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서양을 향한 질주 (4) >
1940년 5월 20일
프랑스 데브흐
“쏴!”
일제포격이 아침의 고요한 침묵을 깨자 포성에 놀란 새 떼가 일제히 자리를 박차고 날아올랐다.
곡사포와 자주포는 물론이고 대전차포와 88mm 대공포도 포격에 동원되었다.
보병수송용 외에도 탄약운반용으로도 쓰이는 케츠헨이 도착하면 포병들이 뛰어와 부지런히 탄약을 날랐다.
베스페와 그릴레가 쉴 새 없이 불을 뿜는 가운데 He 111, Ju88이 하늘을 오가며 폭탄을 투하했다.
쉬지 않고 내리는 강철의 비에 영국군은 고개를 들지 못했다.
병사들은 참호 바닥에 웅크린 채 포격이 끝나기만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간혹 재수없이 폭탄이 참호를 직격하는 경우엔 참호에 있던 1개 소대가 통째로 사라지곤 했다.
공군과 포병이 적진을 두들기는 동안 고무보트와 나룻배에 나눠탄 독일 보병들이 강을 도하했다.
강의 너비는 50m도 되지 않지만, 수심이 깊어 계획상으론 공병대의 도착을 기다려야 했다. 하지만 1분 1초가 급했던 지휘관들은 서둘러 도하를 진행했다.
12대밖에 되지 않는 고무보트로 수천 명에 이르는 병사들이 모두 강을 도하하려면 시간이 오래 걸렸다.
먼저 강을 도하한 병사들은 후발대의 도착을 기다리는 대신 적진을 향해 내달렸다.
비록 수십 명도 채 되지 않는 병력이지만, 쇼카콜라와 페르비틴 알약의 영향 덕분에 그들은 두려움을 전혀 느끼지 못했다.
되려 두려움을 너무 느끼지 못해 탈일 정도였다. 지나치게 흥분한 병사들이 명령을 무시하고 적군을 공격하는 일이 종종 일어나곤 했기 때문이다.
아라스에서의 반격이 처참한 실패로 돌아갔다.
영국군은 전차 74대 중에서 52대를 잃었고 보병도 300명이 넘게 죽었다.
영국군의 공세 소식을 접한 프랑스군도 서둘러 병력을 증파했지만, 별 도움이 되지 못했다.
공세가 실패로 끝나자 영국군은 모든 희망을 접고 대서양 방면으로 퇴각했다.
영국군이 퇴각하자 프랑스군과 벨기에군도 연달아 퇴각을 시작했고 독일군은 퇴각하는 연합군을 바짝 추격했다.
5월 20일 새벽, 구데리안은 예하 1기갑사단에게 칼레로, 2기갑사단은 불로뉴쉬르메르, 10기갑사단에겐 됭케르크로 진격할 것을 명령했다.
히틀러는 그에게 피해에 신경쓰지 말고 무조건 전진하라고 지시했다. 무조건.
-장군만 믿소. 적군을 한 명도 남기지 말고 모조리 바다에 처넣으시오.
“걱정 붙들어 매십시오, 총통 각하. 놈들에게 지옥이 어떤 것인지 확실하게 보여주겠습니다.”
히틀러는 구데리안의 대답에 흡족해하며 전화를 끊었다.
***
“제리들이 온다! 모두 마음 단단히 먹어!”
겨우 포격이 끝나 안심하고 있었는데, 독일군이 온다는 소리를 듣자 헨리 고든 일병은 속이 뒤집어지는 느낌이었다.
빌어먹을, 죽다 살아났는데 다시 죽게 생겼네.
30분 넘게 이어진 포격이 끝났을 때, 고든이 속한 중대에서 살아남은 중대원의 수는 40명 남짓에 불과했다.
나머지는 모두 육편이 되거나 땅에 파묻혔다.
Ju88의 폭격을 정통으로 맞은 탓에 고든의 중대는 다른 중대보다 유독 피해가 컸다.
