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짜 전쟁 (3)
독일이 내년에 있을 결전을 준비하는 사이 영국과 프랑스도 마냥 놀고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폴란드가 한 달을 채 넘기지 못하고 무너졌소. 95만 대군을 보유한 그 폴란드가!”
“독일군이 보통 군대가 아니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로 강력할 줄이야.”
4주 만에 동유럽의 강국 폴란드를 무너뜨린 독일군의 모습을 보고 세계는 충격과 공포에 빠졌다.
특히, 이들과 싸워야 할 영국과 프랑스의 충격은 더더욱 컸다.
“독일군의 2호 전차와 LT-35, LT-38 전차는 크게 문제 될 게 없는 성능이오. 진짜 문제는 바로 4호 전차요.”
“폴란드군이 보유한 어떤 전차도 독일군의 4호 전차를 상대로 열세였습니다. 운 좋게 측면이나 후면을 노려서 격파에 성공한 사례도 있습니다만, 대부분 적에게 제대로 된 타격조차 주지 못하고 격파당했습니다.”
“폴란드군 병사들의 증언에 따르면, 한 4호 전차는 기습을 받은 상황에서 역으로 전차 4대를 격파했답니다. 폴란드군의 빅커스 전차가 쏜 포탄은 모조리 도탄되었답니다. 심지어 측면을 명중한 포탄조차 말입니다.”
“용의 비늘로 만든 것도 아니고, 그게 가능하단 말인가?”
4호 전차가 폴란드에서 보여준 활약은 양군 수뇌부를 긴장시키기에 충분했다. 증언만 들으면 괴물이 따로 없는 성능이었기 때문이다.
“저희가 알아낸 바로는 차체 전면장갑의 수치는 80mm, 포탑 전면장갑은 50mm, 차체 측면은 30mm, 차체 후면은 20mm라고 합니다. 아군이 보유 중인 보이즈 대전차소총으로는 90m 거리까지 접근해 후면을 노려야만 겨우 손상을 입힐 수 있습니다.”
“허어, 이거 참.”
“90m까지 접근해야 한다고? 그것도 후면을 노려야만? 병사들이 잘도 해내겠군!”
영국군과 프랑스군이 사용 중인 보이즈 대전차소총은 90m 거리에서 수직장갑 23mm를 관통할 수 있었다.
즉 4호 전차를 상대로 정면과 측면에서는 이빨이 먹히지 않는다는 소리였다.
전차 정면의 기관총좌와 조종수 관측창을 노린다면 전차의 전투력을 상당 부분 깎아 먹을 수 있지만, 그게 보통 일이 아니라는 것쯤은 높으신 분들도 알고 있었다.
굳이 약점을 노리지 않아도 적에게 손상을 입힐 수 있어야지!
영국군의 2파운더 대전차포와 프랑스군의 호치키스 25mm 대전차포는 그나마 전망이 밝았다.
측면을 노린다면 이론상 1km 거리에서도 관통이 가능하고 정면의 경우 포탑만 집중해서 노리면 500m에서 관통할 수 있으니 말이다.
영국군은 자국 대전차포의 성능이 충분하다고 판단, 위력이 다소 떨어지는 대전차소총에 집중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운용하려면 최소 4명 이상의 인원이 필요한 대전차포와 달리, 대전차소총은 보병 한 명으로 충분히 운용이 가능했다.
영국군 수뇌부는 바로 여기에 주목했다.
“대전차포보다 대전차소총이 훨씬 가격도 싸서 더 많이 생산할 수 있소. 운용에 필요한 인원도 병사 1, 2명이면 충분하고.”
“언제 독일군이 쳐들어올지 모르니, 최대한 많은 숫자의 대전차소총을 찍어내 병사들에게 들려줘야 합니다!”
가격도 비싸고, 인원도 많이 필요한 대전차포보다 대전차소총으로 보병들을 무장시키는 것이 보다 나은 선택이라고 판단한 영국군은 즉시 신형 대전차소총 개발에 들어갔다.
영국군 수뇌부가 건 조건은 최소 200m에서 30mm 장갑판을 관통할 수 있어야 하고 보병들이 들고 다닐 수 있도록 무게는 20kg을 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예로부터 높으신 분들의 충실한 노예였던 기술자들이 달라붙어 열심히 머리를 굴린 결과, 석 달 만에 결과물이 나왔다.
이름하여 킹스 대전차 소총.
“새로 개발한 14×120mm 철갑탄을 사용하여 200m에서 수직장갑 35mm를 관통할 수 있고, 무게도 ‘겨우’ 22kg 밖에 나가지 않습니다!”
