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화. 갑자기 너무 거물이 나오시는데? (3)
청명에게로 다가서는 당군악의 몸에서 가공할 기세가 뿜어지기 시작했다. 지켜보던 다른 이들은 물론, 당군악의 아들인 당패와 당잔조차도 질릴 정도의 압력이었다.
하지만 막상 당군악의 기세를 정면으로 받는 청명은 별다른 반응 없이 심드렁한 얼굴로 멀뚱히 서 있었다.
되레 당황한 사람은 따로 있었다.
"잠까아아아안!"
전각 안에서 네 명의 인영이 빛살처럼 튀어나온다.
새하얀 무복을 입은 백천이 재빨리 청명의 앞을 가로막고는 당군악에게 깊이 포권 했다.
"사천당가의 가주님께 인사 올립니다. 저는 화산의 이대제자인 백천이라고 합니다."
당군악의 발걸음이 멈췄다.
하지만 그의 손은 여전히 소매 안에 머물러 있었다.
"화정검이로군."
"당가주님께서 저를 알고 계시다니 영광입니다. 성도에 들었으면 당가주님께 먼저 문안을 드렸어야 했거늘, 제가 어리석어 경우가 없었습니다. 깊이 사과드리겠습니다."
"음."
저 청명 놈과는 달리 나름 예의가 있는 모습에, 당군악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인다.
다른 화산의 제자들도 필사적으로 미소를 지었다.
'아니, 저 미친놈은 들이댈 사람이랑 아닌 사람도 구분 못 하나?'
'세상에, 어떻게 당가의 가주에게.'
'미쳤다, 미쳤다 했지만 설마 저렇게까지 미친놈일 줄이야.'
애먼 놈 때문에 휘말려 같이 죽게 생길 판이다.
당군악이 누구인가?
천하에 이름 높은 독왕이 아닌가?
독왕이라는 별호가 사천당가의 가주에게 의례히 붙는 별호라고는 하지만, 당금 당가의 가주인 당군악은 그 독왕이라는 별호가 결코 아깝지 않은 사람이었다.
천하에 고수가 수두룩하게 많다지만, 당가의 가주를 무시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설사 화산의 장문인인 현종이 이 자리에 있다고 해도 당가주에게는 예의를 차려야 한다.
그런데 저 천둥벌거숭이 놈이!
백천이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차원이 다르다.
이미 무당의 장로들을 만나고 그들의 검을 봤던 백천이지만, 당군악에게서 흘러나오는 기세는 그들의 경지를 무색하게 만들었다.
'이게 절대고수!'
마주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숨이 멎을 것 같다.
대놓고 할 수는 없는 말이지만, 화산의 어른들에게서는 이런 기세를 느껴 본 적이 없다. 당군악은 그들이 단 한 번도 보지 못한 차원에 올라 있는 것이 분명했다.
"제 사질이 저지른 무례를 대신 사과드립니다. 벌해야 한다면 저를 벌해 주십시오."
"네가?"
"예!"
백천이 단호하게 말했다.
"제가 이 아이들을 책임지고 있습니다. 그러니……."
"아, 비켜 봐!"
그 순간 청명이 백천을 잡아 쭉 당겼다.
얼결에 뒤로 끌려간 백천이 황망한 표정으로 청명을 보았다.
"야……. 야, 이놈아! 상황이……."
"에이! 그런 게 아니라니까!"
"응?"
청명이 피식 웃으며 말한다.
"애초에 저 아저씨, 사숙은 안중에도 없어. 처음부터 나 보러 왔구만 뭘."
"……그게 무슨 말이냐?"
"여하튼 그래."
청명이 한숨을 쉬며 당군악을 바라본다.
내원으로 들어올 때부터 그에게 살기를 날려 대던 당군악이다. 웬만하면 참으려고 했는데 살기로 콕콕 찔러 대고, 심지어는 조평을 저리 겁박하는데 나서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그보다 잘 봐 둬. 저 양반은 진짜니까."
백천이 눈을 크게 떴다.
