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화. 하핫, 뭐 대단한 사람 오셨다고. (4)
이송백이 눈을 찌푸렸다.
후회? 지금 후회라고 한 건가?
'어린놈이 겁도 없이.'
평소의 이송백은 상대를 나이나 지위 고하로 판단하는 사람은 아니다. 하지만 이 어린 화산의 제자는 방자해도 너무 방자했다.
'아무리 멋모른다고 해도 그렇지.'
자신의 문파와 다른 문파의 격차를 정확하게 알고, 언행을 결정할 정도의 나이는 아니다. 거기까진 이해한다.
하지만 적어도 자신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타문파의 검수가 비무를 청하는데 어떻게 저런 태도가 나올 수 있다는 말인가?
'담대하다고 생각하자.'
이송백은 살짝 한숨을 내쉬고는 말을 이었다.
"비무에 응하겠다는 것이오?"
"네."
대답도 너무 담담하다.
이송백은 마지막으로 어린아이에게 아량을 베푼다는 마음으로 입을 열었다.
"도호를 물어도 되겠습니까?"
"도호는 없어요. 이름은 청명이구요."
"청명, 청명이라."
이미 알고 있었던 이름을 다시 물은 이유야 간단하다.
"이보시오. 청명 도장. 내 충고 하나 하겠소. 청명도장은 지금 아무런 잘못이 없다고 생각하겠지만, 세상일이라는 게 본인의 잘잘못만으로 결정이 나는 게 아니오. 더 큰 화를 보기 전에 그만 화산으로……."
"안 싸워요?"
이송백이 움찔한다.
청명이 지루하다는 듯 하품을 하더니 기지개를 쭉 켰다.
"종남 분들은 입으로 싸우시는 모양이네. 먼저 싸우자고 시비 걸어 놓고 왜 좋은 칼 놔두고 말로 하신대?"
"……."
이송백이 빙그레 웃었다.
'내 수양이 아직 많이 부족하구나.'
이 쥐톨만 한 놈을 흠씬 패 버리고 싶은 마음이 이리 솟구치는 걸 보니 말이다.
"그리 재촉할 것 없소이다. 안 그래도 지금 시작할 생각이니까."
이송백이 검을 움켜잡자 고휘가 슬쩍 이송백의 소매를 잡았다.
"사형. 직접 하실 생각이십니까?"
이송백이 고휘를 돌아본다.
"직접 나서실 것 없습니다. 제가 하겠습니다."
"아니다."
"사형."
이송백이 단호한 눈으로 말한다.
"최소한의 예의라는 게 있는 법이다. 그래도 이중에서는 내가 가장 어른이니, 나와 싸워 지는 편이 저 아이에게도 면피가 되지 않겠느냐?"
결국 고휘가 한숨을 쉬며 뒤로 물러났다.
'여하튼 사형은 너무 고지식해서 탈이라니까.'
인품만은 대제자가 되고도 남을 사람이다.
"종남의 말학 이송백이 화산의 제자 청명의 검을 도문하고자 합니다."
"어, 잠깐만요."
"……또 뭐요?"
청명이 고개를 살짝 빼 고휘를 바라보았다.
"검 좀 빌려주세요."
"……."
고휘의 눈이 부릅떠졌다.
'검을 빌려달라니. 그래도 명문의 제자라는 놈이 어떻게 저런 망발을 할 수 있는가?'
검문에 들어가서 가장 먼저 배우는 게 자신의 애병을 남에게 넘기지 말라는 것이다. 그런데 뻔뻔하게 검을 넘겨달라니!
"검문의 제자가 검도 들고 다니지 않는다는 말인가?"
"뭐, 싸움박질할 일이 있을 줄 알았나요?"
"대체 화산은……."
"싫으면 마시든가."
청명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어디 보자. 검으로 쓸 만한 게……."
이송백이 눈을 찌푸렸다.
"줘라."
"사형!"
"종남의 제자가 검도 들지 않은 화산의 제자를 핍박했다는 말을 듣고 싶은 거냐?"
"……."
이송백의 말에 고휘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이내 허리에 찬 검을 풀어 청명에게 던졌다.
"감사."
검을 받아 든 청명이 한 손에 검을 파지하고 심드렁한 눈으로 이송백을 바라본다.
"시작하시죠?"
"……뽑지 않을 생각인가?"
"뭐 죽일 것도 아닌데. 뽑을 것까지야. 그쪽은 뽑아도 돼요."
이송백이 눈을 질끈 감았다.
'심마구나. 심마야.'
이놈과 대화를 하고 있으면, 그동안의 수양이 삽시간에 사라지는 느낌이다.
