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화. 소도장은 정말 도사인가? (5)
"낄낄낄낄. 호구 잡았네."
청명이 헤벌쭉 웃었다.
"아니, 쟤들은 상인이라는 애들이 뭐 저리 현실 감각이 없어. 그거 하나 구해 줬다고 이걸 다 퍼 주나?"
돈!
돈이다!
재물!
크으. 옛 선인이 말하기를 돈은 많을수록 좋다고 하지 않았는가?
이미 장문사형의 비자금을 탈탈 털어서 섬서에서도 손꼽히는 부자가 된 청명이었지만, 재산이 늘어난다는 것은 언제나 즐거운 일이었다.
"화끈하기도 하지."
섬서에서 거상이라더니, 아주 그냥 손 크기가 장강이 따로 없다. 그냥 농담 삼아 이야기한 건데, 설마 그걸 다 줄 줄이야. 한 반만 챙겨도 만세를 부를 일이었는데.
물론!
당연히 저들이라고 청명에게 감사하는 마음만으로 이 많은 것들을 퍼 주지는 않았을 것이다. 황문약이 일어나기 전이라면 그럴 마음이 충분히 있었겠지만, 막상 쾌차해 버린 이상 상황은 달라지는 법.
측간 가기 전과 측간 다녀온 뒤의 마음이 달라지는 건 인지상정이니까.
그럼에도 그 많은 것들을 군말 없이 퍼 줬다는 건 필시 다른 속내가 있기 때문이리라.
하지만 저들이 청명에게 따로 바라는 게 있다고 해도, 청명의 입장에서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안 해 주면 그만이지.'
청명이 겉으로 보이는 것처럼 어린아이였다면 이만한 재물을 받은 것에 부담을 느낄지도 모르지만, 안타깝게도 청명은 어린아이가 아니었다.
오히려 너무 과하게 닳아 버린 고인물이다.
그걸 저들이 알았다면 생각을 달리했겠지만…….
"여하튼 뭐 대충 해결은 다 했네."
황 대인을 구했고, 그 보답으로 화산에 대한 지원을 약속받았다. 준비가 끝나는 대로 그도 청명과 함께 화산으로 향할 것이다. 그러니 이곳에서 그가 해야 할 일은 모두 했다고 할 수 있다.
딱 하나 남은 것은…….
청명이 자신에게 다가오는 한 사람을 보며 피식 웃었다.
"여어. 몸은 좀 괜찮아요?"
이송백.
종남의 이대제자인 이송백이 대청마루에 드러누운 청명의 앞까지 다가와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무슨 일이세요?"
이송백이 청명을 빤히 보다가 입을 열었다.
"종남으로 돌아가게 되었소이다."
"어, 잘됐네요. 혼자만 남아서 쓸쓸할 것 같더니. 축하해요."
"고맙소이다."
이송백은 그 말을 하고도 몸을 돌릴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슬쩍 그를 보며 청명이 입을 열었다.
"하고 싶은 말이라도 있어요?"
청명의 말에 이송백이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소도장."
"네?"
"이번 일을 해결하기 위해서 나를 함정에 빠뜨린 건 이해하겠소."
"네?"
"결과가 좋으니 이해할 수 있다는 말이오."
청명이 몸을 일으켜 대청마루에 앉았다. 그리고는 이송백을 보며 피식 웃었다.
"함정이라니 말이 좀 이상하긴 하네요. 막상 저를 함정에 빠뜨리려고 한 것은 그쪽 아니었어요?"
이송백이 싱긋 웃었다.
"그러니 탓하지 않기로 한 것 아니겠소?"
청명이 어이없다는 듯이 웃고 말았다.
'얘 성격 희한하네.'
요즘 애들은 옛날과 확실히 좀 다른 것 같았다. 예전에 만났던 종남파 놈들은 하나같이 청명에게 적의를 표출하지 못해서 안달이었는데.
하기야 그러다 보니 종남파 제자들의 성격이 어떤지 확인할 겨를도 없었지만.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뭔데요?"