“오오오.”
목표치였던 20kg보다 무게가 2kg가량 늘어난 게 조금 아쉽지만, 그래도 이게 어딘가. 22kg 정도면 보병 한 명이 들고 다닐 수 있는 무게고, 관통력도 보이즈 대전차소총보다 뛰어나다.
신형 무기의 성능에 만족한 영국군은 즉시 대량생산을 시작했다.
프랑스군의 대응은 영국군과 조금 달랐다.
어차피 대전차소총은 영국으로부터 수입해 사용했기에 프랑스군은 대전차소총 대신 전차의 성능 개량에 집중했다.
프랑스군이 보유한 최강의 전차는 소뮤아 S35 기병전차와 샤르 B1 bis 보병전차, 이 둘인데 둘 다 방어력은 괜찮았지만 화력이 문제였다.
“샤르 B1은 그래도 차체에 장착된 75mm 주포가 있지만, 문제는 소뮤아 S35요.”
소뮤아 S35에 정착된 포탑은 샤르 B1에 장착된 포탑과 같은 물건으로, 47mm SA35 전차포 1문이 달려 있다.
“47mm 전차포의 성능이 나쁜 것은 아니지만, 4호 전차의 80mm 전면장갑을 관통할 수 없소. 포탑조차 400m 이내에서야 관통이 가능하고.
따라서 보다 크고 강한 포를 탑재해야 하오.”
프랑스군이 보유한 화포 중에 47mm보다 화력이 강한 포는 75mm급 이상의 포들 뿐이었다.
관통력만 따지면 호치키스 25mm 포도 있지만, 25mm라는 소구경 때문에 보병용으론 적절치 않았다.
결국 낙점된 것은 75mm 포였는데, 기존 포탑에 탑재하기엔 포가 너무 컸다.
“주포를 탑재하기에 포탑이 너무 작다고?”
“그럼 포탑을 새로 만들면 되지!”
틀린 말은 아니었다. 기존 포탑이 작아 포를 탑재할 수 없으면 포탑의 크기를 키우는 것은 당연한 이치니까.
그렇게 1940년 3월, 신형 포탑이 완성되었다.
완성된 신형 포탑에는 모두의 염원인 75mm 주포를 탑재하는 게 가능했다.
그런데,
“어······ 포탑이 너무 커진 거 아닙니까?”
“포탑 크기가 거의 차체에 맞먹는 것 같은데?”
신형 포탑의 크기는 예상보다 훨씬 컸다.
한눈에 봐도 이전 포탑의 1.5배는 더 커 보이는 크기에, 시제품을 보러 온 프랑스군 관계자들은 황당함을 표했다.
이건 커도 너무 크지 않나?
“75mm 주포를 탑재하기 위해선 어쩔 수 없었습니다. 그나마 최대한 작게 만든 게 이 정도고, 다른 놈들은 차체가 견디지 못했습니다.”
“그렇다면 뭐······.”
“별수 없지요.”
신형 포탑을 장착한 결과, 무게가 19.5t에서 21톤으로 증가했지만 수뇌부는 큰 문제는 아니라고 판단했다. 아무튼 75mm 주포를 달았으면 됐지!
‘소뮤아 S40’으로 명명된 신형 전차는 최전선의 부대로 보내졌다.
처음엔 신형 전차를 받게 되어 병사들은 기뻐했지만, 기쁨의 탄성은 얼마 못 가 분노의 탄식으로 바뀌었다.
“포탑은 전보다 더 큰데, 내부는 더 좁잖아! 장난하냐?”
“무전기도 여전히 안 달려 있고,”
“해치도 없는 건 똑같군.”
전투력은 상승했어도 그 외의 문제점은 전작과 달라진 게 없었다.
큐폴라는 있는데 해치가 없어서 포탑 후면에 달린 출입구로만 들어가야 했으며 무전기가 없어 수기를 통해 명령을 하달해야 했다.
가뜩이나 약하기로 유명했던 현가장치는 자주 파손되었고 속도도 느려졌으며 탄약 적재량은 84발에서 40발로 반 이상 줄었다. 탄약 무게 때문에 장전 시간이 늘어난 것은 덤이었다.
S40이 S35보다 나은 점은 오직 화력 하나뿐, 안 그래도 많은 단점은 더욱 늘었다.
“이, 이런 놈을 타고 독일군과 싸우라고······?”
“차라리 S35가 더 낫겠다!”
전차병들의 절규에도 불구하고, 프랑스군 수뇌부의 생각에는 변함이 없었다.
