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천왕성 작전 (8) >
“아무리 들어도 이상하단 말이지.”
“무엇이 이상하다는 말씀이십니까?”
“이거.”
처칠은 비서에게 영어로 번역된 히틀러의 대국민연설문을 들어 보였다.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나? 오늘 히틀러가 한 연설 말이네.”
“음....”
비서는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는 듯 고개를 숙였다가 이내 처칠의 눈치를 살폈다.
“솔직하게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언제는 안 솔직했다는 뜻인가?”
“그게 아니란 거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뭐라고 말하든 간에 화 안 낼 테니 말해보게.”
처칠로부터 안전을 보장받은 비서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아무리 영국의 적이라지만, 흠잡을 구석이 없는 최고의 연설문이었습니다. 왜 독일인들이 히틀러에게 열광하는지 알 수 있을 정도로요.”
“그렇지? 내 생각도 그래. 말한 인간이 히틀러라는 것만 빼면, 100점 만점에 100점을 줘도 모자란 연설이야. 그런데....”
“?”
“내가 구상한 연설문이랑 너무 똑같아.”
“.....예?”
비서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이건 또 무슨 소리야? 본인이 구상한 연설문이랑 히틀러의 연설문이 똑같다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연설문이 똑같다니.”
“말 그대로일세! 어떻게 그놈 입에서 나온 건지 모르겠지만 내가 구상한 내용문이랑 너무 똑같다고! 놈이 내 연설문을 베꼈다는 증거는 없지만, 아무튼 그래.”
“.......”
갈수록 가관이었다. 히틀러의 연설이 뛰어나다고 솔직하게 인정하면 될 것을, 갑자기 자기가 구상한 내용과 똑같다고 주장하는 꼴이라니, 무슨 어린애도 아니고.
가장 큰 문제는 이 남자가 대영제국을 책임져야 하는 위치에 있는 총리라는 것이었다. 아, 머리야.....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자신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비서의 시선을 무시한 채 처칠은 자신만의 생각에 빠졌다.
히틀러, 그놈이 무슨 마법을 부린지 몰라도 내가 하려던 연설문을 놈이 말해버렸으니 다른 연설을 준비해야겠군.
일단 도입부부터 어떻게 하지? 도입부는 다르니까 그대로 써도 되려나? 아니면 처음부터 다시 쓸까? 고민되는군....
“각하, 모스크바로부터 연락이 왔습니다.”
“모스크바라면, 스탈린인가?”
새 연설문 작성에 빠진 처칠은 모스크바라는 말에 고개를 돌렸다.
“아닙니다, 각하. 스탈린 서기장이 아니라 몰로토프 외무장관이라고 합니다. 각하와 급히 통화해야 한다고 전해왔습니다.”
“몰로토프라면 이든 선에서 처리해야 하는 거 아닌가?”
처칠이 불쾌하다는 듯이 말했다. 몰로토프와 통화 못 할 이유도 없었지만, 아무리 그래도 총리인 자신과 통화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게 영 언짢았다.
외무장관이면 외무장관과 통화를 해야지, 빨갱이들은 위아래도 없다는 말인가?
“그런데 소련 측에서 꼭 총리와 통화를 해야 한다고 강력하게 요구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할까요?”
“끙..... 알겠네. 통화 정도는 해주지.”
“지금 연결하겠습니다.”
몰로토프와의 전화가 연결되었다고 비서가 알리자 처칠은 인상을 팍 쓰며 수화기를 들어 올렸다.
-총리 각하? 소련 외무인민위원 몰로토프입니다. 이렇게 전화로나마 대화를 나누게 되어 영광입니다.
몰로토프의 통역사가 몰로토프의 발언을 영어로 옮겨 처칠에게 전했다. 처칠은 콧방귀를 뀌며, 일부러 퉁명스러운 말투로 대답했다.
“나도 영광이오. 그런데 스탈린 서기장에겐 말 못 할 사정이라도 있으시오?”
처칠의 말에 숨은 뜻을 몰로토프는 재깍 알아차렸다.
-서기장 동지께서는 다른 업무로 워낙 바쁘셔서, 부득이하게 제가 대신 맡게 되었습니다. 부디 넓은 아량으로 양해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총리 각하.
