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화. 화산을 건드리면 어떻게 되는지 알려 주지! (3)
"소행에게서 온 소식은 없더냐?"
"……아직 아무런 소식이 없습니다."
"그런가……."
위립산(魏立山)은 생기가 빠져나가 퀭해진 얼굴로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문주님. 조금 더 정양 하셔야 합니다."
"……알고 있네. 알고 있네만……."
말을 흐리는 위립산을 보며 염평은 내심 깊은 탄식을 내뱉었다.
'편히 쉴 수가 없으시겠지.'
종도관은 화영문과 공존할 생각이 없다. 처음 개파 했을 때부터 지속적으로 시비를 걸어왔고, 결국 위립산과의 비무에서 승리하고도 만족하지 못하여 화영문에게 남영을 떠나라 요구하고 있다.
강압적이고 과한 처사다.
하지만 화영문은 그 과한 처사를 성토할 힘이 없었다.
강호는 약육강식. 힘이 없는 자는 힘 있는 자를 어찌하지 못한다. 평생을 강호에서 살아왔음에도 제대로 알지 못한 강호의 이치를 이제야 뼈저리게 실감하는 염평이었다.
"무당의 제자들은 도착했다고 하더냐?"
"아직은 아닙니다. 하지만 시일을 따져 보았을 때, 곧 도착할 것입니다."
"그렇……. 쿨럭! 쿨럭!"
"괜찮으십니까? 문주님?"
"……나는 괜찮다."
"내상이 심하십니다. 어서 몸을 누이시지요."
"그래야겠지."
대답은 그리했지만 위립산도, 말을 하고 있는 염평(閻平)도 지금 그저 편히 누워 있을 상황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었다.
무당의 제자들이 도착한다면 당장 이곳에서 쫓겨날지도 모른다. 평생을 지켜 온 화영문이 현판을 내리게 생겼는데 어찌 침상에서 시간을 보낼 수 있겠는가?
"문도들은 어떠한가?"
"……동요가 심합니다."
"그렇겠지. 그래……. 그렇겠지."
위립산의 입에서 낮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제자들이 동요하고 있다는 말을 들었음에도 원망하는 마음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무당의 속가와 대립하게 된 상황에서도 아직까지 자리를 지켜 주고 있는 이들이다.
'내 헛살지는 않았구나.'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보답을 받은 기분이었다.
"문주님."
염평이 말끝에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위립산의 대제자라고 할 수 있는 염평이다. 오랜 시간 위립산의 옆에서 함께하며 화영문을 이끌어 왔지만, 이번만은 그로서도 딱히 다른 방법을 찾아낼 수가 없었다.
"……문주님. 지금이라도 종도관주와 다시 이야기를 해 보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소용없네."
위립산이 고개를 내저었다.
"저들이 원하는 것이 따로 있다면 그 대화에 의미가 있겠지. 하지만 저들은 남영에서 우리를 몰아낼 생각뿐이네. 그런데 무슨 대화를 하겠는가? 저들이 원하는 건 하나고, 우리는 그걸 들어줄 수 없으니 평행선만 달릴 뿐이네."
"그럼 이렇게 눈 뜨고 당해야 한다는 말씀이십니까?"
"……곧 본산에서 우리를 도우러 올 걸세."
"문주님……."
염평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졌다. 언제나 총명하고 이지를 잃지 않는 위립산이지만, 화산이라는 이름만 나오면 판단력이 흐려진다. 이건 위립산의 고질병이었다.
"상대는 무당입니다. 아무리 화산이 최근 들어 이름을 조금 날렸다고 하지만, 무당은 도가에서는 견줄 곳이 없는 거파가 아닙니까. 화산이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
"도움을 주려고나 하면 다행이지요. 화산이 생각이 있다면 이 일에 개입하지 않으려 할 것입니다. 무당과 대립하여 좋을 일이 있겠습니까? 문주님. 냉정하셔야 합니다. 도움 따위는 어디에서도 오지 않습니다. 이건 우리가 해결해야 하는 일입니다."
위립산이 염평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의 말이 틀리지 않았다는 건 알고 있다.
"그래도……."
