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르샤바로 가는 길 (1)
영프의 참전 소식에 환호했던 폴란드인들은 전쟁이 터지고 일주일이 다 되도록 영프가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자 당황했다.
“왜 아직까지 영국과 프랑스는 가만히 있는 거지? 지금쯤 독일로 밀고 들어갔어야 정상 아냐?”
“독일 놈들이 바르샤바로 진격하고 있다는데······.”
“이, 이러다가 정말로 나라 망하는 거 아냐?”
“재수없는 소리하지 마, 새꺄! 말이 씨가 된다는 말 몰라?”
속이 타는 것은 폴란드군 수뇌부도 마찬가지였다.
영프의 선전포고에 한숨 돌리고 있었는데, 여태껏 아무 소식이 없다니.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한단 말인가?
개전 첫날에 공습으로 불바다가 된 바르샤바를 버리고 브레스트로 도망친 폴란드 정부는 동맹국 영국과 프랑스에게 서둘러 독일 서부를 공격해달라고 요청했지만, 그럴 때마다 두 국가는 난색을 표했다.
아직 군의 준비가 완료되지 않았다, 적의 계획도 모르는데 섣불리 공세를 가할 수 없다, 국내 여론의 반대가 심하다 등등.
영프가 미적거리는 동안 독일군은 진격에 진격을 거듭했고,
9월 8일.
독일군 제4기갑사단과 제31보병사단이 바르샤바 서쪽 외곽지역에 도달하면서 바르샤바 전투가 시작되었다.
***
1939년 9월 10일
바르샤바 외곽 폴란드군 방어선
“줄 서, 이 새끼들아! 줄 서라고! 줄!”
급양관을 맡은 중사가 목청이 쉬도록 소리쳤지만, 이미 굶주림에 이성을 잃은 병사들에겐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이등병부터 병장까지 모든 병사들이 먼저 배식을 받기 위해 서로 드잡이질을 했다. 배고픔 앞에서는 규율도, 계급도 통하지 않았다.
결국 헌병들이 투입되어 개머리판과 곤봉으로 병사들을 두들겨 팬 끝에 겨우 질서가 잡혔다.
“조금만 더 줘, 조금만.”
“충분히 줬잖아. 얼른 가!”
“감자 하나만 더 줘! 3일 동안 물 한 모금밖에 못 마셨어. 이번이 첫 식사란 말이야! 제발, 응?”
누더기나 다름없는 군복을 걸친 채 감자 한 조각을 애걸하는 병사들의 간절한 외침에 마음이 약해진 취사병은 국자로 감자 조각을 퍼 반합에 담아줬다.
“이제 꺼져. 다음!”
천신만고 끝에 배식을 받은 얀은 폭격으로 부러진 참나무 근처로 향했다. 그리고 누가 볼세라 잽싸게 수프를 퍼먹었다.
감자와 순무를 맹물에 소금도 넣지 않고 끓인 수프였지만, 오랫동안 굶주린 그에겐 진수성찬이나 다름없었다.
감자는 설익었고, 순무에선 시큼한 맛이 났지만 얀은 음식을 먹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였다.
개전 첫날, 국경 인근에서 독일군의 공격을 격퇴한 얀의 중대는 전투가 끝나고 1시간 뒤 상부로부터 퇴각 명령을 받았다.
남쪽을 담당하던 아군의 방어선이 돌파당해 퇴각이 불가피하다는 것이었다.
기껏 잘 구축된 진지를 버리고 퇴각하던 얀의 중대는 이동 도중에 적기의 공습을 받았다.
독일군이 자랑하는 급강하폭격기, Ju87 슈투카의 눈에 발각되고 만 것이다.
슈투카는 단 2대뿐이었지만, 그 2대에게 얀의 중대는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고 말았다.
중대장과 소대장은 전사했고, 일부 병사들은 무기를 버리고 도주했다.
위생병이 전사하는 바람에 치료할 사람이 없어 부상병들은 그대로 방치되었다.
다들 제 한 몸 간수하기도 힘든 처지라 누굴 도울 수가 없었다.
생존자들은 울부짖는 부상병들을 내버려 둔 채 끝없는 여정에 올랐다.
병사들은 적기의 눈에 띄지 않으려고 숲을 통해서만 이동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을 놓을 때쯤이면 어김없이 적기가 나타나 폭탄을 떨구거나 기총소사를 퍼부었다.
다음날, 본대와 합류한 중대원들의 숫자는 얀을 포함하여 10명도 되지 않았다.
