은 악적들을 처리한 소림의 대표적인 고수 중 하나였다.
그런 이가 직접 대회를 진행한다는 사실에 모두가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그리고 자리를 빛내 주시는 각 파의 장문인들께도 감사 인사를 드리겠습니다."
공초가 몸을 돌려 비무장의 한쪽에 마련된 높은 단상을 향해 반장을 했다.
단상 위에는 비무에 참가하는 각 파의 장문인들이 모여 앉아 있었다.
그들에게 우레와 같은 환호가 쏟아진다.
윤종이 그 광경을 보며 빙그레 웃었다.
"장문인께서 기분이 좋으시겠구나."
"아뇨, 사형. 엄청 불편해하시는 것 같은데요?"
"……그렇더냐?"
하기야. 현종도 저런 자리는 익숙하지 않을 것이다.
"생각해 보면 옆에 종남 장문인이 앉고 반대쪽에는 무당 장문인이 앉아 있구나. 저기서는 물만 마셔도 체하겠네."
"그러니까 말입니다."
"그럼 우리가 저 자리를 편하게 만들어 드려야지."
"예."
때마침 공초가 내공을 실은 목소리로 소리쳤다.
"지금부터 천하비무대회를 실시하겠습니다! 호명된 이들은 지정된 비무장으로 나서시오. 대진표는 각 문파 장문인들의 입회하에 공정히 짰으니, 불만은 받지 않겠습니다!"
백천이 손을 들어 영웅건을 꽉 맸다.
'시작이군.'
살짝 심호흡을 한 그는 가라앉은 눈으로 비무장을 바라본다.
저 멀리 다른 비무장 앞에 모여 있는 종남이 보인다. 그곳에는 진금룡과 그의 아버지도 있을 것이다.
"후."
청명이 슬쩍 백천을 보며 물었다.
"떠는 것 같은데?"
"물론 떨린다."
"응?"
생각보다 너무 담담한 인정에, 청명이 고개를 갸웃했다. 백천은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천하에 화산의 검을 알릴 기회를 얻었는데 어찌 떨지 않을 수 있겠느냐? 나는 지금 가슴이 벅차 진정하기가 힘들구나."
"어쭈?"
꽤 멋진 말도 할 줄 아는데?
"살살해, 살살. 괜히 힘주다가 실수하지 말고."
"청명아."
"사숙 같은 사람이 괜히 잘하려고 힘주다가 엎어지곤 하지."
"청명아."
"거 아닌 척하지 말고 담담하게."
"아니, 인마!"
"응?"
백천이 슬쩍 턱짓으로 청명의 뒤를 가리켰다.
"너 부른다."
"엥?"
청명이 뒤를 돌아보았다.
비무장 위에서 진행을 보조하는 소림승이 목에 핏대를 세우고 소리치고 있었다.
"화산파의 청명! 청명 없소? 아니, 대체 어딜 간 거요! 비무가 시작되는데!"
"어?"
"화산파의 청명! 없소? 없으면 기권으로 처리하겠소!"
화들짝 놀란 그가 냉큼 손을 번쩍 들었다.
"여기! 여기 있어요! 여기!"
그리고 부리나케 비무장으로 뛰어 올라갔다.
소림승이 눈썹을 파르르 떨며 외쳤다.
"대체 어딜 갔던 것이오!"
"아, 어딜 간 건 아닌데……."
"어서 비무대에 서시오! 상대가 아까부터 기다리고 있지 않소!"
"네, 네."
청명이 쪼르르 달려가 비무장의 한쪽에 섰다. 상대는 이미 자리를 잡고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안녕하세……. 어?"
상대를 확인한 청명이 고개를 갸웃한다.
"어디서 뵌 것 같은데? 우리가 만난 적이 있었나요?"
"……."
청명의 상대.
해남의 대제자인 곽환소가 몸을 떨며 뿌득뿌득 이를 갈았다.
"빌어먹을 화산 놈! 사람을 무시해도 유분수지! 당장 이틀 전에 일을 벌여 놓고 나를 잊어버려?"
"아……! 그때 그분이시네. 워낙 순식간에 얻어맞고 날아가셔서 얼굴이 잘 기억이 안 났네요."
"이놈이!"
곽환소가 부들부들 떨다가 연신 심호흡을 한다.
"검은 어디다 팔아먹고 왔느냐?"
"엥?"
청명이 자신의 허리춤을 바라본다.
"아……."
허리춤이 비어 있는 것을 확인한 청명이 자기가 있던 자리를 확인했다. 백천이 청명의 검을 들고 한숨을 푹푹 내쉬고 있다.
"옜다."
백천이 비무장 위로 검을 던졌다. 허공에서 잽싸게 낚아챈 청명은 얼른 허리에 검을 찼다.
곽환소는 어이가 없다 못해 기가 막힌 듯 말했다.
"검수가 검을 놓고 다니다니. 화산에선 그런 것도 가르치지 않더냐?"
"남의 문파 교육 방침에 관여할 만큼 그쪽이 대단해 보이지는 않는데요?"
"뭐라! 그건 전에 네놈이 먼저……!"
"됐으니까 빨리 시작하죠."
말허리를 뚝 잘라 먹은 청명이 목을 좌우로 꺾었다.
우둑. 우둑.
첫 번째 비무부터 자신이 나서게 될 거라곤 생각 못 했지만, 이것도 나쁘지 않다.
맞은편에서 곽환소가 이를 갈며 검을 뽑았다.
스르르릉.
