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환장의 시대 (2)
리벤트로프가 도고와 만나 내 의사를 전달하는 사이, 나는 주중 독일대사 트라우트만에게 연락해 중일 양국의 중재를 맡으라고 지시했다.
마침 일본 정부와 군부 내에서 확전에 반대하던 주화파가 몰래 우리에게 연락을 취해왔다.
일본 외무대신 히로타 고키는 주일 독일대사 헤르베르트 폰 디르크젠을 만나, 독일이 양국의 중재에 나서주길 희망한다는 의사를 전달했다.
중국과 일본 모두 중재에 미적지근한 영국과 미국을 상대방의 편이라 인식하고 있었기에, 그 대체제로 독일을 택한 것이었다.
트라우트만은 디르크젠에게 중국의 요구조건을, 디르크젠은 트라우트만에게 일본의 요구조건을 전달했다. 일본의 요구 조건은 다음과 같았다.
1. 내몽고에 별도의 자치정부를 세울 것.
2. 화북 일대를 비무장지대로 선포하고, 행정장관으로는 일본 정부도 찬성할 수 있는 인물을 임명할 것. 대신 일본 정부는 화북의 행정권이 전적으로 중국 정부에 속하는 것을 인정하겠음.
3. 상하이 또한 비무장지대로 선포하고 도시의 관리를 국제연맹에 위임할 것.
4. 중국 정부는 반일정책을 즉각 폐기하고 교과서의 반일적인 내용도 삭제할 것. 그리고 중일 양국이 함께 편찬한 새로운 교과서를 배부할 것.
5. 양국은 소련에 대항하여 공동방공전선을 구축하며 상호 협력할 것.
6. 중국으로 수출되는 일본 상품에 붙는 관세를 대폭 경감할 것. 중국이 일본에 수출하는 물품의 관세는 그대로 유지.
7. 만주국을 정식 정부로 승인할 것.
“······이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오? 이건 승자의 요구가 아니오?”
디르크젠을 통해 일본의 요구조건을 전달받은 트라우트만은 어이가 없었다.
일본 입장에서는 나름 온건한 방향으로 조건의 수위를 조절한 것이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일본의 입장이었지 중국의 입장은 아니었다.
난데없이 일본으로부터 침략을 당한 피해자인 중국 입장에서는 일본의 요구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전쟁 이전의 국경으로 되돌리고 배상금을 받아도 모자랄 판에 사실상 항복선언이나 다름없는 조건을 요구사항으로 내밀다니. 이게 날강도가 아니면 뭔가?
“저도 난색을 표했습니다만, 일본의 입장이 워낙 단호해서 어떻게 할 수가 없었습니다.”
“끙······.”
디르크젠도 일본의 요구가 터무니없다는 것쯤은 알았다.
이조차 최대한 절충한 것으로, 처음에는 아예 화북 일대의 할양까지 논의되었다.
이 경우 중국이 결사항전에 나설 것이라는 만류로 철회되었지만.
“알겠소. 일단 이것을 장 총통에게 전해보리다. 하지만 기대는 걸지 않는 게 좋을 것 같구려.”
“알겠습니다. 수고하십시오.”
트라우트만의 예상대로 일본의 요구조건을 전해 받은 장제스는 노발대발했다.
“이 역겨운 작자들이 뭐가 어쩌고 어째? 중국을 사실상 자신들의 괴뢰국으로 만들겠다는 소리 아닌가!”
트라우트만도 장제스의 말에 공감했지만, 문제는 중국이 날강도나 다름없는 요구조건조차 받아들여야 할 정도로 상황이 좋지 않다는 것이었다.
독일 군사고문단의 헌신적인 지휘와 국민혁명군 병사들의 분투에도 불구하고 전황은 중국에게 암울했다.
해군은 전멸했고, 공군도 숨만 겨우 붙어있었으며 육군은 날마다 밀려나고 있었다.
“위원장님, 전황이 너무나도 좋지 않습니다. 연이은 패배로 병사들의 사기는 바닥이고 국민들도 동요하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에게 저들을 막을 방도가 없습니다.”
“어려운 결정이긴 하나 현실에 순응해야 할 때도 있는 법입니다.”
이대로 전쟁을 계속했다간 수도 난징까지 일본군이 쳐들어올 터.
망국을 피하기 위해선, 굴욕을 감수하고서라도 일본과 강화해야 했다.
온건파는 물론, 강경파조차 일본의 요구를 받아들일 것을 건의하자 장제스는 눈물을 머금고 이를 수락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장제스가 일본의 조건을 수락했을 때, 상황이 바뀌었다.