통상적으로 부대 총인원의 30%가 전투불능이 되면 전멸로 간주하는 것을 생각하면 고든의 중대는 전멸을 넘어 궤멸당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정석대로라면 부대 재편을 위해 후퇴시키는 것이 맞지만, 적이 코앞까지 온 마당에 퇴각은 어림도 없는 소리였다.
고든은 주변을 둘러봤다.
사방이 크고 작은 구덩이로 가득했다.
구덩이 주변에 널린 시체와 살점을 본 고든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구토를 했다.
“우웨엑!”
이틀 동안 먹은 것이라곤 비스킷 하나와 차 한 잔에 불과했는데, 밖으로 나오는 것은 많았다.
위가 텅텅 빈 고든은 자신이 게워낸 토사물의 악취를 피해 옆 참호로 자리를 옮겼다.
“여어, 고든. 너도 살아있었냐.”
동기 어거스트 에임이 고든을 보곤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넌 꼴이 그게 뭐야? 누가 보면 땅에 묻혔다가 다시 나온 줄 알겠네.”
흙투성이인 어거스트를 본 고든이 말했다.
“맞아. 생매장당했는데 간신히 빠져나왔어.”
농담으로 한 말이었는데, 어거스트에겐 농담이 아니었다.
그는 정말로 참호의 벽이 무너지는 바람에 흙에 깔려 죽을 뻔했다가, 간신히 빠져나왔다.
죽다 살아나서 그런지 어거스트의 눈은 도저히 정상이라 볼 수 없었다.
“담배 있냐? 내 건 흙에 파묻혀서 찾을 수 없거든.”
“여기. 한 대 피워라.”
고든은 동기를 위해 마지막까지 아껴둔 돛대를 건넸다. 어거스트는 망설임 없이 담배를 피웠다.
니코틴의 효과 때문인지 눈동자의 불안한 움직임이 줄어들면서 손발의 떨림도 사그라들었다.
“망할 제리 새끼들. 그놈들 때문에 이게 뭔 고생이냐, 진짜.”
“제리 새끼들보다 더 문제인게 프랑스 놈들이야. 그놈들이 죄다 겁쟁이여서 여기까지 밀린······.”
“온다! 사격 준비!”
둘의 대화는 독일군의 등장으로 중단되었다.
고든은 리-엔필드를 들고 전방을 겨냥했다.
과연 저 멀리서 독일군들이 달려오고 있었다. 숫자는 스무 명 남짓.
“사격 개시!”
중대장 대리를 맡은 하사가 사격을 명령하자, 중대원들이 발포했다.
다른 중대는 적군이 조금 더 가까이 올 때까지 끌어들일 생각으로 발포를 자제하고 있었지만, 고든의 중대에서 먼저 발포하자 잇따라 발포했다.
고든은 처음 보는 신형 기관단총을 들고 달려오는 독일군을 조준하고 방아쇠를 당겼지만, 적은 쓰러지지 않고 계속 달려왔다.
긴장한 나머지 조준이 흐트러진 것이었다.
연거푸 2탄을 발사했지만 이번에도 총알은 빗나갔다.
루이스 경기관총이 돌격하는 독일군을 상대로 불을 뿜었다.
기관총의 집중사격을 받은 독일군 2명이 넝마조각이 되어 쓰러졌다.
그러나 주변의 독일군은 자세를 낮추거나 속도를 늦추는 기색 없이 달려왔다.
“저놈들 대체 뭐야? 죽는 게 안 무서운 거야?”
고든은 황당함을 넘어 두려움을 느꼈다.
옆에서 달리던 동료가 쓰러져도 독일군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뛰어왔다.
마치 사람이 아니라 기계를 보는 것 같았다.
스무 명 남짓이었던 독일군은 눈 깜짝할 사이에 마흔 명이 되었다. 총을 맞고 죽은 병사들보다, 새로 합류하는 병사들이 더 많았다.
영국군의 눈에는 총을 쏘면 쏠수록 적군이 되려 더 늘어나는 것처럼 보였다. 병사들이 사이에서 동요의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독일군도 사격을 시작하자 이번엔 영국군이 쓰러졌다.