그는 청명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오는 걸 단 한 번도 들은 적이 없다. 다시 말하자면 역시 저 당군악은 이 간이 배 밖으로 나온 청명조차 인정하는 강자인 것이다.
"읏차!"
청명이 자신을 붙든 백천의 손을 털어 내고는 휘적휘적 앞으로 나섰다.
"용건이 뭐예요?"
"……용건?"
"네. 사람을 찾아왔으면 용건이 있겠죠."
당군악의 미소가 짙어졌다.
"하나 묻겠는데."
"얼마든지요."
"내 앞에서 그런 방자함을 보이고도 살아 있는 이가 있을 것 같으냐?"
모두의 심혼을 얼어붙게 하는 말이었다. 하지만 청명은 태연했다.
"네."
"……뭐라고?"
"있겠죠. 뭐 한 사람쯤 없겠어요?"
"……."
"아니면 내가 처음이어도 되고."
차가움을 유지하던 당군악의 얼굴이 순간 멍해진다.
'이 녀석은 대체 뭐지?'
그는 조금 전부터 청명을 살기로 짓누르고 있는 중이다. 웬만한 이라면 지금쯤 사색이 되어 벌벌 떨고 있어야 한다.
심지어 그의 아들이자 당가의 소가주인 당패라고 할지라도 이만한 살기를 계속 맞는다면 혼절하고 말 것이다.
하지만 청명은 이런 살기쯤은 익숙하다는 듯 태연하게 버티고 있었다. 아니 버티고 있다는 말도 무색하다. 정말 아무렇지도 않은 모양이다.
'어디서 이런 걸물이 나타났단 말인가?'
더 황당한 것은 청명이 결코 강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물론 강호에서는 외견이나 풍기는 기세만으로 사람을 판단할 수 없다. 그러나 저 어린 나이에 자연체를 이룬 게 아니라면 어느 정도 감은 잡히기 마련인데, 청명은 그저 모호하게만 보였다.
말하자면…….
"아무것도 없거나."
그게 아니면.
"한없이 깊거나."
뜻 모를 말을 중얼거리는 당군악을 보며 모두가 의아해했다
오로지 청명만이 그 의미를 이해했다.
"확인해 보시려고요?"
"그럴 참이다. 하지만 그 전에 하나 묻고 싶은 것이 있다."
"네, 물으세요."
"너는 내가 너를 죽이지 않을 거라 생각하는 게냐?"
"네."
"……어째서냐? 화산이 너의 뒷배가 되어 줄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당가의 앞에서도?"
그런데 돌연 얼굴이 어두워진 청명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놈의 문파……. 이놈의 문파! 뒷배는 얼어 죽을."
내가 화산의 뒷배다, 이놈아! 내가!
뭔 놈의 화산이 내 뒷배가 되어 줘! 내 허리가 휠 판인데!
살짝 시큰해지는 눈가를 훔친 청명이 끄응 하고는 입을 열었다.
"내 입으로 할 말은 아니지만, 믿을 게 없어서 화산을 믿……. 에이! 아니다."
청명이 손을 내저었다.
"아무튼, 그런 건 아니에요."
"그럼?"
"제가 믿는 건 화산이 아니라 당가죠."
"……그게 무슨 말이냐?"
청명이 당군악을 똑바로 보며 말한다.
"사천당가는 가문에 이득이 되는 일은 무슨 짓이든 한다고 들었어요. 아닌가요?"
"그럴지도 모르지."
맞을 것이다.
직접 들은 거니까. 그 빌어먹을 놈에게.
- 우리 집안은 이득이 되는 일이라면 나라를 팔아먹는 것도 주저하지 않을 겁니다. 저도 당씨지만 이놈의 집구석은 영 정이 안 간다니까요. 농담이 아니라 제가 가문에 방해가 되면 저를 죽이는 것도 당연하게 생각할 곳입니다. 네? 죽일 수는 있냐고요? 제깟 놈들이 저를 어떻게 죽입니까? 내가 바로 암존(暗尊)인데!
"그럼 저를 죽일 리가 없죠."
당군악이 미간을 좁혔다.
"이유는?"