이것들 봐라? 처칠은 내심 불쾌했지만 참고 넘겼다. 일단 무슨 이유로 전화를 했는지 한 번 들어봐야지.
“어쩔 수 없지. 그래서 무슨 일이오?”
-서기장 동지께서는 영국이 언제쯤 독일에 선전포고하실 계획인지 알고 싶어하십니다.
처칠은 스탈린이 초조해하고 있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느꼈다.
개전한 지 아직 하루도 지나지 않았는데, 벌써 언제쯤 참전하냐고 묻는 걸 보니 작금의 상황이 본래 계획보다 많이 틀어진 게 분명했다.
“우리가 언제 참전할지 정확한 날짜를 알고 싶다, 이 말이오?”
-그렇습니다.
“사실대로 말하지. 귀국이 바르샤바나 쾨니히스베르크에 도착했을 무렵에 선전포고할 계획이오.”
처칠의 대답을 들은 몰로토프는 한동안 대답이 없었다. 너무 말이 없어서, 전화가 끊어진 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모스크바와의 전화는 계속 연결되어 있었다.
“왜 말이 없으시오? 이다음 뭐라고 말해야 할지 까먹은 거요?”
-아니 그..... 저, 정말로 붉은 군대가 바르샤바를 점령하기 전까지는 독일과 전쟁을 할 생각이 없다는 말씀이십니까?
“나야 당장이라도 선전포고해서 독일 놈들의 도시를 잿더미로 만들어버리고 싶지만, 내각과 군의 반대가 워낙 심해서 말이오. 그들도 대독개전에 반대하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서부의 병력이 동부에 집중되었을 때 참전해야 프랑스 상륙의 난이도도 더 낮아질 것이라고 입을 모아 말하더군.”
몰로토프는 고민했다. 사실대로 말을 해야 하나? 전황이 좋지 않은 지금, 역으로 허세를 부렸다가 영국의 참전이 미뤄지기라도 한다면 스탈린이 그를 가만 내버려 둘 리 없었다.
그렇다고 사실대로 말했다간, 영국에게 국가기밀을 누출했다는 혐의가 씌워질지 몰랐다.
이런 상황에선 어떻게 말해야 하지?
외교계에서 잔뼈가 굵었다고 자화자찬하는 몰로토프는 진실과 거짓이 가져올 각각의 결과를 두고 고민에 빠졌다.
-총리 각하, 저도 솔직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지금 전황이.... 그다지 좋지 않습니다.
고민 끝에 몰로토프는 진실을 말하기로 했다. 일단 지금 상황에선 영국을 최대한 빨리 참전시키는 가장 중요했다.
“전황이 좋지 않다니. 많이 심각한 거요?”
-자세히 말씀드리기 곤란하지만, 그렇습니다.
“구체적으로 어느 정도로 심각하오?”
-핀란드를 상대로 전쟁을 치를 때보다도 사정이 더 좋지 않습니다.
소련은 핀란드를 만만하게 봤다가 큰 피해를 입고 추가병력과 물자를 동원한 끝에 간신히 승리를 쟁취했다.
그런데 독일은 핀란드 같은 약소국이 아닌, 유럽을 제패한 초강대국.
상대가 독일이니 소련도 핀란드를 상대할 때와 다르게 철저히 준비했을 것이다.
그런데도 핀란드와 싸울 때보다도 전황이 나쁘다고 할 정도면 어느 정도로 심각한지 감조차 잡히지 않았다.
-서기장 동지께서는 대영제국이 최대한 빨리 참전하길 바라십니다. 영국의 참전이 없다면, 소비에트 연방은 더 큰 피해를 입고 말 것입니다.
몰로토프는 차마 영국이 참전하지 않는다면, 붉은 군대가 베를린까지 진격하는 것이 아닌 독일군이 모스크바까지 진격할지 모른다고 말할 수 없었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건, 영국이 참전하지 않으면 독일은 금방 소련군을 자국에서 몰아내고, 역으로 소련을 침공할 것이다.
그토록 혐오하던 제국주의자들의 손에 1억 9천만 인민들의 운명이 달려 있다니. 이 얼마나 우스운 일인가.
“귀국도 독일을 치기 위해 나름대로 노력을 했을 텐데, 그 노력이 전혀 빛을 보지 못할 정도로 독일이 강하다는 말이로군.”
