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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217화 (217/1,567)

217화. 지금 화산이라 했느냐? (2)

"다들 명심해라. 우리는 화산의 제자가 아니다. 화평상단의 상인으로 자목초를 구입하러 온 것뿐이야."

"거 뻔한 소리를."

"화산의 제자라는 사실을 드러낼 어떤 행동도 해서는 안 된다. 이번 일은 은밀함이 생명이다."

"다들 잘 들었지?"

"그러니 무슨 일이 있더라도 두 번! 세 번! 또 생각하고 생각해라!"

"그래. 생각하라고!"

자신의 말끝마다 추임새를 넣는 청명에게 끝내 백천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너 말이야, 인마! 너! 다른 사람 말고 너!"

청명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나?"

"그래! 여기서 지금 이런 말을 들을 사람이 누가 있냐! 너 말고 누가 사고를 친다고!"

"쯧쯧. 사숙도 이상한 편견이 있네, 내가 사고 치는 거 봤어?"

"……말을 말아야지."

백천이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영 불안한데.'

여기까지 오는 건 어떻게든 성공했지만, 저 청명이 놈을 데리고 곤명에 들어가려니 다리가 절로 꼬이는 기분이다.

'그렇다고 두고 갈 수도 없고.'

말이라도 들어 먹는 놈이면 어떻게든 해 보겠지만, 사숙의 신분으로도 청명을 통제하는 건 무리였다.

"유 사매."

"네, 사형."

"청명 옆에 바짝 붙어서 절대 저놈이 사고 못 치게 감시해!"

"네!"

유이설의 의욕에 찬 눈으로 청명을 노려보았다.

그러자 그가 영 불만이라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나를 대체 뭐라고 생각하는 거지? 내가 이런 위험한 곳에서 사고나 칠 사람으로 보이나?"

"응."

"그러고도 남지."

"안 그러는 게 더 이상하다."

"……."

청명이 억울함에 몸을 뒤틀었지만, 그의 사형제들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나마 유 사매는 조금이라도 신경을 쓰는 편이니 좀 낫겠지.'

하지만 근본적인 대책이 될 수는 없다. 백천도 유이설이 청명을 말릴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 않는다.

가장 좋은 방법은, 청명이 사고를 치기 전에 재빨리 자목초에 대한 정보를 얻어 내어 곤명을 벗어나는 것이다.

백천이 조걸, 윤종과 시선을 교환했다.

그들도 같은 생각을 하는 건지, 얼굴에서 단호한 결의가 엿보인다.

"가자!"

"예!"

화산의 제자들이 당당하게 곤명의 성문으로 진입했다. 말이 성문이지 앞을 지키는 이도 보이지 않고, 딱히 오가는 이도 보이지 않았다.

살짝 을씨년스럽기까지 한 분위기에, 백천은 미묘한 표정으로 성문을 통과했다.

"……뭐야?"

"여기 왜 이렇지?"

심지어 성문 안은 더했다. 모두 의외의 광경에 눈살을 찌푸렸다.

"……역병이라도 돈 건가?"

"그런 건 아닌 것 같은데요……?"

굳이 말하자면…… 활력이 없다.

눈앞에 펼쳐진 대로에는 사람의 기척이 거의 없었다. 아주 간혹 구석구석 벽에 몸을 기댄 채, 숨을 몰아쉬는 이들만 보일 뿐이었다.

"……심한데?"

백천이 눈을 찌푸리며 주변을 돌아보았다.

상행이 발달된 도시는 활기가 넘쳐야 한다. 도시에 돈이 도는데 조용할 수는 없는 법이다.

그런데 지금 그들의 눈에 들어오는 곤명은, 말 그대로 죽은 도시였다.

"으음."

청명마저도 영 찝찝한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그때 주위의 암담한 광경을 보던 윤종이 입을 열었다.

"여기까지 오면서 본 모습도 그리 좋아 보이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곤명은 다를 줄 알았는데, 오히려 여기가 더 심한 것 같습니다."

"……그렇구나."

백천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뒤에 있던 조걸이 슬쩍 말을 보태었다.

"차 무역을 그만두면서 운남의 상황이 어려워졌다는 말은 들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습니다."

"설마 그 이유뿐이겠느냐? 가뭄이 들었다고 하던데, 아마 그 영향이 클 것이다."

