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화. 화산이기 때문입니다. (3)
"아우. 추워!"
산의 새벽은 평지의 새벽과 확연히 다르다.
차가운 공기가 새벽의 습기를 만나면 뼈까지 파고드는 한기를 만들어 낸다. 그 새벽 공기를 헤치며 삼대제자들이 백매관을 빠져나와 연무장으로 향했다.
"잠이 확 깨네."
"잠은 깨는데 몸이 안 깬다. 피로가 안 풀려……."
"제대로 운기 했어야지."
"밤새도록 운기만 했거든요?"
"아, 그래?"
실없는 말을 주고받으며 삼대제자들이 연무장 한편에 마련된 움막에서 모래주머니와 돌주머니들을 꺼냈다.
"그런데 이건 언제까지 해야 하는 거냐?"
"글쎄. 그만하라고 할 때까지 아닐까?"
"누가?"
"몰라서 물어?"
제자들의 얼굴에 한 사람이 떠올랐다.
'괴물 같은 놈.'
'똥물에 빠져 죽을 놈.'
같은 삼대제자이건만 청명은 이미 완벽하게 삼대제자들을 지배하고 있었다.
워낙 수련이 힘들다 보니 중간중간 반항하는 이들이 나오기는 했다. 하지만 그마저도 마지막에 반항했던 이가 백매관 천장에 처박힌 이후로는 나오지 않았다.
하기야.
초대 반항지원자인 조걸과 대사형인 윤종도 별말 없이 수련을 하는데 그들이 무슨 수로 청명에게 반기를 들겠는가?
애초에 조걸과 윤종은 삼대제자 중에서도 급이 다른 이들이다. 누구도 그들을 뛰어넘을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들의 입장에서는 조걸과 윤종도 괴물인데, 세상에는 그보다 더한 괴물이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요즘 그놈 좀 이상하지 않아?"
"뭐가?"
"상태도 안 좋아 보이고, 수련에도 잘 안 나오고."
"……그렇지?"
초반에는 꼬박꼬박 새벽 훈련에 참여해 다양하게 삼대제자들을 괴롭히던 청명이었지만, 최근에는 영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혹시 그 말이 사실이 아닐까?"
"무슨 말?"
"주화입마에 들었다는 소문이 있던데."
"에이! 설마."
"아냐. 아냐. 생각해 봐. 날이 갈수록 마르고 퀭해지는 데다가 건강이 안 좋으니 자꾸 수련을 빼먹잖아."
"음……."
"평소에 게으름을 피우던 놈이면 모를까, 그것도 아니고. 수련을 할 때마다 남들 세 배는 하던 놈이 갑자기 그렇게 안 보이는 게 이상하지 않아?"
"듣고 보니 정말 그럴싸하네."
둘의 대화를 듣는 삼대제자들 사이에 미묘한 기류가 형성됐다.
"그럼……."
그리고 누군가가 끝내 해서는 안 될 말을 꺼냈다.
"수련 안 해도 되는 거 아냐?"
"……."
삼대제자들의 얼굴이 삽시간에 굳어 간다.
사실 수련을 처음 시작했을 때와 지금이 같지는 않다. 처음에는 정말 강압으로 인해 수련장에 나왔고, 하루하루가 지옥 같았다.
하지만 지금은 그 수련을 통해 스스로가 강해지는 것을 실감하는 중이었다. 기운을 다듬고 검로를 연구하는 게 아니라, 생짜로 육체를 직접 움직여 수련을 하는 방식이 낯설기는 했지만, 그 효과만큼은 확실했다.
하체가 안정되었고 검로가 선명해졌다.
무인에게 있어서 강해지는 것 이상의 즐거움이 있겠는가? 몸은 고되지만, 나름 수련의 즐거움을 알아 가는 중이었다.
하지만 이 말을 듣자 그동안 꾹꾹 눌러 왔던 마음이 슬그머니 고개를 든다.
'매번 빼먹을 수는 없겠지만…….'
'아니, 뭐 한 번쯤은…….'
'사실 수련이 좀 과하기는 하잖아. 조금 줄이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은데…….'
모두의 생각이 하나로 모인다.
'청명만 없으면!'
수련 도구들을 들고 연무장에 설 때까지도 웅성거림은 잦아들지 않았다. 당연하다고 여겼던 새벽 수련이 미혹이 생기자마자 은근히 귀찮아진다.
모두 사람이니 어쩔 수 없는 현상이었다.
"봐, 오늘도 안 나오잖아."
"진짜 무슨 문제가 있는 모양인데?"
"그럼 이제 해볼 만한 거 아냐?"
마지막 말이 결정타였다.
