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화 그라운드 제로 (1)
물론 강후의 입장에서나 개수작으로 보이는 것이지, 장시환의 입장에서는 탄탄대로 그 자체다.
이제 포르투나 길드의 헌터들은 서울에 자유롭게 드나들어도 눈치를 볼 필요가 없다.
상호 협력 및 전면 교류에 관한 협약이라는 것이 사실상 길드 연합, 동맹이나 다름없어서다.
유사시에 장시환이 케이시를 돕거나, 반대의 경우라고 해서 이상하게 볼 이유가 없어지는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앞으로 장시환은 다른 열세 개의 별 구성원들과 물리적, 심리적 거리감을 좁힌다.
밑 작업을 확실하게 해 둔 다음, 나중에는 모두가 한 몸처럼 다닌다.
그것을 보고서 사람들은 연합의 진위를 의심하기보다는 하나의 거대한 ‘영웅 군단’으로 보게 된다.
장시환의 큰 그림이다.
정확히는 주인공 장시환을 위해 그렇게 판을 짠 원작자인 자신의 업보……이지만 말이다.
‘원작에서는 그렇게 뽕이 차오르는 광경이 아닐 수 없었는데.’
강후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미국의 네임드 헌터 중 한 명인 케이시 렉스의 인정을 받은 주인공 장시환!
봐라! 당신들이 보는 소설 속의 주인공이 이렇게 대단하다! 그런 의미로 들어간 씬이었는데.
신강후의 시점에서 보니 사악한 놈들의 거대한 설계처럼 보여서, 이리 불편할 수가 없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에 달려들어 판을 깨고 싶은 심정이다. 그만큼 불쾌한 조합이 만들어졌다.
‘서울은 이래저래 까다롭군.’
용병 활동조차도 허락되지 않는 서울은 무조건 정화 길드의 관할 안에 있어야 했다.
우회하는 방법은 헌터 치안청에서 일하는 것이지만, 국가 기관은 좋은 선택이 아니다.
모든 행동이 기록으로 남아, 은밀한 활동이 불가능하다. 게다가 하는 일도 제한적이다.
그리고 더 큰 틀에서 보면, 서울의 헌터 치안청은 사실상 정화 길드 2중대나 마찬가지다.
‘정화 길드에 깊게 연결되는 일은 사절하고 싶지만, 적당한 혜택에는 숟가락 좀 얹고 싶은데.’
가까운 시기에 정화 길드의 주도 아래 이루어지는 대형 이슈가 하나 있다.
바로 ‘심판의 지옥’이라고 불리는 초대형 던전의 공략이다.
무려 1천 명이 동원되는 대규모 레이드로 유일하게 외부에서 용병을 구하는 이슈다.
인재 스카우트 차원에서 외부인의 여유를 남겨두는 것이다.
게다가 심판의 지옥 던전이 정화 길드의 소유라서, 딱히 분쟁이 일어날 이슈가 없기도 했다.
강후는 여기에 참여 신청을 넣어 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초대형 던전이라는 콘셉트에 맞게 미들 보스도 정말 많고, 내부 비밀 지형도 많기 때문이다.
원작에서 장시환이 성장이 막힐 때마다 항상 재미를 봤던 던전이기도 하다.
즉, 시점을 바꾸어 보면 강후도 얼마든지 이득 볼 구석이 많다는 얘기다. 아는 게 많으니까.
꿀꺽- 꿀꺽-.
강후는 방금 편의점에서 산 대용량 캔커피를 들이켰다.
사이즈업이 된 500ml의 캔커피라서 그런지, 두 모금을 마셨는데도 아직 남은 용량이 넉넉했다.
그때.
“서울 사람은 아니죠?”
대뜸 등 뒤에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서울에는 인맥이 전혀 없는 강후이기에 아는 사람의 목소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중저음의 허스키한 목소리엔 약간의 어색함이 묻어 있었다.
한국어가 유창한 외국인이 말하는 느낌이랄까?
혹시나 하는 생각에 고개를 돌리니 아는 얼굴이었다.
‘유청화.’
일전에 안영호를 만났을 때, 자연스럽게 얼굴과 이름을 떠올렸던 적이 있는 유청화였다.
중국인인 그녀는 열세 개의 별의 구성원이자 스킬 카피 능력자다.
그녀가 유청화라는 사실을 바로 알아차린 이유는 간단했다.
가슴골까지 훤히 드러나 보이게 입은 검은 블라우스.
쇄골에서부터 윗가슴까지 쭉 이어지는 붉은 장미 문신.
양쪽 눈가 아래에 찍혀 있는 작은 별 모양의 문신까지 그녀의 시그니처 표시였기 때문이다.
레드 컬러의 머리에 붉은색 립스틱, 붉은 재킷에 붉은 바지.
그리고 굽 높은 하이힐.
드레스 코드 또한 레드(Red)인 것이 틀림없는 유청화의 취향이었다.
“무슨 일이시죠?”
강후가 능청스럽게 대답했다.
