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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270화 (270/1,567)

270화. 진짜 사고가 뭔지 보여 줘? (5)

커다란 대전.

상석에 앉은 이를 중심으로 수많은 이들이 모여 앉았다. 그들이 내뿜는 진중한 기세가 대전을 고요히 물들이고 있었다.

상석의 소림방장 법정이 모두를 한번 바라보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다들 본사의 초청을 받아들여 주셔서 감사합니다. 먼 길을 오시느라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법정이 합장을 하며 고개를 숙였다.

소림방장의 인사를 받은 각 파의 장문인들이 미소를 지으며 덕담을 주고받는다.

"소림이 부르는데 어찌 오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되레 저희가 초청에 감사를 드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법정이 짧게 불호를 외우고 진중한 얼굴로 말했다.

"이번에 본사에서 천하무림대회를 개최한 이유는 지난 백 년간 각 파간의 회합이 너무 격조했기 때문입니다. 마교가 강호에 남긴 상처는 너무도 컸고, 그 상처가 아물기까지 너무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마교라는 이름이 나오자 모두가 숙연해졌다.

이곳에 모인 문파 중 마교의 손에 신음하지 않은 이가 누가 있겠는가?

"하나, 이제 백 년의 시간이 흘렀고, 강호는 과거의 힘을 충분히 회복했습니다. 다만 아쉽게도 그러다 보니 이런저런 문제가 생겨나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 말에 몇몇 장문인들이 낮게 헛기침을 했다.

물이 가득 차면 넘치기 마련인 법.

과거의 힘을 회복한 강호의 문파들이 주변 문파와 충돌하는 일이 최근 들어 잦아졌다. 충분히 힘을 쌓았으니 이제는 다른 문파의 영역을 노리기 시작하는 것이다.

아직은 서로 체면을 차리고 있어서 심각한 상황의 비화는 없었지만, 이대로 간다면 언젠가는 큰 사고가 터질 것이다.

"그렇기에 이번 천하무림대회를 통해 문파들이 서로 회합을 가지고 서로 좋은 관계를 맺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곳에 모이신 분들의 책임이 막중합니다."

권위를 내세우지 않는 부드러운 말투였다.

"물론입니다, 방장."

그렇기에 오히려 권위가 더 살아난다. 훈훈하고 부드러운 분위기가 이어졌다.

그때, 한 사람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방장께 감히 여쭙고자 합니다."

모두의 시선이 한곳으로 집중된다.

붉은 얼굴과 길게 자라난 검은 수염.

관운장의 현신이라는 말이 어울리는 모습. 바로 무당의 장문인인 허도진인이었다.

"무당 장문인께서 하교하실 말씀이 있으시다면 그리하셔야지요."

"하교라니. 당치도 않습니다."

허도진인이 가만히 법정을 바라본다.

현 강호를 이끌어 가는 두 거인이 서로를 마주보자 장내의 공기가 일순간에 무거워졌다.

"회합을 위해 문파들을 소집하신 것은 정말 좋은 일입니다. 제 그릇이 모자라 감히 생각하지 못한 일을 방장께서 해 주신 것에 먼저 감사드립니다."

"어찌 무당 장문인께서 그릇을 논하십니까. 소승이 무안합니다."

"그리 말씀해 주시니 감사하기 이를 데가 없습니다. 다만……."

정광 가득한 그의 눈이 법정을 정확하게 응시한다.

"방장께서 오로지 회합만 다지자고 이만한 대회를 열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천하의 모든 명문거파를 한곳에 모을 만한 이유가 따로 있으셨던 건 아닌지……."

살짝 말끝을 흐리는 허도진인을 보며 법정이 작게 미소 지었다.

"과연 장문인의 심기가 더없이 깊습니다. 제가 감히 따를 수 없을 정도입니다. 아미타불."

"하면……?"

법정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본래는 대회가 모두 끝난 뒤에 말씀을 드리려 했습니다. 하지만 이리된 이상 이 자리에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법정이 작게 불호를 두어 번 외었다. 그 침중한 얼굴을 본 이들의 몸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대산에서 마인들의 움직임이 발견되었다는 소식이 들어왔습니다."

