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 종남에서 오셨습니까? (2)
"……어케 왼 겅……미다."
"발음 똑바로 안 해?"
"……임…… 안이 터져서."
"흠."
야행인. 그러니까 청명이 다리를 꼰 채 생각에 빠졌다.
"그러니까."
"예."
"화산에 빌려준 돈이 십만 냥을 넘었다고?"
"……그렇습니다."
"십만 냥?"
"예."
"십만?"
"……."
"십마아아아안?"
유종산은 울고 싶었다.
'어쩌라고, 인마!'
불만이 있으면 대화를 통해 풀어야 사람이지. 다짜고짜 사람을 개 패듯 팬 것도 미칠 노릇인데, 왜 이런 식으로 사람을 괴롭히는가.
"야."
"예!"
"내가 당장에 네 속곳까지 벗겨서 내다 팔아도 십만 냥은커녕 만 냥도 안 나올 것 같은데, 너희가 화산에 십만 냥을 빌려줬다고?"
"아, 그게……."
청명이 문제로 삼는 게 뭔지를 확실하게 알아낸 유종산이 활짝 웃으면서 대답했다.
"고리(高利)라는 게 다 그런 법이지요. 이율을 높게 해서 돈을 빌려주면 원금을 갚지 않는 이상 이자는 계속 불어납니다. 헤헤. 이게 불어나고 또 불어나다 보면 나중에는 원금 따위야 아무것도 아닐 정도로 이자가 막대해집니다. 그때 꿀꺽 집어삼키면……."
따아악!
"끄으으윽!"
유종산이 머리를 잡고 바닥을 굴렀다.
"자랑이다, 인마."
"끄으응."
청명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하긴, 이놈을 탓해 봐야 의미가 없나?'
아무래도 화산의 빚이라는 것은 당대에 쌓인 것이 아닌 모양이다.
'그야 그렇겠지.'
지금에 와서 거금을 빌린다는 것은 딱히 의미가 없는 일이니까. 진짜 돈이 필요했을 시점은 화산이 무너지던 시기이다. 새어 나가는 모래를 틀어막을 바구니를 구하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하니까.
"그런데."
"예."
"너 화음포목점의 점주라고 했었나?"
"그렇습니다."
"화음포목점은 언제 산 거지?"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저 포목점은 대대로 저희 가문이 주인이었습니다."
"……주인이었다고?"
"예. 제가 알기로는 증조부께서 화음포목점을 만드셨다고 들었습니다."
청명이 피식 웃었다.
'그럴 리가 있나.'
마찬가지다. 화음포목점 역시 화산의 사업체 중 하나였다.
음?
화음현에 있는 잘나가는 사업체는 다 화산의 것이었냐고?
'당연하지.'
이상한 일도 아니다. 애초에 화음이라는 곳은 화산이 자리 잡기 전까지는 그저 밭때기 몇 개 있는 마을에 불과했으니까.
화산이 들어서고 방문객이 많아지면서 마을이 생겨났고, 그곳에 화산이 돈을 풀어 여러 사업체를 만들면서 커다란 현으로 발전했다.
화음에서 돈 좀 만진다는 사업체는 기본적으로 화산의 것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뭐? 증조부부터 화음포목점이 지들 거였다고?
이놈의 나이를 감안해 보면 증조부 정도 되면 아마 청명의 나이쯤 되거나 그보다 어렸을 것이다. 화음포목점에 아이들 무복을 떼러 가던 기억이 생생한데 주인은 얼어 죽을.
'구린내가 풀풀 나는군.'
어디 보자.
"몇 가지 대답이 필요한데."
"……얼마든지 물으십시오."
"그럼 화선다루(華仙茶樓)는 누가 운영하고 있지?"
"유 루주입니다."
"당연히 몇 대 조 전부터 그쪽 집안의 것이었겠지?"
"그리 알고 있습니다."
"오악상단이나 화음객사도 당연히 그럴 테고, 그렇지?"
"예. 다들 화음의 터줏대감들이죠."
청명이 피식 웃었다. 더는 물어보지 않아도 대충 알겠다.
그럼 화산의 윗대가 끊기고 망하는 틈을 타서 사업체를 운영하던 놈들이 그걸 모조리 꿀꺽했다 이거지?
"허 참."
참으려고 해도 자꾸 헛웃음이 나왔다.
화산이 사업체들을 직접 운영하지 않고 대리인에게 맡긴 이유는 두 가지다.
첫 번째는, 아무리 화산이 속가의 성향이 강한 문파라고 할지라도 결국 도가이기 때문이다. 도사들이 주루를 운영하고 포목점에서 비단을 파는 모습이 남들에게 좋게 보일 리가 없지 않은가.
