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화 베주미예 (1)
* * *
약속 당일, 약속한 장소에서 김수경과 그의 용병단 소속 일원을 만났다.
김수경 한 사람을 제외한 모든 용병은 복면을 쓰고 있었고, 그것은 강후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김수경은 애초에 외부로도 얼굴이 많이 팔린 사람이라 굳이 가릴 이유를 못 느낀 것이다.
확실히 산전수전 다 겪은 용병단의 냄새가 풍겼다.
강후가 보기에도 용병들의 무장 상태가 정말 좋았고, 무엇보다 사라지지 않는 피 냄새가 느껴졌다.
피로 얼룩진 전장에 푹 빠져 살다 보면, 마치 피부에 밴 것처럼 피 냄새가 없어지지 않곤 한다.
반지하의 습기 많은 집에서 오래 살아온 사람에게 특유의 눅눅함이 느껴지듯이 말이다.
김수경이 강후를 보자마자 바로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반갑습니다. 김수경입니다.”
“정선규입니다.”
“다른 용병과의 인사는 생략하실까요?”
“아뇨. 어쨌든 같은 목적을 가지고 함께 할 분들인데 인사는 나눠야죠.”
쓸모없는 겉치레를 싫어하는 강후지만, 이번에는 경우가 좀 다르다고 생각했다.
공통의 타깃인 전종두를 노리고 모인 사람들이다.
김수경 용병단 내 구성원도 있고, 자신처럼 외부에서 섭외한 용병도 있다.
서로가 살아온 배경이나 환경은 다르지만, 적어도 이 자리에서만큼은 일회성이라도 동료였다.
강후는 철저하게 이 ‘동료’들을 활용할 생각이었다. 그것은 저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서로를 활용하는 가운데, 끝에는 전종두를 손에 넣는 것이 목적인 셈이다.
김수경의 안내를 따라, 각 용병들과 차례로 인사를 나눴다.
그들은 복면에 적힌 가명으로 자신을 소개했고, 강후도 하나하나 이름을 외웠다.
누가, 어떤 분야에 탁월한 재주가 있는지 확인하는 과정도 거쳤다. 분야가 정말 다양했다.
그다음.
전종두에 대한 브리핑이 시작됐다.
광전사 계열의 헌터로 레벨은 350대. 이미 많은 범죄 혐의점을 술술 달고 있는 인간쓰레기였다.
증거 영상도 있었다.
세간에 제법 이름이 알려진 국내의 유망주 헌터를 러시아에 팔아넘기는 영상이 다수 나왔다.
거기에 곁들여서 일반인 여성의 인신매매도 같이 진행하는 모습까지 확인됐다.
핵폐기물 급의 쓰레기라는 표현이 전혀 아깝지 않을, 지저분하고 추악한 행보였다.
강후는 이번 의뢰를 선과 악의 대결 같은 속 편한 구도로 보지는 않았다.
밝은 미래와 어두운 미래의 구도로 생각했다.
정의구현에는 딱히 관심이 없는 강후라지만, 저런 식으로 인재를 잃어 좋을 것은 없었다.
국내 측면에서도 손실이고, 헌터 전체의 측면으로 봐도 대단히 큰 손해다.
한편으로는.
이번에 김수경 용병단과 공조하면서 김수경과의 인맥을 쌓아두려는 목적도 있었다.
김수경은 앞으로 강원도 동부권에서 큰 영향력을 발휘하게 될 사람이다.
게다가 기본적으로 길드나 용병단의 범죄 행위를 용납하지 않는 사람이기도 했다.
즉, 장기적인 안목으로 보면 정화 길드와도 대립각을 세울 가능성이 컸다.
세상에 알려지지 않아 그렇지, 정화 길드의 악행이 한두 가지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 사실을 조금이라도 알게 된다면, 김수경은 절대 정화 길드에 좋은 감정을 갖지 않게 될 터다.
어쨌든 전종두에 대한 브리핑은 자세하게 이루어졌다.
전장이 될 곳은 전종두 일당이 비밀스런 회합 장소로 자주 쓰는 폐공장이라고 했다.
그리고 김수경이 전체적인 상황 지시를 담당하기는 하지만, 강후는 재량을 많이 부여받았다.
외부 용병이다 보니, 과도한 복종이나 협력을 요구하진 않는 모양새였다.
물론 강후는 김수경의 말을 무시하거나 용병단과의 협력을 무의미하게 여기진 않을 생각이었다.
단, 전략적으로 필요하다면, 그리고 승부수를 던질만하다면 혼자 활동할 계획을 세웠다.
사실 그게 편했다.
큰 틀에서는 팀이지만, 작은 틀에서는 결국 1인으로 움직이는 그림이 좋았다.