"망신을 당했다거나, 덕분에 위기에 처했다거나, 혹여 소도장의 손에 놀아났다거나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소. 그건 모두 내가 모자라서 생긴 일이오."
이송백이 굳은 얼굴로 말했다.
"다만 나를 괴롭히는 건, 그 일이 터지기 전 소도장과 나누었던 비무이외다. 나는 아직도 그때 내가 무슨 일을 겪었는지 이해할 수 없소."
청명이 눈을 살짝 가늘게 뜨고 이송백을 바라보았다.
"그래서요?"
"허락한다면 귀하와 다시 한번 비무를 해 보고 싶소. 이번 비무는 저번처럼 사특한 의도를 가진 게 아니오. 진정으로 그대에게 비무를 청하오."
청명이 이송백을 보며 볼을 긁었다.
'이것 봐라?'
보나마나 다시 시비를 걸러 온 것이라고 생각했다. 돌아가는 사정을 모두 파악했다면 그가 청명의 손에 놀아났다는 사실을 모르는 게 더 이상하니까.
분명 선불 맞은 멧돼지처럼 날뛸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송백은 되레 그 사실을 묻어 두고 비무를 청하고 있었다.
'비무를 해서 패겠다는 의미도 아닌 것 같고.'
꽤나 재미있는 반응이다.
"흐음. 어쩔까나."
비무라는 건 애초에 서로의 무학을 견주는 것이다. 이송백의 입장에서야 청명과 비무를 하는 게 의미가 있을지 모르지만, 청명의 입장에서는 딱히 이송백에게 얻을 것이 없었다.
그러니 이 청을 받아 줄 이유가 없지만…….
"뭐, 그러죠."
뭐 딱히 거절할 이유도 없으니까.
청명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턱짓으로 마당을 가리켰다.
"여기에서?"
"사람들이 보지 않는 곳으로 갑시다."
"어휴. 무서워라. 혹시 슥삭 하려는 건 아니죠?"
청명이 자신의 목을 쓱 긋는 시늉을 하자 이송백이 한숨을 내쉬었다.
"소도장. 나는 바보가 아니오. 믿을 수 없는 일이기는 하지만, 소도장의 무위가 나보다 뛰어나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소."
"호?"
청명이 흥미롭다는 얼굴로 이송백을 바라본다.
"말하지 않았소. 나는 내가 겪은 일이 뭔지 알고 싶다고."
청명이 미묘한 미소를 지었다.
"후회할 텐데."
"그래도 좋소이다."
"네, 뭐. 좋아요. 그럼 가죠."
청명이 먼저 발을 떼자 이송백이 굳은 표정으로 그의 뒤를 따랐다.
이송백은 낮게 숨을 내쉬었다.
긴장된다.
사형제는 물론이고 사부나, 사숙들과 비무를 할 때조차 긴장하지 않았던 이송백이지만, 눈앞에 서 있는 청명을 보니 심장이 세 배는 빨리 뛰는 느낌이었다.
'작다.'
찬찬히 다시 뜯어본 청명은 여전히 어린아이였다.
물론 이제는 아이라는 말을 붙이기가 조금 민망하기는 하지만, 적어도 그보다 열 살은 어리다는 사실이 변하지는 않는다. 종남으로 치자면 그의 막내 사질쯤 되려나?
'적어도 한 배분 차이는 넘겠지.'
한 배분이라는 것은 스승과 제자가 나뉘는 차이다.
원칙적으로 이대제자인 이송백은 삼대제자인 청명을 제자로 받을 수 있다. 물론 한창 수련에 전념해야 할 나이에 제자를 받는 건 어려움이 있는지라 실제로는 일대제자쯤 되어야 제자를 받지만, 원칙적으로는 가능하다는 말이다.
다시 말하자면 지금 그는 제자뻘 되는 이를 상대하겠다고 검을 들고 있다.
그럼에도 뭔가?
이 중압감은?
그저 청명을 적으로 인식하고 앞에 두었을 뿐인데, 지금까지 받아 본 적 없는 압박감이 그를 짓누르고 있었다.
