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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53화 (54/1,567)

53화. 하핫, 뭐 대단한 사람 오셨다고. (3)

"으으으음!"

조반상을 받은 기목승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젓가락을 들었던 그는 결국 아무것도 집지 않은 채, 도로 탁 소리 나게 상 위에 내려놓았다.

수행하던 제자들이 슬쩍 기목승의 눈치를 본다.

"음식이 입에 맞지 않으십니까?"

"으음."

기목승이 가볍게 고개를 내젓는다.

"음식이 맞지 않는 게 아니라, 마음이 편치 않구나."

"어찌 마음이 편치 않다 말씀하십니까. 이 제자들이 잘못한 것이 있다면 준엄하게 꾸짖어 주십시오."

"너희 탓이 아니니라."

기목승이 살짝 짜증 어린 얼굴로 조반상을 슬쩍 밀어 내었다.

"꼴도 보기 싫은 놈이 상단에 얼쩡거리고 있으니 밥도 넘어가지 않는구나."

그러자 종남의 이대제자인 이송백(李松栢)이 조용히 되물었다.

"혹여 그 화산의 아이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크흠."

기목승은 가타부타 말을 하지 않았지만, 이 불편한 헛기침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를 이는 없었다.

"장로님. 저는 잘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그깟 어린아이 하나가 온 것이 뭐 그리 대단한 일이라고……."

"아이라는 게 문제가 아니다."

"그럼……."

"화산의 아이라는 게 문제지."

제자들이 영 이해 못 하겠다는 얼굴로 기목승을 바라보았다.

화산의 아이라는 게 뭐 어쨌다는 말인가?

그들은 때때로 윗사람들이 보이는, 화산에 대한 적개심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내 누누이 말하지 않았느냐? 화산과 우리는 한 하늘을 이고 살 수 없는 사이다."

하지만 기목승은 달랐다.

그는 과거 종남의 어른들에게 화산에 대한 이야기를 수없이 들으며 자랐다. 화산이 종남을 얼마나 괴롭게 만들었는지, 그리고 종남이 화산의 기에 눌려 얼마나 힘겨운 시간을 보냈는지 말이다.

"화산의 아이가 떳떳하게 서안에 들어왔다는 것도 거슬리기 짝이 없는데 하필이면 그 이름이 그 씹어 먹어도 시원치 않은 매화검(梅花劍)과 같다니!"

"……."

제자들이 살짝 눈빛을 교환했다.

'그거 때문이셨군.'

'그놈의 매화검은 죽은 지 백 년이 다 되어 가는데 아직까지 회자되는군.'

'화산 놈들은 매화검이라는 별호를 기억도 못 할 것 같은데, 우리는 어찌 당대의 조사들보다 매화검 이야기를 더 듣는 것 같다니까.'

매화검.

매화검존 청명.

종남의 사람들은 과거의 청명을 언급할 때, 별호에 존(尊)자를 붙여 주지 않는다. 씹어 먹어도 시원치 않을 놈에게 감히 그런 존귀한 글자를 붙일 수는 없는 법이다.

이송백이 사제들의 시선을 규합했다.

기목승의 집착이 비정상적이라는 것이야 누구라도 알 수 있지만, 그렇다 해도 기목승은 종남의 장로이자 지금 그들이 보필하는 어른이다.

그리고 화산 이야기만 나오지 않으면 기목승은 무척이나 정상적이고 온화한 사람이다.

"괘념치 마십시오."

"괘념치 말라고?"

기목승의 눈썹이 위로 올라갔다.

"그 아이가 지금 황 대인을 치료하겠다고 동네방네 떠들고 다니고 있다."

"하하. 설마……."

"차도가 있다고 하는구나."

"……."

이송백이 입을 다물었다.

기목승은 더 말하지 않았지만, 총명한 이송백은 그 말 뒤에 숨은 뜻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다.

혹여나 정말 그 아이가 황 대인을 치료하기라도 한다면?

'난리가 난다.'

황 대인은 은원이 분명한 자다. 그런 황 대인이 자신의 목숨을 살려 준 화산을 그냥 내버려 둘리가 없다. 분명 물심양면으로 최선을 다해 화산을 지원하려 들 것이다.

'막아야 한다.'

재빨리 머리를 굴려 계산을 끝낸 이송백이 살짝 헛기침을 하고는 입을 열었다.

"장로님. 그리 그 아이가 거슬리신다면 저희가 그 아이를 쫓아내면 되지 않겠습니까?"

"너희가?"

기목승이 눈을 살짝 크게 뜬다.

"예. 장로님께서 직접 나선다면 흉이 되겠지만, 저희야 이대제자가 아닙니까. 종남의 이대제자가 화산의 삼대제자와 검을 나누는 게 뭐 그리 흠이 되겠습니까?"

