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화. 장문인! 저놈은 재신(財神)입니다! (1)
"어, 어디서 배우다니. 쿨럭!"
이송백의 입에서 피가 뿜어져 나왔다. 그 광경을 본 청명이 한숨을 쉬고는 멱살을 잡은 손을 놓았다.
'좀 과했네.'
청명의 입장에서는 하늘이 무너져도 용납할 수 없는 일이라 한들, 그 죄가 이송백에게 있을 리는 만무했다. 이송백에겐 이만한 일을 벌일 능력이 없으니까.
"쯧."
청명의 손을 펴 이송백의 등을 한 번 내리친다.
타악!
청명의 기운이 그의 육체를 훑고 지나가자 진탕이 되었던 내부가 가라앉아 간다. 이내 이송백이 한결 편해진 얼굴로 길게 숨을 토해 냈다.
이송백이 진정된 걸 확인한 청명은 몸을 곧게 세우고 하늘을 바라보았다.
한참 동안 하늘을 바라보던 청명이 길게 탄식했다.
"그게 종남의 새 무공이라고?"
"……그렇소."
"설화십이식?"
"그렇소이다."
청명이 피식 웃고 말았다.
'이름이라도 좀 확 바꾸든가.'
이건 숫제 화산이 알면 뭐 어쩌겠냐는 도발이나 다름없다.
'아니. 그게 아니지.'
대놓고 이런 짓을 해도 화산에서는 이제 이 검을 알아볼 리가 없다는 확신이겠지.
이건 조롱이다.
청명이 나타나지 않았다면, 화산에서 실전되어 버린 검을 종남 놈들이 버젓이 쓰고 다니는 걸 보면서도 화산은 아무것도 몰랐을 것이다.
이 검을 만든 놈의 악의가 청명의 속을 있는 대로 긁어 놓고 있었다.
"이 검을 누가 배우지?"
"……."
"뭐 그리 대단한 거라고 답을 재고 있어."
이송백이 고개를 끄덕인다.
"이대제자들부터입니다."
"이대제자부터라. 그럼 이 검을 아는 게 일대제자와 이대제자, 그리고 장로들인가?"
"장로님들은 이 검을 배운 적이 없다고 들었습니다. 지금 이 검을 익히고 있는 이들은 이대와 일대입니다."
"배운 적이 없다……."
청명의 눈이 무시무시한 빛을 발했다.
장로들 중 하나가 설화십이식을 창안했다면, 전수는 당연히 일대제자부터 이뤄졌을 것이다.
'그럼 이 검을 마지막으로 완성한 놈이 아직 종남에 있다는 뜻이렷다?'
개중에 그나마 나은 소식이었다.
이런 짓을 벌인 놈이 벌써 죽어 묻혀 버렸다면 죄를 지은 놈을 찾아 단죄할 수 없을 테니까.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감히 이런 개짓거리를 한 대가를 톡톡히 치르게 해 주지!'
청명이 이를 뿌득 갈았다.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굳이 알아볼 필요도 없다.
화산에서 난리가 났을 때, 종남 역시 화산을 도우러 왔을 것이다. 바로 옆에 있는 문파가 마교의 침공을 받는데 손가락만 빨고 구경한다는 건, 강호의 지탄을 받을 일이니까.
'하지만 돕는 척만 하고 실제로는 화산의 무학을 빼돌렸다는 거로군.'
모두가 그러지는 않았겠지. 하지만 화산이 불타는 틈을 타 하지 말아야 할 짓을 한 이가 있다.
아니 어쩌면…….
'화산이 불에 탄 것도 마교의 소행이 아닐지 모르겠군.'
으드득.
이가 절로 갈린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참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이 개 같은 놈들이……."
청명은 목숨을 걸고 강호를 위기에서 구했다. 그런데 이놈들은 되레 그 은혜를 화산에 원수로 갚았다는 뜻이 아닌가?
더구나 이건 한 사람의 욕심으로 끝난 일이 아니다.
사람은 실수를 한다. 그래서 죄를 저지를 때도 있다. 화산에 왔던 종남의 누군가가 욕심에 눈이 멀어 실수를 했다고 치자.
하지만 그 실수를 바로 잡아야 하는 것이 문파가 아닌가?
준엄하게 죄를 꾸짖고 빼돌린 비급을 돌려주지는 못할망정, 그걸 바탕으로 새로운 무학을 만들어 낸다? 그것도 화산을 조롱하듯이 설화(雪花)라는 이름까지 붙여서?