그리고 또 한 가지는.
- 청명아. 화산이 바라는 것은 부를 독점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잘사는 것이다. 화음의 사람들이 화산에 속하는 것은 아닐지라도 이웃이 아니더냐? 같이 잘살고 같이 배가 부르다면 그보다 더 좋은 일이 어디 있겠느냐?
좋은 일은 얼어 죽을.
'이게 사람입니다. 장문사형.'
사람은 은혜를 갚을 줄 알아야 한다고 경전과 선인들이 수도 없이 강조하는 이유는 하나다.
사람이란 은혜를 갚지 않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아니, 갚지 않는 정도면 다행이지. 이득만 된다면 은인의 등에 언제라도 칼을 박을 수 있는 게 사람이다.
기껏 은혜를 베풀어서 먹고살 수 있게 해 줬더니, 은혜를 갚기는커녕 은인이 위기에 처한 틈을 타서 사업체를 들고 날랐다.
그럼 제 죄를 알고 은인자중하며 살 것이지. 그 사업체를 바탕으로 화산에 고리대를 놓아?
"에라!"
뻐엉!
청명이 유종산을 힘껏 걷어차자 거대한 유종산의 몸이 공처럼 굴러간다.
"아이고오오!"
청명이 그 꼴을 보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놈을 때려서 뭣 하겠나.'
아마 유종산은 자신이 하는 일이 뭐가 잘못되었는지도 모를 것이다. 그는 화음포목점이 정말 자신의 가문이 일군 사업이라 생각하고 있으니까.
'이 일을 어떻게 해야 한다?'
청명은 고민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다.
성질 같아서는 이놈들을 당장 때려잡고 화음에서 쫓아내 버린 뒤 사업들을 다시 꿀꺽해 버리고 싶지만 이게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다.
화산은 명문 정파다.
지금이야 명문이라는 이름도 퇴색해 버렸지만, 어쨌거나 청명이 다시 부활시키고 싶은 화산의 모습은 명문 정파에서 그리 벗어나지 않는다.
사파라면 모를까 명문 정파라 불리는 이들이 정당한 사유도 없이 타인의 사업체를 힘으로 겁박하여 먹어 치운다?
그날로 화산의 이름은 땅에 떨어진다.
"꼬여도 더럽게 꼬였네."
뻔히 일이 어떻게 흘렀는지는 알겠는데 해결법이 난해하다. 힘으로 겁박하지 않고, 명분을 잃지 않으면서도 사업을 되찾을 방법을 강구해야 한다.
말이 쉽지! 말이!
"끄으으응."
뒷머리를 벅벅 긁은 청명이 유종산을 획 돌아보았다.
"야. 그러니까……."
그때였다.
"멈춰라!"
"어?"
등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청명이 고개를 돌렸다.
"어? 일어났어?"
조금 전에 날려 버렸던 유종산의 호위 중 하나가 어느새 정신을 차리고 그에게 도를 겨누고 있었다.
꽤나 강하게 쳤다고 생각했는데 벌써 의식을 되찾다니, 청명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강한 모양이다.
"이 빌어먹을 놈이!"
호위가 이를 갈았다.
"비겁하게 기습을 해!"
기습?
내가?
청명이 황당한 얼굴로 호위를 바라보았다.
"야. 니가 먼저 덤볐잖아."
"이 비겁한 놈!"
"어, 그래. 그럼 그냥 그런 걸로 하자."
저런 놈과 드잡이하고 싶지 않다. 그냥 그렇다고 치자.
"누구냐?"
"응?"
"그 실력을 보아하니 무명소졸은 아닌 것 같은데 정체를 밝혀라."
황당함이 좀 더 커졌다.
내가 정체를 밝힐 것 같으면 복면을 쓰고 왔겠냐?
"정체는 알아서 뭐 하게?"
"내 검에 죽은 놈이 누군지는 알아야지."
"……너 조금 전에 나한테 맞고 기절했거든?"
그럼 의식을 찾았어도 죽은 척하고 있어야지. 왜 일어나서 매를 벌지? 내가 환생하는 동안 애들이 다들 멍청해졌나?
"내가 방심만 하지 않았다면 너 따위 놈에게 당할 사람이 아니다. 잠깐 소일거리 삼아 호위를 맡았더니, 이런 굴욕을 당하는군. 내가 누군지 아느냐?"
"……."
"이 어른신이 참호도(斬虎刀) 정빈(鄭斌)이시다. 아무리 견문이 없다고 해도 이 몸의 이름 정도는 들어 봤겠지?"
