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장검의 밤 (2) (13/150)

장검의 밤 (2)

룀의 처단을 앞두고, 마지막 회의가 열렸다.

룀과 더불어 처형될 돌격대 간부들의 주요 명단작성과 더불어 돌격대 소속은 아니지만 이 기회에 함께 제거해야 할 자들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졌다.

첫 빠따는 쿠르트 폰 슐라이허.

역사대로라면 히틀러 이전의 독일 총리가 되었을 남자지만, 역사개변으로 그는 총리가 되지 못했다.

앞으로도 영원히 되지 못할 테고.

슐라이허는 자신이 나를 대신해 총리가 될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는지 힌덴부르크가 나를 총리직에 임명했다는 소식을 듣자 분노하며 나와 힌덴부르크의 뒷담을 주변에 하고 다녔단다. 지금도 그렇고.

“심지어 프랑스 대사와 접촉하고 그자로부터 뇌물을 수수한 정황이 포착되었습니다.”

하이드리히의 말에 모두들 분개했지만, 나는 말없이 듣고만 있었다.

원래 하이드리히는 정보 수집에도 능하지만, 없는 죄를 창조해서 상대에게 뒤집어씌우는 일에도 천부적인 재능을 가진 자다.

지금 저 말이 사실인지, 아니면 날조된 누명인지 당장은 확인할 방법이 없었다.

하지만 중요한 건 슐라이허가 나를 극도로 증오하며 내 모함을 하고 다닌다는 것만큼은 명백한 사실이라는 점이다.

이대로 놔뒀다간 나중에 내 발목을 잡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미리 선수를 칠 수밖에.

“그래도 일국의 장군이었으니, ‘나름’ 정중하게 보내줘야하지 않겠나.”

“어떤 방법을 원하십니까, 각하?”

“폭탄이나 총은 너무 요란하니, 가장 조용한 방법을 쓰게. 그래, 독이 좋겠군. 효과가 아주 확실한 놈으로.”

“그리 하도록 하겠습니다.”

하이드리히는 평소 자신이 들고 다니는 노트에 내가 한 말을 필기했다.

슐라이허 다음은 파펜이었다.

프란츠 폰 파펜.

역사에선 하인리히 브뤼닝의 뒤를 이어 총리직에 오르나, 무능해서 짤리고 말았다. 파펜이 짤린 직후 총리직을 꿰찬 이가 슐라이허고.

슐라이허에게 앙심을 품은 파펜은 히틀러와 협력하여 그의 집권에 도움을 줬지만, 히틀러는 대놓고 자신을 조종해 비선실세가 되려고 한 파펜을 배척했다.

이에 파펜이 마르부르크 대학에서 반나치, 반히틀러 연설을 하며 히틀러를 공격하자 히틀러는 장검의 밤 때 그의 측근들을 처형해 파펜에게 경고했다. 뒈지기 싫으면 알아서 기라고.

파펜은 즉시 히틀러에게 굴복했고, 오스트리아, 터키 대사 등 한직을 돌며 지내다가 1969년에 사망했다.

“파펜은 기각일세.”

“아니, 어째서입니까?”

힘러가 물었다. 당연히 파펜도 쌍으로 죽일 줄 알았는데, 반대하니 뜻밖이라는 반응이었다.

“지금 파펜은 우리에게 협력적으로 나오고 있네. 속으로 무슨 생각으로 하는진 몰라도. 뭐 다른 꿍꿍이가 있을지 몰라도 그건 사람 뇌를 직접 들여다보지 않고선 모르는 일 아닌가.

게다가 그에 대한 대통령 각하의 신임도 두터운데, 함부로 해쳤다간 역풍이 불 수도 있어.”

“하지만 각하, 그자가 사석에서 자신이 차기 총리가 되어야 했다고 발언한 증거가 있습니다.”

하이드리히도 힘러처럼 파펜의 죽음을 바란 모양인지 항변했다. 그러나 내 마음을 돌리진 못했다.

“그 정도 말이야 당연히 할 수 있지. 슐라이허처럼 대놓고 날 엿먹이려는 게 아니면 나는 관대하게 넘어갈 생각이네. 피를 흘릴 땐 흘려야 하지만, 닥치는 대로 죽여선 안 될 일이야.”

