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화. 화산이기 때문입니다. (2)
'아까워 죽겠네, 진짜!'
기운이 뭉텅뭉텅 썰려 나간다. 쓸 수 있는 부분은 최대한 살려 보려고 했지만 도무지 쓸 만한 게 없다.
완전히 썩어 버린 무에서 먹을 수 있는 부분을 골라 베어 내는 것처럼, 이제는 숫제 설매단의 기운 중에서 가장 정순한 내력을 뽑아 추출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 기준에 이르지 못한 기운들은 과감하게 몸 밖으로 뽑아냈다.
다른 이라면 감히 상상도 못 할 짓이다.
영단이란 기본적으로 내력을 증진시키기 위해 섭취하는 것이 아니던가? 그런데 지금 청명은 영단의 내력을 몸 밖으로 뿜어내 버리고 있다.
설매단을 제조한 이들이 봤다면 당장에 입에 거품을 물고 달려왔을 것이다.
'나라고 이러고 싶어서 이러냐?'
망할 놈의 토대!
단전에 정순하디정순한 기운만 모아 놨더니 이제는 내력도 마음대로 늘릴 수가 없다. 정제하고 또 정제한 영단의 기운조차 커다란 불순물로밖에 여겨지지 않는다.
대해와 같던 기운에서 고르고 골라 모은 정수는 겨우 한 줌.
겨우 한 줌 남아 버린 기운을 필사적으로 이끌어 단전 안으로 밀어 넣는다.
우우우우우우웅!
이내 정수의 기운이 단전 안에서 잠자고 있던 청명의 기운과 합쳐지며 전신에 돌기 시작한다.
일 주천. 이 주천.
순식간에 십이 주천이 이루어진다. 가부좌를 튼 청명의 육체가 허공으로 떠오르기 시작한다.
청명의 내공으로는 어림도 없는 일이었지만, 그 기운이 워낙에 정순하다 보니 내력의 양을 초월하는 현상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우우우우우우웅!
맑디맑은 기운이 전신을 돌고 돌고 또 돈다. 그러면서 육체에 깃든 불순한 것들을 모조리 걸러 내기 시작했다.
'이게 아닌데?'
이는 청명이 의도한 바가 아니었다.
청명은 그저 순수한 기운으로 선천지기나 회복할 생각이었건만, 그의 기운은 그의 의지를 벗어나 육체를 재생시키기 시작했다.
부러졌던 양 손목이 순식간에 붙고 아문다. 육체 여기저기에 나 있던 타박상들이 처음부터 없었던 양 말끔하게 회복된다.
주르르륵.
전신으로 흘러나온 노폐물들이 옷을 적시다 못해 줄기를 이루어 바닥으로 뚝뚝 떨어졌다. 이미 한번 뚫어 놨다고 생각했던 대혈은 물론이고, 세맥마저 더욱 넓고 광활하게 열리기 시작한다.
청명이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젖혔다.
'처…… 천통(天通)?'
백회가 열린다.
하단전.
흔히 단전으로 칭하는 곳에서 출발한 기운은 가슴 어귀의 중단전을 활짝 열어젖힌 뒤, 이제는 상단전마저 열고 있었다.
덜컥 겁이 난다.
세상 모든 것은 단계가 있기 마련이다. 어린아이는 기어야 한다. 어찌어찌 노력하면 걸을 수는 있겠지만, 다리에 힘이 붙지 않은 아이가 달리려 들었다가는 엎어져 머리가 깨지는 법이 아닌가?
지금 청명이 딱 그 짝이었다.
'막아야…….'
통제를 벗어난 기운은 무엇을 할지 모른다. 기운이 통제를 벗어나 육체를 무너뜨리는 게 바로 주화입마(走火入魔)다.
이건 입마의 초입이나 다름없는 상황이다. 과정 자체가 육체에 도움이 되고 있다고는 한들, 그 끝이 어찌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청명이 기운을 애써 틀어막는다. 하지만 청아하기 짝이 없는 기운은 그의 의지를 거부하고 자신의 길로 내달렸다.
'빌어먹을, 말을 들어 처먹으란 말이다! 내 기운이잖아!'
청명이 다시 한번 악을 썼다. 그제야 기운이 주춤한다. 자신의 주인이 누구인지 깨달은 모양이다.
하지만 그도 잠시. 살짝살짝 눈치를 보던 기운이 다시 내달리기 시작한다. 청명이 이를 악물었다.
'막는다!'