어차피 전장에서 싸우는 것은 병사들이지, 자신들이 아니었으니까.
***
1939년 10월 25일
핀란드 헬싱키 대통령관저
영국과 프랑스, 독일이 각자의 방식으로 예정된 결전을 준비하는 동안, 북유럽 끝자락에 자리잡은 핀란드는 소련의 협박에 시달리고 있었다.
“이, 이게 정녕 소련의 요구란 말이오?”
핀란드의 대통령 퀴외스티 칼리오는 어처구니없음을 넘어 분노까지 느꼈다.
동석한 아이모 카얀데르 총리도 증오가 가득 담긴 시선으로 소련의 특사 몰로토프를 노려봤다.
분노와 증오가 담긴 두 시선을 동시에 받으면서도 몰로토프는 눈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되려 그들의 시선이 재밌다는 듯이 웃어 보이기까지 했다.
“겨우 이 정도로 놀라시면 어떡합니까? 스탈린 동지께서는 귀국의 사정을 감안하여 최소한의 조건만 요구하셨는데요.”
“이게 최소한의 요구라고? 어처구니가 없군!”
“이건 승자의 요구가 아니오!”
카얀데르도 참지 못하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러거나 말거나 몰로토프의 태도에는 여전히 변화가 없었다.
칼리오는 저자의 거만함과 여유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인지 곰곰이 생각했다.
태어났을 때부터 배짱이 크고 담력이 두둑해서?
절대 아니다.
저자는 자신의 위치, 정확히는 자신의 조국의 위치를 믿고 있기에 저리 거만하게 굴 수 있는 것이다. 역겨운 돼지 새끼 같으니라고······.
당장 저 가증스러운 면상에 주먹을 날리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는 현실이 안타까울 따름이었다.
‘이 나라에 조금만 더 힘이 있었더라면, 저자의 태도도 분명 달랐을 테지.’
차오르는 한숨을 억누르며 칼리오는 다시 한번 소련의 요구사항이 담긴 문서를 읽었다.
- 카렐리아와 라플란드 지역을 포함해 2,300k㎡에 달하는 영토를 소련에 할양할 것.
- 수르사리 섬 등 핀란드 만의 4개 섬과 올란드 제도를 소련에 할양할 것.
- 헬싱키, 항코, 투르쿠, 코트카, 비푸리를 비롯한 핀란드의 주요 항구를 30년 동안 소련에 조차하며, 이들 지역에 대한 소련군 주둔을 승인할 것.
다시 읽어봐도 어처구니없는 조건이었다.
핀란드의 주요 공업지대이자 상당한 인구가 거주하는 카렐리아와 라플란드 지역을 넘기라는 소리는 핀란드더러 평생 깡촌으로 지내라는 것과 다름없었다.
올란드 제도도 중요한 해상 요충지였고 수도 헬싱키를 비롯한 각종 항구들의 중요성은 말할 필요가 없었다.
그 대가로 소련은 핀란드에게 5500k㎡에 달하는 동부 영토를 할양하겠다고 제안했지만, 소련이 내놓겠다고 제안한 영토는 호수와 늪지뿐인 가져도 그만이고 안 가져도 그만인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땅이었다.
“우리 국민들 중 어느 누구도 귀국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못할 거요.”
“그건 핀란드 국민들이 알아서 할 문제고, 저는 지금 대통령 당신께 묻고 있는 겁니다. 당신은 이 나라의 대통령이 아닙니까. 스스로 결정하셔야지요.”
한 나라의 외무장관의 태도치곤 오만방자하기 짝이 없었다.
일반적인 외교관이 저런 태도를 보였더라면 바로 추방을 당해도 할 말이 없을 터였다.
조국의 힘만 믿고 안하무인으로 구는 상대에게 칼리오는 증오를 넘어 살인충동까지 느꼈다.
“내 하나 묻겠소. 귀국이 갑자기 우리에게 이런 무리한 요구를 해온 이유가 대체 무엇이오?”
“간단합니다. 귀국의 존재 자체가, 소비에트 연방에 큰 위협이 되고 있기 때문이죠.”
“허, 이처럼 작은 나라가 귀국처럼 거대한 나라에게 무슨 위협이 된단 말이오?”
“정말로 몰라서 묻는 겁니까? 핀란드 국경 바로 아래에 레닌그라드가 있지 않습니까. 귀국이 언제든지 나쁜 마음을 먹는다면, 레닌그라드는 불바다가 되고 맙니다. 레닌그라드와 도시에 살고 있는 무고한 인민들의 안전을 위해서 우리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생각입니다.”