***
“이건 또 뭐야?!”
“우리 몰래 뒤에서 이따위 추잡한 짓을 저지르다니!”
“전선에서 악전고투 중인 황군 병사들에게 부끄럽지도 않은가!”
도청으로 국민당 정부의 무선을 염탐하던 중국파견군 정보부는 이를 본국 일본에 보고했다.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화평이 논의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군부 강경파는 황군의 희생을 무시하는 것이냐며 노발대발했다.
“대본영도 다 똑같은 놈들이야! 겁쟁이 자식들 같으니라고.”
“이참에 확 엎어버려?”
“자꾸 이런 식으로 나오면 재미없다고 전해야 하오!”
군부 내 강경파도 문제였지만 이를 통제할 힘도, 생각도 없는 대본영도 문제였다.
한술 더 떠 처음엔 화평을 제안했던 고노에 후미마로 총리와 히로타 고키 외무대신조차 일본군의 연승에 생각을 바꿨다.
“황군이 벌써 난징 코앞까지 진격했다고?”
“이거 잘만 하면 우리가 이길 수도 있겠는데?”
“그러면 굳이 중국과 강화할 필요가 있을까? 승리가 빤히 보이는데?”
“하늘이 주신 절호의 기회를 놓칠 수 없지!”
이전까지 화평에 열심이었던 고노에 내각은 입장을 바꿔 기존의 요구조건이 너무 약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감히 무적의 황국에게 조건을 붙이다니. 비루한 패배자 놈들 주제에!
승리를 확신한 고노에는 군부 강경파를 적극적으로 지지하며 기존의 화평안을 철회했다.
이 소식은 디르크젠을 통해 중국과 독일에 전해졌다.
***
“좆같은 쪽발이 새끼들. 하여간 좆같은 놈들 아니랄까봐 좆같은 짓만 골라서 해요.”
디르크젠의 보고를 받고서 중얼거린 말인데, 소리가 너무 컸나 보다.
회의실에 있던 모든 이들이 대화를 멈추고 나를 응시했다.
내 심기가 불편한 것을 아는지, 땀을 삐질삐질 흘리면서 전전긍긍하는 모습이 성적표를 받아든 부모 앞에 선 학생을 보는 것 같다.
“초, 총통 각하······ 무슨 문제라도······.”
블롬베르크가 더듬거리며 묻는 것을 손을 휘저어 물리쳤다.
“장군들에게 화난 것이 아니오. 일본이 내 말을 듣지 않아서 잠시 화가 난 거지.”
“그렇습니까?”
화의 대상이 자신들이 아니란 것을 알자 장군들은 눈에 띄게 안도했다.
평소엔 별들 달았다고 꺼드럭거리던 양반들이 내 한 마디에 벌벌 떠는 꼴이라니, 참나.
역사에서도 일본의 연이은 승리로 독일의 중재조차 뿌리치고 확전에 돌입했고, 난징을 함락시킨 뒤 그 유명한 난징대학살을 자행했다.
난징에서 일본군에게 학살당한 중국인들의 숫자는 30만 명 이상.
강간, 폭행당한 사람들까지 합치면 수를 셀 수조차 없다.
방금 욕을 한 것도 일본의 좆같음을 몸소 체험하는 바람에 나도 모르게 튀어나온 거지, 진심으로 화난 것은 아니다.
정말로.
저놈들이 ‘만족’이란 단어를 알 리가 없다는 것쯤은 상식이다.
이렇게 될 줄 알고 다 미리 계획을 세워놓았지.
“리벤트로프.”
“예.”
“트라우트만과 디르크젠에게 전하게. 중재를 계속하되 절대 어느 한쪽만 편들지 말라고.”
“알겠습니다.”
“참, 트라우트만에게 또 하나 전하게. 지금 당장 난징에 있는 독일인들을 대피시키라고. 난징은 곧 불바다가 될 거야. 우리 국민들이 다치면 안 되지.”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국민들의 안위를 생각하시는 모습, 감동했습니다.”
이 새끼 또 오버하기는. 안 지겹냐?
***
상하이가 함락되자, 장제스는 난징 방어를 위해 병력과 물자를 긁어모았다.
그러나 난징을 지켜낸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웠고, 국민정부도 이 사실을 알았다.
장제스는 난징 포기를 결정하고 주요 정부기관과 국민혁명군 주력을 우한으로 철수시켰다. 중국의 임시 수도로 충칭이 선택되었다.
국민정부가 난징을 포기하기로 결정을 내렸을 때, 이미 난징에선 독일인들의 철수가 끝나가고 있었다.
