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화 베주미예 (2)
* * *
‘이런 무식한 놈이 성좌 계약이 없다는 게 말이 되나?’
베주미예와 탐색전을 치르는 동안, 강후는 베주미예가 성좌 없이 이만한 화력을 내는 것이 대단하다 여겼다.
성좌가 베주미예와 계약하지 않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일 것이다.
애초에 베주미예가 어떤 판단을 할 수 있는 지성이라는 것이 거세되었기 때문이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성좌가 미쳤다고 전장에 죽으라고 내던지는 인간 병기와 계약할 리 없기 때문이다.
베주미예는 확실히 ‘탱킹’을 목적으로 설계된 병기라서 그런지 아이템 구성이 좋았다.
어느 정도냐면 강후가 작정하고 날린 전광비도의 일격을 맞고도 멀쩡했다.
피가 철철 흘러내리기는 했지만 그뿐이었다.
허벅지에 박힌 단검도 베주미예의 기동력에 타격을 입히진 못했다. 고통을 못 느끼는 듯했다.
‘어쨌든 이런 녀석도 처치할 수 있어야 성좌들에게 어필하는 바도 크겠지.’
성좌 강탈이나 아이템 탈취 같은 물리적인 보상만 떠올리고 있지는 않았다.
레벨 100이 코앞이다.
자신에게 관심을 갖고 있는 성좌들에게 꾸준히 어필을 하는 것도 중요하다.
특히 ‘주시’까지 하고 있는 대재앙 – 어둠에게는 더 많은 모습을 어필할 필요가 있다.
바꿔 생각하면 베주미예는 좋은 샌드백이었다. 잘 패면 아주 멋진 그림이 될 것이다.
“쿠아아아!”
“그래. 감질 맛나지?”
베주미예가 돌격해 왔다.
이유가 있었다.
강후가 탐색전을 핑계 삼아, 계속 치고빠지기를 반복하며 베주미예에게 상처를 입혔기 때문이다.
원하는 그림이었다.
암살자 입장에서는 상대에게 접근하는 것이 가장 까다로운 과정이다.
그런데 먼저 찾아와주는 서비스를 해 준다면야 거절할 이유가 전혀 없다.
【환각】
일부러 거리를 좁히도록 기다리고 있던 강후가 베주미예에게 환각을 걸었다.
저런 인간 병기의 가장 큰 약점은 정신 공격에 약하다는 것이다.
환각도 정신을 왜곡시켜 엉뚱한 것을 보게 하는 만큼, 당연히 정신계 공격의 범주에 들어간다.
“와아악!”
역시 보기 좋게 환각에 걸린 베주미예가 환각으로 만들어진 강후를 보고는 허공에 주먹을 날렸다.
강후가 있던 자리보다 두 걸음 정도 앞의 허공을 때리는 무의미한 공격이었다.
물론 베주미예에게 무의미한 것이고, 강후에게는 의미가 컸다.
‘아까부터 계속 신경이 쓰였는데, 이젠 확실해졌네.’
강후는 탐색전에서 베주미예가 주먹을 뻗는 끝 동작에서 미세하게 흔들림이 있는 것을 느꼈었다.
마치 불편한 부위가 있는 것처럼 끝에 가서 어깨를 살짝 비트는 행동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바로 지금.
베주미예의 주먹이 허공을 가를 무렵, 강후가 정조준 스킬을 이용해 시야를 확대했다.
그러자 선명하게 드러난 겨드랑이 안쪽으로 고름 같은 것이 잔뜩 흘러내리는 게 보였다.
어두운 주변 환경과 맞물려 잘 보이지 않던 것이 확대되어 드러난 상황이다.
인간 병기에게 육체적인 문제가 생기는 것은 생각보다 흔한 일이었다.
아무 곳에서나 잠을 재우고, 위생적이지 못한 환경에 자주 노출되다 보니 저런 식으로 몸 여기저기에 문제가 생기는 빈도가 잦았다.
게다가 자기 스스로 아프고 힘든 부분을 호소할 줄 모르기에 더욱 문제가 많이 생겼다.
애완동물의 경우.
사랑을 듬뿍 주는 주인을 만나면 어딘가 아파도 방치될 일이 없다.
하지만 전투를 위한 살인 병기로 이용되는 존재에게 과연 누가 사랑을 듬뿍 주겠는가?
결국 베주미예의 겨드랑이는 보이지 않는 아킬레스건이나 다름이 없었다.
강후는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전광비도】
앞서 허벅지에 날린 전광비도는 별 타격을 주지 못하고 끝났지만, 그래도 한 번 더 날렸다.
물론 이번의 타깃 지점은 베주미예의 겨드랑이였다.
후우우웅! 푸슈슉!
“크아아아!”
“거긴 처음이지?”
투척용 단검의 날이 보이지 않을 만큼 깊숙하게 박혔다.