겨우 쉬는가 했더니, 상부로부터 새 명령이 하달되었다. 적이 전선을 돌파했으니 급히 방어선을 형성하여 적을 막으라는 것이다.
그렇게 얀은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하고 참호 구축에 투입되었다.
몸에 힘이 하나도 없어 야전삽은 번번이 지면에 튕겨 나왔다.
보다 못한 장교가 자신의 수통을 건네자 얀은 간신히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참호를 반쯤 팠을 때, 독일군이 공격해왔다.
얀은 반쪽짜리에 참호에 들어가 쭈그려 앉은 채로 전투를 치러야 했다.
“사격 개시!”
지휘를 맡은 소령의 명령에 따라 전 병사들이 일제히 사격을 가했다. 독일군 몇 명이 빙판길에 미끄러지듯이 쓰러졌다.
전투가 시작되자 독일군도 바닥에 엎드리거나 장갑차 뒤에 숨어 폴란드군을 향해 사격했다.
Sd.Kfz 222 정찰장갑차가 20mm 기관포를 발사하자, 폴란드군 진영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허억!”
재장전하던 얀은 옆 참호에 있던 병사 둘이 기관포에 맞아 걸레짝이 되자 자기도 모르게 숨을 멈추었다.
산산조각난 육체의 살점과 내장 조각이 뺨과 군복에 달라붙어 있었다.
“우웨에에엑!”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 얀은 구토를 했다. 안으로 들어간 건 없는데, 밖으로 나오는 건 많았다.
한참을 쏟아내고, 위가 텅텅 비어 더는 쏟아낼 게 없자 구토가 멈췄다. 시큼한 위액 냄새가 코를 찔렀다.
간신히 정신을 차린 얀의 눈에 연기를 뿜어대는 독일군의 장갑차가 보였다. 아군 대전차소총과 대전차포가 해치운 것이다.
“전차다! 전차가 나타났다!”
그러나 산 넘어 산이라고, 장갑차를 해치우자 이번에는 전차가 나타났다. 독일군 기갑부대의 주력이라 할 수 있는 4호 전차였다.
“발사!”
대전차소총 3정이 연이어 발포됐지만, 적 전차는 총탄을 모조리 튕겨냈다. 300m에서 15mm를 관통하는 Wz.35로 4호 전차를 격파하기란 불가능했다.
“젠장, 다 튕겨나오잖아?!”
“무슨 저런 괴물이 다 있어?”
대전차소총이 통하지 않자 대전차포가 나섰다.
스웨덴제 보포스 37mm 대전차포가 4호 전차의 전면장갑을 향해 철갑탄을 발사했다.
하지만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다. 두께가 80mm에 달하는 4호 전차의 전면장갑은 37mm 철갑탄을 가뿐하게 튕겨냈다.
대전차포를 튕겨내는 전차라니. 이런 건 들어보지도 못했는데.
포수가 재차 발포했지만, 이번에도 포탄은 적의 장갑을 뚫지 못하고 허공으로 튕겨 나갔다.
4호 전차의 포탑이 돌아가더니 뭉툭한 75mm 주포에서 섬광이 터졌다.
75mm 유탄 한 발에 대전차포병들은 전멸하고 말았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대전차포 주변에 있던 탄약까지 폭발에 휘말려 일제히 유폭하는 바람에 피해는 더욱 커졌다.
“으아, 으아아아아!!!”
“위생병!”
팔이나 다리가 날아간 병사들이 비명을 지르고, 몸에 불이 붙어 허우적대던 병사들이 공축 기관총에 벌집이 되었다.
4호 전차를 앞세운 독일군의 공격으로 폴란드군의 방어선은 삽시간에 붕괴되었다. 얀은 또다시 패잔병 신세가 되었다.
그래도 이번에는 운이 조금 따라주는 편이었다. 정처없이 걷던 그는 마침 바르샤바 방면으로 퇴각하던 아군 수송부대와 만나 트럭을 얻어탈 수 있었다.
트럭에는 부상병들로 가득했다.
파편에 피부가 찢어지거나, 화상을 입은 병사들은 그나마 경상자들에 속했다.
많은 병사들이 손이나 다리를 잃고 대충 감은 붕대와 지혈대에 의지하며 고통을 인내하고 있었다.
후방의 야전병원에 도착할 때까지, 부상병들의 입에선 신음과 물을 찾는 소리가 끝없이 흘러나왔다.
“저 친구, 살아있는 거 맞아? 암만 봐도 죽은 거 같은데.”
앉을 자리가 없어 서서 가야 했던 얀이 옆의 병사에게 말했다.
