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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27화 (26/1,567)

27화. 화산이 복덩이를 얻었구나. (2)

"으음."

현종은 창을 뚫고 들어오는 햇빛을 보며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누군가에게는 저 햇빛이 기분 좋은 하루의 시작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다음 날을 살아감이 힘겨운 이들에게는 저 햇빛만큼 원망스러운 것도 없다.

'또 아침이구나.'

결국 다시 하루가 시작되었다.

벌써 이틀이나 지나갔다. 공 루주가 말한 일자까지, 이제 남은 것은 오 일뿐이다.

오 일. 불과 오 일.

현종이 가만히 눈을 감았다.

'오 일이라.'

그 짧은 시간 내에 십만 냥을 마련하지 못한다면, 화산은 모든 전각을 빼앗기고 거리로 나앉게 된다.

사람을 살게 하는 것은 세 가지다.

의(衣), 그리고 식(食), 마지막으로 주(住).

기거할 곳을 잃어버린다는 것은, 더 이상 살아갈 수 없음을 의미한다.

물론 화산에 속했던 이들은 어떻게든 다른 삶을 찾겠지. 하지만 화산은 더 이상 화산(華山)이라는 이름을 유지할 수 없을 것이다.

뜻이 있고 의지가 있는 이들이 남아 화산의 이름을 이어 갈 수는 있을지 모르지만, 그건 그저 이름일 뿐이다. 오랜 세월 명문으로서의 화산에게는 사형선고가 내려지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수천 명의 제자를 두었던 거대 문파가 십여 명으로 줄어들고, 겨우 가전 무공의 형식을 띄고 이어진다면 이를 과연 멸문하지 않았다 할 수 있겠는가?

거처를 잃은 이들은 뿔뿔이 흩어질 수밖에 없다. 한동안이야 그를 따르는 이들이 있겠지만, 살길이 막막해지다 보면 다들 제 길을 찾아 떠나게 될 것이다.

그렇게 점점…….

'아니.'

현종이 격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약한 생각을 할 때가 아니다.'

아직 오 일이나 남아 있다. 그 안에 어떻게든 돈을 마련한다면 화산을 지킬 수 있다.

그는 대 화산의 장문인이다. 화산이 사라지는 그날까지 절대 포기해서는 안 된다. 다른 모든 이들은 포기할 수 있을지언정 그만은 포기할 자격이 없다.

현종이 손을 들어 얼굴을 주물렀다.

화산에 손톱만 한 인연이 있는 이들에게라면 모두 손을 뻗었다. 화산의 사정을 담은 서찰이 천하로 뿌려지고 있다. 그중 화산을 도울 이가 하나쯤은 있을 것이다.

누군가 한 명만 도와준다면…….

현종이 자신도 모르게 허탈하게 웃고 말았다.

'도와주는 이라.'

도와줄 생각이 있었다면 이미 도왔을 것이다. 화산에 받을 것이 그나마 남아 있던 때에도 변변한 도움의 손길은 없었다.

그런데 심지어 이제 몰락해 버린 화산에 누가 십만 냥이라는 거금을 빌려준다는 말인가?

'무겁구나.'

피해서도 안 되고 외면해서도 안 되는 일이다. 하지만 현종은 하루하루 자신을 짓눌러 오는 이 무게가 너무도 버거웠다.

그의 대에 화산의 맥이 끊어질지도 모른다는 부담감은 맨정신으로는 버티기 힘들 정도였다. 이어지는 불면의 밤 속에 내일 아침이 오기를 바라지 않기를 빌고 또 빌었다.

그때였다.

"장문인!"

현종이 서둘러 의관을 정비했다.

그의 속이 어떻든 제자들에게는 이런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된다. 내일 당장 화산이 망하더라도 그는 장문인으로서 고고한 모습만을 기억하게 해 주어야 하니까.

"무슨 일이냐?"

"자, 잠시 나와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음?"

현종이 고개를 갸웃했다.

하지만 생각은 잠시. 현종이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문밖에는 운검이 살짝 얼이 빠진 듯한 얼굴로 서 있었다.

"운검?"

현종이 미간을 좁혔다.

운암이 아니라 운검이다. 운검은 지금 백매관을 맡고 있지 않은가? 운암이 찾아왔다면 화산에 무언가 일이 있다는 뜻이고, 운검이 찾아왔다는 것은 백매관에 문제가 발생했다는 뜻이다.

하지만 백매관에 장문인이 직접 들어야 할 정도의 일이 터진다?

그것도 지금처럼 이른 아침에?

"무슨 일이더냐?"

"자, 장문인."

운검의 낯빛이 이상하다. 크게 놀란 듯도 하고, 질린 듯도 했다.

