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침 해가 뜨기 전에 (5) >
노르웨이 정부의 파병 요청이 들어오기 무섭게 나는 레더에게 출격 명령을 내렸다.
그리고 덴마크 주재 독일 대사로 하여금 독일군이 덴마크를 통과할 수 있도록 허가를 내려달라고 덴마크 정부에게 요청할 것을 지시했다. 최대한 정중하게!
노르웨이 국왕 호콘 7세의 형, 덴마크 국왕 크리스티안 10세는 영국에게 공격당한 동생네 나라를 도우러 간다고 하니 즉시 허락해줬다.
덴마크가 독일군의 영토 통과를 허락하자, 영국은 덴마크까지 공격했다.
정확히는 공해에 있던 덴마크 국적의 선박들을 나포해 영국 해군에 편입한 것인데 이를 돌려받고 싶으면 독일군의 영토 통과 허가를 취소하라고 덴마크 정부에게 요구했다.
덴마크 정부가 영국의 이런 어처구니 없는 요구를 무시하자 영국은 휘틀리 폭격기를 보내 코펜하겐을 폭격했다.
공습의 피해는 크지 않았지만 덴마크인들을 분노시키기는 충분했다.
4월 12일 덴마크는 영국에게 선전포고했다.
스웨덴도 덴마크를 보고 자신감을 얻었는지 다음날 영국에 선전포고했다.
이로써 덴마크, 노르웨이, 스웨덴 3개국 모두 영국과의 전쟁 상태에 돌입했다.
겨우 며칠 만에 우리는 3개의 동맹국을 얻었고 영프는 3개의 적국을 얻었다.
경사났네, 경사났어.
“이제야 균형이 좀 맞춰진 것 같군. 엊그제까지 2:3이었는데, 이제는 5:3이 되었으니 쪽수로만 따지면 우리가 더 많구려, 허허.”
물론 숫자로만 따지기 힘든 군사력의 차이가 있었다.
당장 프랑스만 해도 독일을 제외한 다른 동맹국들의 군사력을 모두 합한 것보다 훨씬 더 강력한 군사력을 가지고 있다.
그래도 영국의 무차별적인 공격은 세계의 여론을 크게 변화시켰다.
지금까지는 폴란드를 침략한 독일을 비난하는 분위기였지만, 영국의 뻘짓으로 스칸디나비아 3개국이 참전한 뒤부터는 영국을 비난하는 목소리가 더 커졌다.
세계 각국의 언론사들은 물론, 워싱턴 포스트, 뉴욕 타임스, 타임 등 미국의 저명한 언론사들도 영국의 스칸디나비아 선제공격을 강한 어조로 비판했고, 백악관조차 영국을 규탄하는 성명을 발표했다(말미에 원한다면 미국이 평화 협상을 중재하겠다는 말을 덧붙이긴 했다).
심지어 영국 내의 언론사들조차 굳이 이럴 필요까지 있었느냐는 반응까지 보이고 있다.
프랑스 파리에선 시위대가 반전을 외치며 폭동을 일으켰고 이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10여 명이 죽거나 다쳤다.
이래서 외부의 적보다 내부의 적이 더 무섭다는 거다.
괴벨스는 대영제국의 영원한 X맨 처칠이 만들어준 절호의 기회를 헛되이 날리지 않았다. 녀석은 즉시 기자들을 불러 모아 본격적인 선동에 나섰다.
-독일과 전 세계의 자유시민 여러분! 보셨습니까? 이게 바로 세계의 질서를 수호한다고 주장하는 영국의 실체입니다!
영국 정부는 평화를 원하는 독일인들의 간절한 제안을 매몰차게 거절한 것도 모자라, 중립국을 공격하여 죄없는 선량한 시민 수만 명을 죽였습니다! 보십시오, 하루아침에 가족과 삶의 터전을 잃고 울부짖는 피해자들의 모습을! 들으십시오! 아이를 잃은 부모와 부모를 잃은 아이들의 절규를!
