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화 울릉도 (1)
* * *
에밀리아가 공들여 만든 요리는 모두에게 반응이 좋았다.
현실적인 이유로 음식을 먹을 수 없는 타카시의 분신을 제외하고는 모두 맛있게 먹었다.
특히 엘리자베스는 몇 번이고 에밀리아에게 음식을 더 채워 줄 것을 부탁했을 정도.
서로 기 싸움을 할지도 모른다는 다른 구성원의 예상과 달리, 둘은 화기애애하게 대화를 잘 나눴다.
하지만 웃는 얼굴 속에 꼭 선한 마음이 담겨있지는 않을 수도 있는 법.
눈치 빠른 빈센트는 에밀리아와 엘리자베스가 묘한 신경전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적어도 상대방보다는 더 매력적이고 아름다운 사람이 되고 싶은, 특유의 경쟁 심리.
그 심리를 숨기기 위해서 둘은 친근함과 친절함을 연기하고 있는 쪽에 가까웠다.
또 다른 여성 헌터 중 한 명인 유청화는 이런 신경전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녀는 빈센트처럼 히든 스킬의 소유자가 누구인지 궁금해하는 모습이었다.
유청화가 빈센트에게 말했다.
“빈센트.”
“어.”
“짚이는 암살자가 있어?”
“한국 쪽은 내가 빠삭하게 아는 것은 아니어서. 혹시 네가 아는 건 없고?”
빈센트의 물음에 유청화가 어깨를 으쓱였다.
아주 잠깐, 엉뚱하게 다른 사람의 얼굴이 생각나기는 했다.
최근 이름을 알게 된 남자, 바로 강후였다.
강동현이 이클립스 공식 홈페이지에 강후에 대한 모든 정보를 올리기 전까지만 해도.
유청화는 강후의 가명도, 본명도 알지 못했다.
그저 자신의 정신 스킬을 완벽하게 차단해낸, 솜씨 좋은 암살자 정도로 기억했을 뿐이다.
그리고 얼마 전에 척살 명단에 적힌 이름을 보면서 그제야 모든 의문이 풀렸다.
실력이 꽤 있는 암살자라고 생각했는데, 그 추측이 틀리지 않았던 것이다.
강동현의 역린을 자극했을 정도면, 얼마나 강후가 약오르게 만들었는지는 안 봐도 뻔했다.
하지만.
아무리 잠재력이 높은 암살자라고 해도, 강후의 수준으로 히든 스킬은 무리였다.
빈센트가 한 말대로 히든 스킬은 ‘운 좋은 어중이떠중이’가 얻긴 불가능한 스킬이기 때문이다.
강후가 이 세계에 77개 밖에 없는 히든 스킬의 주인이 되기엔 자격이 모자란다는 생각이었다.
“모르겠네.”
유청화가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강후는 아니다.
아마 공략대에 다른 솜씨 좋은 암살자가 또 있었겠지. 암살자 네임드가 없는 것도 아니고 말이다.
답답함에 빈센트가 볼멘소리를 냈다.
“장시환이랑 채관형은 도대체 언제 나오는 거야? 그놈들이 협조해 줘야 찾든지 말든지 하는데.”
빈센트는 벌써 몸이 달아 있었다.
지난 살인 이후로 꽤 오래 냉각기를 가진 탓일까?
뜨거운 피를 얼굴에 뒤집어쓰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다.
모락모락 김이 피어오르며 들썩이는 압력밥솥처럼 그의 살인 욕구도 연신 꿈틀대고 있었다.
* * *
한편.
강후는 비행기를 타기 직전, 불쑥 마스터 K에게 걸려온 전화를 받고 행선지를 바꾼 상태였다.
이륙 후 정상 고도에 오른 비행기에 안정이 찾아올 무렵.
강후는 마스터 K와의 통화 내용을 녹음해 뒀던 것을 듣고 있었다.
이륙 전에 너무 정신없이, 급하게 대화가 진행되었던 탓에 놓친 부분이 있었던 것이다.
- 방출 옵션이 있는 초소형 부적을 ‘간접적으로’ 얻을 수 있는 곳을 알아냈어.
- 어딥니까? 던전입니까?
- 구매처를 전 세계에 수소문해 봤지만 현재로서는 구할 수 있는 매물이 없더군.
- 다른 방법이 있으신 겁니까?
- 맞아. 재료를 조합해서 만드는 방법이 있어. 무색 부적에 방출의 핵을 합성 세공하는 거지.
- 어떤 것을 구해야 할까요?
- 일단 방출의 핵은 내 부인을 통해서 구할 수 있으니 걱정하지 말고. 무색 부적이 문제인데.