눈을 감고 깊게 심호흡을 한 이송백이 검을 들었다.
원래는 살짝 놀라게 해서 쫓아낼 생각이었지만, 아무래도 그 정도로는 안 될 것 같다. 개인적인 악감정을 떠나서…….
'말하는 꼬락서니나 하는 짓거리로 보건대, 어디 하나 부러지지 않으면 말을 들어 먹지 않을 놈이다.'
짧은 대화만으로 청명의 성격을 정확하게 판단한 이송백이었다.
"검을 들게."
"네, 뭐."
청명이 심드렁하게 검을 들어 올렸다.
그 모습을 보며 이송백이 살짝 미간을 좁힌다.
"제대로 하는 게 좋을 걸세. 내 손속이 독하다 욕할 때는 이미 늦었을 테니까."
"저기."
"음?"
청명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빨리빨리 좀 합시다. 뭔 날 새우겠네. 좀 덤벼요."
"……이!"
이송백의 얼굴에 드디어 노화가 차올랐다.
"버릇을 고쳐 주마!"
결국에는 예의고 뭐고 다 집어던진 이송백이 청명을 향해 일직선으로 날아갔다.
파아아앗!
종남의 검은 단순 명확하다.
구파 중 도가이며 검문으로 이름을 날리는 곳들은 다들 저마다 확연한 특색이 있다. 무당의 검은 부드럽고, 화산의 검은 화려하며, 점창의 검은 쾌속, 종남의 검은 진중하다.
일체의 변화와 잔재주를 배제한 묵직한 검이 청명의 목을 향해 내리쳐진다.
청명이 가볍게 검을 들어 날아드는 이송백의 검을 막았다.
카앙!
검집과 검집이 충돌하며 날카로운 금속음을 만들어 낸다.
"타핫!"
그 순간 이송백이 재차 검을 휘둘러 청명의 옆구리를 노려 온다.
쾌속하고 강맹하다. 설사 반격을 할 틈이 있다 하더라도 허리를 반으로 갈라 오는 검의 기세에 반격할 엄두를 내지 못할 것이다.
카앙!
그리고 이번에도 청명은 검을 내려 이송백의 공격을 막아 냈다.
주춤.
청명이 거센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고 뒤로 한 발 물러선다.
선기를 잡은 이송백이 가열 차게 검을 휘둘러 청명을 몰아치기 시작했다.
"호오."
두 사람의 대결을 지켜보던 고휘가 여유만만하게 미소를 지었다.
"사형께서 꽤나 화가 나신 모양이다. 쉽게 끝낼 생각이 없어 보이는구나."
"예?"
"저 아이가 사형의 속을 많이 긁기는 했지. 쯧쯧. 그러게 사람을 봐 가며 장난을 쳐야지."
"사형께서 지금 저 아이를 혼내시는 겁니까?"
"그렇다.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끝낼 수 있지만, 적당히 어울려 주고 있지 않으냐? 아마 지금 사형의 공격을 막고 있는 저 아이는 죽을 맛일 거다."
아니나 다를까. 청명이 자꾸만 주춤주춤 뒤로 물러났다.
그 광경을 보며 위한수(魏寒洙)가 고개를 갸웃한다.
"그런 것치고는 지나치게 잘 막고 있지 않습니까?"
"그게 바로 사형의 대단한 점이다. 사형이 단숨에 저 아이를 쓰러뜨려 버린다면 어떤 말이 나오겠느냐?"
"아……."
"저 아이의 한계를 순식간에 파악하시고는 겨우겨우 막아 낼 수 있을 만큼의 힘과 속도로만 몰아붙이고 있는 것이다. 단 한 대도 때리지 않았지만, 충분히 가르침을 주고 있는 것이지."
고휘가 어깨를 으쓱했다.
"건방진 아이에게 내리기에는 너무 큰 가르침이구나. 저 아이가 그걸 알아야 할 텐데. 너희도 사형의 움직임을 놓치지 말거라."
"예!"
고휘가 살짝 혀를 찬다.
'저 점잖은 분이 저리 화가 나시다니. 하기야 나 같아도 화가 났겠지. 사형이 너무 흥분하지 않으셔야 할 텐데.'
하지만 뒤에서 보는 이들의 감상과는 달리, 공격을 하는 이송백은 죽을 맛이었다.
카앙!
'또 막아?'
이상하다.
이게 막히면 안 되는데?
적당한 힘과 속도로 놀아 주고 있다는 고휘의 말과 다르게, 지금 이송백은 자신이 낼 수 있는 가장 빠른 속도를 내는 중이었다.
'이게 왜 막히지?'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청명의 검은 절대 빠르지 않다. 느리다 못해 갑갑하기까지 한 검이었다.
