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화. 화산을 건드리면 어떻게 되는지 알려 주지! (1)
"……."
위소행은 살짝 기죽은 얼굴로 주변을 바라보았다.
'이 사람들이 화산의 문하들이구나.'
속가제자들은 배분을 떠나 태어난 시기로 본산의 제자들과 배분을 맞추는 게 일반적이다. 그렇게 따진다면 위소행은 본산의 삼대제자와 같은 배분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곳에 도착하기 전까지만 해도 진신제자라고 해도 뭐 그리 특별할 것이 있겠느냐고 생각했다. 하지만 막상 진신제자들이 모여 있는 것을 보니 그의 생각이 얼마나 잘못되는지를 알 수 있었다.
'하나하나가 다 칼날 같고 정광이 흐르는구나.'
아버지께서 왜 그리 화산이 명문임을 강조했는지 이제 이해할 것 같았다. 같은 세월을 살아온 이들이지만, 이들과 위소행은 분명히 뭔가 달랐다. 동작 하나하나에 절도가 있고, 시선 하나하나에 은은한 도가의 향취가 묻어난다.
식사를 하는 지금도 그렇다.
음식을 먹는 와중에 타인이 감탄할 만한 절도를 보여 준다는 건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이래서 다들 명문을 높이 치는구나, 하고 생각…….
찹찹찹찹!
찹찹찹찹!
"……."
위소행의 시선이 한쪽으로 돌아간다.
모두가 정갈하게 식사를 하는 와중에 구석에 앉은 한 사람만은 과격하다 못해 게걸스럽게 음식을 '퍼'먹고 있는 중이었다.
'도무지 알 수가 없네.'
닭다리가 순식간에 사람의 입으로 사라진다. 순식간에 입 안에서 발라져 나온 닭다리 뼈는 얼마나 깨끗한지, 어떤 방식으로 조리되었는지 결코 짐작할 수 없을 정도였다.
'걸신이 들었나.'
더 이상한 것은 식당 한쪽에서 저리 소란스레 밥을 먹고 있는 이를 아무도 나무라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다들 애초에 음식을 흡입하는 저 사람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굴고 있었다.
'저 사람이 정말 화산신룡이라고?'
위소행은 도무지 믿지 못하겠다는 듯 청명을 바라보았다.
물론 겉모습은 멀쩡하다. 아니, 겉모습만 보면 화산신룡이라는 말이 더없이 잘 어울린다.
문제는 멀쩡해 보이는 게 겉모습뿐이라는 점이다.
청명의 모습에서는 천하제일 후기지수라 불리는 화산신룡의 위엄을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진짜 소문이 잘못됐나?'
그럴 리가 없다.
소문이라는 건 언제나 실제보다 과장되기 마련이지만, 이번만은 그럴 수가 없다. 사실과 조금만 다른 내용이 퍼져도 종남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기 때문이다.
종남의 침묵이야말로 화산신룡의 업적에 대한 가장 강력한 증거다.
'그렇다는 건 저 사람이 그 종남의 이대제자를 싸그리 때려잡은 그 사람이 맞다는 건데.'
위소행이 머리를 벅벅 긁었다.
물론 사람이란 저마다의 성향이 있기 마련이지만, 기본적으로 고수에게 요구되는 품위라는 게 있지 않은가?
하지만 저 청명에게는 고수의 품격이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다. 당장 저 사람에게서 화산의 도복을 벗겨 낸다면, 뒷골목을 누비는 왈패라고 해도 아무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을 것이다.
'정말 저 사람을 데리고 가도 괜찮을까?'
그때 문이 열리며 한 사람이 안으로 들어왔다.
윤종.
위소행은 안으로 들어오는 윤종을 보며 자신도 모르게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차라리 저 사람이 화산신룡이었으면.'
그럼 정말 쌍수를 들고 만세를 불렀을 텐데!
저 윤종이라는 사람에게는 위소행이 화산신룡에게 바라던 모든 것이 있었다. 고아한 고수의 풍모. 몸가짐에서 느껴지는 절도. 그리고 표정에서 느껴지는 부드러움과 여유.
그야말로 그린 듯한 고수의 풍모가 아닌가?
그런데 왜 저 사람이 아니고 저'놈'이 화산신룡이라는 말인가?
윤종은 청명에게 다가가더니 눈을 찌푸렸다.
"체하겠다. 천천히 좀 먹어라."
"사엉오 억 달 굴어 봐."
"……석 달 굶어 보라고?"
청명은 입 안에 든 음식을 꿀꺽 삼키더니 옆에 놓인 냉수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리고 물병을 탁 하고 내려놓은 뒤 의자에 늘어지듯 기대어 배를 두드렸다.
"석 달 동안 벽곡단만 먹었더니, 이제는 공기에서도 벽곡단 맛이 난다. 내가 미쳤다고 폐관을 해서는."
"……."