연한 속살을 파고들었으니, 아마 어깨 근육이 있는 지점까지 손상을 입혔을 터다.
그간 계속 곪다가 아물기를 반복했던 부위라 그런지, 강후가 생각한 것보다 출혈이 더 심했다.
그뿐만 아니라, 심하게 고통스러워하면서 본능적으로 뒷걸음질을 쳤다.
두려워서가 아니었다.
베주미예 스스로 전략적인 불리함을 감추고자, 강후와 거리를 두는 선택을 한 것이다.
일단 거리를 둬야 정비를 할 수 있고, 다시 힘 있게 반격의 고삐를 당길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베주미예의 의도를 바로 읽은 강후는 여유를 주지 않았다.
【납치】
멀어져도 언제든 강제로 끌어올 수 있는 납치 스킬은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최고의 선택지였다.
베주미예의 육중한 거구를 생각하면 접근전을 꺼리게 되지만.
지금은 달랐다.
녀석이 거리를 벌리기를 원하는데 그것을 막는 것이다. 전략적으로 선공권을 가져간다는 얘기다.
“크와악!”
납치에 이렇다 할 반항조차 하지 못한 베주미예가 포물선을 그리며 강후에게 쭉 끌려왔다.
무거운 몸이라고 해도, 납치 스킬에 끌려오는 속도는 가벼운 몸과 같았다.
물론 납치로 끌려온 베주미예를 정직하게 정면에서 노리는 멍청이 같은 짓은 하지 않았다.
베주미예가 강후의 자리에 도착할 무렵, 이미 강후는 횡 이동으로 녀석의 뒤에 위치하고 있었다.
솨아악!
“끄어어!”
강후가 무심하게 그어낸 부위는 목 뒤쪽의 움푹 파인, 부드러운 곳이었다.
우리가 뒷골이 쑤시다고 할 때의, 그 부위보다 조금 아래에 위치한 곳이다.
같은 힘으로 타격해도 가장 깊은 상처와 출혈을 유도할 수 있는 좋은 부위였다.
하지만 베주미예는 인간 병기라는 수식어에 걸맞게, 그 와중에도 몸을 회전시켜 강후를 노렸다.
반응이 반 박자씩 늦고, 고통에 잠식되었다고 한들 대응을 게을리하지는 않았다.
이것이 인간 병기의 무서운 점이다. 고통에 신음하는 중에도 차분하게 다음을 노린다.
여기서 자신의 공격이 성공했다는 사실에 기뻐하거나, 자만에 빠진 헌터가 당하는 것이다.
그런 방식으로 베주미예가 죽인 헌터의 수가 제법 됐다. 이 녀석은 앞서 학습된 경험이 있었다.
다만 녀석이 놓친 것은.
강후는 절대 어떤 상황에도 방심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오히려 그것을 역으로 이용하려는 상대의 노림수를 또 한 번 이용해서 역공을 노렸다.
지금이 딱 그런 상황이었다.
베주미예가 신음을 토해내는 와중에 더 격렬하게 몸을 비틀어 후방에 있는 강후를 노린 순간!
“여기다.”
강후는 또다시 베주미예의 뒤로 이동해 있었다. 녀석의 반격을 읽고, 횡 이동을 또 한 것이다.
그 바람에 베주미예의 노림수가 담긴 힘 있는 주먹 한 방이 다시 허무하게 허공을 갈랐다.
노림수는 한 번 간파당했을 때보다 두 번 간파당했을 때의 타격이 훨씬 크다.
두 번은 안 당하지, 하는 생각으로 보통 승부수를 던지기 때문이다. 지금의 베주미예도 그랬다.
강후가 이미 자신의 수를 읽고, 먼저 대응을 했을 것이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고.
결국.
푸욱! 푸욱! 푸욱! 푸욱!
“끄으으으……!”
비싸게 대가를 치렀다.
단지 혈루에 찔린 부분을 또 찔렸단 것만이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그것은 베주미예가 감당해야 할 폭풍의 극히 작은 일부분에 불과했다.
문제는 방금의 공방전으로 순식간에 대폭 누적된 강후의 공격 대미지였다.
베주미예가 계산 없이 철철 쏟아낸 핏값을 정산해야 할 때가 다가오고 있었다.
물론 강후의 스킬에 대해 알지 못하는 베주미예는 다가올 폭풍의 존재를 알지 못했다.
그리고.
【혈화】
퍼퍼퍼펑! 퍼펑! 펑!
피를 누가 흘렸는가에 상관없이 공평하게 고통을 선사하는 최악의 지옥이 찾아왔다.
베주미예는 그제야 느꼈다.
앞서 자신이 몸뚱이로 무식하게 받아낸 공격의 상처가 거대한 부메랑으로 돌아온다는 것을.
목 뒤와 겨드랑이, 그리고 허벅지에서 피를 매개로 한 폭발이 연달아 터졌다.