“트라우트만 대사로부터의 보고입니다. 최소한의 인원들만 남기고 모든 독일인이 철수를 완료했다고 합니다.”
“다행이군. 크리벨은 충칭에 있다고 했나?”
“예. 팔켄하우젠도 충칭에 있습니다.”
“좋아. 마침 점심시간이군. 밥 먹으러 가세.”
점심에는 치킨을 먹었다.
김치나 된장찌개 같은 것들은 별로 생각이 안 나는데, 이 치킨만큼은 도저히 포기할 수가 없었기에 주방에 지시를 내려서 만들게 했다.
만드는 방법도 현대의 그것과 같다. 닭고기에 밑간을 한 뒤, 튀김옷을 입혀서 기름에 튀기면 끝.
참고로 나는 핫크리스피 치킨을 좋아한다. 가격이 만만찮아서 자주 사먹지 못했지만.
그래서 내가 먹는 치킨에는 후추와 파프리카 파우더를 아끼지 말고 팍팍 넣으라고 지시했다. 팍팍.
인터넷도 없는 세계에 떨어져 팔자에도 없는 고생을 하고 있는데 이 정도 호사는 누려도 괜찮잖아?
비록 21세기에 먹던 그것과는 미묘한 차이가 있지만, 닭고기 자체가 원래 맛있는 식재료이기에 맛이 없을 수가 없다.
특히 갓 튀겨낸 치킨을 곧바로 먹을 수 있다는 것이 최고의 장점이다.
여기에 시원한 콜라까지 곁들이면 더 이상 바랄 것도 없지.
“어떤가? 먹을만한 것 같나?”
“음, 닭고기의 부드러운 육질과 바삭한 튀김옷의 조화가 제법 잘 어울립니다.”
맨손으로 치킨을 먹는 나를 보고 처음에는 당황하던 괴링도 지금은 익숙해졌는지 능숙하게 치킨을 뜯어먹었다.
그런데 괴벨스의 표정이 영 좋지 않다. 닭고기 싫어하나? 그런 소리는 못 들었는데?”
“괴벨스 박사? 무슨 문제 있소? 표정이 좋지 않은데?”
“어, 음······ 죄송하지만 제겐 조금 많이 매운 것 같, 커헉!”
착오가 있었던 모양인지, 괴벨스의 접시에는 내 식성에 맞게 맵게 튀긴 치킨이 올랐다.
고추장찌개에 청양고추를 송송 썰어 넣고, 비빔밥을 시키면 기본 반찬으로 김치가 나오며 생마늘을 쌈장에 찍어 먹는 것에 익숙해진 한국인들에게 이 정도 맵기는 맵다고 할 수도 없지만 20세기 독일인들에게는 그게 아니었다.
이름이 뭐였더라? 외국인들 우리나라에 데려와서 이것저것 관광시키던 TV 프로그램.
거기 나온 프랑스 친구들이 닭갈비가 매워서 다 못 먹고 식당에서 나왔지. 한국인 입장에선 매운 축에도 못 끼는데도.
하물며 매운 요리가 거의 없는 독일 요리에서 익숙해진 독일인이라면? 지금쯤 입안에서 네이팜탄이 터진 것 같은 기분이리라.
아, 아직 네이팜탄은 안 나왔지.
“주방에서 실수를 했나 보군. 앞으로 주의하라고 전해두겠소.”
“가, 감사합니다······.”
물만으로는 진화가 어려운지 이번에는 무 피클과 자우어크라우트를 우걱우걱 씹어댄다.
괴링은 괴벨스가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이 무척 마음에 드는지 얼굴에 함박웃음을 띄우고 있다.
사이 안 좋은 거 아는데, 너무 노골적으로 좋아하는 거 아니냐.
“총통 각하!”
치킨으로 배를 채운 뒤 디저트를 기다리는 중 리벤트로프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이보시오, 리벤트로프 장관. 총통께 무슨 실례요?”
괴벨스만큼이나 리벤트로프를 싫어하는 괴링이 쏘아붙였다.
괴벨스 역시 불청객이 끼어들었다는 눈치다. 불청객으론 눈앞에 있는 괴링 하나만으로 족한데 말이지.
“미안하오. 하지만 총통께 급히 전할 소식이 있소.”
“아무리 그래도 상황을 보면서-”
“됐네. 내가 무슨 폭군도 아니고. 그래, 리벤트로프. 무슨 일인가? 어서 말해보게.”
“예, 총통 각하. 중국에서 군사고문단을 철수시켜 달라는 일본의 요청이 들어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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