"크으. 사람은 고기를 먹어야지! 소림 놈들은 어떻게 풀만 먹고 사는지 모르겠어!"
우리도 이 년 전에는 풀만 먹고 살았다, 인마.
하기야 그걸 바꾼 게 청명이긴 했지.
"그래서 성과는 좀 있었더냐?"
"성과는 무슨."
청명이 피식 웃었다.
그저 시간이 조금 필요했을 뿐이다.
청명의 무학은 과거와는 조금 달라졌다. 기반이 달라지고 토대가 달라졌으니 그 위에 지어지는 건물도 과거와는 다른 형태를 띨 수밖에 없다.
그래서 다른 것들에 신경 쓰지 않고 정리할 시간이 조금 필요했을 뿐이다.
"내가 없는 동안 수련은 착실하게 했겠지?"
"……."
윤종이 떨떠름한 얼굴로 주변을 살짝 둘러본다.
사제들의 원망 어린 시선이 그에게 꽂혔다.
'아직 며칠 남은 것 같았는데, 왜 굳이 저놈을 끄집어내선!'
'그래도 석 달 동안은 사람 사는 것 같았는데! 좋은 시절 다 갔네, 빌어먹을!'
'매화동 입구를 좀 더 튼튼한 걸로 막았어야 하는데!'
윤종이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다들 열심히 수련했다."
"호오? 그렇단 말이지?"
청명이 또 슬금슬금 끓어오르기 시작하자 윤종이 재빨리 찬물을 끼얹었다.
"지금 중요한 게 그게 아니잖으냐? 화영문의 일이 급하다."
"아, 그렇지! 그 무당 새끼들!"
청명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그 새끼들 대가리를 깨야지! 사형, 언제 간대?"
"장문인께서 내일 아침 출발하라고 하셨다."
"내일? 말씀하신 것보다는 빠른데?"
"화영문의 상황이 그만큼 급박하다는 거겠지. 무당에서 사람이 이미 출발했다면 곧 도착할 거다. 너무 늦게 도착한다면 뒷북만 치고 돌아오지 않겠느냐?"
"그렇지!"
"그러니 식사 다 했으면 가서 짐을 챙겨 두거라. 최대한 빨리 출발할 수 있도록 할 테니까."
"알았어!"
청명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밖으로 나가자 삼대제자들이 일제히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뒈지는 줄 알았네."
"사는 게 사는 게 아니야. 진짜."
그때 식당의 뒷문이 슬그머니 열린다. 고개를 안으로 살짝 들이민 누군가가 안쪽을 살피더니 작은 목소리로 묻는다.
"갔냐?"
"……예."
"하……."
백상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온다. 그의 뒤로 이대제자들이 우중충한 얼굴로 우르르 몰려 들어왔다.
"밥 한 끼를 마음대로 못 먹네! 밥 한 끼를!"
"아니! 폐관 며칠 남았다 그랬잖습니까! 왜 일찍 나온 겁니까!"
"평화가 끝났구나. 죽고 싶다."
"……."
이 모든 광경을 지켜보던 위소행은 이 상황을 도통 이해할 수 없었다. 궁금해서 속이 터질 지경이었다.
'이게 대체 뭔 상황이야?'
보아하니 저 청명이라는 사람이 이중에 가장 막내인 것 같은데, 사형이란 이들은 그 막내의 눈치를 보고, 심지어 사숙들조차 청명을 껄끄러워 하는 게 분명하다.
'명문은 상하가 무척 명확하다고 들었는데.'
위소행의 떨떠름한 시선이 윤종의 시선과 마주친다.
"저……. 윤종 도장."
"아."
윤종이 위소행을 보고는 가볍게 머리를 긁는다.
"저는 이게 대체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윤종이 묘한 눈으로 위소행을 바라보며 입을 연다.
"굳이 이해하려 할 필요 없습니다. 위 소협."
"예?"
"곧 이해하기 싫어도 이해하게 되실 테니까요."
"……."
위소행의 가슴으로 뭔가 알 수 없는 불안함이 밀고 들어왔다.
* * *
다음 날 아침.
위소행은 장문인의 처소 앞에서 함께 화영문으로 출발할 이들을 기다렸다. 그의 옆에는 윤종과 조걸이 이미 봇짐을 든 채, 아직 오지 않은 이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슬슬 오실 때가 됐……."
"저기 오시네요."
위소행의 시선이 윤종을 따라 돌아간다.
"아……."
위소행이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질렀다.
새하얀 백의를 입고 영웅건을 쓴 사내가 그들을 향해 걸어오고 있다.
'굉장하다.'
그 말밖에는 생각이 나지 않는다.
윤종에게서도 주위를 압도하는 고수의 풍모를 느낀 위소행이지만, 지금 다가오는 이는 뭔가 격이 다른 느낌이다. 그야말로 영웅의 풍모라고 할까?
겉모습으로 사람을 판단하는 것은 나쁜 버릇이지만, 저 사람을 처음 본 이라면 누구라도 같은 생각을 하게 될 것이다.