-유감스럽지만 사실입니다.
처칠의 말에 몰로토프는 자존심이 상했지만 지금 고개를 숙여야 할 쪽은 그였다. 지금은 최대한 처칠의 비위를 맞춰주는 수밖에.
“알겠소. 최대한 빨리 내각과 군을 설득해서 참전을 서두르도록 하지. 귀국도 최선을 다해주길 바라오.”
-물론입니다. 총리 각하. 독일 파시스트들의 손아귀로부터 유럽을 구해내야 하지 않겠습니까.
말은 잘하는군. 대영제국의 도움 없이는 아무것도 못 하는 빨갱이들 주제에.....
처칠은 몰로토프의 답변에 소리없이 웃었다. 나치를 유럽에서 몰아내야 하는 건 맞지만, 그렇다고 빨갱이들과 공존할 생각이 처칠에겐 없었다.
히틀러와 나치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손을 잡은 것이지, 처칠에겐 소련도 영국과 유럽의 평화를 위협하는 대상이었다.
나치만 무너뜨리면, 그다음은 네놈들이다.
“스탈린 서기장에게 전해주시오. 대영제국은 기필코 귀국을 저버리지 않을 것이라고.”
***
독소전쟁의 첫날도 마무리까지 이제 2시간을 남겨두고 있었다.
개전 첫날에만 독일은 소련군에 막대한 피해를 안기는 데 성공했다.
당장 확인된 전과만 해도 적기 710여 기 격추에 화포 300문, 차량 350대, 전차 220대 이상을 격파했다.
사살한 적 보병들의 수만 수천 명에 달한다는 추측이 있으며 획득한 포로들도 벌서 세 자릿수에 달한다.
이 모든 게 개전 첫날, 그것도 우리가 침공한 게 아니라 침공당한 상황에서 이뤄낸 전과다. 믿겨 지는가?
귄터 프린이 함장으로 있는 U-47을 포함한 유보트 3대가 항코에 기습을 가해 소련 해군 전함 옥차브리스카야 레볼루치야와 마라, 거기에 4척의 적함까지 격침시켰다는 소식과 무르만스크 공습이 성공했다는 보고가 전해졌을 땐 모두가 감격에 겨워 환호했다.
“역시 우리 공군과 해군은 강하구만. 아주 믿음직스러워.”
스케퍼플로에 이어 항코 기습까지 성공시킨 귄터 프린에게는 중령 진급과 다이아몬드백엽검기사십자장 수여가 결정되었다.
독일 전체를 통틀어 현재까지 다이아몬드백엽검기사십자장을 받은 사람은 손에 꼽을 정도로 수여자가 극히 드문데, 지금까지 국방군에서 이 훈장을 수여받은 이는 괴링, 레더, 되니츠, 룬트슈테트, 구데리안, 만슈타인과 전투기총감을 맡은 베르너 묄더스, 독일 본토 방공사령관 아돌프 갈란트, 해군항공대 사령관 헬무트 뷔크가 전부였다.
여기에 프린도 당당히 이름을 올리게 된 것이다.
프린 말고도 다이아몬드백엽검기사십자장 수여가 결정된 이는 한 명 더 있었다. 바로....
“축하하네, 헤스.”
“영광입니다, 총통 각하.”
우리의 헤스였다.
내가 목에 친히 다이아몬드백엽검기사십자장을 걸어주자 헤스는 기쁨을 감추지 못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주변의 시선을 의식한 건지 내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런데 제가 이걸 받을 자격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어허, 그런 말 말게. 자네는 국방군의 백만 대군으로도 이룰 수 없는 업적을 세우지 않았나. 그러니 자부심을 가지게.”
헤스의 머리에서 나온 번뜩이는 발상 덕에 나는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않고 소련의 이름난 명장들과 학자들을 제거할 수 있었다.
그것도 소련 놈들의 손을 이용해서! 숙청된 이들이 독소전쟁과 냉전 초반 소련의 우주개발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감안하면 헤스의 업적은 그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엄청난 것이었다.
그런 공을 세웠으니 이 정도는 받아야지.
현실에서는 전투기를 훔쳐 타고 영국으로 갔다가 스스로 포로가 된 괴짜가 여기서는 독일의 어느 누구도 해내지 못한 업적을 세우리라고 누군들 예상이나 했을까.
