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화산이 박살이 난 게 나 때문이라고? (2)
"그 아이가 말이더냐?"
"그렇습니다. 사형."
운암의 얼굴이 기괴하게 일그러졌다. 운검은 예상하지 못한 운암의 반응에 고개를 갸웃했다.
"모르셨습니까?"
"내가 알 리가 있느냐?"
"……허어. 저는 장문인께서 일부러 그 아이를 들인 줄 알았습니다. 그러지 않고서야."
"기재를 찾아올 만한 여력이 있는 상황이 아니잖느냐. 제 발로 걸어 들어온 아이다."
"장문인께서 새로 입문을 받았다고 하시기에……."
운검이 말끝을 흐렸다.
제자를 더 이상 받지 않겠다고 한 장문인이 받아 준 아이다. 그러니 응당 뭔가 사연이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래서 그만한 풍파가 일어났음에도 그러려니 한 것 아닌가?
그런데 운암은 정말로 모르는 눈치다.
"장문인께서만 아시는 뭔가가 있으신 건……?"
"아니다. 정말 제 발로 찾아온 아이다."
"……기사(奇事)군요."
운암이 고소를 머금었다.
'생각할수록 기괴하구나.'
갑자기 이 먼 곳까지 찾아온 아이가 뜬금없이 화산의 제자가 되고 싶다고 하더니 하루도 지나지 않아서 뭔가를 하고 있다.
'지나친 생각이겠지.'
혹시 타 문파에서 화산을 망치기 위해서 보낸 간자가 아닌가 싶었지만, 그건 너무 과한 생각이었다.
첫째로 화산은 이제 더 이상 누군가가 굳이 망치려 들 만한 가치가 없는 문파였고, 둘째로 설사 그런 의도가 있다 하더라도 저 작은 아이가 그만한 능력을 갖추는 건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그런 능력이 있는 아이라면 간자로 보내 썩게 만드는 것보다는 심혈을 다해 키우는 게 이득이기도 하고.
"하면, 지금이라도 아이를 말려 보는 게 좋지 않을는지요."
"그냥 두자꾸나."
"하나, 사형."
"네가 굳이 막지 않았던 것은 그 아이에게 나름 기대하는 것이 있기 때문이겠지?"
운검은 대답 대신 고개를 살짝 숙였다.
"네 노고는 잘 알고 있다. 제자들을 이끌어 주는 것 선대로서의 당연한 임무이기도 하지만 그 임무를 너만 너무 과도하게 지고 있다는 것 역시 알고 있단다."
"그렇지 않습니다. 사형. 저는 그저……."
"괜찮다."
운암이 부드럽게 웃었다.
"다들 힘든 게지. 그 아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네가 판단하기에 너와 화산에 도움이 된다면 굳이 막을 필요는 없다."
운검이 고개를 들고 운암을 바라보았다.
"아직 정확하게는 모르겠습니다. 그 아이가……."
"운검아."
"예, 사형."
"그 아이도 이제는 화산의 제자다."
운검의 눈이 살짝 흔들렸다.
"먼저 품은 아이에게 조금 더 정이 가고 애틋한 것이야 왜 모르겠느냐? 하지만 나중에 온 아이라고 해도 화산에 적을 두기로 한 이상 다 같이 돌봐야 할 화산의 아이다."
"……제가 어리석었습니다."
운검이 고개를 살짝 숙였다.
"과하다 싶으면 네가 막거라. 백매관에 관한 것은 나나 장문인보다 네가 더 잘 알지 않느냐?"
"예. 사형."
운검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가 보겠습니다."
"그러거라."
운검이 자리를 뜨자 운암이 가만히 찻잔에 차를 따랐다.
'기이한 아이로군.'
확실히 범상치 않은 녀석이 들어왔다.
자신의 존재감을 하루도 숨기지 못하는 녀석이니, 반드시 급격한 변화를 몰고 올 것이다. 그 변화가 화산의 복이 될지 화가 될지, 지금의 운암으로서는 알 수 없었다.
다만 한 가지.
'변화는 필요하다.'
지금 화산에는 새로운 바람이 필요했다. 바람 한 점 없는 망망대해에 떠 있어 봐야 말라 죽거나, 굶어 죽을 뿐이다.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 해도 일단은 항해를 해야 한다.
설사 그 항해의 끝에 도달할 곳이 무인도라 할지라도 망망대해에서 말라 죽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다.
운암이 천천히 차를 입가로 가져갔다.
그는 청명의 존재가 화산을 움직여 줄 바람이 되기를 바랐다.