윤종이 다가오는 이를 향해 고개를 숙인다.
"백천 사숙. 간밤에 평안하셨습니까?"
'백천? 그럼 저 사람이?'
화정검(華正劍) 백천?
화산신룡이 화산에서 가장 신비에 싸인 이라면, 화정검은 화산에서 가장 유명한 이다. 화정검이 자신의 사형제들을 이끌고 강호에 나와 간악한 도적들을 소탕하고, 수많은 이들을 구해 내었다는 건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이야기다.
화정검을 본 이들은 입에 침이 마르도록 그의 풍모를 칭찬한다지 않는가?
'과연 영웅의 풍모로다.'
부드러운 미소를 띤 얼굴로 그들에게 다가온 백천은 빙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너 같으면 평안했겠냐?"
"……."
백천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빌어먹을. 그놈이 다시 튀어나온 것도 끔찍한데, 그놈이랑 같이 강호행을 해야 한다니. 내가 대체 무슨 죄를 지었다고 이 꼴을 당해야 한다는 말이냐!"
"그래도 사숙은 불만이라도 표할 수 있잖습니까. 저희는 꼼짝없습니다."
"끄응."
백천이 머리를 벅벅 긁었다.
"장문인도 무심하시지."
"그러게 말입니다."
모인 세 사람이 동시에 한숨을 내쉬었다.
"저…… 저는 위소……. 으악! 깜짝이야!"
슬그머니 말을 걸려던 위소행이 어느새 자신의 옆에 서 있는 한 사람을 발견하고는 기겁을 하고 뒤로 물러섰다.
'언제?'
기척조차 느끼지 못했는데, 대체 언제부터 옆에 서 있었다는 말인가? 하지만 놀란 것은 위소행뿐, 다른 이들은 그게 당연하다는 듯 표정의 변화조차 없었다.
여자?
앞에 서 있는 여자의 얼굴을 확인한 위소행이 자신도 모르게 입을 쩌억 벌렸다.
아름답다.
위소행은 맹세코 이토록 아름다운 사람을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얼음을 한 겹 씌운 듯 차가운 얼굴로 서 있는 여인.
본래대로라면 저 차가운 표정이 본연의 아름다움을 조금은 반감시켜야 할 텐데, 저 여인은 오히려 그 차가움이 아름다움을 더욱 배가시켜 주는 느낌마저 든다.
"유 사매. 짐은 챙겼어?"
"예. 사형."
"굳이 사매까지 갈 필요는 없을 텐데."
"제가 가겠다고 한 거예요."
"음."
백천이 뭔가 말을 하려다 입을 다물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위소행이 그 모습을 지켜보며 한 가지를 깨달았다.
'사람이 그리 많은 문파도 아닐 텐데, 만나는 사람마다 평범한 사람이 없네.'
이리 보니 다들 독특하다.
하지만 그 사실을 이제야 깨닫게 된 이유가 있다. 그리고 지금 바로 그 '이유'가 저 멀리서 터덜터덜 걸어오고 있었다.
"일찍 나왔네?"
청명이 다가오며 손을 흔들자 유이설을 제외한 모두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진다.
'늦잠이라도 좀 자지.'
'쓸데없이 부지런하다니까!'
청명이 모인 이들을 훑어보고는 고개를 갸웃한다.
"사숙도 가요?"
백천이 떨떠름한 얼굴로 대답했다.
"그렇게 됐다."
"뭐, 사숙이야 그렇다 치고……."
청명이 살짝 눈을 찌푸린다.
"사고도?"
"응."
"굳이?"
"응."
"……."
청명이 막 뭔가를 말하려는 찰나 문이 열리며 현종이 밖으로 나왔다.
"다들 모였느냐?"
"예."
현종이 아래로 내려와 위소행의 두 손을 잡는다.
"위 소협."
"예, 장문인."
"걱정이 많을 것은 알고 있소. 하지만 이 아이들은 분명 믿을 만한 아이들이니 반드시 귀문에 도움이 될 것이오."
"감사합니다, 장문인."
위소행이 진심으로 고개를 숙였다.
화영문이 아무리 화산의 속가라고는 하나, 이리 전폭적으로 도움을 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손으로 전해져 오는 온기에 눈물이 날 지경이다.
"그리고…… 백천아."
"예."
"아이들을 잘 이끌어 주거라. 내 너를 믿는다."
"예!"
"이설과 윤종, 그리고 조걸은 백천을 도와주도록 하거라."
"걱정 마십시오 장문인!"
"그리하겠습니다."
"예."
그리고 마지막으로 현종의 시선이 청명에게로 향한다.
"……청명아."
"예!"
"제발 사고 치지 말거라."
"……거, 다른 사람들이랑 뭐가 좀 다른 것 같은데요."
"제발!"
"……눼."
그렇게 화산의 이대제자와 삼대제자들이 화영문으로의 여정을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