"그래서 제가 진즉에 화산에 공물을 보내는 일을 그만두시라 하지 않았습니까. 필요할 때는 도움이 되지 않는 곳에 왜 그리 공을 들이십니까. 소문주를 무당이나 소림으로 보냈다면 이런 일이 있었겠습니까?"
구구절절 맞는 말이다.
그럼에도 위립산은 고개를 끄덕일 수가 없었다.
"우리는 화산의 속가네."
"……."
염평이 입을 꾹 다물었다.
"근본은 버릴 수 없는 것이고, 버려서는 안 되는 것이네. 화산의 속가라는 것을 부정하고 화산의 이름을 내다 버리면, 더 나아질 것 같은가?"
"장문인……."
"그렇게 하다 보면 그 어디의 속가라 해도 마찬가지가 되네. 무당이 이름을 잃으면 무당을 버리고, 소림의 기세가 쇠하면 소림을 버리겠지. 아니, 아닐세. 나는 그렇게 살고 싶지는 않음이야."
"누구도 알아주지 않습니다."
"누가 알아주기를 바라는 게 아니네. 그저 나는 내가 지켜야 할 것을 지킬 뿐이라네."
염평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답답하다. 꽉 막혔다.
하지만…….
'그렇기에 문주님이시다.'
결국 그가 이곳에서 잔소리를 늘어놓는 것 역시 위립산을 존경하기 때문이다. 위립산이 쉽게 화산을 내려놓을 사람이었다면 염평 역시 그를 이토록 존경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믿고 있네."
"무엇을 말입니까?"
"화산이 우리를 저버리지 않을 거라고 말이네."
염평이 고개를 내젓는다.
"문주님. 그건 성의나 마음의 문제가 아니라 능력의 문제입니다. 화산이 무당을 상대할 능력이 있겠습니까?"
"……마음만으로 충분할 때도 있는 법일세."
염평이 막 한마디를 더 하려는 찰나였다.
쿵쿵쿵쿵!
누군가 대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크게 들려왔다.
위립산과 염평의 얼굴이 삽시간에 굳어졌다. 그들은 지금 대문을 걸어 잠그고 방문자를 받지 않고 있다. 그럼에도 굳이 문을 두드린다는 것은 용무가 있어 찾아온 이라는 뜻이다.
지금 그들에게 용무가 있을 사람이라 해 봐야…….
"위 문주! 위 문주 안에 계시오? 내 오늘 담판을 지으러 왔으니 썩 나오시오!"
염평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종도관주의 목소리다.
'빌어먹을. 벌써!'
저들이 아무 이유 없이 찾아왔을 리 없다. 분명 당도한 무당의 제자들을 데리고 왔을 것이다.
"어찌합니까? 문주님?"
"별수 있는가."
위립산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나가 봐야지. 직접 찾아오기까지 했는데 나가지 않는다면 겁쟁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쓸 테니까."
위립산이 비척이며 침상에서 일어났다.
"무슨 일이시오."
"뻔히 알면서 말만 돌리시는구려. 오늘은 담판을 지으러 왔소."
선불 맞은 멧돼지처럼 밀고 들어오는 종도관주를 보고 있으면 이자가 정말 무당의 속가제자인지 의심을 품게 된다.
최소한 도경이라도 어느 정도 공부했다면 이럴 수는 없는 법이다.
"나는 더 할 이야기가 없소."
"할 이야기가 없다니! 비무에서 패했으면 남영에서 꺼질 것이지, 뭘 더 얻어 처먹겠다고 아직까지 여기 눌러앉아 있는 거요?"
"비무에서 패했다고 떠나야 한다는 법이 어디 있소이까."
"그런 법은 없지! 하지만 그 낯짝이 문제 아니겠소?"
위립산이 나직한 탄식을 흘렸다.
비무에서 패했다고 떠나야 한다는 법은 없다. 딱히 내기를 걸지 않은 이상은 말이다.
하지만 애초에 문주끼리의 비무가 벌어질 정도로 상황이 심각해졌다면 패한 이는 두말없이 떠나는 것이 불문율이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불문율이라기보다는 패한 쪽이 버티지 못한다는 것이 맞을 것이다.
관주의 실력은 그 문파의 척도다. 같은 지역에서 상대보다 못하다는 것이 명명백백하게 밝혀졌는데 무슨 수로 버티겠는가? 새로 무학을 배우려는 이가 어느 쪽을 택할지 너무도 빤하지 않은가?