사실 그동안 삼대제자들이 청명을 군말 없이 따른 이유는 정확하게 세 가지였다.
하나는 삼대제자 전부가 달려들어도 청명을 쓰러뜨릴 수 있다는 확신이 없다는 것. 아니, 솔직하게 말하면 쓰러뜨릴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두 번째는 청명이 백매관주인 운검의 비호를 받고 있다는 점. 상대할 수 없는 동기가 있다면 그 윗선을 통해 해결해야 한다. 그런데 그 윗선이 청명의 손을 들어주는 데야 무슨 방도가 있겠는가?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청명이 의외로 합리적이라는 점이다. 수련에 있어서는 악귀가 따로 없이 사람을 몰아치지만, 힘이 있다는 이유로 누군가를 괴롭히거나 사사로운 일을 시키지는 않는다.
덕분에 오히려 과거 조걸이 삼대제자들의 기강을 잡을 때보다 생활면에선 더 편해진 점도 있었다.
그런데 지금 세 가지 이유 중 하나가 무너졌다.
'해볼 만하지 않을까?'
'거의 피골이 상접했던데?'
'다들 합심해서 싸우면 이길 수 있지 않을까?'
삼대제자들의 눈에 결연한 의지가 감돌기 시작했다.
의견을 교환하느라 웅성대는 삼대제자들을 보며 조걸이 한숨을 쉬었다.
"사형."
"내버려 둬라."
윤종이 피식 웃었다.
"곧 현실을 알게 되겠지."
그때였다.
끼이이이이익.
모두의 고개가 한쪽으로 돌아간다. 백매관의 문이 열리고 있었다. 지금 이곳에는 청명을 제외한 모든 삼대제자들이 모여 있다. 그 말인즉슨 백매관에 남아 있는 이는 오직 청명 하나라는 뜻이다.
그러니 지금 백매관에서 나오는 이는 당연히!
문이 활짝 열렸다.
그리고 삼대제자들이 일제히 눈을 감고 고개를 돌린다.
"악! 뭐야!"
"눈부셔!"
뭔가 휘황찬란한 빛이 눈을 훑고 지나간다.
슬그머니 다시 문 쪽으로 시선을 던진 이들이 하나같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청명이 걸어 나온다. 분명히 청명이다.
하지만 눈에 보이는 청명은 어제까지 그들이 본 청명이 아니었다. 분명 청명은 청명인데…….
'뭐가 저리 뽀송뽀송하지?'
'얼굴에 기름이 좔좔 흐르는데?'
'어디서 산삼이라도 주워 먹었나?'
삼대제자들은 모두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분명 어제까지만 해도 피골이 상접해서 언제 픽 쓰러져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몰골이 아니었던가? 하지만 지금 눈앞의 청명은 건강하다 못해 기름기가 뚝뚝 떨어질 것처럼 보였다.
'텄다.'
'글러 먹었다. 수련이나 해야지.'
'좋은 꿈을 꿨구나.'
삼대제자들은 자신들의 꿈이 먼 곳으로 날아갔음을 직감했다.
"크흠."
연무장으로 걸어와 삼대제자들의 앞에 선 청명이 조금 침중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제군들."
"……."
"본 교관은 제군들에게 미안한 마음을 금할 수가 없다. 그간 몸이 좋지 않아 제군들의 수련에 소홀할 수밖에 없었다. 이에 본 교관은 책임을 통감한다."
"……아, 아니."
"괜찮아. 그럴 수도 있지!"
"우린 괜찮다! 진짜 괜찮다!"
뭔가 이상한 시동이 걸리고 있단 것을 직감한 이들이 필사적으로 소리쳤다. 하지만 청명은 침중한 얼굴로 고개를 내저을 뿐이었다.
"아니다. 내가 없음에도 이리 열심히 수련을 하는데, 내가 그 기대에 부흥하지 못했다. 이건 분명 본 교관의 실책이다."
분위기가 이상해진다.
'이럴 리가 없는데?'
'저 새끼가 저런 말을 다 하네?'
그래도 뭔가 좋은 상황이 아닐…….
"그러나!"
"……."
청명이 부리부리한 눈으로 단호하게 선언한다.
"잘못을 되돌릴 수는 없어도 만회할 수는 있는 법! 수련이 부족했다면 수련을 더 하면 그만이지!"
"저 개새……."
"똥물에 튀겨 죽일……."
"차라리 죽여라. 차라리!"
여기저기서 작은 욕지거리가 쏟아져 나왔지만, 청명은 눈곱만큼도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러니 여러분도 화산의 미래가 자신에게 있다는 것을 잊지 말고 수련에 성심성의껏 임해 주길 바란다. 그럼 일단."