- 네. 말씀해 주십시오.
- 울릉도로 가면 될 것 같아. 김신령이 거기에 있거든. 그 친구에게서 구매할 수 있을 거야.
- 김신령 님이요?
- 그래. 김신령. 만능의 손이라고도 부르는 실력자지. 혹시 알고 있나?
- 자세히는 모릅니다만.
만능의 손, 김신령.
50대 후반의 중년 여성이지만, 겉으로 보이는 외모는 20대 수준인 시술-개조 능력자다.
외모가 젊어 보이는 이유는 놀랍게도 그녀가 사람의 얼굴을 쏙 빼닮은 가면을 쓰고 다녀서다.
그런 가면을 제작하는 것 역시 그녀의 실력 중 하나였다.
정말 감쪽같은 수준이었다. 물론 가면으로 위장할 수 없는 부분에는 주름이 제법 잡혀있다.
원작에서 김신령의 이름이 등장하는 시점은.
강후에게 팔을 잃은 울산의 도살자, 공태수가 자신의 왼팔에 마석을 심는 때였다.
그때, 살짝 이름만 언급되는 수준으로 나오고 말았었는데 지금은 강후에게 꽤 중요한 이름이 됐다.
- 어쨌든 그 친구가 울릉도에 있는 자기 별장에서 쉬고 있는 모양이야. 한 번 찾아가 봐.
- 알겠습니다. 위치만 말씀해 주시면 제가 직접 찾아가죠.
- 아냐. 형서를 울릉도로 보낼 테니까 녀석의 안내를 받도록 해. 내 추천서도 가지고 갈 거고.
- 아, 그 어린 친구 말입니까?
- 그래. 내가 무례하게 굴지 않도록 단단히 일러 놓을 테니, 너무 신경 쓸 건 없고.
- 알겠습니다. 그럼 울릉도 쪽으로 바로 방향을 잡겠습니다.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 신경은 무슨. 나중에 다 값으로 쳐서 받을 테니까, 돈이나 두둑하게 준비해 놔.
- 물론입니다.
- 아. 그리고…… 알지? 김신령은 자기 별장이 하나의 거대한 함정이라는 거.
- 그건 알고 있습니다.
- 그래. 무리하진 말어. 시험에 들어가는 것은 좋지만, 그게 관뚜껑을 열고 들어가라는 건 아니니까.
마지막에 K가 남긴 말대로, 김신령은 자신을 만나려는 사람들을 쉽게 만나 주지 않았다.
보통 그녀를 만나려면 아지트처럼 활용하는 별장을 찾아가야 하는데.
정문에서부터 별장으로 가는 길이 온갖 미로와 함정으로 도배되어있다는 것이 특징이었다.
천억, 아니 1조 원을 줘도 프리패스는 불가능했다. 반드시 그녀의 ‘시험’을 통과해야 했다.
그런 이유로 김신령을 만나려다가 비명횡사한 헌터가 한둘이 아니었다.
심지어 시체 수습도 해 주지 않기에, 수습을 하려고 온 동료들이 추가로 죽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무색 부적이라…….’
처음 듣는 이름이다.
어떤 의미를 갖고 있기에 무색 부적이라는 명칭이 붙었을까.
아마 그 답은 김신령을 만나야만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바짝 긴장할 때가 됐다.
강후가 두 눈을 감고, 원작에서 조형된 김신령에 대한 모든 기억과 내용을 떠올리기 시작했다.
아주 사소한 내용까지도 놓쳐서는 안 된다. 그녀의 성격과 특징을 제대로 파악할 필요가 있기에.
* * *
울릉도에 도착한 것은 막 땅거미가 지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강릉에서 3시간 동안 배를 타고 이동해서 그런지, 내리자마자 지면을 밟는 느낌이 어색했다.
멀미가 심한 사람들은 내려서도 구토를 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강후는 그런 부분에서는 둔감했다.
‘실제로 봤던 것과 똑같네.’
강후가 익숙한 풍경을 보며, 마치 고향에 온 듯한 포근함을 느꼈다.
원작을 쓸 때, 가끔 타지생활을 하고 싶을 때 찾아왔던 곳이 바로 울릉도였기 때문이다.
울릉도 곳곳에 잘 마련되어 있는 게스트하우스에서 머물곤 했었다.
짧아도 1달 이상은 머물렀고, 길게는 1년 이상을 살았던 적도 있었다.
그때 직접 보고 느낀 것들을 원작 속 묘사에 착실히 넣어 둔 덕분인지, 세계도 똑같이 구현되어 있었다.
한데 바로 그때.
“……?”