정말 호흡이 잘 맞는 동료가 아니라면, 보통 옆에서 부대끼는 존재는 걸리적거린다.
1시간 후.
최종 정비를 마친 일행이 폐공장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마침 추적추적 비가 내리기 시작했고, 해도 진 시간이라 전체적으로 길이 어두웠다.
강후는 야시를 활용해 평소와 다름없이 시야를 확보하면서 먼저 나아갔다.
출발하기 전에 김수경에게 미리 길 뚫기를 자원했던 만큼, 보초나 경계가 없는지 살피는 중이었다.
‘역시.’
주변 경계를 서는 녀석들이 있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녹슨 컨테이너와 어지럽게 쌓인 나무 상자 때문에 보이는 게 없었던 상황.
하지만 마나의 흐름과 함께, 성좌 탐색 능력을 활용하니 숨어 있는 두 존재가 감지됐다.
제법 실력 좋게 몸을 숨기고 있었던 것은 맞지만, 어쨌든 들켰으니 미래는 뻔했다.
스으윽.
횡 이동으로 은신 상태에 들어간 강후가 무영까지 활용하며, 소리소문없이 그들에게 접근했다.
그리고 어둠 속에서 숨을 죽이고 불청객의 등장을 경계하고 있던 두 보초를.
푸욱! 푸욱!
순식간에 제압했다.
단숨에 목 뒤에 꽂아 넣은 단검은 두 헌터로 하여금 비명 한 번 지르지 못하고 즉사하게 했다.
만약을 대비해 대참수 스킬까지 넉넉히 쓴 상황이라 일격을 버텨낼 재간도 없었다.
아마 당사자들은 자신이 죽었다는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했을 터다.
눈 떠보니 저승이 코앞인 그림이겠지. 어찌 보면 축복받은 죽음이다. 고통 없이 죽었으니까.
결국 무전이나 경계 신호 한 번 보낼 틈도 없이 죽은 보초는 임무를 하나도 달성하지 못했다.
강후가 앞장을 선 덕분에 김수경이 이끄는 1팀은 진입로가 순탄하게 열렸다.
반면 2팀은 중간에 한 번 발각될 뻔한 위기가 있었다.
그래서 시간을 두고, 다시 폐공장 측면로를 우회하는 계획을 세우겠다고 연락이 왔다.
구구절절 말이 길어지기는 했지만 결국 진입이 지연됐다는 뜻이다. 꼬였다는 얘기다.
반면 강후는 소리 없이 보초 여섯을 차례대로 제압했고.
더 나아가 은밀하게 지면에 깔린 형태로 매립되어 있던 경계용 결계도 확인했다.
이 결계는 공격 기능은 없지만, 조명탄 효과가 있어 적의 침입을 알려주는 성능을 가졌다.
그런데 강후가 결계 위치를 정확히 파악한 덕분에 1팀은 아무도 결계를 밟지 않을 수 있었다.
‘예상은 했지만, 생각보다도 더 감각이 좋고. 무엇보다 활용 가능한 능력이 많은 것 같다.’
김수경은 강후의 능숙한 대응과 이동, 그리고 최단 루트 개척까지 두 눈으로 보면서 이예린이 왜 그를 자신 있게 추천했는지 이해했다.
이예린이 전했던 말대로 레벨은 전혀 중요하지 않은 요소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히려 강후의 레벨이 아직까지 100도 안 됐다는 사실이 무섭게 느껴졌다.
지금도 자신이 감탄할 수준이라면, 여기서 더 성장하면 그 이상일 테니까.
‘암살자 교본이라고 해도 무방하겠군. 은밀하게 죽이는 모든 과정에 특화되어 있어.’
첫 만남에서 느꼈던 대로, 강후는 산전수전 공중전을 다 겪은 인물이었다.
전장에서 본 암살자의 수는 덤프트럭 몇 대에 채워도 모자랄 만큼 차고 넘쳤다.
하지만 그렇게 보아온 많은 암살자 중에서 강후의 움직임이 일품이었다.
깔끔했다.
암살자 헌터에게 ‘깔끔하다’라는 말은 검과 마법을 다루는 헌터에게 강력하다는 표현과 같다.
해당 직업군에 보낼 수 있는 최고의 찬사 중의 하나인 것이다.
김수경은 강후에게 망설임 없이 그런 수식어를 붙여주고 싶었다. 전장에서 뼈가 굵은 솜씨다.
폐공장으로 가장 빠르게 이동할 수 있는 비탈길 형태의 샛길에 막 1팀이 접근했을 무렵.
퍼어어엉!
반대편에서 폭발이 일었다.
1팀의 완벽한 접근이 무색하게 2팀에서 사고가 난 모양이었다.
“침입자다!”