물론 헤스의 훈장 수여 이유는 당분간 비밀에 부쳐질 예정이었다.
공식적으로는 당과 총통인 나를 오랫동안 보좌해온 공로로 훈장을 받은 것이라 언론에 알리고, 자세한 진실은 전쟁이 끝난 후에나 밝힐 생각이다.
그리고 자신이 숙청한 이들이 독일의 스파이가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에게서 기밀을 빼냈다고 생각한 것이 사실은 자신이 우리에게 놀아난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스탈린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궁금해서 미칠 지경이다.
“빨리 전쟁이 끝나면 좋겠군. 그래야 사람들이 자네의 진짜 업적에 대해 알게 되지 않겠나.”
***
무르만스크가 독일-노르웨이 공군의 공습을 받은 직후, 소련은 곧바로 반격을 개시했다.
활주로에서 이륙한 Pe-2 20대는 구체적인 작전이나 계획 없이 무작정 노르웨이로 향했다.
스탈린의 불호령을 소련 공군 총사령관 파벨 지가레프는 기지 사령관에게 지시해 당장 소비에트 연방의 적들의 도시에도 같은 불벼락을 내리라고 지시했다. 지금 당장!
폭격기 조종사들에게 내려진 명령은 간단명료했다.
노르웨이의 도시 시르케네스에 폭탄을 퍼붓고 귀환할 것. 전략적 목표라던가, 폭격으로 거둘 수 있는 효과 등에 대해선 일언반구의 언급도 없었다.
시르케네스가 작전목표가 된 것도 그저 소련에서 가장 가까운 위치에 있다는 이유 하나뿐이었다.
드미트리 피쇼프스키 하사는 착잡한 심정이었다.
전쟁이 끝날 때까지 꿀만 빨 수 있다고 좋아했는데, 노르웨이가 참전을 선언하고 무르만스크를 폭격하는 바람에 기지에 짱박혀 조용히 지낼 수 있다는 환상은 산산이 조각나고 말았다.
설상가상으로 그는 갑자기 계획된 폭격 임무에 투입되고 말았다.
좆같은 노르웨이 놈들. 그냥 가만히 있으면 어디 덧나냐? 왜 굳이 독일을 따라서 전쟁에 끼어든 건지 국제정세에 대해 아는 것이 없는 드미트리로선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곧 노르웨이 상공이다. 모두 주.....
-7시 방향에 적기다!
노르웨이 상공에 들어서기 무섭게 환영행사가 열렸다. 노르웨이 공군 소속 Bf109, Bf110이 기총을 쏘며 접근해왔다.
드미트리가 베레진 UB 중기관총의 방아쇠를 누르자 12.7mm 총탄이 총구에서 뿜어져 나왔다.
5발에 한 발꼴로 든 예광탄이 감색의 하늘을 불 밝히는 가운데 노르웨이군의 Bf110이 첫 전과를 올렸다.
-추락한다!
첫 번째 Pe-2가 격추된 뒤에 이어 두 번째, 세 번째 Pe-2가 격추되었다.
격추되는 전우들의 단말마가 무전에 울려 퍼질 때마다 드미트리는 등에서 식은땀을 흘렸다.
죽고 싶지 않다는 일념으로 그는 미친 듯이 총을 쏘았다. 총알이 다 떨어지자 그는 서둘러 재장전했다.
재장전이 거의 끝나갈 무렵 Bf109 한 대가 드미트리가 탄 Pe-2를 향해 다가왔다.
드미트리가 기관총을 발사하자, 놈은 우측으로 방향을 틀어 탄막을 피했다.
임무는 실패였다. 난전의 와중에 폭격기들은 제 살길을 찾아 흩어졌다.
드미트리가 탄 Pe-2의 조종사도 적기를 피해 조종간을 마구 틀어댔다.
“제발 좀 가라, 가! 좇아오지 말라고 씨발!”
드미트리는 거의 애원하듯이 욕을 하며 기관총을 난사했다.
그의 절박한 기도에 신이 감탄한 것일까? 드미트리의 Pe-2는 천신만고 끝에 Bf109의 추격을 뿌리치고 도주하는 데 성공했다.
문제는 무리에서 벗어나 완전히 혼자가 되었다는 것과 정신없이 도망치느라 그만 방향을 잃고 말았다는 것이었다.