"으으음. 어린아이를 핍박하였다는 말이 돌지 않겠느냐?"

이송백이 빙그레 웃었다.

"화산과 종남이 오랫동안 교류를 해 왔다는 것을 모를 이들이 누가 있겠습니까? 우연히 만난 김에 서로의 검을 비교해 보다가 조금 손속이 과했다면 그리 흠이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기목승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더구나 종화지회가 얼마 남지 않았으니, 더욱 명분이 될 것입니다."

"네 말이 무슨 소리인지는 알겠다. 하나 나는 허락할 수 없다."

기목승이 단호하게 말했다.

"그렇다 해도 삼대제자다. 너희가 그 아이에게 손을 쓰거나 비무를 청하는 것은 종남의 위신에 걸맞지 않는 일이다. 다 망해 가는 문파의 아이를 핍박하는 것을 강호인들이 어찌 보겠느냐?"

이송백이 고소를 머금었다.

그 아이에게 가장 신경을 쓰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기목승이다. 그런 그가 이런 뻔한 말을 하고 있으니 고소를 참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그런 웃어른의 마음까지 헤아려 움직이는 것이 제자 된 도리일 터.

"그럼 장로님께서는 허하지 않은 것으로 알겠습니다. 하지만 제자들 중 하나가 실수를 한다면 합당한 벌을 받으면 그만이겠지요."

"물론이다. 그 아이에게 손을 대는 이는 내가 반드시 벌을 내릴 것이다."

"명심하겠습니다."

기목승은 자신의 말을 지키는 사람이다. 그러니 반드시 벌을 내린다는 말은 사실일 것이다.

다만 한 가지.

그 벌과 함께, 벌보다 더 큰 상도 주어질 것이 분명했다.

"사문 어른의 말씀을 따르는 것은 제자 된 도리입니다. 하지만 사문 어른의 편치 않은 마음을 풀어 드리는 것 역시 제자 된 도리가 아니겠습니까? 남은 일은 저희가 알아서 할 테니 장로님께서는 괘념치 마시기 바랍니다."

"크흠. 그리하거라."

"예. 장로님. 그럼 물러가 보겠습니다."

기목승이 대답 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제자들이 깊게 읍을 하고는 방을 빠져나갔다.

기목승은 그 광경을 바라보다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저 아이들은 화산을 너무 우습게 보는구나.'

이해는 간다.

저 아이들이 태어났을 때, 화산은 이미 그 세가 완연하게 기울어진 뒤였으니까. 저들의 머릿속에 화산은 과거의 영광을 안은 채 쓰러져 가는 고목일 뿐이다.

하지만 기목승은 알고 있다.

왕년의 화산이 얼마나 강대했는지.

지금 종남이 천하의 검문으로 이름을 떨치고 있다고는 하나, 기목승이 어릴 적 보았던 사문의 선인들은 절대 지금 종남의 수준보다 못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더 뛰어난 면도 분명 존재했다.

그런 과거의 종남도 화산의 앞에서는 맥을 추지 못했다. 마교의 침략으로 화산의 세가 기울지 않았더라면 지금 이 순간까지도 종남은 화산을 넘어설 수 없었을 것이다.

'절대 그 시절로 돌아갈 수는 없다.'

기목승의 얼굴에 단호한 기색이 어렸다.

"저 아이가 화산을 떠나 이곳까지 온 걸 보니, 화산이 대외적인 활동을 다시 시작했다고 생각해도 무방하겠지."

다시는 일어설 수 없도록 완전히 짓밟아 두었다고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그 역시 화산의 여력을 너무 쉽게 본 모양이었다.

"아무래도 이 일이 끝나는 대로 장문인과 대화를 해 볼 필요가 있겠군."

기목승의 눈에 도인답지 않은 살벌함이 어렸다.

"장로님께서 너무 과민하신 것 아닙니까? 사형?"

"화산 이야기만 나오면 매번 저러시지 않느냐?"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저 작은 아이마저 경계하는 건 너무 심합니다. 아무리 과거의 화산이 천하제일을 다투는 문파였다고는 하나, 이제는 망해서 기둥뿌리도 남지 않은 소문파에 불과하지 않습니까?"

"그도 그렇지."

"그리고 설사 왕년의 화산이 다시 돌아온다고 해도 지금의 종남에는 미치지 못할 것입니다."

이송백이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패기는 좋다. 하지만 나도 장로님의 말씀에 동의한다. 과거의 화산은 결코 쉽게 볼 만한 문파가 아니다. 지금의 종남도 그 시절의 화산에게는 조금 처지는 면이 있지."

"사형!"

"하나, 과거는 과거일 뿐이다. 결국 살아남는 자가 강자인 법이지."

그제야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이송백의 사제이자 종남의 이대제자인 고휘(高輝)가 넌지시 물어왔다.

