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 종남에서 오셨습니까? (3)
"왜 이렇게 늦지?"
조걸이 초조하게 밖을 바라보았다.
저 멀리 동이 트고 있는데 아직 청명이 돌아오지 않았다. 이대로 아침까지 청명이 돌아오지 않으면 사문의 어른들도 그가 자리를 비웠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럼 난리가 난다.
문도가 허락 없이 화산을 벗어났다는 것만으로도 중죄다. 그런데 심지어 뒤늦게 화산으로 돌아온 청명이 입고 있는 검은 야행복을 들키기라도 하면?
'지옥이다.'
절대 그 꼴만은 보고 싶지 않았다.
"침착해라."
"하지만 사형."
윤종이 고개를 젓는다.
"그리 멍청한 놈은 아니잖느냐. 늦기 전에 돌아올 것이다. 뭔 사고라도 나지 않은 이상은."
그리고 아무리 생각을 해 봐도 그 괴물 같은 놈에게 무슨 일이 벌어질 것 같지는 않았다. 기껏 해 봐야 조금 늦는 정도겠지.
"그래도 사람 일은 모르는 것 아닙니까?"
"그렇지."
사람이라면 말이다.
조걸이 고개를 창밖으로 쭉 빼는 순간 문이 벌컥 열렸다.
"쯧."
조걸과 윤종의 고개가 획 돌아갔다.
"사제!"
청명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복면을 한 손에 쥐고 들어온 청명이 문을 닫자마자 야행복을 훌렁훌렁 벗어젖힌다. 그러더니 도복으로 갈아입기 시작했다.
"별일 없었지?"
"우리가 물어볼 말이다. 별일은 없었어?"
"별일은 무슨."
청명이 피식 웃었다.
"대접 잘 받고 노잣돈까지 받아 왔지."
"누, 누구한테?"
"이름이 뭐더라? 유……. 하여튼 있어. 포목점 주인."
"엥?"
조걸과 윤종이 눈을 동그랗게 뜬다. 그들의 반응을 보면서 조금 전 상황을 떠올린 청명은 피식 웃었다.
'웃기지도 않네. 진짜.'
청명이 화산을 정리하기 위해서 종남에서 나온 이라고 지레짐작해 버린 유종산은 굳이 청명이 필요로 하지 않는 정보까지 모두 술술 풀어놓았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이름 석 자를 청명에게 각인시키기 위해 무던히도 노력했다.
'거참.'
일이 쉽게 풀리니 좋기는 하지만, 한편으로는 씁쓸함을 금할 수가 없었다.
유종산의 머릿속에 존재하는 명문대파의 목록에서는 명백히 화산이 빠져 있다. 심지어 청명이 펼치는 검결을 눈으로 보았음에도 화산을 떠올리지 못했다.
아무리 매화검법이 실전되어서 이제는 화산의 상징이 되지는 못한다고는 하나, 화음에서 평생을 살아온 유종산이라면 화산이 과거에 매화검법을 장기로 삼았다는 것 정도는 알아야 할 것 아닌가?
화산의 지금 전력을 감안한다면 어린 나이에 그만한 능력을 갖춘 이가 있을 리 없다는 생각을 했을지도 모르지만, 씁쓸함이 가시는 건 아니었다.
'뭐 씁쓸한 건 씁쓸한 거고, 덕분에 편해지기는 했지.'
웬만큼 정체를 노출할 각오를 하고 시작한 일이건만, 되레 완전히 감춰졌다면 좋은 일이 아닌가.
"어떻게 됐어?"
"……쯧."
조걸의 물음에 청명이 손을 내저었다.
"애들이 알아서 뭘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아서라."
"……자기도 애면서."
"됐고. 집합이나 시켜. 훈련해야 돼."
"오늘도?"
청명이 눈을 부라렸다.
"잘 들어. 사형."
"응?"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바람이 부나. 오늘부터 수련은 단 하루도 빼먹지 않는다! 폭설이 내리고 한파가 불고! 화산이 무너져도 쉬는 날 따위는 없다!"
조걸이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각오한 바다!'
그가 청명을 돕고 따르기로 다짐한 것도 이런 이유가 아니었던가? 수련을 해 강해질 수 있다면 뭐든 할 수 있다. 휴식 없는 훈련은 오히려 그가 바라던 일이었다.
"바로 정렬시키지. 그럼 너는……."
"아. 나는 안 가."
"어?"
청명이 심드렁한 얼굴로 고개를 돌려 윤종을 바라보았다.
"어떻게 훈련하는 지는 알지?"