이게 어떻게 문명국입니까? 이것은 문명국이 할 짓이 아닙니다! 이번 전쟁은 여태까지 선진국의 탈을 쓰고 있던 영국이 스스로 야만국임을 입증하는 전쟁으로 남을 겁니다!
나는 집무실의 소파에 앉아 차가운 탄산 레모네이드를 마시며 괴벨스의 장광설을 들었다.
역시 이 녀석 인종차별주의자에 여자라면 사족을 못쓰는 호색한이지만 선전선동만큼은 인류 역사상 최고, GOAT라니까.
-마지막으로 우리 독일의 적국인 영국과 프랑스 시민들에게 묻겠습니다. 여러분은 스스로를 어느 편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분명 여러분은 여러분의 조국이 정의의 편이라고 생각하고 계실 겁니다.
하지만, 이 모습을 보고도 그 생각에 변함이 없으신지 궁금하군요.
여러분은 아직도 스스로를 정의의 사자라고 생각하십니까? 여러분이 진정으로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지금 자리에 앉아 알아서 전쟁이 끝나기만을 기다리지 마십시오! 당장 문을 박차고 나가 이렇게 외치십시오.
우리는 평화를 원한다고. 더 이상의 전쟁은 안 된다고.
제 말을 명심하시길 바랍니다. 진심으로 정의를 믿고 따른다면, 여러분 스스로의 힘으로 쟁취하십시오! 권력의 옥좌에 앉아 살육의 명령만 반복하며 여러분들을 죽음으로 몰고 가는 전쟁광들을 끌어내리고, 평화를 외치십시오! 세계는 여러분이 평화와 자유를 스스로의 손으로 쟁취하기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나도 모르게 오른손을 치켜들고 지크 하일을 외칠 뻔했다.
괴벨스, 이 무서운 녀석.
이 녀석이 독일에 태어나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만약 영국이나 프랑스에서 태어났다면, 이렇게 웃고 있지 못하겠지.
녀석이라면 틀림없이 영국의 스칸디나비아 공격을 비열한 침략이 아닌 인류의 평화를 수호하기 위한, 어쩔 수 없었던 비극으로 포장해 사람들을 홀렸을 것이다.
괴벨스의 연설은 세계적으로 큰 호응을 얻었다.
각국 메이저 언론사들이 앞다투어 그의 연설문을 신문 일면에 싣는가 하면, 스칸디나비아 3국에선 이번 괴벨스의 연설이 나의 인종주의 반대 연설과 맞먹는 희대의 명연설이라고 칭찬이 자자하다고 한다.
이러다 나중에 동상이라도 하나 세우는 거 아닌가 모르겠군.
괴벨스가 세계인들을 상대로 열심히 선동질을 하는 동안, 국방군은 무사히 노르웨이에 상륙해 북으로 향했다.
국방군이 도착하기 전에 노르웨이군은 자체적인 힘만으로 나르비크 탈환을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노르웨이군의 위기는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4월 11일에 트론헤임과 베르겐이 영국 공군과 해군의 무차별적인 공격을 받았다.
나르비크 공격으로 전국에 경계태세가 발령된 탓에 트론헤임은 그나마 사상자가 적었지만, 베르겐은 예외였다.
영국과 거리가 가깝다는 이유로 베르겐은 철저한 공격을 당했다.
확인된 사상자만 2만 명에, 설상가상으로 영국 해병대와 프랑스 해군 육전대가 상륙해 항구를 점령했다.
노르웨이군과 시민들이 영프군의 시내 진입을 필사적으로 저지하는 동안 비스마르크와 샤른호르스트, 그나이제나우, 그라프 체펠린 및 구축함 6대로 구성된 대함대가 베르겐으로 향했다.
***
1940년 4월 13일
북해
영국 해군과 크릭스마리네의 첫 교전은 함재기들의 교전으로 시작되었다.