레닌그라드의 안전 운운은 어디까지나 핑계일 뿐, 약소국인 핀란드를 집어삼키겠다는 야욕 때문이겠지. 칼리오는 이를 악물었다.
“그렇소? 소련이 이토록 겁이 많은 나라인 줄은 몰랐소만. 이제부터 잘 알겠소이다.”
칼리오의 비아냥에 몰로토프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이번 공격은 통했나 보군.
“대답이나 하시지요. 그래서, 어떻게 할 겁니까? 요구를 받아들일 겁니까?”
칼리오의 답변은 간결했다.
“안 되오.”
대통령의 답을 들은 몰로토프는 더는 말할 필요도 없다는 듯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두 핀란드인을 바라보는 몰로토프의 시선에는 경멸과 혐오가 가득했다. 그의 비틀린 웃음이 더욱 일그러졌다.
“내 역할은 이제 끝났소. 나머지는 붉은 군대가 말할 것이오.”
몰로토프는 인사조차 하지 않고 성큼성큼 걸어서 문을 열고 나갔다.
멀어져가는 몰로토프를 칼리오는 말없이 지켜봤다.
“이제 어떡하지요?”
총리의 물음에 대통령은 땅이 꺼져라 한숨을 토해냈다.
협상 같지도 않은 협상이었지만, 아무튼 협상이 파토났으니 이제 남은 것은 전쟁뿐이었다.
늦어도 이번 해가 끝나기 전에 소련은 쳐들어올 것이다.
“이미 주사위는 던져졌네. 싸우지도 않고 노예가 될 바에는, 차라리 싸우기라도 해야지.”
“즉시 의회와 만네르하임에게 알리겠습니다.”
칼 구스타프 에밀 만네르하임.
핀란드군 총사령관이자 스웨덴인의 피가 흐르는 오만하기 짝이 없는 귀족 나으리.
러일전쟁과 1차대전에 참전한 경력이 있고 핀란드 내전에서 혁혁한 공을 세워 오늘날의 핀란드를 있게 한 만네르하임은 핀란드 국민들에게 영웅으로 떠받들어지고 있지만, 칼리오는 그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귀족 출신인 그는 자신을 부를 때 남작이라는 칭호를 붙이지 않으면 상대가 누구든 간에 짜증을 냈고 가뜩이나 없는 살림에 군비 증강을 주장하여 내각과 자주 충돌했다.
대통령을 대할 때도 만네르하임의 태도에는 변함이 없었다.
만네르하임은 툭하면 사령관직 못 해 먹겠다며 사표를 제출했고, 그럴 때마다 칼리오는 마음에도 없는 말을 늘어놓으며 만네르하임을 달래야 했다.
사직서를 수리하고 싶어도, 만네르하임이 아니고선 핀란드군을 이끌 책임자가 없기 때문이었다.
“만네르하임······ 그래, 이번만큼은 그 친구를 믿을 수밖에.”
헬싱키 거리가 피로 뒤덮이고 밤마다 총성이 울리던 내전의 참상을 생생히 기억하는 칼리오는 다가올 전쟁의 참상에 몸서리쳤다.
이번에는 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고 다칠지······.
“부디 신이 이번에도 핀란드를 도와주시길.”
***
1939년 10월 27일
소련 모스크바 크렘린 궁전
“그자들이 결국 우리 제안을 거절했다고?”
“예, 서기장 동지.”
티스푼으로 월귤잼을 한가득 퍼 입으로 옮기던 스탈린은 미소를 지었다.
“핀란드 놈들, 가진 건 쥐뿔도 없는 주제에 끝내 자존심을 선택했군. 자존심이 밥을 먹여주는 것도 아닌데 말이야.”
“어리석은 작자들입니다.”
뼛속까지 공산주의자지만, 제국 시절 러시아의 위용에 향수를 가지고 있는 스탈린은 이번 기회에 잃어버린 러시아 제국의 위상을 되찾을 계획이었다.
폴란드를 무너뜨렸으니 이제 남은 건 핀란드 같은 소국뿐.
핀란드를 제압하면 발트 3국은 알아서 소비에트의 품으로 기어들어 올 것이다.
그렇게 발트해를 평정하고 난 뒤에는 스웨덴이나 터키 둘 중 한 곳을 노릴 생각이다.
그다음엔 루마니아, 루마니아 다음에는 발칸 전체를 손에 넣으리라.
스탈린은 위대한 붉은 군대가 헬싱키 시가지에서 개선행진을 벌이는 광경을 상상하며 차를 음미했다.
오늘따라 차가 더욱 달고 향기롭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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