"긴말할 것 없소. 당장 떠나시오."
"나는 그럴 생각이 없다지 않소."
종도관주의 눈이 사나워졌다.
"정말 피를 봐야 정신을 차리겠소?"
분위기가 급격하게 무거워지자, 뒤쪽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이 중 하나가 천천히 걸어 나왔다.
"관주님. 제가 대신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아, 그러시겠소이까? 이런 사소한 일까지……."
"괜찮습니다."
"그럼 저야 감사할 따름입니다!"
위립산을 대할 때와는 판이하게 다른, 공손한 태도였다. 자연히 위립산의 시선도 앞으로 나선 이를 향할 수밖에 없었다.
검은색의 도포.
그리고 머리에 쓴 도관.
도포에 새겨진 소나무 형상의 자수가 이자의 신분을 말해 주고 있었다. 천하에 수많은 문파가 있지만, 가슴에 소나무의 형상을 새길 수 있는 곳은 오직 하나.
'무당의 제자구나.'
사내가 앞으로 나와 가만히 포권 한다.
"처음 뵙겠습니다. 저는 무당의 이대제자인 진현(眞炫)이라 합니다."
"위립산이외다."
깍듯한 자세와 절도 있는 동작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마주하지 않았다면 그 모습에 절로 찬탄했으리라. 하지만 지금 저 절도 있는 동작이 노리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위립산이다.
위립산은 잠깐 그를 살피다 돌연 얼굴을 굳혔다.
"잠깐! 지금 진현이라 하셨소?"
"예, 문주님."
"그럼 그쪽이 그…… 부절검(不?
劍)이라 불리는 그 진현이란 말이오?"
"부끄럽게도 그런 허명을 듣고 있습니다."
사내의 정체를 알아낸 위립산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부절검이라니. 오늘 일진이 좋지는 않겠구나.'
부절검 진현.
혹은 검룡(劍龍) 진현.
무당이 배출해 낸 수많은 후기지수 중에서도 최고로 꼽히는 이가 바로 진현이다. 세상 사람들은 그를 검룡이라 부르며 치켜세우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후대의 무당제일검. 그리고 어쩌면 후대의 천하제일검이 될지도 모르는 이.
무당이 진현을 보냈다는 것은 이번 일을 중히 여기겠다는 선언이나 다름없다.
"저간의 사정은 종도관주님께 들었습니다. 남영에 남기를 원하신다고 하셨습니까?"
"그렇소이다."
진현이 살짝 고개를 내저었다.
"그건 좋은 생각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진현의 목소리는 나직하지만 힘이 있었다.
"남영은 그리 큰 지역이 아닙니다. 그런 곳에 무관이 둘이나 있다면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지요. 문도를 나눠 가져야 하니 서로 힘들 뿐입니다."
"그걸 모르는 게 아니오. 하지만 어째서 먼저 무관을 운영하던 우리가 떠나야 한다는 말입니까!"
"그건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무관이 둘이나 된다면 서로 피해를 볼 것이고, 더 큰 피해를 볼 곳은 누가 봐도 화영문이라는 겁니다."
"……."
진현이 빙그레 웃었다.
"이러면 어떻겠습니까?"
"예?"
"무당의 속가가 이곳에 개파를 하며 귀문에 피해를 끼친 것도 사실이니, 나름의 배상을 하겠습니다. 남영에서 이주하신다면 그 비용 일체를 이쪽에서 부담하지요."
가만히 상황을 듣고 있던 염평이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이 날강도 같은 놈들.'
설마 이주 비용이 없어서 이러고 있겠는가?
새로운 곳에 정착한다는 것은 모든 걸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말이다. 화영문은 남영의 문파다. 문도도 모두 남영에 발을 붙이고 살고, 모든 역사가 남영에 있다.
남영을 떠난다는 건, 그 모든 것을 버리고 바닥에서부터 시작하라는 의미다.
"말씀은 감사하지만……."
위립산이 고개를 저었다.
"화영문은 그럴 생각이 없습니다."
"음."
진현은 자신의 말을 거절하는 위립산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 낮게 침음했다.
"문주님."
"……."
