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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26화 (25/1,567)

26화. 화산이 복덩이를 얻었구나. (1)

비동은 생각보다 좁았다.

하기야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다. 만년한철로 거대한 비동을 만들어 낼 수 있을 정도의 재력이라면 당대의 화산은 천하제일문파로 불렸을 테니까.

"……맨날 돈 없다고 징징대더니. 이런 거 만든다고 돈을 쓰고 있었구만."

깊은 빡침이 밀려왔지만, 어쩌겠는가? 이미 죽은 사람들에게 따질 수도 없고.

구시렁거리며 안으로 들어간 청명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비동 안에 뭔가 여러 가지 물건들이 있었다. 일단 제일 먼저 확인해야 할 건?

"돈!"

청명이 눈을 희번덕댄다.

여기에 있을 텐데! 장문사형이 알뜰살뜰 모아 놓은 비자금이! 영롱하게 빛나는 황금이나! 휘황찬란하게 빛나는 도자기 같은 그런 재물들이……!

"있어야 하는데."

청명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고개를 갸웃한다.

뭐지? 왜 안 보이지?

청명이 눈을 크게 뜨고 비동 안을 훑고 또 훑었다. 하지만 아무리 눈을 씻고 찾아봐도 재물은커녕 반짝이는 것 하나 보이지 않는다.

이럴 리가 없는데?

"아, 아니."

장문사형이 아무리 검소한 사람이었다고는 해도, 장문인인 이상 돈이 들어갈 데가 많았을 거 아닌가!

화산의 위기를 대처한다거나 혹시 모를 상황에 쓰기 위해서 어느 정도의 재물을 꿍쳐 놓는 건 상식일 텐데?

"근데 왜 돈이 없어!"

거대한 서글픔이 밀려온다.

하, 지독한 양반. 비자금도 없었나.

청명이 얼굴을 벅벅 문질렀다.

장문인이 숨겨 놓은 비자금이 있었다면, 여러 좋은 곳에 쓸 수 있었을 텐데.

화산의 부흥을 위해 기루를 간다거나, 기루를 간다거나, 기루를…….

"아, 아니! 아니지! 나는 오직 순수하게 화산의 부흥을 위하여!"

어디선가 누군가 혀를 차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에잉."

미련을 버린 청명이 고개를 돌렸다. 사실 재물 같은 것보다 더 중요한 게 있다.

"이건가!"

비동의 한쪽 벽면에 마련된 책장에 차곡차곡 진열되어 있는 서책들.

청명이 마른침을 삼키고는 서가로 다가갔다.

"이게 맞아야 하는데."

중간에 보이는 서책을 뽑아 들고 안의 내용을 훑는다. 한 자 한 자 읽어 나가던 청명의 얼굴에 점점 미소가 피어났다.

"그렇지!"

없을 리가 없지!

예상대로, 첫 번째 서가에 진열된 서책들은 장문인이 차곡차곡 정리해 둔 화산의 장부였다. 본디 재경각에 있어야 하는 것들이지만 장문인만이 알 수 있는 문건들을 정리하기 위해, 그리고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하여 사본을 만들어 모아 둔 모양이었다.

청명 대의 장부들뿐만 아니라 그전 대의 장부들까지 있었다. 이것만 있다면 저 썩을 놈들의 뒤통수를 후려갈겨 줄 수 있다.

"이 새끼들 다 죽었어!"

이것만으로도 비동을 여느라 개고생을 한 가치가 있다.

그리고 두 번째 서가에는…….

"오호라!"

비급이다!

청명은 자신도 모르게 소리를 지를 뻔했다.

실전된 화산의 비급들이 이곳에 있…….

"어?"

청명이 고개를 갸웃한다.

"이건 실전된 애들이 아닌데?"

청명이 미간이 좁아졌다. 비급은 맞지만 여기에 있는 것들은 주로 익히던 무학과는 조금 달랐다. 화산에서는 이제 거의 사장된 무학의 비급이 차곡차곡 모여 있다.

"음."

청명이 볼을 긁었다.

"참 미련 많은 양반 같으니."

더는 후대에 전수하지 않기로 했지만, 모두가 화산의 무학인 것은 틀림없다. 장문인은 그런 무학을 완전히 폐기하고 없애는 것이 껄끄러웠던 모양이다.

혹시나 무학을 잃은 것이 화산의 미래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칠까 싶어, 그런 무학들을 이리 모아 둔 것이었다.

첫 번째 서고가 화산에 대한 장문인의 의무를 증명한다면 이 두 번째 서고는 화산에 대한 장문인의 우려와 애정을 담고 있다.

"……장문사형."

눈시울이 시큰해진 청명은 코를 쓱 훑었다.

