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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16화 (15/1,567)

16화. 화산이 박살이 난 게 나 때문이라고? (1)

"후우우욱!"

청명을 바라보는 운검의 눈이 멍했다.

'이렇게 보면 평범한 아이인데?'

하지만 이 아이는 절대 평범한 아이가 아니다.

'정말 괜찮은 건가?'

두꺼운 도복이 땀에 완전히 젖어 있다. 가만히 서 있는 것뿐인데도 소매를 따라 땀방울이 뚝뚝 떨어진다.

피가 몰려 붉게 상기된 얼굴은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고, 얼마나 진력이 빠졌는지 서 있는 다리가 후들거렸다. 심지어 입술까지도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

"아, 앉겠느냐?"

예의와 규범을 목숨처럼 여기는 운검이 자신도 모르게 청명에게 앉기를 권했다.

이건 어쩔 수가 없다.

비를 쫄딱 맞은 강아지를 보면 누구나 손을 내밀고 싶어지는 것과 같은 이치다. 단언컨대 지금 청명의 몰골은 비 맞은 강아지보다 훨씬 더 불쌍해 보인다.

"아, 괜찮습니다. 그보다 물 좀……."

"누가 가서 물을 떠 오너라! 당장!"

"예!"

슬금슬금 눈치를 보던 아이들 중 하나가 후다닥 물을 뜨러 달려간다.

"그래. 그……."

하지만 운검은 다시 입을 닫았다.

'뭘 물어야 하지?'

일단 부르기는 불렀는데, 어디부터 말을 꺼내야 할지 모르겠다. 이런 황당한 상황은 난생처음이니까.

"이게 대체 어찌 된 상황이냐?"

그러니 뻔한 것을 물을 수밖에 없었다.

운검의 질문을 받은 청명이 주변을 슬쩍 돌아보더니 태연하게 입을 연다.

"별일 아닙니다."

"……뭐라?"

"오늘부터 새벽 운동을 다들 같이 하기로 했는데, 첫날인 것을 미처 생각지 못하고 조금 과하게 운동을 한 모양입니다. 다들 의욕이 넘쳐나서 벌어진 일이겠지요."

의욕이 넘쳐나?

운검이 청명의 뒤쪽에 있는 아이들을 슬쩍 바라본다. 아이들이 입을 꾹 닫은 채 필사적으로 손을 내젓고 있었다.

하지만 청명이 고개를 슬쩍 뒤로 돌리자 내저어지던 아이들의 손이 잽싸게 내려간다.

'이것 봐라?'

황당하기 그지없는 일이다. 대체 어떻게 돌아가는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하나는 확실하다. 삼대제자들 전체가 이 아이 하나에게 한껏 쫄아 있었다.

운검은 눈치가 없는 사람이 아니다. 아이들만 상대한 지가 십 년이 다 되어 간다. 이제는 아이들 눈 굴리는 것만 보아도 상황이 어찌 흘러가는지 대부분 알아내는 경지에 올랐다.

아니, 그런 경지에 오르지 않더라도 이 광경을 보고 그 사실을 알아채지 못하는 게 더 이상하다.

'화산의 제자라는 놈들이…….'

신입 하나에게 겁을 먹어?

운검의 고개가 옆으로 살짝 꺾였다.

'아니, 아니지.'

생각해 보면 이 아이들의 실력은 결코 낮지 않다. 같은 나이대의 웬만한 무관의 아이들은 그 앞에서 고개도 들지 못할 것이다.

썩어도 준치라고 그래도 화산이니까.

그러니, 저 아이들이 한심한 것이 아니라 이 녀석이 이상한 것이다.

"새벽 운동이라 했느냐?"

"예. 그렇습니다."

"이놈."

운검이 단호하게 말했다.

"백매관에는 백매관 나름의 규율이 있는 법이다. 누가 마음대로 취침 시간을 줄이고 수련을 하라고 했더냐?"

살짝 노성을 섞어 보았음에도 청명의 얼굴에는 변화가 없었다. 여전히 태연한 신색을 유지하며 대수롭지 않다는 듯 입을 연다.

"그럼 안 하겠습니다."

"……어?"

"수련을 하면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안 된다고 하시니 하지 않겠습니다."

"……."

어, 이게 아닌데?

운검이 살짝 당황했다. 이건 그가 바라던 반응이 아니다.

"수, 수련을 하면 도움이 될 거라 생각했다고?"

"예."

"왜 그리 생각했느냐?"

청명의 눈에 황당함이 어린다.

"그럼 도움이 안 되나요?"

"……."

"……."

살짝 어색한 공기가 둘 사이를 스치고 지나갔다.

'끄응.'