"그런데 사형. 그 아이는 어떻게 할 셈이십니까?"

"적당히 달래서 보내야 하지 않겠느냐?"

이송백이 고소를 머금었다.

어린아이를 핍박하는 건 이송백의 성정에 어긋나는 일이지만, 기목승 장로가 저리 역정을 내는데 그 아이를 계속 이곳에 두는 것도 문제였다.

기목승이 그 아이에게 직접 손을 댈 일이야 있겠냐마는 종남의 장로쯤 되는 사람이 어린아이와 드잡이를 하는 모습을 보여 좋을 게 없다.

"한데 화산은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 아이를 혼자 보냈답니까? 종남이었으면 산문 밖으로 혼자 나가는 게 허락되지 않았을 어린아이 아닙니까?"

"모든 문파의 사정이 같을 수는 없는 법이지. 이유가 있지 않겠느냐?"

"흐음. 확실한 건, 화산의 사정이 그리 좋지는 않은 듯싶습니다."

"타문파의 일을 우리가 어찌 알겠느냐?"

이송백이 쓸데없는 말을 차단했다.

"우리는 할 일만 하면 된다.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장로님을 잘 보필하는 일이라는 걸 잊지 말거라."

"예, 사형."

"명심하겠습니다."

그제야 이송백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인다.

"하면 그 아이를 어찌 불러내야……."

"잠시만요, 사형. 저기 보십시오."

"응?"

한 사람의 말에 모두의 고개가 한쪽으로 돌아간다.

"그 아이가 아닌가?"

"그러네요?"

"이쪽으로 옵니다만?"

"으음."

이송백이 헛웃음을 흘렸다.

화산의 아이를 어떻게 불러내야 할까 고민하는 와중이었는데, 하필이면 그 아이가 제 발로 그들이 있는 곳으로 오고 있지 않은가?

"어쩝니까? 바로?"

"굳이 시간을 끌 필요는 없겠지."

이송백이 다가오는 청명을 향해 한 발 앞으로 나서며 포권을 했다.

"안녕하시오?"

"어?"

청명이 이송백과 다른 제자들을 보고는 고개를 갸웃한다.

청명이 입을 열기도 전에 이송백이 바로 선수를 쳤다.

"저는 종남의 이송백이라고 합니다. 화산의 제자 분을 만나 뵙게 되어 무척이나 반갑습니다."

"아, 네. 안녕하세요."

청명이 심드렁하게 대답을 했다.

이송백은 끈기 있게 상냥한 미소를 보이며 물었다.

"어딜 가시는 길이온지?"

"황 대인에게 갑니다. 차도가 있는지 보려구요."

"아. 그러시군요."

이송백이 고소를 머금었다.

'아이가 뻔뻔하구나.'

기목승도, 천하의 명의도 고치지 못한 황 대인이다. 그런 황 대인을 이런 아이가 어찌할 수 있으리라 생각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뻔뻔히 황 대인을 치료한다는 말을 하는 걸 보니 심성이 고와 보이지는 않는다.

"바쁘시지 않다면 저와 잠시 이야기를 좀 나누시지 않겠습니까?"

"네, 뭐. 그러세요. 무슨 일이시죠?"

"하하. 다름이 아니라. 예로부터 화산과 종남은 서로 검을 교류하며 발전해 오지 않았습니까? 지금도 화산과 종남은 정기적으로 검을 교류하는 행사를 하고 있습니다. 혹여 아시는지?"

"아, 그래요? 몰랐네요. 제가 화산에 입문한 지 얼마 안 돼서."

"그럴 것 같았습니다."

이송백이 싱긋 웃었다.

'그걸 안다면 내 앞에서 저리 뻣뻣이 고개를 들고 있을 수 없지.'

종남이라는 이름이 나왔음에도 아이의 표정에 변화가 없다. 종화지회를 본 적이 있다면, 절대 저리 평온한 얼굴을 할 수 없을 것이다.

"화산의 검을 겪어 보는 건 수행에 큰 도움이 되는 일입니다. 어떻습니까? 귀하께서 제게 드높은 화산의 검을 한번 견문시켜 주지 않으시겠습니까?"

이송백이 살짝 미소를 머금었다.

분명 거절할 테지만 그에게는 이 아이를 옭아맬 방법이 몇 개나…….

"아, 그러니까."

그 순간 청명이 고개를 살짝 삐딱하게 꺾었다.

"싸우자고?"

"……."

이송백이 목소리를 가다듬는다.

"싸우자는 게 아니라 수련 혹은 비무……."

"그게 싸우자는 거지."

이송백의 눈이 멍해진다.

뭐지, 이놈은?

그 멍한 시선을 받으며 청명이 씨익 웃는다.

"싸움이야 언제든 받죠. 대신 후회하지 마세요."

담담한 선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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