MP38, MP40 기관단총과 StG39 돌격소총 등 최신 화기로 무장한 독일군은 리-엔필드로 무장한 영국군을 화력에서 압도했다.
일일이 노리쇠를 움직여 탄피를 빼내고 장전을 해야 하는 볼트액션 소총과 달리, 기관단총과 돌격소총은 방아쇠를 당기기만 하면 알아서 총탄이 연발로 나가 단기간에 더 많은 총알을 뿌릴 수 있었다.
여기에 MG40 기관총까지 더해지자 이제는 영국군이 독일군의 총탄을 피해 엎드려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제리 새끼들, 죄다 기관단총으로 무장하고 있잖아?”
“전쟁 좆같이 하네. 이거 서러워서 살겠냐?”
돌격소총의 존재를 모르는 영국군의 눈에는 StG39도 기관단총으로 보였다.
영국군도 미국으로부터 수입한 톰슨 기관단총이 있지만, 비싼 가격으로 많은 수량을 보급하지 못해 중대당 몇 정 밖에 없었다.
이마저도 조금 전의 포격으로 상당수가 분실된 탓에 자동화기로 무장한 독일군의 상대가 되질 못했다.
“저 제리들도 기관단총 들고 다니는데 천하의 대영제국 육군이 이게 뭐야?”
“낸들 알겠냐? 보나마나 그놈의 돈 때문이겠지!”
고든의 불평에 장단을 맞추던 어거스트는 총을 내려놓고 수류탄을 들었다.
수류탄 핀을 뽑은 뒤 소리내어 3초를 센 후, 그것을 있는 힘껏 던졌다.
어거스트가 던진 수류탄은 엎드린 자세로 MG40을 쏘던 두 명의 독일군을 날려버렸다.
“좋았-”
자신이 던진 수류탄이 적군에게 명중한 것을 보고 쾌재를 부르던 어거스트가 갑자기 고꾸라졌다. 독일군의 총탄에 맞은 것이다.
“어거스트!”
바닥에 쓰러져 꿈틀거리는 어거스트에게 고든이 놀라서 다가갔다.
어거스트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양쪽 눈 사이에 난 구멍에서 흐르는 피가, 그의 숨이 끊어졌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어거스트는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전혀 모른 채 죽었다. 얼굴에 그대로 남아있는 미소가 그의 죽음을 더 참혹하게 만들었다.
“이런 빌어먹을······.”
고든은 눈물이 나오려는 것을 참으며 이를 악물고 소총의 방아쇠를 당겼다.
“크학!”
나무 뒤에 숨어서 기관단총을 쏘던 독일군이 허벅지를 움켜잡으며 쓰러졌다.
고든은 쓰러진 독일군의 머리를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총탄이 철모의 측면을 비껴맞추자, 독일군은 급하게 머리를 숙였다.
고든이 재장전을 하는 사이 다른 독일군이 쓰러진 전우의 목덜미를 잡아 뒤로 끌어당겼다.
“전차다! 전차가 나타났다!”
보병들을 상대하는 것도 충분히 벅찬데, 이제는 전차까지 나타났다. 장포신 75mm 주포로 무장한 4호 전차였다.
어느새 공병대가 도착해 부교를 놓자 전차들이 강을 건너고 있었다. 전차가 없는 영국군에겐 최악의 상황이었다.
코끼리 코처럼 길쭉한 주포가 달린 포탑을 돌리며 다가오던 4호 전차가 별안간 측면을 공격당해 정지했다.
공격당한 부분에서 뿌연 회색 연기가 솟구쳤다.
고든은 영문을 몰라 눈을 깜빡거렸다.
우측에 매복한 킹스 대전차소총 사수가 4호 전차의 측면에 명중탄을 먹인 것이었다.
측면장갑을 관통한 14mm 철갑탄은 조종수를 즉사시키고 통신수에게 부상을 입혔다.
전차를 격파시키기엔 부족하지만, 장갑을 관통하여 전차병들을 살상시키기엔 충분한 위력이었다.