강후가 무언가 익숙한 누군가의 뒷모습을 보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노트북 가방을 메고, 1L짜리 대용량 아메리카노를 들고 어디론가 걸어가고 있는 남자의 모습.
‘내 모습…… 아닌가?’
그것은 분명히 울릉도에 머물던 시절, 자신이 입었던 옷과 차림새 그리고 행동 그대로였다.
빠르게 그 뒤를 밟아 보았다.
뭘까. 날 닮은 사람인 걸까. 아니면 헛것이라도 보이는 걸까. 그냥 우연인 걸까?
막 샛길로 접어든 남자의 뒤를 따라붙어 봤지만, 어느새 그는 사라지고 없었다.
마치 애초부터 있지 않았던 것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음.”
아예 보이지 않는 마당에 어딘가를 특정하고 쫓을 수도 없어 강후가 멈췄다.
묘한 경험이었다.
어쩌면 빙의하기 전의 삶을 잠시, 추억처럼 떠올리다가 겹쳐진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해야 할 듯했다.
얼마 후.
문형서도 울릉도에 도착하면서, 어색한 상봉이 항구 앞에서 이뤄졌다.
문형서는 강후를 보자마자 허리를 90도로 굽혀 깍듯하게 인사를 건넸다.
딱 봐도 마스터 K에게 따끔하게 주의를 받은 듯한, 아주 공손한 모습이었다.
전과 달리 앞머리도 내리고, 옷도 캐쥬얼하게 입고 온 덕분인지.
문형서는 평소보다 독기가 상당히 빠진, 순한 모습으로 보였다. 정말 대학생 같은 느낌이었다.
“바로 안내하겠습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배편마다 시간이 다른 건데 늦어서 죄송하긴.”
“앞 배편을 타서 미리 와서 주변을 살펴 뒀어야 하는데. 용서하십시오.”
“됐고. 안내나 하지.”
강후가 어색한 미소와 함께 손짓으로 문형서에게 앞서나갈 것을 요청했다.
아무래도 초면인 김신령을 만나기 위해 가는 자리인 만큼, 성큼성큼 들떠서 움직이지는 않았다.
이동하는 동안.
문형서는 계속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경계하는 모습이었다.
항상 주의를 태만히 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긴 하지만, 그 범주를 넘어선 구석이 있었다.
“무슨 이슈가 있는 거야?”
“음……. 비공식적으로 입수된 정보이기는 합니다만.”
“어.”
“요 열흘 동안 울릉도에 거주하던 헌터 열 명이 흔적도 없이 실종된 모양입니다. 이후에 생활 반응도 전혀 없고요.”
문형서의 말에 강후가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울릉도에는 치안청도 없고, 관리하는 핵심 세력도 없어 사실상 각자도생인 곳이었다.
그래서 변수가 많은 장소이기도 했다.
물론 민간인 거주자가 많아, 헌터들끼리는 암묵적으로 유혈 충돌을 자제하는 분위기이기는 했다.
자칫 헌터들 간의 싸움에 휘말려서 민간인들이 죽었다가는 헌터 치안청에서 직접 나서기 때문.
치안청이 나선다는 것은 곧, 정화 길드의 등장을 의미하므로 다들 알아서 ‘처신’을 잘했다.
그런데 실종 이슈가 있는 것이다.
최근 시기에 집중된 형태로 헌터가 계속 사라지고 있다면, 충동적이라고 보기도 어려웠다.
“울릉도에 오픈형 던전이 제법 있다 보니, 헌터들의 출입이 잦기는 할 텐데.”
“그래서 다들 조심하는 눈치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종 사고가 벌어지는 모양입니다.”
촤악!
문형서가 소형화시켜 두었던 창을 꺼내서는 마력을 불어넣고, 원래의 크기로 팽창시켰다.
강후가 비상용 무기로 갖고 있는 강격의 장창처럼 줄이고 늘리는 것이 가능한 모양.
물론 4등급인 강격의 장창과 비교하면, 훨씬 수준이 높은 형태의 외형을 하고 있었다.
최소한으로 잡아도 2등급의 장창은 되는 듯했다. 문형서 정도의 레벨이라면 어울리는 등급이다.
그때.
“잠깐.”
강후가 등 뒤에서 느껴진 이질감에 멈춰 서며, 동시에 문형서를 붙잡아 세웠다.
갑자기 묵직하고도 차가운 한기가 후방에서 훅, 밀려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갑작스러우면서도, 동시에 온몸이 굳게 만들 정도의 위압감이었다.
그 순간, 떠오르는 녀석이 있었다. 강후가 문형서에게 소리쳤다.
“피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