"예,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청명이 뒷머리를 벅벅 긁었다.

"여하튼 이게 중요한 게 아니니까 얼른 자목초에 대한 정보부터 모아 보자고."

"음. 그래."

백천이 동의하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각각 나뉘어서 자목초의 행방을 수소문해 보고, 해가 지면 다시 여기에서 만나기로 하자."

"예, 사숙."

"조심하십시오."

사형제들이 다들 일사불란하게 흩어지자 청명이 흐뭇한 미소로 앞을 바라보았다.

"자, 그러니까 이제 자목초의 행방을 수소문해 보면 된다 이거지!"

의욕이 넘쳐나고, 의지가 불타오른다.

문제가 있다면 딱 하나뿐이다.

"……그런데 뭘 어떻게 수소문해야 하는 거지?"

"……."

유이설이 망연한 얼굴로 청명을 바라보았다.

"크으."

청명이 손에 든 찻잔을 내려놓는다.

"역시 운남이네."

차에 대한 조예가 없는 청명도 알 수 있다. 이 차향은 중원의 것과는 분명 뭔가가 다르다.

더 좋은지 나쁜지를 떠나서, 확연하게 다르다는 느낌이었다.

"고관들이 좋아할 만해."

청명이 여유롭게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그 한가해 보이는 모습에 꽤 불만을 품은 사람도 있었다.

"자목초."

"……."

유이설이 뚱한 눈으로 청명을 바라본다.

그녀의 짧은 말과 시선에는,

'지금 다른 사람들은 죽어라 자목초에 대한 정보를 구하러 이 땡볕 아래를 돌아다니고 있는데, 사문의 막내라는 놈이 다관에 처박혀서 차나 처먹고 있으니 이게 가당키나 한 일이냐?'

라는 의미가 가득 담겨 있었다.

하지만 청명이 누구던가? 이 정도 압박쯤은 깔끔하게 회피할 수 있다.

"그럼 나가?"

"……."

"돌아다녀 봐? 내가 막 들쑤셔 봐?"

유이설의 얼굴에 갈등이 어렸다.

청명이 노는 꼴을 볼 수 없다.

절대 청명이 사고를 치게 만들어서는 안 된다.

이 두 가지가 그녀의 머릿속에서 충돌하고 있는 것이다.

어느 쪽이 더 중요한가를 저울질하던 유이설이 결심을 굳힌 듯 청명을 똑바로 응시했다.

"차 한 잔 더 시켜 줘?"

"……."

뭔가 약간 서글프다.

청명은 피식 웃고는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다관에서 내려다보이는 곤명의 풍경을 응시했다.

'망해 가는군.'

도시 자체에 활력이라곤 없다. 그가 알기로, 이 곤명은 사천으로 따지자면 성도라고 할 수 있는 곳이다. 운남의 중심이 되는 도시라는 뜻이다.

그런 곳이 이토록 활력이 없다는 건 운남 전체가 활기를 잃어 가고 있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청명의 눈이 살짝 일그러졌다.

'옛날 화산을 보는 것 같네.'

한때는 이곳도 활력으로 넘쳤을 것이다. 하지만 마교가 운남을 첫 침략 대상으로 잡으면서 모든 것이 무너졌다. 그리고 잘못된 대처로 예전의 영광을 전혀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

그나마 화산은 청명이 돌아오는 천운이라도 있었지. 만약 청명이 알 수 없는 이유로 되살아나지 않았더라면, 지금 이곳과 화산의 꼴이 뭐가 달랐겠는가?

"쯧."

청명이 가볍게 혀를 차며 내려다보던 시선을 거두었다.

운남은 운남이고 화산은 화산.

그 비슷한 처지에 동정이 가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청명이 관심을 둘 일은 아니다.

지금 관심을 두어야 하는 건…….

"주인장!"

"예! 예이!"

한쪽에서 이쪽을 뚫어져라 주시하던 다관 주인이 부리나케 청명을 향해 달려왔다.

"또 필요한 것이 있으십니까, 손님?"

"일단 씹을 거리 좀 가져다주시고."

"예! 어떤 걸로 드릴까요?"

"적당히 괜찮은 걸로 알아서 가져다주세요. 그리고 차도 시원한 걸로 한 주전자 더 주시고."