내심 앓는 소리를 낸 운검이 입을 달싹거렸다. 그런 운검의 심정을 모두 알기라도 하는 듯 청명이 먼저 입을 열었다.

"무공은 사숙조님께서 가르쳐 주시니 그것으로 충분하겠지만, 제자들 나름으로도 노력할 방법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모든 무학은 본디 육체에서 나오는 법이니, 육체를 단련할 수 있다면 검에도 도움이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옳은 말이다.

지적할 곳 하나 없는 정론이었다.

"네 말은 옳다."

운검도 순순히 그 사실을 인정했다.

"하나. 강압에 의해 벌어진 수련이 옳다 말할 수 있겠느냐?"

"강압이요?"

청명이 뒤를 슬쩍 돌아보고는 피식 웃는다.

"에이, 사숙조님. 제가 뭐라고 사형들에게 강압을 하겠습니까. 제가 수련을 하겠다고 말하니 사형들도 함께하고 싶다고 따라 나온 것뿐입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뻔한 거짓말이었다.

하지만 이 거짓말을 추궁하기 위해서는 '네놈이 사형들을 겁박해서 데리고 나온 게 아니더냐'라는 말을 해야 한다.

그런데…….

'못 할 말이지.'

이건 다 같이 죽자는 소리다.

삼대제자들은 어제 새로 들어온 신입 하나 감당하지 못해 얻어맞고 끌려나온 등신들이 되어 버리고, 운검은 그 등신을 가르치는 상등신이 되어 버린다.

그리고 청명은 막내 주제에 사형들을 후려 패고 겁박한 악당이 되어 버리지를 않는가?

그 말을 해 버리면 모두가 망한다.

"그……."

운검이 할 말을 찾아 말하려던 찰나, 청명이 재빨리 입을 열었다.

"다른 수련에 영향을 주지만 않는다면 좋은 수련법이 될 수 있습니다. 적어도 한 달 정도면 성과가 나타날 것입니다."

'호오?'

입으로는 수련을 논하고 있지만, 숨어 있는 속뜻은 조금 달랐다.

한 달.

한 달 정도만 내버려 두라는 뜻이다. 그럼 확고히 성과를 낼 수 있다는 말이다.

'요놈 봐라?'

어린놈의 말 같지가 않다. 노회한 강호인이 말 속에 뜻을 숨기는 화법을 구사하고 있지 않은가?

회가 동한 운검이 넌지시 찔렀다.

"한 달이라. 그럴 수도 있겠구나. 하지만 수련 자체가 그리 간단해 보이지 않는데 아이들이 한 달이나 수련을 할 수 있겠느냐?"

"사형들의 의지는 제가 본받고 싶은 마음이 절로 들 정도로 높습니다. 고된 수련임에도 그 어느 분도 불만을 토로하시지 않으셨습니다."

한번 굴려 봤는데 입 터는 놈이 없었다. 입을 털지 못하게 만들어 놓았으니 걱정하지 말라는 소리다.

'아니, 어디서 이런 놈이 기어 들어왔지?'

운검이 황당함을 감추지 못하는 가운데, 청명이 몸을 빙글 돌리더니 삼대제자들을 보며 웃는다.

"그렇지 않습니까? 사형들?"

"……그, 그럼."

"열심히 할 수 있지. 열심히."

"……오늘도 열심히 했어."

청명이 다시 몸을 빙글 돌린다.

"사형들의 의지가 이리 높으니 어찌 수련의 결과가 좋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뒤에 애들 얼굴 썩는다, 인마.

기가 막혀 말도 안 나왔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운검의 머리는 빠르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청명의 말은 비록 하루가 지났지만, 그는 이미 삼대제자들을 완전히 장악했고, 그 장악력을 허튼 데 쓰지 않고 수련을 시키는 데 쓰겠다는 소리다.

그리고 혹여 그가 다른 마음을 품는지는, 한 달 정도 지켜보면 결판이 날 거라는 뜻이었다.

'거참.'

들으면 들을수록 황당하다. 갑자기 어디서 이런 괴물 같은 놈이 굴러 들어와 아이들을 제압했단 말인가?

하지만…….

'내 입장에서는 딱히 나쁜 이야기는 아니지.'

백매관주로서 그가 가지는 가장 큰 문제는 바로 수련 시간을 확보하는 것이 힘들다는 점이다.

화산은 언제나 인력이 부족하다.

원래라면 백매관도 그가 홀로 감당할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적어도 열 명 이상의 교관이 필요했다. 하지만 지금 그를 도와 백매관에 전념하는 이들은 셋에 불과하다.

그러다 보니 아이들의 뒤치다꺼리를 하는 데만 하루가 가 버리고 무인으로서 그의 성장은 정체된 상태였다. 만약 이 녀석이 아이들의 통제를 도맡아 줄 수만 있다면 그에게 큰 도움이 될 것이 자명했다.