물론 불어오는 바람이 태풍이라는 걸 알고서도 그가 이리 태연자약할지는 두고 봐야 알 것이다.
* * *
"죽을 것 같다."
"……난 벌써 죽었어."
여기저기서 앓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물론 지금 죽는소리를 해 대는 이들은 화산의 삼대제자들이었다.
'뭐지, 이건 신종 고문인가?'
근력을 키우는 운동이라는 건 알고 있다. 그리고 화산이라고 해서 근력 운동을 소홀히 해 왔던 것도 아니다. 모든 중원 무학의 근간이라고 할 수 있는 소림에서조차 근력 운동은 소홀히 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것도 정도가 있지.'
윤종이 고개를 내려 식탁을 바라보았다.
반찬으로 채소볶음이 나왔는데 손이 너무 떨려 제대로 집어 먹지 못하다 보니 온 식탁에 채소볶음이 널려 있었다.
"끄응……. 밥도 제대로 못 먹겠네."
"오후에는 검술 훈련도 해야 하는데, 검 놓치는 거 아닙니까? 진검이라 휘두르다 놓치면 난리 날 텐데, 누구 하나 등에 구멍 뚫리는 거 아닙니까?"
"……다행히 그만한 힘으로 휘두르지도 못할 것 같네."
"그게 다행입니까?"
윤종이 한숨을 쉬었다.
'앞에서 말해라. 앞에서.'
불만이 있으면 당당히 가서 따지면 될 일 아닌가? 뒤에서 말한들 뭐가 달라지겠는가?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다."
"대사형!"
여기저기서 볼멘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러나 윤종은 그저 묵묵히 채소볶음을 집었다.
운검까지 청명의 편을 들어 버린 판에 그가 무엇을 더 할 수 있겠는가?
"사형! 그래도 이럴 때 사형께서 말을 해 주지 않으시면……."
"대사형이라는 자리가 그런 것 아닙니까?"
윤종이 한숨을 쉬며 말을 하려는 찰나 누군가의 날카로운 음성이 들려왔다.
"거 쫑알쫑알 말 더럽게 많네."
식당을 채우고 있던 삼대제자들의 시선이 일제히 한곳으로 돌아간다.
"조걸?"
잠깐 정적이 흘렀다. 구석에서 조용히 밥을 먹고 있던 조걸이 자신에게 모인 시선을 확인하고는 날카로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대사형이 너희 심부름꾼이냐? 말할 사람 어디 숨어 있는 것도 아니고 할 말 있으면 가서 직접 하든가."
"……아니, 우리는……."
"직접 가서 따지지 못할 거면 조용히 하고 밥이나 먹어. 밥 안 먹어 두면 오후에 못 버틸 테니까."
조걸이 이렇게까지 말하니 아무도 입을 열지 못했다.
그런 조걸을 바라보는 윤종의 눈이 이채를 띠었다.
'이상하군.'
그가 아는 조걸이라면 지금 누구보다 큰 목소리로 청명에 대해 성토하고 있어야 한다. 애초에 삼대제자 중 가장 발언권이 높고 가장 강한 이가 아니던가?
그런 조걸이 은근히 청명의 편을 들어 버리자 다들 입을 열기가 어려워졌다.
탁.
젓가락을 내려놓은 조걸이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윤종에게 다가온다.
"대사형."
"음?"
"잠깐 뵐 수 있겠습니까?"
"……그러자꾸나."
윤종도 젓가락을 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식당을 빠져 나가는 두 사람을 보며 남은 제자들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가 뭔가 잘못 보고 있는지는 모르겠는데……."
인적이 없는 곳까지 나오자 윤종이 먼저 입을 열었다.
"꽤나 개운해 보이는구나?"
조걸이 손을 들어 자신의 얼굴을 주물렀다.
"그런 게 보입니까?"
"너는 표정을 잘 숨기지 못하지."
"처음 알았습니다."
조걸이 어색하게 웃었다.
"그렇게 구르고도 웃음이 나오더냐?"
"……사형."
"응?"
"사형은 화산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윤종이 입을 다물었다.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기에는 너무 진지한 질문이었다.
"어려운 질문이구나."
"저는 이러다가 본가로 돌아가 버리면 그만입니다. 하지만 사형께서는 화산에 뼈를 묻을 생각 아니십니까?"
"그렇지."
윤종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이미 도호를 받기로 되어 있는 사람이다. 다른 삼대제자들은 아직 선택을 하지 않았지만, 그만은 화산의 도호를 받고 진산제자가 되어 화산과 그 운명을 함께할 것이다.