"아주 지랄들을 하는구나."
이를 뿌득뿌득 갈아붙인 청명이 불타는 눈으로 이송백을 돌아보았다.
"너!"
"네? 아…… 네!"
"이거 익히지 마."
"예? 왜……?"
"익히지 말라면 익히지 마! 새끼야!"
청명이 이송백의 뒤통수를 후려쳤다.
머리를 잡고 낑낑대는 이송백을 보고 있으니 두 가지 감정이 교차한다.
이송백도 종남 놈이라 때려 죽여 버리고 싶은 마음이 드는 한편…….
"쯔읏."
짜증을 잔뜩 섞어 혀를 찬 청명이 이송백을 보며 말했다.
"이건 대성할 수 없는 무학이다."
"……."
이송백이 멍한 눈으로 청명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청명은 지금 진실만을 말하는 중이다.
이송백이 그를 찾아와 비무를 청하고 그 설화십이식인지 나발인지를 보여 주지 않았더라면, 청명은 몇 년이 지나도록 이 일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을 것이다.
나름 이송백이 청명을 도와준 것이라 할 수 있다.
은혜는 적당히 갚을 수 있으면 갚고, 원한은 절대로 잊지 않는 청명이지만, 이 은혜는 뭉개고 넘어가기에는 꽤 크다.
"종남의 무학은 치우치지 않는 것을 기본으로 한다. 당장은 느리고 무거운 것 같지만, 검을 갈고 닦으면 닦을수록 더더욱 강해지는 게 종남의 무학이야. 하지만 이건 아니다. 이건 종남과는 맞지 않는 무학이다. 네가 검으로 대성하고 싶다면 이건 당장 갖다 버려."
"하지만 장로님들께서는 이 검이 기존 종남의 검에서 한 발 더 나아간 것이라고."
"당연히 그렇겠지."
아직은 아무도 설화십이식을 대성한 이가 나오지 않았을 테니까.
화려한 것은 빨리 나아간다. 기초를 우직하게 닦는 이와 현란한 변초를 익히는 이가 서로 얕은 경지일 때 맞붙으면 현란한 이가 압도적으로 이기는 법이다.
'아니, 그걸 종남이 왜 모르…….'
"아……."
청명의 입에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너무 팼구나.'
알 것 같다.
청명이 종남의 검수들을 쥐 잡듯이 잡아 버린 것이 모든 일의 원흉이다.
자의식 과잉이나 넘겨짚기가 아니다. 사실 종남의 입장에서 보면 당연할 법한 일이었다.
그들 역시 스스로의 검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바로 이웃 문파에 청명이 등장하고 그가 마교와의 전투에서 죽기까지 수십 년. 종남은 단 한 번도 청명을 이겨 보지 못했다.
그렇다고 종남이 약했는가?
그건 절대 아니다.
'종남이 약했다면 구파일방의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을 리가 없지.'
되레 당대의 종남은 전례 없이 천재들이 쏟아지던 시기였다. 종남의 역사를 통틀어도 그때만큼 인재들이 폭발했던 시기는 찾아보기 어려울 것이다.
그리고 하필 그 천재들이 청명과 같은 시대에 태어나서, 청명의 손에 모조리 박살이 났으니…….
'자신들이 가진 것에 근본적인 회의가 일었다 해도 이상할 게 없지.'
멍청한 것들.
청명이 종남이었다면 검존으로 불리는 일 없이 묻혔겠는가?
아니다.
중요한 건 무학이 아니다. 아니, 무학도 중요하지만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이 누구인가가 몇 배는 더 중요하다.
"저……."
그때, 이송백이 슬쩍 눈치를 보다가 입을 열었다.
"설화십이검을 익히지 말라고 하셨소이까?"
"그래."
"하나……."
이송백이 우물쭈물하는 듯하자 청명이 슬쩍 그를 보고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진지한 어투로 말했다.
"스스로의 길은 남이 정해 줄 수 없는 거예요."
"……."
이송백이 조금 달라진 눈으로 청명을 바라보았다.
"어떤 결정은 다른 이들의 조언을 받는 게 도움이 되지만, 진짜 결정은 혼자 해야 하는 법이죠. 사문의 어른이 해 주는 말도, 제 말도 도움이 되지 않을 거예요. 혼자 고민하고 혼자 생각해서 혼자 결정하세요."
청명이 빙글 몸을 돌렸다. 그리고 두말없이 은하상단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자, 잠시만!"