'왜 나는 이리 긴장하는 것인가?'
마치 장로님들과 검을 맞댄 것 같은 느낌이다. 저 아이가 그런 급일 리가 없는데도 말이다.
실제로 지금 청명에게서는 어떠한 예기도 느껴지지 않는다. 그리고 상대를 반드시 쓰러뜨리겠다는 단단한 의지도 느껴지지 않는다.
그저 목검을 늘어뜨린 채 이송백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이송백은 입술을 질끈 깨물고 전의를 다졌다.
'나는 내 눈으로 확인해야겠다.'
그가 본 것이 무엇인지.
'감이 좋은데?'
청명은 검을 든 채 몸을 떨고 있는 이송백을 보며 흥미로운 얼굴을 했다.
지금 청명은 이송백에게 어떤 위협도 가하고 있지 않다. 하지만 이송백은 눈앞에서 범이라도 만나 것처럼 긴장을 풀지 못하고 있다.
꽤나 날카로운 감각이다.
'훗날에 종남제일검이 될지도 모르겠군.'
과거 청명이 저 나이일 때, 종남의 동년배 중 비슷한 감각을 가진 이들이 있었던가?
글쎄. 모르겠다.
그때는 다른 이들에게 딱히 관심을 가지지 않을 때였으니까. 스스로의 검을 갈고닦고 장문사형의 잔소리를 피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바빴으니까.
하지만 무위는 몰라도, 저만한 감각을 가진 이는 딱히 생각나지 않는다. 감각이 뛰어나다는 것은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다는 뜻이고, 그건 곧 잠재력으로 이어진다.
'대기만성형이로군.'
당장은 크게 두각을 나타내지 못할지도 모르지만, 나이가 들고 수련을 거듭할수록 다른 이들을 성큼성큼 앞서나가기 시작할 것이다. 그리고 먼 훗날에는 종남제일검이나 종남검존쯤으로 불릴지도 모르지.
다만 가여운 것은…….
'하필 내가 돌아온 시대에 태어났군.'
청명이 슬쩍 검을 들어 올렸다.
사과하는 의미로 한 수 가르쳐 줘 볼까?
"안 와요?"
청명이 고개를 까딱거리며 검을 겨누자 이송백이 움찔하며 살짝 뒤로 물러난다. 그리고는 이를 악물며 몸을 앞으로 당겼다.
이마에 송글송글 배어난 땀방울이 지금 그가 얼마나 애를 쓰고 있는지를 보여 준다.
몇 번이고 심호흡을 한 이송백이 힘겹게 입을 연다.
"검을 나누기 전에 하나 물어도 되겠소?"
"네. 얼마든지."
"소도장은 대체 누구요?"
"……화산의 청명인데요?"
이송백이 이를 악물고 말했다.
"어찌 그럴 수가 있소. 소도장은 이제 검을 배운 지 얼마 되지도 않았을 텐데."
내가 호호백발이 될 때까지 백 년을 닦았다, 이놈아.
그리고 내가 네 나이일 때도 너 정도는 손가락을 때려잡았어!
청명이 쩝 하고 입맛을 다셨다.
살짝 반칙을 저지른 느낌이지만, 그리 죄책감은 들지 않는다. 당년의 청명은 오히려 지금의 청명보다 더 강했다.
지금의 청명은 수련을 시작한 지 채 한 해도 되지 않았고, 기초를 쌓는다고 더없이 느리게 나아가는 중이다.
하지만 과거의 청명은 이때쯤 벌써 십 년이 넘도록 검을 닦았고, 후기지수 중에서는 감히 당해 낼 이가 없는 경지에 올랐었다.
그러니 뭐 껄끄러울 것도 없지.
"세상은 원래 불공평한 거예요."
"……."
"하지만 그쪽도 기회가 없는 건 아니죠. 중요한 건 본인의 길을 믿는 것 아니겠어요?"
"내가 나의 검을 믿고 정진하면 언젠가는 그대를 이길 수 있다는 말이오?"