“북쪽이야! 북쪽!”
왜애애앵!
경보 사이렌과 더불어, 앞다퉈 폐공장 밖으로 나오는 오쇼 용병단원이 보였다.
전종두는 보이지 않았지만.
어쨌든 2팀의 사고로 인해서 이미 은밀한 침입의 의미는 사라졌다. 이제는 속도전이다.
김수경이 소리쳤다.
“덮쳐! 전종두를 찾아! 앞을 가로막는 놈은 다 죽여버리고! 단순하게 간다!”
어느새 굵어진 빗줄기를 헤치며 용병들이 폐공장을 향해 질주하기 시작했다.
강후는 바로 비탈길 아래로 보이는 출입구가 아닌, 살짝 우회해서 가야 보이는 쪽문을 봤다.
보통 정문, 그러니까 큼지막한 대문에는 경계 시설이 제법 설치되어 있을뿐더러.
적의 화력도 집중될 수 있는 위험 요소가 있다.
물론 김수경이 그걸 모르고 용병들을 진격시킨 것은 아니었다.
방어에 특화된 능력을 가진 용병 다수를 전면에 배치했기 때문이다. 버틸 자신이 있는 것이다.
다만 강후는 처음부터 전종두가 목적이었기에 소모적인 교전에 힘을 싣고 싶진 않았다.
개인의 책임과 판단 하의 단독 행동은 김수경도 허락한 부분이므로 더 신경 쓸 것도 없었다.
쪽문으로 진입하면 훨씬 수월할 것 같았던 예상과 달리.
콰앙!
쪽문이 통째로 날아가는 광경이 펼쳐지는 순간, 강후는 계획이 살짝 꼬였음을 직감했다.
“베주미예가 여기서 나오나.”
양미간이 찌푸려졌다.
베주미예.
러시아어로 ‘광기’를 뜻하는 단어다. 즉, 러시아에서 넘어온 녀석이라는 뜻이다.
거인형 헌터 병기였다.
정확히 말하자면 헌터는 맞는데 사고하는 능력은 없고, 오로지 기계적으로 살인만 하는 존재다.
이클립스에서 다루는 추적자보다 훨씬 더 강력하기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애초에 헌터 육성 단계부터 꾸준히 약물을 주입해서 덩치와 키를 키우는 데다가.
꽤 효율이 좋은 아이템으로 무장을 해 주기 때문이다. 추적자처럼 쓰고 버리는 개념이 아니다.
베주미예의 특징은 한 명의 적을 타깃으로 삼으면, 죽을 때까지 공격한다는 점이다.
스스로의 숨통이 끊어지지 않는 한, 타깃을 끝까지 노린다.
이를 바꾸기 위해서는 베주미예의 ‘주인’만이 명령으로 방향성을 바꿀 수 있다.
직접 확인한 것은 아니지만, 이 베주미예의 주인은 볼 것도 없이 전종두일 듯했다.
“생긴 것 봐라.”
강후는 자세를 낮추고.
혈루를 힘껏 움켜쥐었다.
프랑켄슈타인 저리 가라 할 정도의 외모를 가진 베주미예는 마주 보는 것도 불쾌했다.
“어쨌든 쉽지 않겠군.”
몸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베주미예는 자신과 비교하면 양극단이라고 해도 될 정도로 정반대의 위치에 있었다.
베주미예는 거인에 돌격형이고, 무력형이다. 몸으로 모든 것을 때우는 타입에 가깝다.
반면에 강후는 치고빠지는 기동형이고 민첩, 회피형이면서 스타일리시한 것이 특징.
찍어누르려는 자와 그것을 피하며 교묘하게 역습을 가하는 자의 싸움인 것이다.
강후가 슬쩍 뒤를 보자, 베주미예와 마주친 것을 확인한 다른 용병이 지원을 오려는 듯 움직였다.
하지만 눈치 빠른 김수경이 강후와 마주친 눈빛에 담긴 속내를 읽고는 용병을 제지했다.
“저쪽은 선규 씨에게 맡겨. 네가 가면 오히려 본인이 짜놓은 판이 어그러질 거다.”
‘센스 있네.’
말을 하진 못했지만, 강후가 김수경을 향해 검지와 엄지를 말아 동그라미를 만들어 보였다.
일대일의 상황이다.
베주미예를 뚫어야 그다음이 있다.
강후는 정문이 아닌 쪽문 쪽에 베주미예를 배치해 둔 이유가 있을 것이라 확신했다.
아마 접근해서는 안 되는 무언가가 있거나, 숨기고 싶은 장소가 있는 거겠지.
이제 러시아산 거대 인간 장벽과 마주칠 시간이다.
한 대만 맞아도 골로 갈 수 있는 만큼 신중해야 한다. 반드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