전차병들은 총탄이 어디서 날아왔는지 갈피조차 잡지 못했다. 적군이 우왕좌왕하는 사이, 사수가 재차 소총을 발사했다.
-캉!
“끄아아아아아아!!!”
금속이 깨지는 날선 소리와 거의 동시에, 처참한 비명 소리가 터져 나왔다. 총탄에 팔이 잘린 전차병이 지르는 비명이었다.
세 번째 총탄은 폐쇄기를 망가뜨려 전차의 주포를 쓸 수 없게 만들었다.
무게가 거의 24톤에 달하는 전차가 22kg의 대전차소총에 의해 전투불능 상태에 빠지고 말았다.
전차가 침묵하자, 참호에서 환호성이 터져나왔다.
그러나 두 번째 전차가 나타나자 환호성은 칼로 잘라낸 것처럼 뚝 끊어졌다.
두 번째 전차는 곧장 대전차소총 진지로 다가왔다. 차체 전면의 MG34가 발사되자, 대전차소총 사수는 바짝 엎드렸다.
어느새 진지로 다가온 4호 전차의 조종수는 차체를 돌려 무한궤도로 진지를 깔아뭉갰다.
진지 바닥에 닿은 궤도가 회전하면서 대전차사수의 몸을 짓이기자 잘게 다져진 피와 살점, 내장조각들이 사방으로 튀었다.
차마 눈뜨고 볼 수 없을 정도로 참혹한 광경에 고든은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 없었다.
궤도 전체에 살점과 내장 조각이 들러붙은 4호 전차는 다시 방향을 돌려 참호로 다가왔다.
정신이 반쯤 나간 병사 몇 명이 참호를 벗어나 안전해 보이는 후방으로 도망쳤지만, 대부분 참호 밖으로 나오기 무섭게 독일군의 집중사격을 받고 벌집이 되어 널브러졌다.
4호 전차에 탑재된 두 정의 MG34가 불을 뿜자, 고든은 참호 바닥에 고개를 처박았다.
총알이 바람을 가르며 지나가는 소리를 들을 때마다 몸이 파르르 떨렸다.
4호 전차가 포문을 열자, 귀청이 찢어질듯한 폭음이 참호를 덮쳤다.
루이스 경기관총을 쏘던 병사와, 병사들에게 명령을 내리던 장교, 공황상태에 빠진 병사들을 다그치던 하사관들까지 폭발에 휩쓸려 허공으로 치솟았다.
“으아아아아!!!”
“살려줘!”
“하느님! 하느님!”
유탄이 참호를 강타할 때마다 절망 섞인 비명이 터졌다.
고든은 그야말로 미치기 일보직전이었다. 당장이라도 소리를 내지르면서 참호 밖으로 뛰쳐나가고 싶은 욕망이 솟구쳤다.
단 한 대의 전차로 인해 영국군의 방어선은 거의 초토화되었다.
눈에 띄는 적군이 없자 전차장은 조종수에게 전진을 명령했다.
무한궤도가 엉망이 된 참호를 타넘어 굴러가자 흙이 참호로 쏟아져 전신이 짖이겨진 채 숨이 끊어진 병사들을 뒤덮었다.
전차가 지나가자 고든은 간신히 눈을 떴다. 고개를 들자, 그의 미간을 겨냥한 검은 총구부터 눈에 들어왔다.
“항복해라, 토미!”
고든의 앞에는 아직 10대로 보이는 앳된 외모의 독일군이 총을 겨둔 채로 서 있었다.
발음이 이상했지만, 뜻을 알아들을 정도는 되었다. 고든은 순순히 두 손을 머리 위로 올렸다.
“전우들이여, 항복해라. 순순히 무기를 내려놓는다면 해치지 않겠다.”
슈탈헬름 대신 장교모를 쓴 독일군 장교가 유창한 영어로 소리쳤다.