'대체 무슨 일이기에.'

말을 제대로 알아먹지 못하고, 아직 철이 들지 않은 아이들을 한데 모아 놓고 가르치는 것은 무척이나 큰 심력을 소모하는 일이었다. 그런 일에 적임자로 낙점되었다는 것이 운검이 얼마나 침착한 사람인가를 말해 준다.

그런데 그런 운검조차도 지금 평정을 유지하지 못하고 있다.

"자세한 말씀은 가서 드리겠습니다. 장문인! 직접 가 보셔야 합니다."

"……앞장서거라."

현종은 가타부타 말없이 운검을 따라나섰다.

사정을 묻는 것은 어렵지 않다. 하지만 운검이 이리 나올 정도라면 한시가 급한 일일 터. 가서 들어도 늦지 않다.

"예! 장문인!"

운검이 경공을 펼쳐 앞서나갔다. 현종이 지체없이 그 뒤를 따라나섰다.

'어디로 가는 거지?'

현종이 살짝 눈을 찌푸렸다. 운검이 향하는 곳은 백매관이 아니다. 백매관의 뒤쪽으로 이어지는 연화봉이었다.

연화봉에는 왜?

하지만 운검은 그의 질문에 답해 줄 생각이 없는지 전력을 다해 연화봉을 올랐다.

'가 보면 알겠지.'

운검을 따라 연화봉을 반쯤 오르자 길가에 여기저기 주저앉은 삼대제자들이 보였다.

'응?'

저 아이들이 왜 저기에 저러고 있지? 그리고 애들 몰골이 왜 하나같이……?

현종이 눈을 크게 떴다.

연화봉으로 오르는 소로의 좌우로 아이들이 드러누워 있었다. 장문인이 왔는데도 고개를 들 생각조차 못 하고 헐떡댄다.

"이, 이게 무슨?"

운검이 크게 역정을 냈다.

"이놈들! 장문인께서 오셨거늘 당장 예를 갖추지 못할까?"

"놔두어라."

"하나, 장문인."

"그보다, 아이들이 왜 이렇게 된 것이냐?"

"그게……."

운검이 눈치를 보다가 고개를 휙 돌렸다.

"청명! 청명은 어디 있느냐?"

청명? 그 이름이 여기서 왜 나오지?

현종이 도무지 이해를 못 하겠다는 얼굴로 운검을 바라보았다. 청명이라면 얼마 전 화산에 새로 들어온 아이를 말하는 것 같은데 왜 그 아이를 부른다는 말인가?

"여기 있습니다."

의문이 채 풀리기 전에 대답이 돌아왔다.

본능적으로 대답이 들린 쪽으로 고개를 돌린 현종의 눈이 부릅떠졌다.

"너, 너 왜? 어?"

나무 뒤에서 기괴한 몰골의 청명이 걸어 나왔다.

얼굴은 백지장보다 더 하얗게 질려 있고, 입술은 푸르뎅뎅하게 변해 있었다. 눈 밑의 검은 음영은 거의 턱 끝까지 내려와 있다.

한마디로, 사람의 몰골이 아니다.

당장 풀썩 쓰러져 죽는다고 해도 이상할 게 없어 보였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이더냐?"

"아, 죄송합니다. 수련을 좀 과하게 했더니……."

이게 무슨 개소리야?

사람이 수련 좀 한다고 저런 몰골이 되면, 강호에서 칼밥 먹는 놈들은 단 한 놈도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그때 운검이 급하게 입을 열었다.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닙니다."

현종은 순간 눈을 부라렸다.

중요하지가 않아?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이더냐!"

백매관의 관주라는 놈이 이런 망발을 지껄이다니!

백매관은 화산의 미래다. 백매관에서 수련하는 삼대제자들이야 말로 훗날 화산을 이끌어 나가야 할 동량(棟梁)이 아니던가! 그런데 다른 이도 아니고 백매관주라는 놈이 이딴 말을…….

"이곳으로 와 보셔야 합니다. 청명 이놈이 이상한 것을 발견했습니다."

"이상한 것?"

"어, 어서!"

운검의 태도가 너무도 다급하다.

'아니…….'

다른 이가 이런 태도를 보였다면 바로 호통을 쳤겠지만, 지금 현종의 눈앞에서 안달복달하고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운검이다. 화산 내에서 가장 침착한 운검이 꽁지에 불붙은 망아지처럼 날뛰고 있다.

현종은 결국 홀린 듯이 청명과 운검을 따라 수풀 안쪽으로 들어갔다.

"대체 뭐가 있……."

현종의 말은 더 이어지지 못했다.