크릭스마리네의 레이더에 영국 함대의 존재가 포착되고 10분 뒤, Ar196이 영국 함대를 발견하여 이를 함대에 알렸고 소식을 접한 그라프 체펠린은 일제히 함재기들을 발진시켰다.
영국 해군도 눈치를 채고 급히 함재기들을 날려보냄으로써 본격적인 전투가 시작되었다.
영국군 함재기들은 모두 복엽기인 글로스터 글래디에이터인 반면, 독일군 함재기들은 Bf109 T형이었다.
전투가 시작되자 독일 해군 항공대 조종사들은 기체의 압도적인 성능을 앞세워 영국군 전투기들을 사냥했다.
“죽어라, 토미들아!”
“뒈져라, 제리들아!”
양측 조종사들의 기량은 서로 비슷한 수준이었지만, 기체의 성능 차이가 너무 컸다.
영국군 조종사들은 적기를 격추시키기 위해서가 아닌, 격추당하지 않기 위해서 안간힘을 써야 했다.
하지만 조종간을 이리저리 틀며 필사적으로 움직여도 어느새 독일기들이 꽁무니에 따라붙어 기총을 난사했다.
“이걸로 두 대째!”
“나도 한 대 잡았다!”
“전투가 아니라 토끼 사냥하는 기분인데!”
간혹 용맹한 조종사가 성능상 우위를 뒤집고 Bf109를 격추하는 일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글래디에이터의 추락으로 끝났다.
전투기의 손실이 눈에 띄게 커지자 영국군은 전투를 중지하고 도주했다.
하지만 이미 적기 사냥에 재미를 붙인 독일 조종사들은 적들이 도망치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영국군은 출격 인원의 3분의 1만 겨우 살아서 도망친 반면, 독일군은 2대가 격추당하고 3대가 경미한 손상을 입는 정도에 그쳤다.
함재기들 간의 첫 전투는 독일 측의 압승으로 끝났다.
독일 해군이 예상보다 만만찮은 상대임을 확인한 영국 함대는 후퇴했다.
그도 그럴 게 영국 해군이 보유한 전함 다수는 나르비크 점령에 투입된 터라 북해의 영국 함대에는 순양전함 리나운과 퀸 엘리자베스급 전함 워스파이트가 전부였다.
반면 독일 해군은 최신예 전함 비스마르크와 샤른호르스트, 그나이제나우까지 도합 3대. 숫자만 따져도 2:3으로 영국군이 불리했다.
승기를 잡았다고 판단한 독일 함대는 전속력으로 영국 함대를 향해 달려들었다.
먼저 Bf109와 Ju87 슈투카가 영국 함대에게 달려들었다.
굶주린 모기떼처럼 달려드는 독일기들의 공격에 영국 해군은 서둘러 대공포를 발사했다.
“씨발, 숫자가 너무 많잖아!?”
“닥치고 쏘기나 해!”
“3시 방향! 서둘러!”
40mm 보포스 대공포에 맞아 몇 대의 적기가 바다로 추락했지만, 독일 조종사들은 이 정도로 겁먹지 않았다.
기괴한 사이렌 소리에 영국 수병들이 놀란 틈을 타, 슈투카들은 폭탄을 투하했다.
요란한 폭음이 대공포 발사음을 집어삼켰다.
거대한 오렌지색 공이 생겨나더니, 검은 연기로 변해 하늘로 솟구쳐 올랐다.
“좋았어!”
“성공이다!”
순식간에 구축함 2대가 슈투카들의 제물이 되었다.
폭발의 충격으로 바다에 떨어진 수병들은 자신들이 타고 있던 배가 차가운 북해 바닥을 향해 가라앉는 광경을 놀란 눈으로 지켜봤다.
전투가 한창인지라 수면 위를 떠다니는 생존병들은 방치될 수밖에 없었다. 비정한 말이지만, 지금은 아군 몇 명을 구조하는 것보다 눈앞의 적기들을 한 대라도 더 많이 격추시키는 게 더 중요했다.