서로의 눈치만 살피고 있던 병사들도 독일군 장교의 말을 듣고 쭈뼛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죽은 척하고 있어도 소용없다. 나중에 걸려서 괜히 피 보지 말고 지금 항복해라. 제네바 조약에 의거하여 정당한 포로 대우를 해줄 테니.”
시체인 척하고 바닥에 누워 있던 3명이 추가로 일어섰다.
독일군은 항복한 영국군 병사들을 참호 밖으로 나오게 했다. 단, 무기는 그대로 참호에 두고.
독일군이 포로들을 일렬로 세우고 소지품을 검사하는 사이, 4호 전차와 Sd.Kfz 251 장갑차가 교대로 참호를 지나갔다.
북쪽으로 향하는 적군의 행렬을 지켜보며 고든은 마음이 공허해지는 것을 느꼈다.
“끝났군.”
***
1940년 5월 21일
프랑스 불로뉴쉬르메르
데브흐를 점령한 독일군은 연료와 탄약을 보급받은 뒤 곧장 불로뉴로 진격했다.
경쾌한 기동성을 자랑하는 르노 AMR 33 경전차는 독일군에서 2선급으로 평가받는 2호 전차를 상대로도 고전을 면치 못했다.
AMR 33의 7.5mm 레이벨 기관총은 보병과 기병에게나 효과가 있었지, 장갑판을 두른 전차에는 무력했다.
적 전차가 쏘는 총탄을 비웃듯이 가뿐하게 튕겨내며 돌진하던 2호 전차는 정지하여 20mm 기관포를 발사했다.
AMR 33 4대가 연달아 벌집이 되자, 프랑스군은 일제히 좌우로 흩어졌다.
“돌격, 앞으로!”
“총통께서 우릴 지켜보고 계신다!”
“우와아아아!!!”
승리에 대한 확신과 총통을 향한 충성심, 그리고 페르비틴 알약이 가져다 주는 쾌감과 흥분에 정신을 지배당한 독일 병사들은 총탄이 빗발치는 전장을 향해 스스럼없이 발걸음을 내디뎠다.
옆에서 동료가 총에 맞아 죽는 것을 봐도 병사들은 움츠리기는커녕 미친개처럼 더욱 날뛰었다.
MP38과 StG39를 난사하며 돌격하는 독일군을 프랑스군은 당해내지 못했다.
프랑스 병사들이 총알 한 발을 쏘고 일일이 재장전을 할 때 독일군은 그저 탄창이 빌 때까지 방아쇠를 당기기만 하면 끝이었다.
“항복하겠다! 쏘지 마라!”
“항복! 항복!”
전의를 상실한 프랑스 병사들은 어설픈 독일어로 항복을 외치며 두 손을 들었다.
포로가 된 병사들은 그래도 운이 따라주는 편이었다. 운이 없는 병사들은 항복을 외쳤음에도 가차없이 사살당했다.
페르비틴에 이성을 잃은 몇몇 병사들은 항복하는 적들을 향해서도 무작정 총을 난사했다.
호치키스 중기관총을 난사하던 프랑스군에게 20mm 기관포 공격이 가해졌다.
기관포탄에 맞은 병사의 몸은 바닥에 내던져진 유리잔마냥 산산조각났지만, 기적적으로 기관총은 멀쩡했다.
육편으로 얼룩진 기관총 진지에 침투한 독일군 하사가 중기관총의 총구를 프랑스군 방향으로 돌렸다.
아군 기관총 진지로부터 총탄이 날아들자 프랑스군은 혼란에 빠졌다.
중기관총이 적군에게 탈취된 사실을 모르는 병사들은 영문을 모른 채 바닥을 나뒹굴었다.
프랑스군의 저항이 대충 정리되자 독일군은 전진을 계속했다.
도주하는 프랑스군 잔당의 추격은 후속부대에 맡겼다.
가장 중요한 것은 패잔병 추격이 아니라, 한시라도 빨리 불로뉴를 점령하는 것이라고 구데리안은 휘하 장교들에게 신신당부했다.
구데리안의 상관인 클라이스트는 구데리안의 진격이 너무 빠르다고 판단해 그에게 자주 정지 명령을 내렸지만, 구데리안은 클라이스트의 지시를 번번히 무시했다.