"나는 천하제일인이 될 사람이자 화산을 천하제일문파로 만들 사람이니까요."
그 황당하기 짝이 없는 선언에 당군악마저 당황하고 말았다.
"그게 이유가 된다는 말이냐?"
"당연하죠. 여기서 나를 죽이면 그냥 미래에 적이 될 이를 제거하는 것에 불과하지만, 나를 친구로 만든다면 미래의 천하제일인을 친구로 두게 되는 거죠. 어느 쪽이 이득인지는 뻔한 거 아닌가요? 내가 없다고 당가가 천하제일문파가 되는 것도 아니고."
"……."
당군악이 가만히 청명을 노려보았다.
'귀신이 곡할 노릇이군.'
지금 청명의 말은 당군악의 의도를 정확하게 찌르고 있었다.
심지어 그의 아들들조차 그가 왜 이곳에 직접 왔는지를 이해하지 못하는데, 일면식도 없는 아이가 그의 심계를 파악하고 선수를 치고 있는 것이다.
"네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아니, 그 말이 맞다. 너는 과도하게 영민하구나."
"헤헤. 그렇게 칭찬하시면 좀 쑥스러운데."
청명이 실없이 웃으며 뒤통수를 긁적였다.
"네 말대로 네가 미래의 천하제일인이라면 당가는 너를 친구로 받아들일 것이다. 벗이란 본디 서로를 돌보는 것. 당가는 네게 베풀 수 있는 모든 것을 아끼지 않을 것이다."
"크으. 감사하게 받을게요."
"하지만."
당군악의 눈가에 냉기가 어렸다.
"그건 네가 미래의 천하제일인이라는 걸 증명했을 때의 이야기겠지. 그게 아니라면 너는 당가를 농락한 대가로 여기서 죽는다."
백천의 얼굴이 시퍼렇게 질렸다.
당가의 가주쯤 되는 사람이 뱉는 말의 무게가 가벼울 리 없다. 설사 저 말이 당가주의 진심이 아니라고 해도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결코 되돌릴 수 없을 것이다.
청명이 당군악에게 자신을 증명해 내지 못한다면 당가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곳에서 청명을 죽이고 만다.
"뭐 뻔한 소리를 하시네요."
청명이 어깨를 으쓱했다.
"자신이 있느냐?"
"거, 두말하면 잔소리죠."
청명이 슬쩍 고개를 돌려 그의 사형제들을 바라보았다.
"지금부터 눈도 깜빡이지 말고 지켜봐."
"청명아!"
"괜찮겠느냐?"
"뭐, 죽이기야 하겠어?"
"죽인다잖아."
"……어…… 에이. 내가 죽기야 하겠어?"
도무지 믿음이 가지 않는다. 도무지!
그런 사형제들을 뒤로하고 청명이 휘적휘적 걸어 앞으로 나섰다.
"사숙……."
"말려야 하는 것 아닙니까?"
백천 역시 어찌할 바를 몰랐다.
청명을 믿지 않느냐고?
'믿지.'
저놈의 성격이야 몰라도 그 실력을 인정하지 않을 도리가 있는가? 백천은 세상 어느 누구보다 청명을 신뢰하고 믿었다.
하지만 그 상대가 당가주다.
독왕 당군악.
청명이 태어나기도 전부터 그 이름을 천하에 떨친 당가의 절대고수이자 당가의 가주.
그런 이를 상대로도 청명의 실력이 먹힐까?
아니, 역시 안 된다.
"그……."
백천이 막 나서려는 찰나 누군가 그의 옷을 살짝 잡아당겼다.
돌아보니 유이설이 가만히 고개를 내젓고 있었다.
"사매?"
"자신 없으면 무슨 수를 써서도 달아날 사람."
"……."
아.
백천의 고개가 절로 끄덕여졌다.
듣고 보니 그렇다.
저놈의 최대 목표는 천하제일인이 되는 게 아니다. 화산을 천하제일문파로 만드는 것이다. 그걸 위해서라면 진흙탕에 뛰어드는 것쯤은 아무렇지 않게 여기고, 굴욕도 얼마든지 감수할 놈이다.