설사 기운이 역류해 몸이 상하는 한이 있더라도 지금은 이 기운을 막아야 한다. 청명이 모든 의지를 끌어모아 기운을 억제하려는 순간이었다.
- 그래서 네놈은 도사더냐 무인이더냐?
'사형?'
머릿속에 장문사형의 목소리가 울린다.
사형의 목소리?
아니다! 이건 과거 그가 장문사형에게 들었던 말이다.
- 무인은 통제하고 억누른다. 하지만 도를 따르는 이들은 내버려 두는 법이다. 야, 이놈아. 세상의 이치가 어디 누른다고 해결되더냐? 흐르는 물을 막겠답시고 둑을 세우면 물은 둑을 넘어 흐르는 법이다.
청명의 몸이 느슨하게 풀어진다.
- 내버려 두어라. 버려두면 모든 것은 순리대로 흐르는 법이다. 사람의 의지로 자연을 뒤튼다? 어리석은 놈. 사람도 자연이다. 넓고 높은 자연 안에 어찌 사람이 없겠느냐?
청명의 허락을 받은 기운이 전신을 내달린다. 광포한 기세로 들끓던 내력은 오히려 풀어 두자 물처럼 부드럽게 청명의 전신을 타고 흐르기 시작했다.
육체 안에 내가 흐른다. 흐르는 물줄기는 점점 더 굵어져, 이내 강이 되고, 청명이라는 우주를 흐르고 또 흘렀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번쩍!
청명이 눈을 떴다. 더없이 맑은 안광이 그의 눈에서 흘러나왔다.
그리고…….
쿵!
"아야!"
허공에서 바닥으로 뚝 떨어진 청명이 엉덩이를 감싸 쥐었다.
"뭐야? 왜 떠 있어?"
몸이 허공에 떠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청명은 얼얼한 엉덩이를 주무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후우. 뒈질 뻔했네."
위험했다.
조금만 어긋났어도 반신불수가 되거나 목숨을 잃었을 것이다. 아까 절벽에서 떨어진 건 애교로 느껴질 정도다.
하지만 그 대가는 확실했다.
"흐음."
청명이 가볍게 손목을 흔들었다. 부러진 손목이 완전하게 붙어 있다. 오히려 부러지기 전보다 더 탄탄해진 느낌이다.
손목만이 아니었다.
'불순물이 남았었구나.'
완전히 씻어 냈다 생각한 육체였건만, 경지가 높아지자 더 많은 것이 보인다. 육체 안에 남은 불순물들을 다시 한번 털어 냈다. 훗날 더 높은 경지에 오르면, 또 지금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일 것이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부차적인 문제에 지나지 않는다. 정말 확연하게 변화한 것은 기혈이었다.
전신이 모두 열려 있는 것 같은 느낌이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어디 하나 막힌 곳이 없다. 본래 그의 혈도가 산 위로 나 있는 작은 오솔길 정도였다면 지금은 황궁으로 들어가는 거대한 관도처럼 넓어졌다. 거짓말 좀 보태서 기혈에서 말이 뛰고, 매가 날아다녀도 될 것 같은 느낌이다.
"내공도 늘었고."
육체를 갈무리하며 내력이 상승했다. 워낙 정순하고 맑은 기운만 모으다 보니 내력을 손톱만큼 늘리는 데도 한 세월이 걸리는 걸 감안하면 정말 고무적인 일이다.
'선천지기도 완전히 회복됐고.'
그러니까 이 모든 것을 종합하자면.
"그릇이 커졌네."
청명에게 있어서 육체란 그의 무학을 담을 그릇이다. 그릇이 작아서야 담을 수 있는 것이 한정되기 마련. 설매단을 통해 새로운 벽을 넘으면서 그릇이 확연히 커졌다.
지금 당장은 쥐꼬리만큼 강해진 것에 불과하지만, 이 그릇은 청명이 과거의 경지를 뛰어넘는 토대가 될 것이다.
청명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사형의 가르침이 아니면 큰일 날 뻔했구나.'
한 번 죽으면서 뭔가 깨달음을 얻기라도 한 건지. 예전에는 그냥 잔소리로밖에 여겨지지 않았던 사형의 말이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새삼스레 깨닫게 된다.
"나는 그저 검수였지."
도인은 아니었다.
화산은 검문이면서 또한 도문이다. 거기에 화산의 정체성이 있다. 하지만 청명은 스스로 도인이라 말하기에는 애매한 사람이다.
그런 청명이 정말 화산을 다시 일으킬 수 있을까?
"으으음."
청명이 머리를 벅벅 긁었다. 이런 고민은 청명과 어울리지 않는다.