"하나 더 묻겠다."

"예."

"네게도 쉬운 일은 아닐 텐데, 굳이 새벽부터 수련을 하는 이유가 무엇이더냐?"

청명이 고개를 갸웃한다.

"제자, 사숙조님의 말씀이 무슨 뜻인지 모르겠습니다."

"음?"

이 아이가 갑자기 이리 말귀를 못 알아들을 리는 없는데?

"화산에 입문했다는 것은 검을 익히겠다는 것이고, 검을 익힌단 것은 강해지겠다는 뜻이 아닙니까. 강해지기 위해서는 수련을 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검의 경지를 개척하고, 더 나아가서는 화산의 이름을 만방에 떨치는 것이 화산의 은혜를 받은 제자의 당연한 임무겠지요."

"그, 그렇지."

"물론 사숙조님께서 주시는 가르침만으로도 충분히 강해지겠지만, 노력이 더해진다면 그 속도를 높일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충분히 노력하기 위해서는 잠자는 시간도 아끼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그렇지."

수련의 과정에 딱히 무슨 이유가 더 필요하냐는 말이었다.

'더 이상 제자를 받지 않겠다고 하셨던 장문인께서 무슨 바람이 들어 새로 입문을 받았는가 했더니.'

이런 놈이라면 키워 볼 만하지 않겠는가?

아직 재능은 확인하지 못했지만, 이만큼 의욕이 있는 놈이라면 재능이 없더라도 충분히 성과를 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본인이 천하의 고수가 되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다른 아이들에게 좋은 영향을 끼치는 것만으로도 좋은 일이다.

"……수련이 많이 힘들어 보이던데?"

"첫날이라 그렇습니다."

"그래도 힘들어 보이던데."

"사람은 굴릴수록 단단해집니다."

운검의 입꼬리가 푸들푸들 떨렸다.

'이거 물건이다.'

운검의 지론과 딱 들어맞지 않는가! 이런 지론을 가진 녀석이라면 한동안은 밀어주어도 괜찮을 것 같다. 어차피 아이들 사이에 배분과 관계없는 서열이 존재하는 건 예전에도 마찬가지였다.

"사형들을 대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건?"

"예의입니다. 대사형의 말을 하늘같이 따르겠습니다."

윗놈들을 너무 괄시하지 않고, 대사형을 존중해 위계는 유지하겠다는 뜻이다. 대답 하나하나가 마음에 든다.

운검이 크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상황이 어찌 돌아가는지 파악하지 못한 아이들이 떨리는 눈으로 운검을 바라본다.

"크흐흠."

헛기침으로 무안함을 날려 버린 운검이 살짝 시선을 피하며 입을 열었다.

"너희가 새벽부터 '자발적으로' 훈련에 임하다니, 이 사숙조는 매우 감동했다."

"사, 사숙조!"

"관주님!"

당황과 경악이 섞인 고함소리가 들려왔지만 운검은 애써 그 목소리를 외면했다.

"앞으로도 꾸준히 훈련을 이어 간다면 반드시 좋은 성과를 낼 수 있을 것이다. 수련법은 이 아이가 잘 알고 있는 것 같으니, 최대한 노력하거라."

'망했다.'

'와, 이렇게 버리네.'

'시선 피하는 것 좀 봐.'

운검의 생각을 알아챈 제자들의 얼굴에 절망이 어렸다.

"그럼 늦지 않게 밥을 챙겨 먹고, 오전 수련에 나오도록 하거라. 그럼 나는 이만."

운검이 슬쩍 몸을 돌리려다가 멈춰 섰다.

"아 참!"

그럼 그렇지!

그래도 백매관준데 설마 사람을 버리…….

"수련에 방해될 테니 이제 아침 문안인사는 오지 않아도 좋다. 수련이 우선이지. 아암, 그렇고말고."

운검이 껄껄 웃으며 획하니 몸을 돌려 멀어진다.

제자들이 다급하게 자신도 모르게 손을 뻗었지만, 운검은 잡히지 않는 신기루처럼 허망하게 사라져 버렸다.

"……."

우득.

그 순간, 스산하게 목을 꺾는 소리가 울린다.

청명이다. 그는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리고 미소를 지었다.

분명 부드러운 미소건만 그의 이마에 돋아 있는 핏대가 그 미소의 의미마저 불분명하게 만든다.

"사숙조, 살려 주세요오?"

"……."

"거참 사형들도, 제가 죽인다는 게 아닌데. 식사 전에 잠깐 들어가시죠. 백매관 안에서 제가 긴히 할 이야기가 있습니다."

"……."

"어서."

"……네."

화산에서 꿈과 희망이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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