"마인!"

"대산!"

대산.

십만대산.

허도진인이 잔뜩 안색을 굳히며 법정에게 물었다.

"사실입니까?"

"개방에서 마인들의 종적을 발견했다고 합니다."

"으으음. 지리멸렬했던 마교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뜻이로군요."

"아미타불."

법정이 다시 한번 나직하게 불호를 외었다.

"여기 계신 분들은 모두 아시겠지만, 강호는 마교를 완전히 무찌르지 못했습니다. 그저 그들의 수괴의 목을 베어 물러나게 했을 뿐입니다."

한구석에서 이들의 대화를 잠자코 듣던 현종은 가만히 눈을 감았다.

'그들이 물러났던가?'

아니. 그렇지 않다.

천마를 잃은 마교는 복수를 위해 화산으로 쳐들어왔다.

저들의 전쟁은 십만대산에서 끝났을지 모르지만, 화산의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하지만 화산에서 이루어졌던 그 처절한 싸움은 강호사에서 언급조차 되지 않는다.

심지어 과거를 똑똑히 아는 이들조차도 그 참혹했던 혈사가 존재하지 않은 일인 것처럼 눈을 감고 있다.

과거의 현종이라면 이 대화를 버텨 내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그는 그렇지 않다.

'잃은 힘을 되찾듯, 잃은 과거 역시 되찾을 수 있다.'

주먹을 꽉 쥔 현종이 가만히 저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다시 말하자면 마교는 그들의 힘을 모두 잃고 퇴각한 것이 아닙니다. 그저 훗날을 기약했을 뿐이지요. 이곳에 계신 분들이라면 모두 아실 겁니다."

"으음. 그렇습니다. 방장."

"외면할 수 없는 사실이지요."

법정이 진중한 눈으로 모두를 바라보며 말했다.

"아직 저들의 발호에 대한 기미를 찾아낸 것은 아닙니다. 그저 몇몇 마인을 목격했을 뿐입니다. 하지만 마인들이 버리고 떠났던 십만대산에 다시금 모습을 드러냈다는 것은 의미하는 바가 큽니다. 어쩌면 저들이 또 한 번의 전쟁을 준비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분위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마교.

그 이름이 주는 무거움을 느끼지 못하는 이라면 감히 이 자리에 앉을 자격이 없다.

"대비가 필요하겠군요."

허도진인의 말에 법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나, 아직은 그저 추측일 뿐입니다."

"마교에 대한 일이라면 추측조차 가벼이 여길 일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래서 여러분들을 모신 겁니다."

법정이 불호를 외우고는 진중한 눈으로 말한다.

"어쩌면 다시 한번 강호가 힘을 합쳐야 할 시기가 오고 있는 건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이번 대회를 통해 사사로운 원한은 접어 두고 친교를 다져 주시기 바랍니다. 서로 다른 이름으로 살아가는 문파이지만 모두가 강호의 일원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 주십시오. 아미타불."

법정의 말에 모두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들이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허도진인 역시 눈을 가늘게 뜨고 법정을 바라본다.

'마교의 발호라.'

사실이라면 실로 위험한 일이다.

하지만 이 모든 행사가 단순히 마교에 대한 걱정으로 시작되었다고 여길 순진한 이는 이곳에 없을 것이다.

'다시 한번 주도권을 잡겠다는 뜻이겠지.'

마교의 발호라는 명분과 천하비무대회에서 보여 줄 실력을 통해 무림의 북두라는 자리를 다시 한번 공고히 하고자 함이 틀림없다.

'대사의 뜻대로 되지는 않을 거요.'

허도진인의 눈이 낮게, 또 낮게 가라앉았다.

"내일부터 천하비무대회를 개최하겠습니다. 예로부터 비무대회란 서로의 성취를 확인하고 친목을 다지는 좋은 자리였음을 다들 아실 겝니다."

"그렇습니다, 방장."

"이번 비무대회 역시 서로의 친목을 다질 수 있는 좋은 자리가 되었으면 합니다. 아미타불."