"에이. 설마."
청명이 손을 내젓는다.
"뱁새가 황새 따라가려다간 가랑이가 찢어지죠."
"……."
"하지만 그래도 괜찮아요. 저에게 이기지 못한다는 게 부끄럽지 않게 될 테니까. 오히려 검을 나눠 봤다는 걸 영광으로 알게 될 거예요."
"광오하군. 더없이 광오해."
이송백의 눈이 천천히 가라앉는다.
대화를 하다 보니 긴장이 조금 풀렸는지, 그의 얼굴은 다시 차츰 무인의 것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조심하시오. 나는 부족함을 알고 처음부터 내가 사용할 수 있는 최선을 수를 쓸 테니까."
"얼마든지."
이송백이 살짝 검을 옆으로 비틀었다.
그 움직임을 보며 청명이 눈을 가늘게 뜬다.
'뭐지?'
검은 사소한 변화만으로도 그 결이 달라진다. 종남은 기본적으로 정도를 추구하는 문파. 검을 비트는 경우가 없다. 상대에게 검날과 검면을 동시에 보이는 건, 환검(幻劍)에서 주로 사용하는 방식이다.
그래.
화산의 방식이다.
"나는 설화십이식(雪花十二式)으로 그대를 상대하겠소."
"설화십이식?"
청명이 고개를 갸웃한다.
종남에 그런 무학이 있었나?
종남 하면 천하삼십육검(天下三十六劍)이랑 태을분광검(太乙分光劍)이 기본인데?
아무래도 그가 없는 사이에 뭔가 새로운 무학을 창안한 모양이다.
"가겠소!"
"네."
"타아아아앗!"
이송백이 기합성을 지르며 청명에게 달려들었다.
청명은 살짝 심드렁한 눈으로 그런 이송백을 바라보았다.
'자, 어떻게 할까?'
떡잎부터 다른 후배를 깔끔하게 짓밟아 버릴까? 아니면 가르침을 주어 잘 자랄 수 있도록 만들어 줄까?
'쯧, 내가 아무리 성격이 나빠도 그렇지.'
종남의 장로나 일대제자쯤 되면 몰라도 저런 아이를 짓밟는 건 취향이 아니다. 일단은 가르침을…….
그 순간이었다.
이송백의 검이 묵직한 변화를 일으킨다.
결코 빠르지 않지만 묵직하기 짝이 없는, 그리고 화려하진 않지만 다채로운.
지금까지 청명이 알던 종남의 그것과는 다른 변화가 청명의 눈앞에 펼쳐진다.
그리고 그 변화를 본 청명의 얼굴이 순간 악귀처럼 일그러졌다.
"이……."
청명의 목검이 일체의 변화도 없이 강맹하게 앞으로 휘둘러진다.
콰아아앙!
폭음과 함께 단 일 수 만에 이송백이 피를 뿜으며 뒤로 나가떨어졌다.
하지만 청명은 그걸로 만족하지 않고 지체 없이 앞으로 달려들어 이송백의 멱살을 움켜잡았다. 그리고는 자신의 얼굴 바로 앞으로 바짝 끌어당긴다.
삽시간에 악귀처럼 변해 버린 청명의 얼굴을 본 이송백은 숨도 쉬지 못하고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너 이 새끼 이거 어디서 배웠어?"
"쿠, 쿨럭. 그, 그게 무슨……."
"이……."
청명이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설화십이식?
개 같은 소리.
그 말로 다른 사람은 모두 속일 수 있을지 모르나, 오직 하나. 청명만은 속일 수 없다.
변화가 둔탁하고 어설프지만 이 검식의 기본형은 청명이 아주 잘 아는 검이었다.
'매화분분(梅花紛紛).'
화산의 검. 화산을 대표하는 검.
화산의 모든 정수가 담겨 있다고 평해지는 검.
이십사수매화검법.
이제는 화산에서조차 실전되어 버린 이십사수매화검법이 다름 아닌 이송백의 손에서 펼쳐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