짐칸 바닥에 누운 부상병들 중에 몇 명은 이미 죽은 것 같았다. 살아있는 사람이라곤 도저히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피부가 퍼렜기 때문에 금방 눈에 띄었다.
“별수 없지, 뭐. 그래도 이 친구들은 그나마 운이 좋은 거야.”
“어째서?”
“진흙탕 속에서 홀로 죽는 것보단 낫잖아.”
“······.”
병사의 말대로 트럭에서 죽은 이들은 그나마 운이 따라준 편이었다.
셀 수 없이 많은 병사들이 도움조차 받지 못한 채 전장에 방치되어 숨을 거뒀으니 말이다.
이미 죽은 자들에겐 해당되지 않았지만, 그래도 신이 그들을 완전히 저버린 건 아닌 모양인지 바르샤바에 도착할 때까지 하늘에 적기는 나타나지 않았다.
부상병들은 야전병원으로 보내졌고 사지가 멀쩡한 병사들은 바르샤바 외곽에 구축한 방어선에 재배치되었다.
희멀건한 국물 한 방울까지 남기지 않고 입에 털어넣은 얀은 참호로 돌아갔다. 여전히 배가 고팠지만, 그래도 뭘 좀 먹으니 힘이 조금은 솟는 것 같았다.
이대로 잠이나 한숨 자려고 눈을 붙이는데 포성이 울렸다.
참호에서 80m 정도 떨어진 지점에 포탄이 낙하해 커다란 구덩이가 생겼다.
“적의 포격이다!”
배급받은 수프를 허겁지겁 떠먹던 병사들이 포격이란 말 한마디에 반합을 내팽개치고 참호로 뛰어갔다.
얀은 두 눈을 감고 손으로 귀를 막은 채 몸을 웅크렸다. 이윽고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막대한 포탄의 비가 쏟아져 내렸다.
지진이 일어난 것마냥 땅이 울리고, 허공으로 솟구쳤던 먼지와 돌멩이들이 중력에 이끌려 우수수 떨어졌다.
마치 지구에 종말이 찾아온 듯했다.
***
“쏘아!”
“쏴부려라!”
30분 넘게 독일군 포병들은 폴란드군이 구축한 방어선을 향해 포탄을 쏟아붓고 있었다.
구데리안은 만면에 미소를 띤 채 쌍안경으로 폴란드군의 방어선이 가루가 되는 광경을 관찰했다.
포격을 당하는 폴란드군 입장에선 죽을 맛이 따로 없겠지만, 구데리안은 즐겁기 짝이 없었다.
폴란드군 한 명이 더 죽을수록 독일의 아들 한 명이 더 살 텐데 어찌 즐겁지 않겠는가.
“모두들 잘 봐두게. 전쟁이 아니면 좀처럼 볼 수 없는 광경이니까.”
구데리안을 신뢰했던 히틀러는 특별히 그가 지휘하는 제19기갑군단에게 각종 신형 장비들을 몰아주는 특혜를 베풀었다.
거기다 라이헤나우의 10군과 함께 바르샤바 공략의 선봉에 서는 막중한 임무까지 부여받았다.
-내 장군만 믿겠소. 어디 마음껏 날뛰어보시구려.
“맏겨만 주십시오, 총통 각하!”
총통의 신뢰에 보답하려면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바르샤바를 점령해야 한다.
바르샤바로 진입하기 위해선 우선적으로 도시 외곽의 폴란드군부터 깔끔하게 해치워야 했다.
10군이 서쪽 외곽을 공격하는 동안, 구데리안의 19군단은 바르샤바 북부 외곽을 공격했다.
구데리안 자신이 직접 개발에 관여한 신형 자주포, 베스페와 그릴레, 훔멜도 포격에 투입되었다.
각각 2호 전차와 38(t), 4호 전차의 차체를 개조해서 만들어진 자주포들은 실전에서 우수한 성능을 발휘했다.
이 중에서 특히 훔멜의 성능이 가장 뛰어났는데, 4호 전차를 베이스로 만들어진 놈이다 보니 육중한 15cm 곡사포를 탑재하고도 뛰어난 기동성과 높은 신뢰성을 보여 호평이 자자했다.
총통께서도 특별히 관심을 가지셨던 놈이니 틀림없이 기뻐하시겠군.
포격이 슬슬 마무리 단계로 접어들자 구데리안은 휘하 제3기갑사단을 선두로 진격 명령을 내렸다.
***
“위생병! 여기야, 여기! 빨리 오라고!”