"걱정 마쇼. 내가 반드시 화산을 원래대로 되돌려 놓을 테니까."

아니, 과거 그 이상으로 융성하게 만들 테니까.

청명이 입맛을 다시고 몸을 돌렸다.

비급은 없지만 괜찮다. 어차피 중요한 무학의 구결은 모두 청명의 머릿속에 있다. 글로 옮겨 적는 것이 귀찮을 뿐이지, 굳이 비급이 있어야 하는 건 아니다. 만들어 내면 그만이니까.

그리고 마지막으로…….

세 번째 서고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텅 빈 서고에 단 하나의 둘둘 말린 두루마리가 있을 뿐이다.

"이건 뭐지?"

청명은 망설임 없이 손을 뻗어 두루마리를 펼쳐 들었다. 그리고 한달음에 읽기 시작했다.

// 수정

사각형>

장문인 친전.

누군가 이 글을 읽고 있다면 다음 대의 장문인이 결정되었다는 뜻일 것이다. 때로는 백마디의 말보다 한 줄의 글귀가 더 많은 것을 전해 주기도 하는 법이기에 굳이 글로 나의 뜻을 남긴다.

화산의 장문인이라는 자리는 결코 화산을 이끌어 가는 자리가 아니다.

후인도 장문인이 된 이라면 이미 알고 있겠지만, 화산을 이끌어 가는 이들은 화산의 제자들이며, 화산에서 자라나고 있는 어린아이들이다. 장문인은 그저 그들이 제 뜻을 펼칠 수 있도록 지켜 주고, 밀어주는 역할로 족하다.

화산의 장문인이 되었으니 화산을 이끌어야 한다는 조바심은 버리길 바란다. 화산은 그저 화산일 뿐이다. 누구도 이끌 수 없고, 누구도 휘두를 수 없다.

후인이여.

현실의 어려움과 어깨를 짓누르는 무거운 짐에 지칠 때면 기억하라.

화산의 정기는 쇠하지 않는다.

화산은 그저 화산이다. 그 기세가 쇠락하든, 천하에 융성하든 화산은 그저 화산일 뿐이다. 장문인으로서 후인이 지켜 나가야 할 것은 화산의 얼과 그 정기다.

선인들이 지켜온 화산의 의지가 후대에도 이어지도록. 그리고 만세토록 변하지 않도록 후인을 키우고 우리의 뜻을 이어 다오.

선인으로서 그리고 전대의 장문인으로서 그대에게 무거운 짐을 남긴다.

대화산파 이십일 대 장문인 청문.

사각형>

"……."

청명은 가만히 두루마리에 써진 글을 바라보았다.

알고 있다.

이건 장문사형이 청명에게 남긴 글은 아니다. 하지만 공교롭다. 지금 이 글을 읽어야 할 사람은 다른 누구도 아닌 청명이니까.

"참……. 잔소리가 많은 양반이라니까."

청명이 한숨을 쉬고는 두루마리를 품에 넣었다.

다른 것들이야 화산에 돌려주어야겠지만, 이 두루마리만큼은 장문인에게 양보할 수 없다.

"자, 그럼……."

청명이 피식 웃고는 몸을 돌렸다.

"생각보다 얻은 건 없지만 이 정도면 괜찮겠지."

일단은 장부를 얻었다는 게 중요하다. 저 장부만 있으면 화산의 사업체들을 모조리 되찾을 수 있다. 그럼 지금 화산을 옥죄고 있는 빚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이 정도에서…….

밖으로 나가려던 청명이 발걸음을 멈췄다.

'잠깐만.'

뭔가 조금 이상하다.

'뭐가 이상하지?'

정확하게 뭐가 이상하다고 딱 잡아 지적할 수는 없는데, 뭔지 모를 찝찝함이 가시지를 않는다.

왜 이런 기분이 드는 거지?

"잠깐."

세 번째 서고?

청명의 고개가 획 돌아갔다.

장문사형.

그러니까 화산의 이십일 대 장문인이었던 청문은 살짝 결벽증이 있는 사람이다. 그렇기에 청문의 방은 언제나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그냥 청결한 사람 수준이 아니다. 모든 가구와 침구는 각을 맞춰 정리했고, 심지어는 좌우의 대칭을 맞추지 않으면 스스로 견디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한쪽에는 서책을 꽉꽉 채운 책장을 두 개나 세우고 반대쪽에는 빈 책장에 두루마리 하나만 덜렁 둔다고?

"아니지, 아니지. 그럴 리가 없지."

내가 장문사형을 겪어 봐서 아는데! 그런 거는 우리에게는 있을 수가 없어!

청명이 득달같이 빈 서고에 달려들었다.

'뭔가가 있다!'

반드시 있다!