"천둥벌거숭이가 천지를 모르고 날뛰는구나. 차라리 잘되었다. 내가 너희 화산 놈들에게 복수할 기회만 기다리고 있었는데 하늘이 나를 돕는구나. 검을 든 이상 화산 따위는 해남의 상대가 아니라는 걸 알려 주마."
"아, 네. 뭐 노력해 보세요. 응원할게요."
곽환소가 울컥하여 이를 악물었다.
하지만 이번엔 결코 경거망동하지는 않았다.
'진정하자.'
저놈의 입심이 대단하다는 건 이미 경험하지 않았던가? 공연히 말려들어 좋을 게 없다.
보여 줄 것이 있다면 검으로 보여 주면 된다.
열 개의 비무장 모두에서 팽팽한 긴장감이 흘렀다. 하지만 세인들의 시선은 오로지 청명과 곽환소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얼마 전 있었던 해남과 화산의 충돌을 알고 있는 이들은 이 비무를 보지 않을 도리가 없는 것이다.
"해남이 복수를 하겠지?"
"모르는 소리! 저 청명이라는 도사가 바로 화산신룡일세! 화산신룡! 천하제일 후기지수 화산신룡 모르는가?"
"음? 저자가 화산신룡이라고? 그렇게 강해 보이지 않는데?"
"고수의 풍모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법이지."
"그냥 소문이 과했던 건 아니고?"
"그야 이 비무를 지켜보면 알 일 아닌가?"
모두가 비슷한 심정으로 비무대를 바라보았다.
한쪽은 어느 순간 강호에 돌풍을 몰고 돌아온 화산의 신진고수 화산신룡 청명.
그리고 다른 한쪽은 화산을 밀어내고 구파일방의 한 자리를 차지한, 해남파의 대제자 삼파검(三波劍) 곽환소!
아무리 화산신룡이 천하제일 후기지수로 명성이 드높다고는 하나 해남파의 대제자도 절대 만만치는 않을 것이다.
"비무를 시작하겠소!"
커다란 외침과 함께 비무대에 오른 이들이 일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해남의 명예를 회복한다!'
곽환소는 들뜬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혔다.
절대 상대를 경시해서는 안 된다.
저 경박한 모습에서는 고수의 풍모가 조금도 느껴지지 않지만, 천하제일 후기지수라는 평가를 골패 쳐서 딴 게 아니라면 반드시 한 수가 있을 것이다.
그러니 침착, 또 침착…….
'응?'
곽환소의 눈이 부릅떠졌다.
갑자기 세상이 어두워진 것이다.
'으응?'
어두워진다고? 세상이?
'사술(邪術)?'
아니다.
곽환소는 금세 깨달았다.
세상에 어두워진 게 아니라 무언가가 자신의 시야를 가린 거란 것을.
뭔가 반질반질하고 거뭇거뭇한 것이 눈앞을 꽉 메우고 있었다.
'이거?'
그는 다행히 그것의 정체도 쉽사리 알아챘다.
'신발 밑창 같은데……?'
하지만 아쉽게도 너무 늦었다.
콰아아아아아아아앙!
청명의 발이 곽환소의 얼굴에 그대로 틀어박힌다.
"꾸웨에에에에에에엑!"
곽환소가 돼지 멱따는 것 같은 비명을 내지르며 뒤쪽을 향해 일직선으로 튕겨 나갔다.
쇄애애애애액!
"뭐, 뭐야!"
"와, 씨!"
비무를 치르던 다른 비무장의 무인들이 화들짝 놀라며 곽환소를 피해 낸다.
뒤쪽에 늘어선 아홉 개의 비무장을 관통하듯 날아간 곽환소는 비무장 끝 담벼락에 그대로 처박히고 말았다.
쿠우우우우웅!
"……."
모든 중인들이 멍한 눈으로 곽환소를 바라보았다.
아니, 정확히는 그가 온몸으로 뚫은 담벼락의 구멍을 바라보았다.
"……."
다른 비무대에서 비무를 치르던 무인들도 병장기를 내리고 멍하니 그 커다란 구멍을 바라보았다.
이윽고, 그 모든 시선들은 곽환소가 원래 있었던 비무대로 천천히 옮겨 갔다. 그리고 마침내 청명에게로 이목이 집중되었다.
청명은 손을 탁탁 털며 중얼거렸다.
"저건 사숙한테 처맞고도 정신 못 차렸네. 어디 내 앞에서 딴 생각이야. 뒈질려고."
두어 번 혀를 찬 청명이 고개를 돌려 공초를 바라본다.
"이긴 거 맞죠?"
"……어?"
"끝났잖아요. 내려가도 돼요?"
"……아, 아아!"
공초가 크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소리친다.
"갑(甲)조의 비무는 화산파 청명 소협의 승리요!"
그 말과 동시에, 순간적으로 정적에 잠겼던 소림 전체에 어마어마한 환성이 쏟아졌다.
"우와아아아아아아아아아!"
"세상에! 단 일 격에!"
"화산신룡! 화산신룡!"
"으하하하하하핫! 내가 내 눈으로 이런 비무를 보는 날이 오다니! 최고다! 화산신룡!"
청명은 쏟아지는 함성을 온몸으로 받으며 터덜터덜 비무대 아래로 향했다. 그리고 화산 제자들 앞에 섰다.
"봤지?"
"응?"
"이렇게만 하면 돼."
"……."
……거참 도움이 되는구나.
아주 눈물 나게 고맙다, 청명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