장문인들이 사람 좋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들 중 누구도 내일 있을 비무대회를 단순한 친목의 장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문파의 고하를 가리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정말 두 문파간의 전쟁이 벌어져 서로 칼을 쑤셔 박지 않는 이상은 상대의 실력을 어렴풋이 짐작할 수밖에 없다.

그런 문파들에게 이대제자까지 나서는 비무는 훌륭한 대리전이 된다.

스승의 실력은 제자의 실력을 통해 가늠할 수 있는 법.

분명 내일 벌어지는 천하비무대회는 천하의 문파들의 서열을 재편하는 중요한 자리가 될 것이다.

'우승하는 문파가 한동안 강호의 모든 영광을 거머쥘 것이다.'

모두의 눈이 열망으로 가득 차올랐다.

단 한 사람을 제외하고 말이다.

* * *

다음 날 아침.

준비를 마친 화산의 제자들이 처소 앞에 모여들었다. 현종은 앞에 서서 도열한 제자들을 내려다보았다.

"하여."

그가 크게 헛기침을 했다.

"준비는 다 되었느냐?"

"예, 장문인."

백천이 대표로 포권을 하며 답했다. 그 헌앙한 모습을 본 현종이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

"오늘부터 있을 비무는 너희에게 좋은 경험이 될 것이다. 그렇기에 내가 너희에게 굳이 한마디를 하려 한다."

모두가 귀를 기울이며 장문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너희가 이긴다 해서 달라질 것이 있겠느냐?"

"……."

모두의 눈빛이 의혹에 가득 차 흔들렸다.

그 눈빛을 보며 현종은 담담히 말했다.

"또한 진다 해서 달라질 것이 있겠느냐?"

그제야 백천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말인지 이제 알 것 같다.

현종이 가만히 고개를 내젓는다.

"승패는 중요한 것이 아니다. 이 대회에서 결과를 내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이 대회를 준비하면서 너희가 해 온 노력이 결과보다 몇 배는 더 중요하다."

현종이 진중한 눈으로 말을 이어 간다.

"과정이 중요하지, 결과가 중요하지 않다는 그런 말을 하려는 게 아니다. 이 대회에서 이긴다면 너희에게는 명예가 주어지겠지. 하지만 그 이전의 노력은 너희에게 실력을 주었다. 나는 너희가 허망한 명예가 아니라 손에 잡힐 실력을 좇는 이들이 되었으면 좋겠구나."

"명심하겠습니다! 장문인!"

"그래, 그래. 그걸로 좋다."

현종이 고개를 끄덕인다.

"늙은이가 전장에 나갈 이들을 오래 잡고 있어 좋을 것이 없겠지. 가자꾸나. 어떤 결과를 맞이하더라도 너희는 자랑스런 나의 제자들이고, 자랑스런 화산의 제자들이다. 그것만은 잊지 말거라."

"예!"

현종이 슬쩍 고개를 돌린다.

"무각주."

"예, 장문인."

"한마디 하시게. 자네와 운검은 말을 할 자격이 있네."

현상이 살짝 난처한 얼굴로 망설이다 이윽고 모두를 바라보았다.

"가진 실력을 모두 발휘하는 데 집중하거라. 전력을 다한 패배는 너희를 위로 이끌어 줄 것이다. 하지만 전력을 다하지 못한 패배는 그저 후회만을 남길 뿐이다."

"명심하겠습니다."

"으음. 나는 이런 게 어렵습니다, 장문인. 운검이가 마저 할 것입니다."

그 말을 들은 운검이 조용히 한발 나섰다.

그가 나서자 제자들의 눈빛이 달라진다.

현종과 현상은 그들에게 있어서 문파의 어른이지만 운검은 다르다. 화산에서 그들의 진정한 스승이라 불릴 이가 바로 운검인 것이다.

"검이란 무엇이더냐?"

"검은 곧 도입니다!"

"도란 무엇이더냐?"

"도는 그저 도일 뿐입니다."

"그럼 검이란 무엇이더냐?"

"검은 그저 검입니다!"

운검이 미소를 지었다.