그의 시야에 파헤쳐진 땅과 그 땅 아래 드러나 있는 낡은 상자가 들어왔다. 상자의 입구는 반쯤 열려 있었다.

현종의 눈이 점점 커진다.

보인다.

반쯤 열린 상자의 안으로 황금빛의 무언가가 빛나고 있었다. 세상에 저런 황금빛을 내뿜는 금속은 단 하나밖에 없다.

하지만 현종의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겨우 황금 따위가 아니었다. 그 황금 옆에 놓여 있는 서책.

그 서책의 제목이 현종의 영혼까지 빨아들이고 있었다.

『대화산파화음현사업장부』

더럽게 긴 제목과 그 뒤에 붙어 있는 숫자.

"이, 이, 이거……?"

현종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이게 왜 여기에서 나온다는 말인가? 심지어 왜 저 황금과 함께 나온다는 말인가?

믿을 수 없는 현실 앞에 선뜻 다가서기가 무섭다. 괜스레 손을 뻗었다가 저 물건들이 신기루처럼 사라져 버릴까 봐 두려운 것이다.

"이, 이걸 어떻게 발견했느냐?"

"저 아이가 발견했습니다."

"저 아이가?"

현종의 고개가 획 돌아간다. 걸어 다니는 시체 같은 모습의 청명이 보인다.

"이, 이걸 어떻게 발견했느냐?"

청명이 반쯤 죽어 가는 얼굴로 힘겹게 입을 열었다.

"새, 새벽……. 새벽 훈련을 가는데……."

"뭐?"

모기 같은 목소리를 들으며 현종이 고개를 갸웃한다. 그러자 운검이 슬그머니 해석을 해 주었다.

"새벽 훈련으로 연화봉에 올랐다는 말 같습니다."

"새벽 훈련이라니 언제부터 그런 걸 했다는 말이더냐?"

"시작한 지 좀 되었습니다. 저 아이가 오고부터."

"으응?"

저 아이가 오고부터라니.

저 아이가 온 지 얼마나 됐다고?

'아, 아니지. 지금 이런 게 중요한 게 아니지.'

자세한 것은 나중에 따져 물어도 된다.

"그러니까 새벽 훈련을 위해서 연화봉을 오르다가 이걸 발견했단 말이더냐?"

"정확하게는 너무 지쳐서 수풀 안쪽에서 조금 쉬려고 했는데 앉은 곳이 이상하게 딱딱하여 바닥을 보니 뭔가 튀어나와 있었습니다. 그래서 혹시나 하여 파 보았더니……."

"그런!"

"그런데…… 안에 든 물건이 워낙…… 범상치가 않아서 제가 직접 확인하기보다는 사문의 윗분들께 알리…는 게 옳다고 생각을 해서."

"처, 천천히 말하거라. 무슨 놈의 수련을 그렇게 반송장이 되도록 하는 것이냐?"

"수련은…… 무인의 근본……."

"이, 일단 알겠다. 너는 잠시 정양에 들거라! 내 직접 확인하겠다."

현종이 마른침을 삼키며 궤짝을 향해 다가갔다. 그러고는 궤짝 안으로 떨리는 손을 집어넣었다. 그의 손이 닿은 곳은 모두의 시선을 빼앗은 휘황찬란한 황금이 아니라 그 옆에 있는 서책들이었다.

"대화산파화음현사업장부."

한 권 한 권을 꺼내며 현종이 넋이 나간 듯 중얼거린다. 덜덜 떨리는 손이, 지금 그의 심정이 얼마나 격동하고 있는지를 말해 주었다.

차마 서책을 열어 볼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어설프게 서책을 열었다가 이 낡은 서적이 바스라지기라도 한다면 죽어서도 눈을 감지 못할 것이다.

"대화산파서기."

이건 화산의 역사를 다룬 사서가 분명했다. 장부처럼 실질적인 역할은 하지 못하겠지만, 화산장문인의 입장에서는 오히려 더 중요할 수도 있는 서책이다.

꺼낸 책들을 조심히 내려놓은 현종의 눈에 그 아래에 소담스레 놓인 서책의 제목이 들어왔다.

"치, 치, 치……."

그의 눈가가 경련을 일으킨다.

"치, 칠매검록(七梅劍錄)?"

전신이 부들부들 떨린다.

"이, 이게 여기서……. 이게……."

"자, 장문인!"

"끄르르르륵."

의식이 하얗게 날아가 버린 현종의 몸이 그대로 뒤로 넘어갔다.

"장문인!"

"정신 차리십시오! 장문인!"

사방에서 들려오는 고함 소리를 들으며, 현종은 정신을 잃는 그 순간까지 환히 웃었다.

이 궤짝에서 나온 건 단순한 재물과 서책이 아니다.

바로 희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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