항법사가 기지로 복귀하려면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하는지 조종사와 입씨름하는 사이, 드미트리는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았다.
살았다는 안도감에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 같았다.
그때였다. 펑펑 소리가 나면서 기체가 충격으로 뒤흔들렸다.
“좌측 날개가 당했어!”
Pe-2의 좌측 날개에 달린 엔진에서 검은 연기가 뿜어져 나오더니 이내 엔진 전체가 오렌지색 불길에 휩싸였다.
날개에 난 구멍으로 연료가 줄줄 새는 것은 덤이었다.
조종사는 기체의 균형을 잡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하지만 고도가 낮아지며, 기체가 지상에 가까워지고 있는 것만큼은 피하지 못했다.
드미트리도 티끌보다 작게 보이던 지상의 나무와 바위들이, 기체가 지상에 가까워질수록 크기가 커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새끼손가락의 손톱만 한 나무들이 동전 크기가 되었다가 이제는 축구공보다 더 커졌을 때, 드미트리는 눈을 감고 신을 향해 필사의 기도를 올렸다.
하느님, 제발 부탁드립니다. 부디 이 어린 양을 굽어살피소서.
이번에도 신이 드미트리의 기도를 들어준 걸까? 아니면 조종사의 노력을 빛을 발한 것일까?
엔진을 당해 지상으로 추락한 Pe-2는 기적적으로 지상에 착륙하는 데 성공했다.
착륙 과정에서 좌측 바퀴가 부러지는 바람에 기체가 땅에 긁히면서 땅에 기다란 자국을 내긴 했지만, PE-2의 승무원 3명 전원은 무사히 살아남을 수 있었다.
드미트리는 눈을 떴을 때, 자신이 저승이 아닌 어딘가의 들판에 있다는 사실을 알고 감격했다.
살았다는 안도감에 눈에서 절로 눈물이 쏟아졌다.
조종사와 항법사도 모두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비록 임무 완수는커녕 적기에 당해 기체까지 잃고 불시착하는 신세가 되었지만, 살아남았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그들은 행복했다.
다만 엔진에 붙은 불이 언제 기체 전체로 번져, 폭발을 일으킬지 몰랐기에 셋은 냉큼 기체 밖으로 나왔다.
기체에서 나온 드미트리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시야에 잡히는 것이라곤 온통 나무와 바위뿐. 사람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여기가 대체 어딜까요?”
“나도 잘 모르겠군.”
조종사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아무래도 노르웨이가 아닐까 싶은데.”
“그렇다면 저희는 이제....”
드미트리가 말꼬리를 흐리자, 심각한 표정의 조종사를 대신해 항법사가 대신 답을 달았다.
“포로 신세가 되겠지.”
개전 첫날, 첫 임무에 투입되자마자 바로 포로 신세라니. 그리 썩 유쾌한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포로수용소에 있는 동안에는 전쟁터에 갈 일이 없으니 죽을 일도 없었다.
아무튼 나중 일은 나중에 생각하고, 지금은 살아남은 것에 감사하기로 했다.
“아, 저기!”
뭔가를 발견한 조종사가 소리를 지르며 손가락으로 어딘가를 가리키자, 드미트리의 시선도 자연스레 조종사의 시선을 따라갔다.
모두의 시선이 향한 곳에는 어둠 속에서 밝게 빛나는 한 쌍의 전조등이 있었다. 엔진 소리도 함께 들렸다.
60m 앞에서 멈춰선 트럭에서 소총으로 무장한 병사들이 우르르 내렸다. 노르웨이군일까? 혹은 독일군?
저 병사들의 소속이 노르웨이군이든 독일군이든 간에 드미트리는 얌전히 손을 들어 올렸다. 그런데 함께 손을 든 조종사가 이상한 말을 했다.
“핀란드군이잖아?”
“잘 못 들었습니다?”
드미트리는 조종사가 무슨 말을 하나 싶었다. 핀란드군이라고?
“저놈들, 핀란드어를 쓰고 있어. 핀란드군이란 말이야. 노르웨이군이 아니라.”
“어? 그렇다면.....”
“우리가 불시착한 이곳이 노르웨이가 아니라 핀란드란 말이야?”
항법사의 물음에 조종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것 같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