승산 없는 싸움을 하느니 체면이고 나발이고 다 집어던지고 달아날 놈이라는 뜻이다.
그런 놈이 제 발로 나서고 있으니 믿어도 되지 않을까?
백천이 불안한 눈으로 청명의 등을 응시했다.
그리 크지 않은 등이 더없이 넓어 보인다. 하지만 그 등마저도 지금의 백천을 완전히 안심시키지는 못했다.
'제발.'
백천은 속으로 빌며 검 손잡이에 살짝 손을 올렸다.
청명이 정말 위기에 처한다면?
'주저하지 않는다.'
상대가 당가의 가주라도 마찬가지다. 화산은 절대 제자를 버리지 않는다.
앞으로 나선 청명이 당군악을 보며 입을 열었다.
"그런데 저도 하나만 물어도 되나요?"
"그 정도는 허락하마."
"왜 저를 지목하여 찾아오신 거예요? 저는 별로 한 게 없는 것 같은데. 싸움은 조걸 사형이 했는데 왜 저예요?"
당군악이 피식 웃었다.
그러더니 다른 이들에게는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열두 번째 비도가 필요하다고 했다지?"
"……어?"
"나는 거기에 흥미가 있다."
엇, 이건 예상 못 했는데……?
이윽고 청명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아니, 이 새끼가?'
- 도사 형님! 크, 형님만 알고 계십시오. 다른 놈들은 제가 비도를 열한 개만 쓴다고 생각하는데, 사실은 숨겨 둔 열두 번째 비도가 있다 이 말입니다. 크으, 이게 진짜 큰 비밀……. 예? 저번에 형님한테 썼다가 개박살 난 거? 에이, 뭐 그런 말을 하고 그러십니까. 자존심 상하게!
'자존심은 얼어 죽을!'
진짜 비밀이었어?
아니, 이 미친놈이 뭔 가문의 비밀을 베갯잇에 돈 숨겨 뒀다는 투로 말해?
사형! 장문사형!
혹시 그 새끼 거기에 있으면 좀 패 주십쇼!
잠깐 당황했던 청명이 어색한 얼굴로 웃으며 사태를 수습하려 들었다.
"그거 그냥 대충 짐작해서 찔러본 건데요."
"그 짐작이 중요하지."
청명의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이 양반 알고 보면 살인멸구 하러 온 거 아냐?'
가문의 비전을 알고 있는 청명을 죽이려고?
에이…….
아니겠지?
태연자약했던 청명의 내심에 슬슬 불안함이 차오르기 시작한다.
"증명은 간단하다."
당군악이 미소를 지었다.
"십 초. 내 십 초를 버텨 낸다면 나는 너를 후대의 천하제일인으로 인정하겠다."
아.
십 초?
독왕의 공격을 열 번만 피해 내면 된다 이거지?
하하하하하.
"아니! 이 양반이 진짜 사람 죽이려고 하나! 새파란 후배한테 십 초씩이나 쓰고 싶어요?"
청명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물론 진짜 후배는 아니지만, 여하튼.
"그 정도는 되어야지."
당군악의 태연한 대답에 청명은 이를 빠득 갈았다.
'오냐. 해보자 이거지?'
당군악의 십 초를 버텨 낸다면 당연히 후대의 천하제일인이겠지. 그걸 해낼 수 있는 사람이면 후기지수라는 말이 붙지도 않을 테니까.
천하제일 후기지수가 아니라 고금제일 후기지수라도 못 하겠다! 망할 영감탱이!
"끄으으응."
앓는 소리를 낸 청명이 눈에 불을 켜고 당군악을 바라본다.
"좋아요. 대신 약속한 거 잊지 말아요."
"약속?"
"친구는 서로 돌보는 거라는 약속. 해 줄 수 있는 건 다 해 준다고 했죠?"
"물론이다."
"각오하는 게 좋을 거예요."
청명이 이를 갈며 말했다.
"내가 당가 기둥뿌리를 뽑아 버릴 테니까."
"할 수 있다면!"
어쭈?
농담인 줄 아나 보네?
허허.
후회할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