"화산에 미래가 있다고 보십니까?"
"망령되구나. 함부로 입에 담을 말이 아니다."
"저는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
나무라야 할 말이다. 하지만 윤종은 차마 그러지 못했다. 그의 생각 역시 조걸과 별반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없다고 생각했다는 건 이제는 생각이 달라졌단 말이더냐?"
"……조금 그렇습니다."
"달라졌다?"
"강제로 하게 된 수련이지만, 이번 수련을 하면서 깨달았습니다. 저는 한 번도 이렇게까지 자신을 한계로 몰아붙이는 수련을 해 본 적이 없습니다."
그야 그렇겠지.
윤종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그도 이런 수련은 해 본 적이 없다. 항상 나름 노력한다고 생각했지만, 지금처럼 손발이 덜덜 떨릴 정도로 자신을 몰아붙여 본 적은 없었다.
"그런데 그놈은 저희가 하는 수련의 배는 넘는 양을 소화하면서도 지치지 않았습니다."
겨우 배가 아니겠지.
횟수만으로도 배다. 무게까지 포함한다면 수련의 강도는 훨씬 더 올라갈 것이다. 자신의 무게보다 더 무거운 모래주머니를 지고 수련을 하는 청명을 보며 윤종도 경악했으니까.
"강하니까 그럴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녀석의 나이는 결코 저보다 많지 않을 겁니다. 강하니까 그런 게 아니라 그래 왔기에 강한 게 아니겠습니까?"
"네 말이 옳다."
"사형. 저는 화산에서 제가 강해지는 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적당히 어디서 힘자랑할 수 있는 수준까지야 가능할지 몰라도 천하를 호령하는 고수가 될 수는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조걸."
"끝까지 들어 주십시오. 사형."
"……."
조걸이 마른침을 삼키고 말을 이었다.
"하지만 저놈을 보고 있으니 제가 잘못 생각하고 있었다는 걸 알았습니다. 막말로 지금 우리 나이 대에 저놈을 상대할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겠습니까?"
없겠지.
절대 없을 것이다.
아무리 윤종이 무학으로 삼대제자 중 최고가 아니라고는 하나 자신의 실력에는 나름 자신이 있었다. 구파일방의 제자들과 붙는다고 해도 크게 밀리지 않을 거라는 확신도 있다.
그런데 저 괴물 같은 놈은 그런 윤종을 손가락 하나로 뒤집어 버리고, 윤종보다 강한 조걸을 한 방에 날려 천장에 꽂아 버렸다.
저런 괴물이 또 있을 리가 있나?
"어느 무학을 익히는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어떻게 익히느냐다. 그 당연한 진리를 그저 귀에 듣기 좋은 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저놈을 보니 그게 사실이라는 걸 알겠습니다. 사형. 저는 최선을 다해 보고 싶어졌습니다."
"……나도 마찬가지다."
조걸이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 사형께서 아이들을 다독여 주십시오. 어쩌면 이건 우리 대가 크게 변할 수 있는 기회일지도 모릅니다. 조금 고깝고 아니꼬울지라도 지금은 저 녀석을 따라가야 합니다."
윤종이 가라앉은 눈으로 조걸을 바라보았다.
조걸은 실력도 좋지만, 상가의 자제라 그런지 흐름의 맥을 짚는 능력이 있었다. 상인이 된다면 반드시 거상이 될 자였다. 그런 이가 이렇게까지 이야기한다면…….
"해 보자꾸나."
"사형!"
"네 말이 옳다. 지금 이대로는 죽도 밥도 안 된다. 나는 화산에 뼈를 묻기로 한 사람이다. 화산에 도움이 될 수 있는 일이라면 뭐든 할 수 있다."
윤종의 단호한 말에 조걸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생각하니 웃기는구나. 고작 어제 들어온 막내 때문에……."
"보통 막내는 아니니까요."
"그렇긴 하지."
가볍게 마주 웃은 두 사람이 몸을 돌렸다. 할 이야기는 끝났다. 이제는 아이들을 얼마나 달랠 수 있느냐의 문제다.
"걸아."
"예. 사형."
"정말 우리가 강해질 수 있을까?"
"하나는 확실합니다."
"음?"
"강해지지 못하면 억울할 만큼 수련은 할 수 있다는 거죠."
"……거참 위로가 되는 말이구나."
두 사람이 말을 주고받으면서 다시 식당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그 순간까지도 둘은 자신들을 지켜보는 시선이 있다는 것을 알아채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