"그래. 검은 그저 검일 뿐이다. 너희가 지금까지 들었던 검과 오늘 들 검은 다르지 않다. 검을 믿고 자신을 믿어라. 그러면 지금까지 해 왔던 너희의 수련이 너희에게 대답해 줄 것이다."

모두가 고개를 끄덕인다.

그때 현영이 불쑥 앞으로 나와 셋에게 말했다.

"그럼 가시죠."

"응?"

그러더니 무작정 현종과 현상을 이끌고 비무장을 향해 휘적휘적 걷기 시작했다.

"운검이 너도 따라오거라."

"예, 장로님."

현상이 황당하다는 듯 말한다.

"애들은? 애들은 안 데리고 가느냐?"

"거, 그냥 따라오십시오. 우리가 먼저 가면 되지, 뭐 하러 굳이 같이 갑니까?"

"어엇? 어?"

장문인을 비롯한 어른들이 현영의 손에 질질 끌려 사라지자 뒤쪽에서 한 사람이 터덜터덜 걸어 나왔다.

"……."

모두가 찝찝한 눈으로 앞으로 나선 이를 바라보았다.

물론 청명이었다.

"다들 장문인이 하신 말씀. 어, 그러니까…… 뭐라고 하셨더라?"

그는 잠깐 고개를 갸웃하더니 어깨를 으쓱했다.

"뭐, 아무래도 좋겠지."

그리고 모두를 찬찬히 훑어보았다.

몇몇을 제외하면 역시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표정은 굳어 있고 온몸이 뻣뻣해 보인다.

청명이 그 모습을 보며 피식 웃었다.

'그럴 만도 하지.'

청명과 함께했던 몇을 제외하고는 타 문파들 앞에서 싸워 본 경험이 거의 없다.

고작 화종지회에서도 얼어서 실력 발휘를 제대로 못 했는데, 이 많은 이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싸운다니 다리가 후들거릴 수밖에.

"여기서 자기가 우승하겠다 싶은 사람?"

"……."

화산의 제자들이 서로를 돌아보았다.

"없지?"

"……."

그야 우승은 네가 처먹을 건데 우리가 어떻게 하냐?

모두의 시선이 뚱해졌다.

청명은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그런데 뭐 긴장하고 있어. 어차피 우승도 못 하는 양반들이."

"뭐, 인마?"

"걱정하지 마. 긴장해도 돼. 긴장 풀 필요 없어."

"……응?"

청명이 씨익 웃는다.

"긴장해도 못 질 정도로 만들어 놨거든. 어디 지고 싶으면 져 봐. 이쯤 되면 지는 것도 쉬운 게 아냐."

화산의 제자들이 허탈하게 웃었다.

저 말이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는 걸 이곳의 모두가 알고 있다. 그들은 정말 말 그대로 뼈를 깎는 수련을 해 왔으니까.

"저기 모인 사람들 보여?"

청명이 비무장 쪽을 가리키자 백천이 대표로 대답했다.

"그래."

"보여 주러 가자고."

"……."

"저들이 잊은 화산이 어떤 문파였는지 말이야."

그 말이 화산의 제자들의 마음에 불을 질렀다.

"가자! 천하제일검문의 자리를 되찾으러."

대답은 없었다.

휘적휘적 걸음을 떼는 청명의 뒤로, 화산의 제자들이 결연하게 따라붙는다.

오늘만큼은 청명도 평소처럼 심드렁한 표정이 아니었다.

단호해진 그의 얼굴 위로, 오래도록 품어 왔던 의지가 스쳤다.

'잊었다 이거지?'

화산을 잊었다고?

'괜찮아. 이제 똑똑히 기억하게 해 줄 테니까.'

영원히 잊지 못하도록, 그 머리에 화산이라는 두 글자를 새겨 주지.

화산이 어떤 문파였…….

청명이 슬쩍 뒤를 돌아 백자 배와 청자 배를 바라본다. 그리고 고개를 슬쩍 들어 하늘을 힐끔 보았다.

'솔직히 예전이랑 좀 다르긴 한데…….'

뭐 괜찮겠지. 이 정도야 뭐…….

- 너무 다르잖아, 이놈아!

아, 조용 좀 하쇼!

억울하면 살아나시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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