청명이 턱짓으로 위를 가리킨다. 모두의 시선이 위를 향한다.
높이 솟은 연화봉이 보였다.
"……."
"가."
"……."
"선착순. 늦게 오는 절반은 다시 간다."
"……."
"안 가?"
그 순간 누군가 벼락같이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가공할 속도로 연화봉으로 향하는 이의 정체를 확인한 삼대제자들의 얼굴에 경악이 어린다.
"대사형?"
윤종.
삼대제자 중 대제자인 그가 발바닥에 불이 나도록 연화봉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그 뒤를 누군가가 재빠르게 뒤쫓는다.
물론 조걸이었다.
"아니, 사형! 의리도 없이!"
"야, 뛰어! 빨리!"
"늦으면 다시 가야 된다! 뛰어!"
그제야 정신을 차린 나머지 삼대제자들이 우르르 연화봉을 향해 달리기 시작한다.
"아니! 어떻게 하루아침에 저렇게 되냐고!"
"낸들 아나?"
"사형! 아까는 해볼 만하다고 했잖습니까!"
"군자는 시기를 볼 줄 알아야 하는 법이다! 지금은 때가 아니다!"
"군자는 얼어 죽을! 말코 나부랭이가!"
"뭐 인마?"
"사형! 사형! 뒤처집니다! 뛰십시오! 사형!"
삼대제자들이 기를 쓰고 연화봉을 올랐다. 청명의 수련은 시간이 지난다고 끝나지 않는다. 할당량이 끝나기 전에는 밥도 먹을 수 없다. 연화봉을 두 번 오르고 할당량까지 채우면 그날은 다리가 아니라 팔로 걸어야 하는 사태가 벌어진다.
그러니 다들 기를 쓰고 달리는 것이다!
"귀신도 무심하지! 저거 안 잡아가고 뭐 하나!"
"귀신이 잡히게 생겼구만!"
모두 피눈물을 흘리며 달리고 또 달렸다. 무슨 수를 썼는지 모르겠지만, 청명이 건강을 회복한 이상 그들에게는 가망이 없다.
최초의 반란 시도가 시작도 전에 깔끔하게 제압되는 순간이었다.
악착같이 연화봉을 오르는 삼대제자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청명이 피식 웃었다.
"아주 깜찍한 것들."
감히 반란을 꿈꾸다니.
새로운 경지에 오르며 민감해진 육체는 백매관 안에서도 이들의 대화를 하나도 놓치지 않았다.
"뭐, 좋아."
예전의 청명도 그랬으니까.
말 잘 듣는 고분고분한 놈들은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화산에서는 그런 이들을 선호할지 모르지만, 청명은 아니다. 애초에 그는 체질적으로 반골이 아니던가.
하지만!
불만을 털어놓는 이가 실력이 없으면 그보다 추한 것은 없다. 무인이 당당한 발언권을 얻기 위해 필요한 것은 첫째도 실력이고 둘째도 실력이다.
"그 실력, 내가 만들어 주지."
청명이 빙그레 웃었다.
스스로 과거의 무위를 되찾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가 아무리 강해져도 과거 화산의 영화를 되찾아 올 수는 없다. 문파란 한 사람의 힘으로 좌우되지 않기 때문이다.
무림사 수천 년.
혼자의 힘으로 천하제일인에 오른 이는 수도 없이 많았다. 하지만 그들의 명성은 전해질지언정 그들의 후인은 세상에 이름을 남기지 못한다.
결국 한 문파가 명맥을 이어 가며 그 명성을 떨치기 위해서는 문파의 모두가 강해야 한다.
소림이 천하제일문으로 불리는 이유는 그곳에 천하제일인이 있어서가 아니다. 천하제일인을 보유한 문파도 문파 대 문파로는 소림을 이길 수 없기 때문이다.
심지어 과거 최전성기의 화산도 소림과 비교하면 몇 수 처진다는 평을 듣지 않았는가?
'이번에는 아니지.'
청명이 눈을 빛냈다.
과거에는 그저 사부와 사형들의 방식을 따라갈 수밖에 없었지만, 이번에는 그의 색으로 화산을 토대부터 다시 쌓을 수 있다. 힘들고 지난한 여정이겠지만, 그 끝은 과거보다 더 높고 웅장할 것이다.
물론 그 화산을 장문사형이 마음에 들어 할지는 의문이지만.
"억울하면 되살아나시든지."
한참을 낄낄대던 청명이 입에 양손을 모으고 소리쳤다.
"꼴찌 하는 놈은 오늘 밥 없다!"
악마도 울고 갈 악랄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