전투의 혼잡함으로 아군 함선들에게 외면당한 생존병들은 차가운 북해 위를 하염없이 떠다니며 추위에 이를 떨었다.
글래디에이터들도 재차 발진하여 독일기들을 상대로 악착같이 싸웠지만, 독일군 조종사들의 전과만 올려줄 뿐이었다.
그나마 살아남았던 함재기들도 거진 다 격추되었고, 독일 함대와의 거리도 좁혀졌다.
영국 함대의 두 전함, 워스파이트와 리나운도 적기와의 교전으로 피해를 입었다.
리나운은 기관부에 어뢰를 맞았고 워스파이트는 슈투카가 투하한 포탄에 맞아 15인치 42구경장 주포를 장착한 포탑 한 대가 완전히 파괴되었다.
숙련된 선원들의 데미지 컨트롤로 두 함선 모두 아직까지는 전투가 가능했다.
그러나 속력은 급격히 떨어졌고 전함에서 가장 중요한 화력이 약화된 것 또한 매우 큰 문제였다.
***
“좌현 견시 보고! 적 대형함 함영! 거리 25,000!”
뤼첸스는 심장이 터져버릴 것만 같았다.
이번이 비스마르크를 타고 나가는 첫 실전인데다 하늘이 도우셨는지 코앞의 영국 함대는 전함이 달랑 두 척뿐.
항공모함 한 척과 구축함 여러 대도 있지만, 함재기들을 잃은 항공모함은 바다에 떠다니는 표적일 뿐이고 구축함들도 전함의 상대가 되질 못한다.
마치 신이 어디 한 번 마음껏 날뛰어보라고 작정하고 깔아준 판 같았다.
일본인 기술자가 만든 신형 레이더도 큰 도움이 되었다.
레이더는 그라프 체펠린에서 발진한 Ar196보다 먼저 적 함대를 발견하여 승무원들이 전투 태세에 돌입할 수 있게끔 만들어주었다.
명령만 내리면 주포는 당장 불을 뿜을 수 있었다. 비스마르크의 함장 린데만 대령도 뤼첸스처럼 얼굴이 흥분과 긴장으로 뒤섞여 있었다.
지금까지 이 순간을 얼마나 기다려왔던가.
저 가증스러운 토미들에게 크릭스마리네의 진가를 보여줄 순간이 드디어 온 것이다.
“거리 23,000!”
“적이 물러나고 있습니다!”
돌격하는 대신 후퇴하고 있다는 뜻은, 분명 이쪽에게 상대가 되지 않거나 함선에 문제가 생겼다는 뜻이렷다. 뤼첸스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가장 가까이에 있는 영국 전함은 퀸 엘리자베스급 전함인 듯했다. 그 뒤에 있는 놈이 아마도 리나운급 순양전함일 테고.
비스마르크의 첫 번째 먹잇감으로는 알맞은 놈들이다.
독일 역사상 최고의 위인의 이름이 붙은 거대 전함의 첫 전과가 조그만 구축함이면 체면이 서겠는가.
“목표, 퀸 엘리자베스급 전함! 발사!”
뤼첸스의 입에서 벼락 같은 고함이 터져 나왔다.
비스마르크의 1번, 2번 포탑이 거의 동시에 불을 뿜자, 육중한 굉음이 허공을 강타하고 충격파로 바다에 거대한 균열이 생겼다.
재수없이 비스마르크 근처를 비행하던 갈매기들이 충격파를 맞고 바다로 추락했지만, 어느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았다.
제독부터 말단 수병까지 모두의 신경은 바다 너머의 적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워스파이트는 지독하게 운이 없었다.
비스마르크의 초탄에 측면을 적중당한 워스파이트는 거대한 불길을 토해냈다.
“좌현 견시 보고! 명중탄입니다!”