"……그렇지."
"똑같이 시켜."
"그럼 너는?"
"나는 따로 할 일이 있다."
청명이 손을 휘휘 내젓자 윤종이 한숨을 내쉬었다.
"알았다. 오늘은 우리끼리 수련하지. 하지만 이번 한 번뿐이다."
윤종이 조금 진지해진 얼굴을 했다.
"이 훈련은 네가 있기 때문에 가능한 거라는 사실을 잊지 마라. 적당히 하다 끝낼 생각이 아니라면 네가 나와 줘야 한다."
"알아."
백매관의 삼대제자들이 군소리 없이 고된 훈련을 하는 이유는 청명이 그 앞에서 도끼눈을 뜨고 있기 때문이다. 윤종이 아무리 대사형이라고는 하나 청명을 대신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그럼."
조걸과 윤종이 방을 나가자 청명이 침상에 벌렁 드러누웠다.
"자 이제 어떻게 한다?"
머리가 아프다.
그놈의 명분.
눈치 보지 않고 쓸어버릴 수 있으면 어려운 일이 아니겠지만, 화산이라는 간판을 달고 있는 이상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청명이 저지르는 일이 청명의 악명만을 쌓는다면 망설일 이유가 없다. 하지만 지금은 그게 불가능하다. 그 누구도 청명이 혼자 일을 벌였다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청명의 나이에 그런 일을 혼자 벌인다는 건 상식적으로 불가능하니까.
다들 화산이 청명을 내세워 일을 벌이고, 어린아이의 뒤에 숨는다고 손가락질을 할 것이다.
그건 청명이 원하는 바가 아니었다. 어떻게든 명분을 찾아야 한다.
"명분. 명분이라……. 끄으으응."
청명이 자신의 머리를 쥐어뜯었다.
"이게 말이나 되냐고! 빌어먹을!"
애초에 저 모든 사업체들은 화산의 것이다. 그런데 화산의 사업체를 꿀꺽한 놈들에게 돈을 갚아야 하다니! 속이 터지고 천불이 난다!
저 사업체들이 본디 화산의 것이고, 저놈들이 화산의 윗대가 돌아오지 못한 틈을 타 장부를 조작하여 사업체를 삼켰다는 것만 증명할 수 있으면 된다. 그렇게 되기만 하면, 그깟 십만 냥? 갚아 주면 그만이다.
아니, 갚을 필요도 없다. 원래 그 돈이 화산의 것이니까. 주인이 제 돈을 가져가 쓰는데 이자는 무슨 놈의 얼어 죽을 이자란 말인가.
그러니까 어떻게든 저 사업체들이 원래 화산의 것이라는 사실만 증명하면 된다. 그러면 다 해결이 되는데…….
"그게 됐으면 이러고 있지도 않겠지."
장부가 있었다면 화산도 손 놓고 당하고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가 있을 때만 해도 화산에 문하에 드는 아이들은 똘똘하기 짝이 없는 녀석들이었으니까.
증거만 있었다면 되찾지 못할 이유가 없다.
상황을 보자면 마교가 쳐들어왔을 때, 장부고 뭐고 다 날아갔다는 건데…….
"이것도 나 때문이냐?"
위가 아프다. 위가.
청명이 침상 위를 데굴데굴 굴렀다.
"아니! 장문사형 그런 중요한 것들은 좀 안전하게 보관해야 할 것 아니오! 안전하게!"
거기 걸린 돈이 얼만데! 그걸 처소에다 대충…….
"어?"
청명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대충?
대애애애충?
'그럴 리가 있나?'
장문사형이 어떤 사람인데 그런 장부를 대충 보관한다는 말인가?
'기억해 보자.'
청명은 워낙 그런 데에 관심이 없었다. 문파를 굴리는데 돈이 필요하다는 것은 알지만, 진정한 무인, 그리고 진정한 도인이라면 신외지물에 연연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지금 화산에서 애들이 풀죽만 퍼먹고 있는 꼴을 보면 과거의 자신을 쫓아가 주둥아리를 부숴 놓고 싶은 심정이지만, 여하튼 그때의 청명은 그랬다.
그렇기에 장문사형은 청명에게 장부를 보여 주지 않았다. 장부를 정리하다가도 청명이 오면 슬그머니 밀어 놓기 일쑤였다.
"……밀어 놔?"
흐릿한 기억을 다시 살려 본다.
장문사형의 방에 있는 장부는 많아 봐야 세 권을 넘지 않았다. 화산을 운영하기 위해 써야 하는 장부는 못해도 수십 권은 될 것이다. 그렇다면 그 장부들은 다 어디에 보관했을까?