"아이고! 예예! 당장 가져다드리겠습니다!"

다관 주인이 희희낙락하며 차를 가지러 바삐 몸을 돌렸다.

그때 청명의 입이 다시 열린다.

"그 전에."

"네!"

주인의 몸이 다시 획 회전한다. 아주 자연스럽고 잽싸게 자세가 훅 낮아졌다.

최근 곤명에 돈이 돌지 않으면서 다관의 운영도 끔찍해진 마당이었다. 그런 와중에 비싼 차를 주전자째 척척 시키는 호구……. 아니, 귀한 분이 오셨으니 어찌 자세를 낮추지 않을 수 있겠는가?

"찻잎 때문에 그러는데. 혹시 자목초라는 풀에 대해서 들어 본 적 있어요?"

"흠, 자목초요?"

"네."

다관 주인이 곰곰 생각하더니 고개를 갸웃거렸다.

"글쎄요. 제가 이곳에 나는 차와 왕래하는 차까지 모조리 꿰고 있는데, 자목초라는 찻잎은 들어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럼 약재 쪽에 대해 잘 아는 이를 아시나요?"

"약재. 약재라……."

다관 주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아는 이 중에, 곤명에서 알아주는 약재상을 하는 이가 있습니다."

"아, 그래요? 거기가 어디죠?"

"아이고. 손님. 뭘 굳이 귀한 걸음 옮기려 하십니까? 제가 그놈을 여기로 부르겠습니다."

"……그래도 돼요?"

"하하하. 물론이죠. 다만…… 오려면 시간이 조금 더 필요할 텐데……."

말꼬리를 주욱 늘이는 모양새에 청명이 씨익 웃으면서 품 안에서 은전을 꺼내 탁자에 올렸다.

"여기 간단한 요리 같은 것도 하나?"

"물론입죠!"

다관 주인이 재빨리 은전을 낚아챈다. 그러고는 허리가 부러져라 고개를 숙였다.

"차는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그리고 약재상 놈도 바로 불러 바치겠습니다!"

"……아, 네."

격렬한 다관 주인의 반응에 청명이 피식 웃었다.

주인이 주방으로 달려가자 유이설이 묘한 표정으로 청명을 바라본다.

"처음부터 이럴 생각?"

"여기가 어디라고 발품 팔고 돌아다녀. 내가 돌아다니면 뭘 아나?"

청명이 피식 웃는다.

"이 동네 문제는 이 동네 사람한테 맡겨야지. 사람 좋은 양반이야 물어보면 대답은 해 주겠지만, 돈 받은 사람 대답에 비할 수 있나."

유이설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똑똑해."

"……."

"안 어울리게."

"차나 마셔."

청명이 차를 홀짝이기 시작했다.

그런 그를, 유이설은 새삼스런 눈으로 바라보았다.

이건 무척 작은 일이다.

사람들이 청명에 대해 가장 큰 착각 중 하나가 있다. 바로 '청명은 주먹만 앞서고 생각이 깊지 않다'는 것이다.

'그냥 그렇게 보일 뿐이야.'

유이설은 이제껏 청명을 지켜본 결과 그건 절대 아니라고 확신했다.

냉정하게 바라보면 청명은 화산의 제자들 중 가장 심계가 깊다. 그가 아무 생각 없이 들이댄 것 같아 보이는 일도, 알고 보면 몇 번을 고심한 끝에 결론을 미리 내려놓은 일이었다.

'그러니까 여기까지 올 수 있었지.'

"안 마셔?"

청명의 말에 유이설이 찻잔을 잡았다.

어쨌든 이 땡볕에 고생을 하고 있을 사형제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드는 것도 사실이라, 그녀는 조금 느린 동작으로 차를 머금었다.

조걸이 한숨을 내쉬었다.

이리저리 자목초에 대한 것을 수소문하고 다녔건만, 이상하게도 곤명에 자목초에 대해 아는 이들이 단 한 명도 없다.

예전에 사천의 상행에서 취급하던 품목이었으니, 당연히 아는 이가 있어야 할 텐데 정보가 이토록 없으니 기이한 일이었다.

'사천에서 좀 더 수소문을 해 봤어야 했나?'