부하임에도 자신의 명령을 대놓고 무시하는 구데리안에게 클라이스트를 머리 끝까지 화가 나 그를 해임하려고 했지만, 히틀러는 구데리안을 질책하기는커녕 역으로 클라이스트에게 구데리안의 진격에 일절 간섭하지 말라고 지시했다.
클라이스트 입장에선 복장이 터질 노릇이었지만, 히틀러의 비호 덕분에 구데리안과 휘하 기갑사단들은 그 어떤 방해도 받지 않고 마음껏 날뛸 수 있었다.
독일군이 코앞까지 오자, 불로뉴를 지키던 연합군은 선택의 기로에 놓였다.
“각하, 독일군이 벌써 사단본부에서 5km 거리까지 진격했다는 소식입니다.”
부관의 보고에 사단장은 고개를 숙였다.
불로뉴에는 영국군과 프랑스군을 모두 합쳐 1만 명이 넘는 병력이 남아있었다.
싸우고자 한다면 충분히 못 싸울 것도 없지만, 이미 대세는 독일군에게 기운 지 오래였다.
무엇보다 군의 사기가 바닥인 마당에 사수 명령을 내려도 병사들이 따를지 회의적이었다.
무슨 짓을 해도 독일군을 이길 수 없다는 비관적인 전망이 퍼지면서 병사들은 물론이고 장교들조차 명령에 불복종하는 사례가 폭발적으로 늘었다.
프랑스군의 상황은 영국군보다 더 심각했는데, 중대장이 본인의 중대를 놔두고 탈영하거나, 완전무장한 부대가 싸우지도 않고 자리를 이탈해 도주하는 사례까지 있을 정도였다.
“각하, 명령을 내려주십시오!”
“······.”
참모들의 재촉에도 사단장은 묵묵부답이었다.
어느새 독일군 전차의 엔진소리가 사령부 건물에까지 닿았다.
앞으로 30분 뒤면, 사령부 정문에까지 독일군이 들이닥치리라.
“······내가 싸우라고 명령해도, 병사들이 따르겠나?”
긴 침묵을 깨고 사단장이 입을 열었다.
시종일관 위풍당당하고 근엄했던 목소리는 어디 가고 이젠 가냘프고 애처로운 노인의 목소리만 남아있었다.
“자네들도 알다시피 사기는 이미 최악일세. 이 상황에서 최후까지 싸우라고 지시한다면, 병사들의 총알이 누구를 향하겠나? 독일군? 아니면 우리?”
“······.”
사단장의 질문에 누구도 대답하지 못했다. 어느새 창문 밖으로 총성이 들려왔다. 전차의 엔진소리는 한층 더 커졌다.
“백기를 올리게. 독일군이 오기 전에 중요문서는 모두 소각하고.”
“알겠습니다······.”
***
“총통 각하!”
크라우제가 뛰어왔을 때, 나는 막 식사를 시작하려던 참이었다.
최근 고향의 맛이 그리워져서 4, 5일에 한 번은 꼭 한식을 먹고 있다. 안봉근의 두부공장에서 공수해온 김치로 만든 돼지고기김치볶음-군필자들에게 익숙한 그놈 맞다-과 삶은 두부가 오늘의 식단이었다.
"식사 중에 죄송합니다, 총통 각하. 방금 구데리안 장군으로부터 보고가 들어와서."
"괜찮네. 식사보다 보고가 우선이지. 말해보게."
“제2기갑사단이 불로뉴를 점령하고 영국, 프랑스군의 항복을 받아냈답니다.”
“좋아, 잘됐군. 오늘도 두 다리 쭉 뻗고 잘 수 있겠어.”
다음날 구데리안은 1기갑사단이 칼레를 점령했다고 보고해왔다.
불로뉴에 이어 칼레까지 함락당했으니, 포위망에 갇힌 연합군에게 남은 지점은 됭케르크뿐.
전쟁의 끝이 다가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