“각하의 말씀이 맞습니다.”

괴링도 내 말에 동의했다. 실제 역사에서도 파펜과 사이가 나름 원만했던 괴링은 파펜의 처형에 반대하며 그를 보호했었다.

“뭐어, 각하께서 그리 말씀하신다면······.”

괴벨스도 찬성.

“옳으신 말씀입니다. 살육은 적당히 해야지요.”

헤스도 찬성을 표함으로써 파펜의 처형은 기각되었다.

파펜에 이어 거론된 자는 그레고어 슈트라서였다.

룀만큼은 아니지만 사회주의 성향이 컸던 슈트라서는 나치당의 노선이 너무 우편향되었다며 히틀러와 충돌했다.

그러다가 슈트라서의 교통사고를 계기로 다시 관계가 회복되었지만 슐라이허의 연정 제안에 찬성하는 바람에 히틀러의 분노를 샀고 그는 모든 공직에서 사퇴해야만 했다.

히틀러가 총리직에 오른 후에도 그는 나치당에 복귀하지 않고 제약회사 이사로 일하다가, 장검의 밤 때 숙청되었다.

그러나 이 세계에선 슐라이허가 총리가 되지 않았고, 슈트라서에게 연정을 제안해올 일도 없었기에 그는 여전히 나치당 조직국장으로 재직 중이었다.

“이 자는 여전히 정신 못차리고 당이 변질되었다며 정책의 수정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슐라이허처럼 사석에서 총리 각하에 대한 비판적인 발언도 서슴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래? 그럼 증거가 있나?”

“예. 여기 보시면-”

하이드리히가 내민 ‘증거’를 나는 자세히 보는 척하다가 조용히 옆으로 치웠다.

“내가 보기엔 증거가 너무 빈약한 것 같네.”

“예?”

“자네들에게 말은 하지 않았지만, 2주 전에 그가 헤스를 통해 내게 편지를 보내왔네. 자신의 지난 과오에 대해 진심으로 사과하더군. 그리고 내 결정에 무조건적으로 따를 것이라고 주장했어.”

“틀림없는 거짓말입니다! 그자의 거짓말에 속아 넘어가시면-”

나는 손을 들어 하이드리히의 말을 잘랐다.

“거짓말인지 진심인지 하늘이 아시겠지. 아무튼 나는 그를 믿네. 물론 그가 과거에 당의 노선을 두고 나와 충돌했다는 사실은 잊지 않았네.

그래도 말이야, 그 정도 일은 누구에게나 일어나는 일이라네. 자네들도 과거에 친구들과 다툰 일이 하나쯤은 있지 않나.”

“그, 그렇긴 합니다만 겨우 소꿉장난과 비교하기에는 사안이 엄중합니다. 무게가 다른 일이란 말입니다.”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군. 그러나 나는 그 자를 믿는다네.

게다가 슈트라서는 오래 전부터 나와 뜻을 함께 해온 동지일세. 그의 동생 오토는 뮌헨에서 나와 함께 행진하다가 총에 맞아 죽었고.

그런데도 그는 나를 원망하기는 커녕 변함없는 충성을 바쳤네.

애초에 그가 나를 배신할 생각이었다면, 진작에 내 등에 칼을 꽂았을 거야. 그러니 적어도 한 번은 더 기회를 줘야지.”

슈트라서는 당의 노선을 두고 히틀러와 충돌하긴 했지만, 개인적으로는 히틀러에게 끝없이 충성했다.

심지어 장검의 밤 당일에도 자신을 체포하러 온 SS 대원들을 보고 ‘그분이 그랬을 리가 없다’고 말했을 정도이니.

그렇게 슈트라서는 목숨을 건졌다. 본래 역사에선 형이 죽고 동생이 살았는데, 여기선 정 반대가 되었다.

이외에도 바이에른 주지사였던 카르와 전직 정치인들 몇 명이 거론되었지만, 대부분 넘어갔다.

살생부가 완성되었으니, 남은 건 집행뿐이었다.

***

1933년 1월 28일

나는 룀에게 전화를 걸었다.

“룀? 날세. 통화 가능한가?”