“좋아! 계속 쏴라!”
초탄에 적 전함을 명중시킨 것은 가히 기적이라고 할 수 있었다.
뤼첸스만큼이나 흥분한 린데만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워스파이트의 주포도 서둘러 불을 뿜었지만, 비스마르크처럼 초탄에 명중시키지 못하고 거대한 물기둥만 여럿 만들었다.
4번째로 발사한 포탄이 드디어 비스마르크에 닿았다. 하지만 비스마르크는 아무 일 없다는 듯 주포에 불을 당겼다.
속사능력을 포기하면서 얻어낸 380mm 3연장 주포의 위력은 가히 상상을 초월했다.
거기에 지옥훈련으로 다져진 승조원의 숙련도까지 더해지자 비스마르크는 일방적으로 워스파이트를 두들겨 팼다.
리나운도 비스마르크를 향해 포격했지만, 녀석의 상대는 따로 있었다.
비스마르크의 뒤에 바짝 붙어 따라온 샤른호르스트와 그나이제나우도 포격전에 가세한 것이다.
“계속 명중탄입니다!”
“훈련의 보람이 있군. 아주 좋아!”
덩달아 신이 난 듯한 부하의 보고에 린데만은 악마처럼 웃었다.
승조원들의 숙련도가 많이 부족한 듯 하니, 더욱 훈련에 매진했으면 좋겠다는 총통의 조언 아닌 조언을 받고 승조원들을 빡세게 굴린 보람이 있었다.
누가 그러지 않았던가.
훈련에서 땀 한 방울을 더 흘릴수록 실전에서 피 한 방울을 덜 흘릴 것이라고.
훈련 중에 웃음을 보였다는 이유로 수병 한 명을 쥐잡듯이 갈구던 뤼첸스조차 지금 상황이 만족스러운지 만면에 웃음을 가득 띤 채 주먹을 흔들었다.
“이게 바로 독일 해군의 힘이다! 독일 해군이라고!”
가뜩이나 포탑 한 대가 박살난 상황에서 초탄까지 얻어맞고 포격전에 돌입한 워스파이트는 팔과 다리가 부러진 상태에서 싸우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승조원들은 포탄 한 발이라도 더 쏘려고 사력을 다했지만, 적은 너무 강했고 그들은 운이 없었다.
워스파이트는 비스마르크를 비롯한 독일 전함들의 포격을 견디지 못하고 끝내 격침당하고 말았다.
전함이 완전히 침몰하기 전, 생존한 수병들은 차가운 바다로 몸을 던졌다.
워스파이트의 침몰을 확인한 비스마르크는 그제야 포격을 멈췄다. 하지만 리나운은 아직 살아있었다.
“워, 워스파이트가 당했습니다!”
“젠장, 빌어먹을 제리 새끼들!”
“계속 쏴라! 밀리면 안 된다!”
워스파이트가 격침당하자, 리나운의 승조원들은 이를 악물고 싸웠다.
그들 모두 여기서 살아서 돌아가는 게 불가능한 일임을 알았다.
그렇기에 그들은 죽기 살기로 싸웠다. 죽을 때 죽더라도, 적 한 명이라도 더 저승으로 데려가고 싶었다.
영국 수병들의 분투는 헛되지 않았다.
리나운이 쏜 포탄 한 발이 비스마르크의 우다 레이더에 명중한 것이다. 충격파로 뤼첸스는 중심을 잃고 뒤로 넘어졌다.
“우웃!”
“피, 피해 보고! 레이더 피탄!”
빌어먹을.
적 전함을 잡은 것에 너무 기뻐했던 탓일까. 방심한 사이 적탄에 레이더가 피탄당하고 말았다. 당연히 레이더는 기능 정지.
레이더뿐만 아니라 거리 측정기도 함께 파괴되었다. 뤼첸스는 당황한 승조원들을 보며 혀를 찼다.