운남에서 자목초가 난다고 했으니, 일단 운남에만 도착하면 어찌 될 거라 생각했는데. 조금 안일했던 모양이다.

이제 와 후회한들 어쩔 수 있는가? 미흡한 정보는 발품으로 채워야지.

"그런데 정보는 발품으로 채운다고 해도……."

조걸이 눈을 찌푸린다.

막상 돌아본 곤명의 상황은 처음 보았던 것 이상으로 좋지 않았다. 대부분의 가게는 문을 걸어 잠갔고, 마주치는 이들은 다들 굶주렸는지 눈에 생기가 없다.

때때로 그에게 구걸을 하겠답시고 옷자락을 잡는 이들마저 있었다.

이러니 제대로 된 정보가 나올 수가 없는 것이다.

'아무래도 다른 방법을 강구해…….'

그때였다.

"응?"

조걸이 고개를 갸웃한다.

"사형?"

저 앞쪽에 윤종이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물론 이상할 건 아니다. 곤명이 넓다고는 해도 무인인 그들이 이리저리 헤집고 다니면 몇 번은 서로 마주치는 게 당연할 테니까.

이상한 것은 마주침 자체가 아니라 윤종의 상태였다.

그의 주변에 작은 아이들이 우르르 몰려들어 있다.

조걸이 고개를 갸웃하며 다가갔다.

"사형. 뭐 하시는 겁니까?"

"……아? 조, 조걸이냐?"

윤종이 어색한 얼굴로 조걸을 돌아본다.

"왜 애들이랑……. 으응?"

조걸이 눈을 가늘게 뜬다.

윤종의 손에 곡식 주머니와 아이 주먹만 한 만두들이 잔뜩 쥐여 있었다.

"……사형?"

"나도 안다. 지금 내가 이럴 때가 아니라 빨리 정보를 얻어야 한다는 걸. 그런데……. 하……."

윤종은 겸연쩍은 얼굴로 말하다 아이들을 내려다보았다. 그의 손만 바라보며 침을 흘리는 아이들에게 만두를 나누어 주자, 모두 허겁지겁 앞 다투어 달려들었다.

"저도 주세요!"

"저요!"

"동생이 굶고 있어요! 하나만 더 주세요!"

윤종이 살짝 입술을 깨물었다.

"이게 떨어지면 더 사 줄 테니, 진정하거라. 그러다가 다친다!"

한 손으로는 만두를 나눠 주며, 다른 한 손으로는 몰려들어 부딪히는 아이들을 슬쩍슬쩍 밀어 다치지 않게 해 주었다.

땟국으로 꾀죄죄한 아이들이 다들 눈이 벌게서 윤종에게 달려든다.

손에 있던 것이 동나자 아이들이 망연한 눈으로 윤종을 응시했다.

"일단은 그걸 먹고, 가족들을 챙겨라. 내가 곧 새 음식을 사 올 테니 여기로 다시 오고!"

아이들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고맙다는 말도 없이 멀어진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조걸이 눈살을 찌푸렸다.

"……도움을 받았으면 고맙다는 말 정도는 해야 할 텐데."

그러자 윤종이 살짝 굳은 얼굴로 돌아보았다.

"그럴 여유도 없는 거다."

"……예?"

"도덕 같은 건 일단 배를 채워야 나오는 거야. 당장 허기가 져 쓰러질 것 같은 아이들이 어찌 그런 것을 따지겠느냐? 제 집에 더 허약한 동생들이 있을 수도 있고, 부모가 쓰러져 있을 수도 있다. 그렇게 쉬이 아이들을 탓하지 말거라!"

"……예, 사형. 죄송합니다."

거의 화를 내다시피 하는 윤종의 모습에, 조걸은 내심 움찔하였다. 오랜 세월 함께 지냈지만 윤종이 이리 화를 내는 모습은 처음 보는 것 같았다.

"혹시……."

그때였다.

"아아아악! 아니에요! 진짜 아니란 말이에요!"

"이놈이 감히 물건을 훔쳐?! 이리 와! 내가 오늘 아주 혼쭐을 내 주마!"

"훔친 거 아니에요! 아악! 아아아아악! 아파요!"

윤종과 조걸의 얼굴이 삽시간에 굳어졌다.

두 사람은 재빨리 비명이 들려오는 곳으로 몸을 날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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