-아돌프? 무슨 일인가?

“별 거 아닐세. 으레 하는 회의 때문에 전화한 거야. 지금 어디에 있나?”

-바트비제 온천에서 휴양 중이야.

“그렇군. 모든 SA 간부들을 30일까지 그곳으로 소집하게. 나도 곧 그리로 가지. 그때까지 편하게 휴가를 즐기라고.”

-알겠네. 자네도 여기 와서 좀 쉬게나. 몸의 피로가 싹 풀린다니까?

“그래? 아무튼···.”

-적당히 쉴 줄도 알아야 하는 법이야. 온천뿐만 아니라 근처에 있는 식당들도 맛이 참 좋아. 특히 슈바인학세를 잘하는 집이 있는데, 자네도 한 번 꼭 먹어보게. 감탄밖에 안 나온다니까.

“······생각해보지.”

전화가 끊어졌다.

“젠장.”

나도 모르게 한숨이 새어 나왔다.

“그놈이 뭐라고 했습니까?”

힘러가 다가와서 물었다. 나는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내 말에 그대로 넘어갔네. 전혀 의심하지 않더군.”

“역시 생각이 짧은 놈이군요.”

“뭐어··· 그만큼 가까웠던 사이였으니까.”

룀, 아마 내가 그 온천을 이용하는 일은 훨씬 나중이 될 것 같네.

***

1월 30일

운명의 날이 밝았다.

미리 바트비제에 보낸 첩자를 통해, 룀과 돌격대 간부들이 바트비제에 모인 것을 확인했다.

“한 명도 빠짐없이 도착했답니다.”

“그렇군. 그럼 우리도 가지.”

참으로 오랜만에 만지는 루거였다. 허리춤에 찬 권총집에 루거를 쑤셔 넣은 후, 집무실을 나섰다.

“총리 각하께 경례!”

검은 SS 제복 차림의 힘러와 하이드리히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필요한 무기와 차량들은 모두 군부에서 제공해줬다.

SS 대원들은 전쟁에 나가기라도 하는 것마냥 완전무장한 채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심지어 운전병들까지.

쓸데없이 맑은 하늘이 철모를 쓴 힘러와 하이드리히와 대비되어 더욱 어색하게 느껴졌다.

“전선으로 가는 것도 아닌데 꼴이 그게 뭔가? 굳이 철모까지 쓸 필요는 없는 것 같네만······.”

“늘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야 하는 법입니다, 각하!”

“······.”

힘러는 내게도 철모를 쓸 것을 권했지만, 나는 한사코 사양했다. 어차피 현역 시절에 많이 써봤어, 인마.

“출발하지.”

역사대로라면 오늘, 히틀러가 총리직에 올랐어야 했지만, 그 히틀러는 작년에 총리가 되었다.

이번 세계에서의 역사에는 오늘이 히틀러의 총리 취임식이 아닌, 숙청의 날로 기록되리라.

***

프로이센 주의원이자, SS 중장인 요제프 디트리히는 이미 SS 2개 중대를 거느리고 뮌헨에 도착하여 우릴 기다리고 있었다.

디트리히와 합류한 우리는 즉시 룀에게로 향했다. 룀이 머물고 있는 숙소에 도착하자, SA 지휘관 2명이 마중나왔다.

“어서 오십시오, 총리 각하. 지금 참모장께선-”

“체포하게.”

내가 손을 들어 올리자, 건장한 체격의 SS 대원들이 용수철처럼 튀어 나가 두 SA 지휘관을 포박했다.

“무, 무슨?!”

“갑자기 왜 그러십니까?!”

“룀을 처단한 뒤에 처분을 결정하도록 하지. 끌고 가.”

나는 SS 대원들을 거느리고 계단을 올라갔다. 룀의 방에 다다르자, 디트리히가 방문을 걷어찼다.

내가 알기로 룀은 체포될 당시 두 애인과 함께 침대에 알몸으로 누워있었다고 들었는데, 천만다행히도 여기선 혼자였다.

잠옷 차림의 룀은 놀란 나머지 말이 나오지 않는 듯 멍한 얼굴로 나를 응시했다.

“룀, 너를 체포하겠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