"아, 미안합니다. 제가 생각보다 더 견문이 없어서."
"……."
참호도 정빈이 눈을 크게 떴다.
비록 지금이야 잠시 돈을 벌기 위해 호위 임무를 맡고 있기는 하지만 그의 이름은 섬서 지방에 널리 퍼져 있다. 그런데 이 이름을 들어 보지 못했다고?
"건방진 놈."
정빈이 도를 움켜잡고 청명을 겨눈다.
"죽기 전에 그 이름을 말할 기회를 주지."
"하……."
청명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세상에 또라이들이 왜 이리 많아졌나.
"야, 그런데 그거 호위가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 아무리 봐도 네가 호위해야 할 사람과 내가 더 가깝다만?"
"호위 따위는 이제 아무래도 좋다."
아, 네. 죄송합니다.
화끈하신 분이셨네요.
"각오해라!"
참호도 정빈이 도를 휘두르며 청명을 향해 돌진해 왔다. 청명이 그 모습을 보며 혀를 찼다.
그의 내력은 명백히 청명보다 강하다. 그리고 힘도, 속도도 청명은 비교도 안 될 수준이다. 일반적인 기준으로 본다면 정빈은 청명과 비교하는 것조차 무례일 정도로 강자다.
그럼 청명이 정빈보다 약한가?
천만에!
내공, 힘, 속도.
그런 것은 강함의 척도가 아니다. 평범한 이들에게는 척도가 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청명에게는 적용되지 않는다.
그에게는 평생 동안 검을 휘둘러 온 경험과 매화검존으로의 기억이 고스란히 남아 있지 않은가?
"읏차."
청명의 검이 느긋하게 휘둘러진다. 강맹하게 날아드는 정빈의 도에 실린 위력에 비하면 파리도 잡기 힘들어 보이는 힘없는 휘두름이다.
착!
하지만 그 힘없는 검이 강맹하게 날아드는 정빈의 도에 찰싹 달라붙는다.
"엇?"
그 순간 정빈이 두 눈을 부릅떴다.
청명의 느릿한 검이 도의 도면에 달라붙는 순간 갑자기 그의 팔을 통해 어마어마한 역도가 전해진다.
"아아악!"
손아귀가 터져 나가며 정빈의 도가 하늘로 치솟았다.
"더 배우고 와라."
청명의 검이 현란하게 하늘을 수놓았다. 선명한 매화는 아니지만, 흐릿한 꽃망울이 허공에 피어난다.
털썩.
정빈의 몸이 썩은 나무처럼 바닥으로 쓰러졌다.
"쯧."
청명이 혀를 차며 검을 회수했다.
내가 힘이 없다면 적의 힘을 이용하면 된다.
자신의 힘 하나 감당하지 못하는 애송이는 백 명이 몰려온다고 해도 청명의 상대가 안 된다.
"주제를 알……."
그 순간이었다.
"여, 역시!"
"엥?"
고개를 돌려 보니 유종산이 매우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차차!'
청명은 그 순간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다.
어쨌거나 유종산도 화음에서 먹고사는 인간. 청명이 그려 낸 어설픈 꽃망울만으로도 그의 출신을 짐작할 수 있을지 모른다. 물론 생각이 있다면야 벌써 어느 정도 짐작했겠지만, 확연한 증거를 주는 것과는 또 다르다.
"역시나 명문에서 나오신 분이셨군요. 예상은 했습니다만."
복면 속 청명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슥삭 해 버려?'
아니면 절대 입을 열지 못하게 확실하게…….
"그 깔끔하고도 화려한 검격! 드높은 무공 수위! 그리고 무엇보다 은은하게 느껴지는 선기(仙氣)!"
뭐? 니가 선기를 느껴?
그럼 안 되는데?
청명이 일순 대처할 방법을 찾지 못하고 머뭇거리는 순간 유종산이 확신을 담아 외쳤다.
"아직 어린 나이임에도 그런 능력을 갖춘 이를 키워 낼 곳은 근방에 단 하나밖에 없지요! 바로!"
"아, 아니……."
"대종남파!"
"……."
청명이 멍한 눈으로 유종산을 바라보았다.
종남? 여기서 종남이 왜…….
어?
"종남에서 오셨습니까?"
"……어?"
생각은 짧았고, 말은 빨랐다.
"그, 그렇다!"
"역시!"
유종산이 그 자리에 넙죽 엎드린다.
"하문하십시오. 뭐든 대답해 드리겠습니다."
"……고맙네."
아주 고마워.
허허.
허허허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