"정 남영에 남고 싶으시다면 한 가지 방법이 더 있습니다."
위립산이 살짝 반색하고는 진현을 바라보았다. 다른 방법이라는 말이 나온 것만으로도 기대가 된다.
"그게 무엇입니까?"
"문주님께서 남영에서 꼭 무관을 운영해야겠다면…… 현판에 있는 매화 문양을 떼십시오."
위립산의 얼굴이 굳었다.
그가 차마 대답조차 하지 못하고 있을 때, 진현이 느긋하게 말을 잇는다.
"두개의 문파는 양립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두 개의 도관은 양립할 수 없는 법입니다. 화산이 아무리 도가의 색채가 옅은 곳이라고는 하나, 무당의 속가가 있는 곳에 공존하는 것은 인정할 수 없습니다."
"그, 그게 무슨……."
"선택하십시오."
진현이 차갑게 일갈한다.
"화산의 이름을 떼어 내겠다면, 저희는 화영문을 인정할 것입니다. 원한다면 자제분은 무당의 속가로 받아 줄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종도관과 화영문은 동문이 되니 서로 잘 지낼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서늘하다.
말속에 비수가 숨어 있다.
"남영에서 화영문의 이름은 영영 사라질 것입니다."
누구도 아닌 진현의 입에서 나온 말이기에 그 무게감이 남달랐다.
충격에 빠져 있는 위립산을 보며 진현이 빙그레 웃었다.
"그래서 화영문의 대답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위립산의 입술이 달싹인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위립산의 표정은 수도 없이 변화했다. 그렇게 고민에 고민을 거듭한 그는 탄식하며 말했다.
"우리는 화산을 저버릴 수 없소."
"……."
"오늘 현판을 내리는 날이 오더라도 우리는 화산의 속가요. 그건 버릴 수 없는 것이외다."
"하……."
진현이 고개를 내젓는다.
"권주를 마다하고 벌주를 마신다고 하시니 제가 어쩔 수 있는 일이 아니군요. 세 시진을 드리겠습니다. 세 시진 뒤에도 이곳을 비우지 않으신다면 비우게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위립산이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천하에 이름이 드높은 무당의 행사치고는 너무 치졸하지 않소이까?"
"착각하시는군요."
"……."
진현이 냉랭한 목소리로 말했다.
"천하에 이름이 높은 무당이 이런 일을 하는 게 아니라, 이리 해왔기에 무당의 이름이 천하에 울려 퍼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해 드릴 수 있는 것은 모두 해 드리려 했습니다. 그 제안을 거부하고 억지를 부린 건 관주십니다."
"우리는……."
"거기까집니다. 더 할 말이 없군요. 세 시진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위립산에게만 들릴 정도로 낮게 중얼거렸다.
"줄을 대려면 좀 더 좋은 곳을 택할 것이지. 화산의 속가라니. 화산이 화영문을 도울 것 같습니까? 우리 무당을 상대로?"
"……나는……."
위립산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진현의 얼굴에 어린 명백한 비웃음이 그의 입을 틀어막는다.
'덧없구나.'
무당은 자파를 보호하기 위해 억지까지 부리며 화영문을 핍박하고 있다. 하지만 화산은 그들을 돕기 위해 어떠한 것도 하지 않고 있다.
그 수많은 세월 동안 화산에 바친 그의 정성은 대체 무엇이었다는 말인가?
"화산은 감히 이곳에 오지 못합니다. 문주께서는 좀 더 현명하시……."
그 순간이었다.
"뭐라는 거야? 저게?"
"……."
등 뒤쪽에서 들려오는 심드렁한 목소리에 진현이 절로 고개를 돌렸다.
"누구냐?"
"아, 비켜! 왜 문은 막고 서 있어!"
문 앞쪽을 채우고 있던 그의 사형제들이 슬쩍 옆으로 물러난다.
그리고 그 열린 틈으로 한 사내가 휘적휘적 걸어 들어왔다.
'누구?'
처음 보는 이에 대한 감상이 채 생기기도 전에, 진현은 생전 한 번도 들어 보지 못했던 말이 귀를 파고드는 걸 느껴야 했다.
"나다. 이 말코 새끼야."
"……."
진현은 저도 모르게 입을 쩍 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