누가 봐도 강후가 베주미예에게 카운터 펀치를 세게 먹히는 통쾌한 상황이었다.
심지어 지켜보던 김수경조차 강후의 일방적인 승리라고 생각하며 감탄하고 있던 차였다.
하지만 바로 그때.
촤아악!
일순간에 진흙과 흙탕물이 뒤로 비산하더니, 비틀거리던 베주미예가 강후에게 돌진했다.
그 와중에 강후에게 반격할 기회를 노리고 있었던 것이다. 살인 병기다운 집념이었다.
“아.”
김수경이 탄식하는 소리가 들렸다. 오히려 강후가 카운터 펀치를 맞을 판이었다.
강후는 승리를 자축하듯이 베주미예를 등지고 서서는 피가 잔뜩 묻은 혈루를 쓸어내리고 있었다.
그리고 강후의 등 뒤에서 마치 야차(夜叉)처럼 피를 뒤집어쓴 베주미예가 나타났다.
베주미예의 거대한 양손은 이내 강후의 머리를 붙잡으며 걸레 짜듯 비틀어버릴 준비를 마쳤다.
강후의 죽음이 코앞이었다.
제아무리 솜씨 좋은 헌터여도, 목이 비틀어지고 부러진 상태에서 살아날 수는 없다. 절대로.
한데 바로 그때.
프스슷……!
최후의 일격을 확신하고 강후의 머리를 붙잡고 비틀던 베주미예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이유는 간단했다.
강후의 머리를 잡지 못했기 때문이다. 베주미예의 손이 닿은 것은 강후를 빼닮은 ‘환영’이었다.
“오!”
김수경이 탄성을 질렀다.
강한 빗줄기와 더불어 베주미예의 움직임에 시선을 빼앗겨 강후의 움직임을 잠시 놓친 사이.
이미 강후는 환영술을 이용해서 가짜를 만들어 뒀던 것이다.
그리고 환영으로 보란 듯이 승리를 자축하면서 지켜보던 모두를 기만했다.
눈썰미 좋기로 소문난 김수경도 깜빡 속았을 정도였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 베주미예에게 한 방을 먹이면서 바로 강후가 환영술을 전개했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강후는 두 번의 역공이 성공해도, 베주미예가 또 반격을 할 것을 간파한 것이다.
“……기가 막히군.”
김수경이 혀를 내둘렀다.
수준 높은 수 싸움을 눈앞에서 직접 관전한 터라, 가슴이 떨리는 구석도 있었다.
게다가 수 싸움의 승리자가 아군인 강후라는 사실이 더욱 그를 기쁘게 만들었다.
한편.
또 한 번의 공격 실패에 방황하던 베주미예의 시야가 그 순간부터 완전히 검게 바뀌었다.
이유인즉.
푸욱! 푸우욱!
베주미예의 후방에서 어깨 위로 올라탄 강후가 양손에 든 단검으로 안구를 휘저었기 때문이었다.
“크아아아!”
아무리 방어에 특화되었다고 해도, 질 좋은 아이템을 착용했다고 해도 눈알을 지킬 수는 없다.
베주미예는 뒤에서 달려든 강후의 공격에 속수무책이었고, 두 눈을 허무하게 잃었다.
‘베주미예가 무식하게 대응하지 않아서 오히려 내 입장에서는 노림수가 제대로 먹혔군.’
강후가 의미 없이 허공에 주먹질하는 베주미예를 보며, 전투를 총평했다.
적당히 머리를 쓸 줄 알아서 오히려 독이 된 케이스랄까.
우직하게 보이는 대로만 움직였더라면 강후의 입장에서도 계산이 복잡해졌을 것이다.
이제 마무리 단계.
적당히 거리를 두고 움직이면서 베주미예에게 마지막 일격을 날릴 타이밍을 찾았다.
시각을 잃은 베주미예는 강후가 어디에 있는지 특정하지도 못하고 계속 허공을 휘저었다.
이는 인간 병기의 한계점이기도 하다. 결국 인간의 감각을 활용하기에 가질 수밖에 없는 맹점.
휘리리릭! 척!
혈루를 손가락 사이로 움직이며 호흡을 다듬던 강후가 이내 자세를 낮추고 역수로 움켜쥐었다.
베주미예를 죽여야 그다음이 있다. 승리의 기쁨을 만끽하기에는 지금부터가 전투의 시작이다.
“간다.”
짧은 강후의 한마디.
빗줄기와 더불어 어둠이 짙게 깔린 폐공장의 으슥한 공간에서.
촤아아악!
선혈이 하늘 높이 솟구치고.
쿠우웅!
거구의 몸이 통나무처럼 빳빳하게 뒤로 나자빠졌다.
동시에 강후는 검은 그림자가 나자빠진 거구의 목과 가슴 언저리를 차분하게 찔렀다.
확실한 죽음으로의 인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