하지만 그런 움직임으로 기가 막히게 이송백의 검을 막아 낸다.
느릿한 검이 어느새 이송백의 검이 갈 곳을 미리 선점하고 느긋하게 기다린다.
'내 머릿속에 들어와 있지 않고서야 이게 말이나 되는 일인가?'
검로를 읽힌다?
아니, 그런 수준이 아니다.
화산의 어린 제자에게 검로를 읽히는 일이 일어날 리도 없거니와 설사 검로를 읽혔다 한들, 이건 상식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저 느린 검으로 그의 검을 막기 위해서는 이송백이 검을 떨치자마자…… 아니, 검을 떨치기도 전에 먼저 이송백의 생각을 읽고 검을 움직여야 한다.
청명이 귀신이 아니고서야 그런 일이 어찌 가능하단 말인가?
"타아아아앗!"
이송백이 기합성을 토하며 강하게 검을 떨쳤다.
눈앞의 아이는 아무리 잘 봐 줘도 이제 겨우 열다섯이나 되었을까. 나이로 따지자면 그의 막냇동생뻘에 불과하다. 그런데 그런 아이가 이송백의 검을 힘든 기색도 없이 막아 내고 있는 것이다.
종남에서도 손꼽히는 기재로 불리는 그의 검을!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송백의 검에 내공이 실리기 시작했다.
분명 시작은 가벼운 비무였으나, 자신도 모르는 새 검에 실리는 내공이 점점 강해져 간다.
쇄애애애애액!
검에서 검풍이 강렬하게 뿜어져 나왔다.
카아아앙!
하지만 내력이 잔뜩 실린 이송백의 검도 청명의 검을 밀어 낼 수는 없었다.
벽.
이건 벽이다.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뚫고 지나갈 수가 없다. 이건 숫제 강철로 만들어진 벽이나 다름없다.
"이익!"
오기에 찬 이송백이 있는 힘껏 검을 휘둘렀다.
"저!"
이송백의 검에서 뿜어져 나오는 검풍을 본 고휘가 자신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사형! 흥분하지 마십시오!"
고휘의 날카로운 목소리는 이송백의 귀에도 똑똑히 들렸다.
'아, 내가 무슨 짓을!'
이송백이 검에 실린 내력을 급히 회수했다. 묵직한 기세가 사라지고 그저 빠르기만 한 검이 청명의 검을 후려친다.
그런데.
콰아아아앙!
갑자기 난데없이 폭음이 터지더니 청명의 몸이 쏘아 낸 화살처럼 뒤로 튕겨 났다.
"어?"
그리고 담벼락에 그대로 처박힌다.
쿠우웅!
쩌적. 쩌저저적!
청명이 틀어박힌 담벼락에 거미줄 같은 금이 갔다. 이윽고 청명의 몸이 스르륵 바닥으로 흘러내린다.
"……."
이송백이 두 눈을 부릅떴다.
"사형!"
고휘가 기겁을 하며 달려왔다.
"아이에게 무슨 짓을 하신 겁니까!"
"아, 아니 나는……."
분명 내력을 뺐다.
전력을 다해 휘둘러도 생채기 하나 내지 못했다. 그런데 내력을 뺀 검을 막다가 저리 나가떨어진다는 게 말이나 되는가!
그 순간이었다.
"끄르르륵."
바닥에 쓰러진 청명이 부르르 경련하더니 갑자기 입에서 피를 분수처럼 뿜어내기 시작했다.
"히이이이익!"
"으아아아아아!"
모두가 기겁을 하여 청명에게 달려갔다. 단 한 사람, 이송백만이 귀신에 홀린 듯한 얼굴로 멍하니 서 있을 뿐이었다.
"푸우우웃!"
피 분수가 강렬하게 위로 솟구친다.
와……. 사람 입에서 피가 저렇게 뿜어질 수도 있구나.
누가 봐도 내가 잘못했네. 누가 봐도.
"사형!"
"……."
환장하겠네.
이송백은 대체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끄륵. 끄르륵."
청명의 입에서 선지 같은 피가 울컥울컥 쏟아진다. 누가 봐도 내상을 과하게 입은 모습이다. 이대로 숨이 끊어져도 이상하지 않아 보인다.
이송백이 퍼뜩 정신을 차리고 청명에게 달려가려는 순간이었다.
"이게 대체 무슨 짓이오!"
모두의 시선이 소리가 난 곳으로 돌아갔다.
이송백은 암담한 얼굴로 눈을 질끈 감을 수밖에 없었다.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노기 가득한 얼굴로, 황종의가 수염을 부르르 떨며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