걸어가던 청명이 고개를 살짝 돌아본다.
이송백이 정중한 자세로 포권을 해 왔다.
"가르침에 감사드리오."
"뭐. 별말씀을."
청명은 손을 가볍게 휘젓고는 걸음을 마저 옮겼다.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이송백이 깊은 한숨을 내쉬고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정말 신선이라도 만난 기분이구나."
한편, 청명의 얼굴은 붉게 달아올랐다가 식기를 반복했다.
"생각할수록 열받네, 이 새끼들!"
감히 다른 것도 아니고 이십사수매화검법을 훔쳐? 그리고 그걸 베껴? 생각 같아서는 지금 당장이라도 종남으로 달려가 깽판을 쳐버리고 싶다.
"아이고. 사형. 세상인심이 이렇습니다. 이 새끼들이 은혜를 갚기는커녕 이런 개짓거리를 하고 있었습니다. 이런데도 제가 참아야 합니까?"
- 안 참으면 네가 어쩔 건데.
하늘에서 청문이 피식 웃으며 반문하는 것 같다.
"아오, 내가 옛날만큼만 셌어도……."
청명이 지금 매화검존이었다면 종남의 장로들은 죽었다고 복창해야 할 텐데, 아쉽게도 지금의 그는 매화검존이 아니라 화산의 삼대제자였다.
'좀 더 빨리 강해져야겠어.'
새삼 느끼게 된다.
강호는 힘이 없는 자들은 결국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곳이다. 화산의 장문인과 장로들이 이 일을 안다고 한들, 종남에 항의할 수 있을까?
없겠지.
항의를 하고 상대의 잘못을 지적하는 것은 힘을 가진 자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다. 지금의 화산은 종남의 무도함을 성토할 힘조차 없었다.
"지금은 말이지."
청명이 이를 뿌득뿌득 갈았다.
"하지만 얼마 안 남았어."
결국 화산은 과거의 영화를 되찾을 것이다. 청명이 있는 이상 그렇게 될 수밖에 없다.
오늘 하나 확인한 것이 있다면, 결국 화산과 종남은 양립할 수 없는 사이라는 것.
종남이 끝내 하지 말아야 할 짓을 해 버린 이상, 화산은 화산대로, 종남은 종남대로 잘 먹고 잘 사는 것은 불가능하다.
설사 다른 이들이 그걸 원한다고 해도 이제는 청명이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더 빨리 강해져야 해."
청명의 눈에 독기가 어렸다.
그도 강해져야 하지만, 화산 전체의 힘 역시 강해져야 한다. 화산이 화산으로서 강해지지 못한다면 그 한계는 너무도 명확해진다.
청명은 자신에게만 의지하는 화산을 만들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청명 없이도 천하제일검문으로 우뚝 설 수 있는 화산이 되어야 한다.
그래야 저 무도한 것들을 벌할 수 있으니까.
'설화십이식이라…….'
잘 만들어졌다.
이십사수매화검법을 어설프게 베껴 만든 검법이기는 하다. 하지만 그저 형을 따오는 데서 그치지 않고, 종남의 무학에 어떻게 녹여 낼지 깊은 고민을 한 게 느껴진다.
화려함을 최대한 줄이고 종남의 내공에 맞도록 검식을 수정한 흔적도 엿보이고, 종남의 다른 무학과 어우러지도록 속도를 조절한 것 역시 보인다.
단순히 매화검법을 베낀 게 아니라, 완전히 종남의 무학으로 만들어 내겠다는 의지가 담겨 있긴 하다만…….
"오히려 그렇기에 극독이 되겠지."
청명의 얼굴에 숨길 수 없는 장난기가 생겨난다.
"일단은 그냥 내버려 둬도 서서히 곪아 갈 테지만."
또 그걸 지켜보고 있는 게 청명의 성미에 영 맞지 않는다. 당했으면 패야 하는 게 청명이다. 망하기를 기다리며 기도하는 건 그의 방식이 아니다.
"너희 사람 잘못 건드렸어."
청명의 시선이 남쪽을 향한다. 저 멀리 우뚝 솟아 있는 종남산을 보며 그는 혀를 찼다.
"은혜도 모르고 화산을 건드린 대가는 반드시 치르게 해 준다. 종남파."
그리고 휘적휘적 걸어 다시 은하상단으로 향했다.
하지만 이때의 청명은 알지 못했다.
먼 훗날에나 올 거라 생각했던, 종남을 벌할 기회가 그토록 빨리 찾아올 줄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