일단은 어떻게든 해 보고!
"안 되면 그만이지, 뭐."
청명이 휘적휘적 궤짝으로 걸어갔다. 한 발 한 발을 뗄 때마다 생각보다 몸이 앞으로 휙휙 나아가 당황스러웠지만, 예전에는 오히려 이게 더 자연스러운 움직임이었기에 금세 적응할 수 있었다.
딸깍.
청명은 궤짝에서 설매단과 매화단이 든 상자를 꺼내 소매 안으로 밀어 넣었다.
"쯧. 아쉽네."
이제 이건 청명에게는 의미가 없다.
그가 육체를 재정비할 수 있었던 건 설매단의 기운이 매개체가 되어 주었기 때문이지, 그 기운 자체가 내력에 보탬이 되었기 때문은 아니다.
정제하고 또 정제한 영단이라고 해도 청명의 내력에 가져다 대면 그저 불순물에 지나지 않는다. 자소단쯤 되면 조금이야 낫겠지만, 썩 크게 다르지는 않을 것이다.
물론 쥐꼬리만큼은 도움이 되겠지. 하지만 그렇게 쓰기에는 설매단이 너무 아깝다. 그가 아닌 다른 사람이라면 훨씬 큰 효과를 볼 수 있을 테니까.
"쩝."
청명이 입맛을 다셨다. 상황이 참 교묘하게 돌아간다.
"에이!"
고민하던 그는 눈을 질끈 감았다.
이미 자신의 것이 아닌데 미련을 가져서 무엇 하겠는가? 이미 설매단 열 알로도 볼 수 없는 효과를 봤다.
"욕심 부리다가 패가망신한다. 청명아, 먹을 수 있는 만큼만 먹자."
청명이 미련 없이 몸을 돌…….
후다다닥!
"흠흠! 흠! 흐으음!"
궤짝 안에 든 술병 두어 개가 청명의 허리춤에 감긴다.
이건 절대 술이 마시고 싶어서 이러는 게 아니다. 백 년이나 숙성된 술이 대체 어떤 맛이 날까 하는 순수한 호기심에서 기인된 행동이다.
술과 상자를 갈무리한 청명이 동굴 입구에 서서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기분 이상하네."
흔적이 보여서 그럴 것이다.
너무도 변해 버린 화산에서 이 동굴만은 과거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이 동굴 안에 있으면 예전의 그 시간을 살아가는 느낌이 난다.
그립고.
또 그리운.
말없이 가만히 동굴 안을 바라보던 청명이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가끔은 찾아와야겠어.'
전처럼 술을 먹고 놀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마음이 무거울 때 한 번씩 찾아와 쉬기에 좋을 곳이다.
"뭐 그래도 자주 오지는 않을 거야. 과거는 과거일 뿐이니까."
그가 매화검존 청명이었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지금의 그는 매화검존 청명이 아니라 화산의 삼대제자 청명이었다.
과거에 매여 있는 자는 미래로 나아갈 수 없다.
과거는 그저 그의 삶을 바른 곳으로 이끌어 줄 이정표일 뿐이니까.
"그럼."
청명이 미련 없이 동굴 밖으로 몸을 던졌다.
스으으읏!
비할 바 없이 가벼워진 몸은 동굴에 들어올 때와는 전혀 다른 움직임을 가능하게 했다.
그의 발이 절벽을 가볍게 박차고 위로, 또 위로 오른다.
"읏차!"
한 번의 도약으로 삼 장에 가까운 높이로 뛰어오르기를 여러 차례. 청명은 순식간에 절벽을 올라 정상에 섰다.
"나쁘지 않네."
깊게 숨을 들이켠다.
정상의 맑은 공기가 코를 파고들자 더없이…….
"우웨에에엑!"
구역질이 난다.
그제야 자신의 옷이 몸에서 흘러나온 진득한 오물로 뒤덮여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청명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훌렁훌렁 옷을 벗었다.
"뭐 몸에서 이런 게 나와!"
남김없이 옷을 걷어 낸 청명이 손끝으로 옷을 들어 올리며 한숨을 푹푹 내쉰다.
"하, 진짜. 되는 일이 없네. 가까운 냇가가 어디지?"
일단은 이 옷을 빨아야 화산으로 돌아가든 말든 할 것이다.
청명은 터덜터덜 걸어 산을 내려갔다.
그날. 평소처럼 아무 생각 없이 시냇가에서 목을 축였던 짐승들은 다들 탈이나 몇 날 며칠을 끙끙 앓아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