'다른 곳이 있다!'
장문인의 방에는 그런 것들을 보관할 것이 없었다.
대 화산파의 장문인이라고는 하지만, 그 역시 도인. 장문인의 방은 소탈하기 짝이 없었다. 장문인의 방에 있는 궤짝에 장부를 채우려고 하면 다른 것들은 넣지도 못하게 될 것이다.
게다가 몇 번 그 궤짝을 여는 모습을 보았지만, 그 안에 장부 같은 것들은 없었다. 그렇다면 그 장부는 어디에 있을까?
"그럼 그게 사실이었나?"
예전에 화산에는 장문인만 들어갈 수 있는 비밀 창고가 있다는 말을 들은 적 있었다. 뜬소문이나 다름없었지만, 꽤나 유명한 이야기였다.
당시의 청명이라면 진위를 알아낼 수 있었겠지만, 딱히 별 관심이 없었기에 확인해 보지 않았다.
'잠깐. 그러고 보면…….'
집히는 게 몇 가지가 있다.
화산이 섬서를 대표하는 명문이다 보니 때때로 기이한 것들이 들어오고는 했었다. 예를 들면 사람이 익혀서는 안 되는 마공서나 전대 고수들의 비급 같은 것들. 가끔은 전설적인 명검이나 보물들이 입수되기도 했다.
그럼 그것들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
재경각은 아니다. 재경각에 있었다면 청명이 보지 못했을 리가 없다.
그렇다고 팔아치운 것도 아니다. 풀리면 강호에 난리가 날 것들이 몇 가지 있었다. 장문사형이 그런 것들을 팔아 치웠다면 청명이 듣지 못했을 리가 없다.
그렇다면?
'있다!'
장부와 보물들을 모아 둔 창고가 있다.
그것도 이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창고를 들락거리기 위해 화산을 비울 수는 없었을 테니, 분명 화산 안에 그런 장소가 있을 것이다. 누구도 알 수 없는 그런 창고가.
하지만 그게 가능한가?
무공 고수가 모기떼처럼 득실거리는 화산에서 아무도 모르는 곳에 창고를 짓고 들키지 않는다는 게?
청명이 문을 박차고 나왔다.
그게 가능한 곳은 단 한 곳밖에는 없다.
일단 출입구는 분명 장문인의 처소 안에 있을 것이다. 처소 밖에 입구가 있다면 들키지 않는 것은 불가능하다.
장문인의 허락을 받지 않으면 누구도 들어갈 수 없는 곳. 화산에 그런 곳은 오로지 장문인의 처소뿐이다.
'장문인의 처소는 과거와 달라지지 않았다.'
그렇다는 건?
밖으로 뛰쳐나온 청명이 눈을 크게 떴다.
장문인의 처소가 있는 전각 뒤로 완만한 산등성이가 있다.
'창고를 지었다면 절대 눈에 띄지 않을 수가 없지.'
하지만 창고를 짓고도 다른 이들의 눈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이 하나 있다.
바로 땅속에 창고를 짓는 것이다.
처소 밑에 땅을 파고 창고를 지었다면 민감한 고수들에게 발각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통로를 만들어서 저 산 아래 창고를 지었다면?
"귀신이 아니고서야 아무도 모르겠지."
청명이 음산하게 웃었다.
'저기에 있다.'
생각해 보면 이상한 일이다.
보통 다른 문파들은 장문인이 거주하는 전각이 문파의 중심부에 있기 마련이었다. 그래야 모든 곳을 두루 살필 수 있으니까.
황제가 황궁의 구석에서 기거한다는 건 아무래도 이상하지 않은가?
하지만 화산 장문인의 처소는 화산 가장 깊숙한 곳에 있다. 그리고 그 뒤로는 아무것도 없다.
오로지 저것밖에는!
장문인의 처소 뒤로 보이는 작은 동산을 보며 청명이 씨익 웃었다.
"이거 팔자에도 없는 보물찾기를 하게 생겼는걸."
하늘 위에서 장문사형이 거품을 무는 게 느껴지는 것 같았다.
"이해하십쇼. 장문사형. 일단 화산을 살리고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내 될 수 있으면 손대지 않고 장문인에게 넘기겠습니다."
될 수 있으면. 될 수 있으면.
내가 챙길 건 챙기고 나서.
억울하면 다시 살아나시든가.
"낄낄낄낄."
청명이 득의양양하게 웃어 젖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