저 어색하기 짝이 없는 빈 책장이 자꾸만 거슬린다. 굳이 저 편지 하나를 전하기 위해서 책장을 세워 뒀다? 청명이 아는 장문사형은 절대 그럴 사람이 아니다.

이곳에 들어온 이가 청명이 아니라 후대의 장문인이었다면 어색하게 생각하지 않았겠지! 하지만 지금 이곳에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청명이다.

청명은 책장을 붙잡았다. 그리고 주저없이 옆으로 들어 옮겼다.

'밖으로는 장치가 있을 수 없어.'

그러니 책장 뒤에는 뭐가 있을 리 없다. 저쪽은 만년한철로 뒤덮였으니까. 하지만 아래라면 어떨까?

있겠지. 물론 한철로 바닥이 덮여 있겠지. 하지만?

책장을 옮긴 청명이 바닥에 손을 댔다. 그리고 이내 진기를 도인하여 끌어당기기 시작한다.

'내가 아는 장문사형이라면 여기다!'

어색한 곳이 있다면 그곳이 함정이다.

우우우웅!

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힘이 모자란가 싶어, 뭐가 빠져라 힘을 주어 당겼는데도 딱히 변화가 없다.

'아닌가?'

잘못 짚었나 싶어 머쓱하게 포기하려는 그 순간이었다.

들썩.

"……!"

있다!

"으라차차차차차차!"

청명이 젖먹던 힘까지 끌어내어 바닥을 끌어당겼다.

덜컹!

이윽고 뭔가 쑥 빠지는 느낌과 함께 청명은 균형을 잃고 바닥을 나뒹굴었다.

"아야야야."

뒷머리를 몇 번 부딪힌 바람에 눈앞에 별이 다 번쩍거렸다.

'큰 소리는 안 났겠지?'

본능적으로 입구 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하지만 장문인이 알아챈 기색은 보이지 않는다. 처소로 이어져 있다고는 하지만 거리가 있고 방음이 되어 있을 테니, 쉽사리 알아채지는 못할 것이다.

그보다!

청명이 벌떡 일어나 앞으로 달려갔다.

분명 뭔가 열렸다.

다시 그 자리로 뛰어간 청명이 바닥에 뻥 뚫린 구멍을 보며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럼 그렇지!"

장문사형이 어떤 사람인데!

"진짜 철두철미한 양반이라니까."

혹시나 천에 하나, 만에 하나 장문인이 아닌 사람이 이 비동을 열고 들어올 상황을 대비해 이중으로 바닥을 만들어 둔 것이다.

고생고생해 이곳까지 들어온 이들이라면 보통 비동 안에 또 다른 비동이 숨겨져 있을 거라고는 절대 상상하지 못할 테니까. 청명조차도 장문사형이 어떤 사람인지 몰랐다면 모르고 그냥 나가 버렸을 것이다.

보라.

저 입구에서 빛이 뿜어져 나오고 있다!

빛이!

마치 청명에게 광명을 주겠다는 듯 은은한 광채가 줄줄 쏟아져 나온다.

청명이 주저 없이 바닥에 드러난 구멍으로 몸을 밀어 넣었다. 아직 작은 아이의 몸임에도 꽉 낄 만큼 작은 입구. 그 입구를 통과해 내려가자 허리를 펴기도 힘들 정도로 낮은 공간이 나타났다.

그곳에는…….

청명이 손을 뻗었다. 그러고는 힘들여 연 뚜껑을 조심스레 덮었다.

"후욱. 후욱!"

이제는 소리가 새어 나가지 않겠지?

그러니…….

청명이 눈을 크게 떴다. 호흡이 가빠지고 심장이 두방망이질한다. 피가 얼굴로 몰려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다.

하지만 아무려면 어떤가?

"으헤헤헤헤헤!"

좋아 죽겠는데!

그의 눈앞에 행복이 있다.

한쪽에 가지런히, 소담스레 쌓여 있는 금괴들.

그리고 다른 쪽에 각을 맞추어 정리된 각종 보검들.

그리고…….

"이, 이거 묘안석인가?"

정체를 알 수 없는 보석들과 비급들까지!

"으헤헤헤헤헤헤헤!"

자꾸만 웃음이 터져 나온다. 자제하려고 해도 바보 같은 웃음이 걷잡을 수 없이 흘러나왔다.

"으헤헤헤헤헤헤헤헤헤!"

그래. 웃자! 웃어!

"나는 이제 부자다아아아아아아아아아!"

화산의 이십일 대 장문인 청문이 막대한 돈을 들여서라도 반드시 피하고 싶었던 상황이 결국에는 벌어지고 말았다.

가장 들어가서는 안 되는 이에게 화산의 운명이 넘어가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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