포탑에 부착된 거리 측정기를 통한 직접조준사격으로 전환할 수 있지만, 통합 일제사격이 불가능하니 명중률이 급격히 떨어질 터였다.
“후퇴한다. 계속 쏴봤자 아까운 포탄만 낭비할 뿐이야.”
“알겠습니다, 각하.”
린데만은 입맛을 다시며 고개를 끄덕였다. 레이더와 거리 측정기가 파괴된 것 외에 두드러지는 피해가 없다는 것이 그나마 위안이었다.
리나운의 포탄이 추가로 날아와 비스마르크의 3연장 주포 포탑에 명중했지만, 장갑을 뚫지 못하고 도탄되었다. 도탄된 포탄은 북해에 빠졌다.
레이더가 파괴된 비스마르크를 대신해 샤른호르스트와 그나이제나우가 전면에 나섰다.
이미 리나운도 포탄을 얻어맞아 간신히 바다에 떠 있는 상태. 비스마르크가 빠져도 리나운에겐 승산이 없었다.
리나운을 끝장낸 것은 샤른호르스트였다.
잠시 포격을 멈추고 비스마르크의 우측으로 이동한 샤른호르스트는 모든 화력을 리나운의 측면에 쏟아부었다.
사격제원을 처음부터 새로 뽑아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지만, 만신창이가 된 리나운을 상대론 충분히 해볼만한 도박이었다.
샤른호르스트의 380mm 주포가 일제히 불을 뿜자, 리나운은 대폭발을 일으키며 두 동강 났다.
격침이었다.
“리나운급 순양전함 격침!”
“이야아아!!!”
비스마르크의 승조원들은 미친 듯이 기뻐했다. 비록 비스마르크가 격침시킨 것은 아니지만, 적함에 상당한 손실을 입혔으니 어느 정도의 공로는 있었다.
전함과 구축함들이 시간을 끄는 동안 부리나케 도주하던 커레이저스급 항공모함 글로리어스의 승조원들은 워스파이트가 리나운이 차례대로 가라앉자 망연자실했다.
이 순간, 영국 함대에 남은 전함은 한 척도 없었다.
가장 큰 방해물이었던 전함을 모두 격침시켰으니, 남은 목표물은 항공모함 한 척뿐이었다.
샤른호르스트와 그나이제나우의 주포가 일제히 글로리어스를 조준했다.
“쏴!”
“쏴아!”
글로리어스 주변으로 높이 십수m 짜리 물기둥이 솟구쳤다.
두 번째 포격에서 글로리어스는 항공갑판이 파괴되었다.
갑판위는 함재기 한 대 없이 깨끗했다. 적함의 주포탄에 명중하기 훨씬 전에 함재기들은 이미 모두 격추되었기 때문이었다.
항공갑판에 이어 함교가 피격된 글로리어스는 장장 30분에 걸쳐 독일 전함들에게 일방적으로 두들겨맞다가 격침되었다.
최후까지 살아남은 구축함 3척은 전속력으로 도주했다.
그들에겐 천만다행히도 독일 해군은 추격을 포기했다. 정확히는 추격을 포기한 게 아니라 추격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 것이지만.
이미 전함 두 척과 항공모함 한 척 격침이라는 대전과를 올린 마당에 구축함 3척을 마저 잡자고 귀한 연료를 소비할 필요는 없었다.
전투가 벌어졌던 북해에는 저체온증으로 죽은 승조원들과 격침당한 군함에서 흘러나온 기름띠가 둥둥 떠다녔다.
멋모르고 착수(着水)한 재갈매기 한 마리가 기름띠에 엉겨 힘없이 울부짖었다.
불에 그을리고 토막난 사람의 시체에서 흘러나온 피 냄새를 맡은 물고기들이 전투의 현장에 몰려들었다.
수많은 생명들의 목숨을 앗아간 참혹한 전투의 그늘 아래에서는 바다생물들의 연회가 열렸다.
연회는 오랫동안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