“하느님! 하느님!”
“타데우시! 타데우시! 어딨어?”
독일군의 포격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는 지옥도가 펼쳐져 있었다.
포탄에 직격당해 형체도 없이 사라진 병사들은 그나마 곱게 죽은 편에 속했고, 훨씬 더 많은 병사들이 상상을 초월하는 처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파편에 신체의 일부가 날아가거나 복부가 찢어져 내장이 그대로 튀어나온 병사가 있는가 하면, 폭압에 온몸의 옷이 날아가고 알몸만 남은 병사도 있었다.
한 줌도 안 되는 위생병과 민간인 자원봉사자들이 부상병들을 구하기 위해 이리저리 뛰어다녔지만 부상병들의 수가 너무 많았다. 너무나도 많았다.
이번에도 얀은 운이 좋았다.
군복 안으로 흙이 들어가고, 고막이 얼얼한 것만 빼면 그는 멀쩡했다.
포격의 영향 때문인지 머리가 아팠다. 밧줄로 머리를 꽉 조인 듯한 통증에 얀은 구토를 했다.
아직 소화되지 않은 감자와 순무 조각들이 식도를 타고 올라와 지면에 쏟아졌다.
“씨발.”
겨우 배를 채우는가 했더니 다시 위가 텅텅 비었다.
피 냄새와 화약 냄새, 위액 냄새가 뒤섞인 악취가 코를 자극했다. 구토를 많이 해서 속이 매슥거렸다.
“모두 전투 준비! 독일군이 몰려온다!”
“대전차포 세워! 빨리!”
독일군의 전차들이 거대한 돌풍을 일으키며 맹렬한 기세로 달려오고 있었다. 그것도 하필이면 죄다 4호 전차였다.
포격에 반쯤 정신이 나간 병사들은 몰려오는 전차들을 보고도 멍하니 앉아있거나, 혹은 무기를 내던지고 도망쳤다.
한 번 퍼진 공포는 걷잡을 수 없었다. 수많은 병사들이 “전차다!”를 외치며 뒤로 도망쳤다.
“도망치지 마라! 사살하겠다!”
“돌아와, 이 겁쟁이들아!”
장교들과 하사관들이 악을 쓰며 위치 사수를 외쳐댔지만, 공포로 이성을 잃은 병사들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오직 살아야 한다는 원시적인 본능만이 남아있을 뿐이었다.
결국, 장교들은 도주하는 병사들을 사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처음엔 동료들을 향해 총을 쏴야 한다는 사실에 망설이던 병사들도 장교들이 재차 명령을 내리자 주저하며 방아쇠를 당겼다.
요란한 총성이 울리고 도주하던 병사들이 도미노처럼 와르르 쓰러졌다.
용케 총탄을 맞지 않은 병사들은 계속해서 달렸다.
“저 빌어처먹을 새끼들. 매국노 새끼들······.”
탈영병들을 향해 권총을 쏘며 욕설을 마구 퍼붓던 장교의 목이 휙 돌아가며 쓰러졌다. 독일군의 사격이 시작된 것이다.
대전차포가 발포했지만, 강철 괴물들은 가뿐하게 튕겨냈다.
간혹 장갑이 얇은 포탑에 명중하는 경우가 있었지만, 전차는 멈추지 않고 계속 움직였다.
전차들이 육박해오자 그나마 남아있던 병사들도 참호를 버리고 후퇴했다.
위치 사수를 목청이 터지도록 외쳐대던 장교들조차 도망치는 병사들 사이에 껴서 도주했다.
그들에겐 천만다행히도, 한 줌 남은 폴란드군 포병대가 아군의 퇴각을 지원하기 위해 포격을 개시했다.
야포의 숫자도 몇 대 없는 데다 포탄도 얼마 없어 포격은 금방 끝났지만 독일군의 추격을 몇 분이나마 지연시킬 수 있었다. 도망치는 병사들에겐 천금보다 귀중한 시간이었다.
얀도 병사들 사이에 섞여 바르샤바 시내로 도망치는 데 성공했다. 정신없이 달린 탓에 뺨에 상처가 난 것도 몰랐다.
겨우 안전지대에 들어온 얀은 무너지듯이 주저앉아 거친 숨을 내쉬었다. 지친 그를 위해 간호병에 자원한 아낙이 물을 담은 주전자를 가져왔다.
물로 갈증을 달랜 그의 손에 흑빵 한 조각이 쥐어졌다.
얀이 감사를 표하기도 전에 아낙은 다른 병사들을 돌보러 사라지고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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