유청화가 자신이 누구인지 알고 말을 걸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녀와의 접점은 전혀 없으니까.
여기서 괜히 당황스러워하거나 과민 반응을 보이면, 그게 더 쓸데없는 의심을 유발하겠지.
“그냥 타지의 헌터 같은 느낌이 나서요. 서울에 주로 있는 헌터는 전광판을 유심히 보지 않거든요.”
“그렇군요.”
맞는 말이기는 해서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강후는 서울의 소식을 유심히 살피고 있었다.
“서울, 재미없죠? 물가도 살인적이고, 어딜 가도 다 해 먹는 놈만 해 먹으니 말이에요.”
옳은 말이지만 유청화의 입으로 말한다 생각하니 웃음이 나왔다.
자기도 은밀하게 뒤에 숨어 정화 길드의 혜택을 보는 주제에 다 해 먹는 놈이라니.
확실히 한국어가 유창하다.
말투에서 느껴진 아주 작은 이질감만 걷어내면, 한국 사람이라고 생각해도 무리가 없을 정도다.
유청화에게 자연스럽게 시선이 갔다. 동시에 그녀의 능력에 대비할 준비를 했다.
유청화는 스킬 카피가 주특기지만, 서브 능력으로 정신계 능력도 가진 헌터다.
그녀와 시선이 마주치는 순간, 강후는 머릿속으로 아주 우울하고도 힘든 생각을 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머릿속을 들여다보고자 하는 그녀의 ‘정신 스캔’을 힘들이지 않고, 회피하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강후와 시선이 마주친 유청화가 살짝 놀란 표정을 짓더니 씨익 웃었다.
은근슬쩍 강후를 스캔하려고 했는데, 시작부터 실패로 돌아가면서 강후를 다시 본 눈빛이었다.
이렇게 자연스럽게 정신 스캔을 회피하려면 기본적으로 자신보다 레벨이 높아야 하기 때문이다.
혹은 정신 능력에 대한 대응 훈련이 확실하게 되어있는, 전문 헌터라면 가능한 그림이기도 하다.
【미혹의 여우】
【별다른 정신적 방어 기제가 없을 때, 자신보다 레벨이 낮은 대상의 상태창 정보를 획득합니다.】
【위대한 복제자】
【반복 숙지, 학습을 통해서 대상의 스킬을 복제할 수 있습니다. 단, 복제 스킬의 효율은 기존의 20% 이상을 넘길 수 없습니다.】
【침묵의 여인】
【어떠한 경우에도 대표 성좌 둘 외의 다른 계약 성좌에 대한 정보는 알려지지 않습니다.】
확인된 성좌 정보만 봐도, 그녀가 앞으로 얼마나 까다로운 존재로 성장할지 알 수 있었다.
보이는 성좌 정보는 3개다.
그런데 침묵의 여인 성좌가 다른 성좌에 대한 정보를 ‘차단’하고 있기 때문에.
다른 성좌의 정보는 알 수 없다고 봐야 한다.
【흥미롭군. 내가 살필 수 없는 세계가 있다니.】
차원 강탈자가 더 들여다볼 수 없는 유청화의 성좌 정보에 놀랐는지 말문을 열었다.
괜히 그녀가 열세 개의 별의 구성원이 되는 것이 아니다.
각 구성원이 계약한 핵심 성좌들은 차원 강탈자만큼이나 대단한 신격을 가진 성좌들이다.
“저기.”
“네?”
“쓸데없는 시도는 그쯤 합시다. 대문 열어줄 생각 없으니까, 그만 두드려요.”
“예리하네요. 제가 정신계 능력을 쓸 것이라고 예상한 건가요?”
“그렇게 대단한 헌터 아닙니다. 신경 쓸 것 없어요.”
적당히 말을 돌렸다.
유청화의 관심이 싫은 것은 아니지만, 굳이 그녀의 관심을 받아야 할 이유가 있는 것도 아니다.
피차 이후에 적이 될 수밖에 없는 사람이다. 가까워져서 좋을 것은 없다.
“자기 입으로 대단한 헌터가 아니라고 하는 거 보니까, 청개구리처럼 더 관심이 가는 걸요?”
“…….”
강후가 아무 대꾸도 하지 않자, 유청화가 재킷 속주머니에서 꺼낸 명함 지갑에서 명함을 꺼냈다.
선명한 금테가 둘린 붉은 색 배경의 명함이었는데, 익숙한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신투 길드.’
중국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최상위 길드 중 하나인 신투 길드다.
“국내 활동이 지루하거나, 전폭적인 지지를 받고 싶으면 찾아와요. 한국인 전담 부서도 있어요.”
“이 명함이 프리패스라도 되는 건가 보죠?”
강후가 슬쩍 떠봤다.
“물론이에요. 제 능력에 한 번이라도 제대로 저항한 사람에게만 주는 명함이니까.”
“시험을 통과했다?”
“뭐, 그런 셈이에요. 언제든 이 명함을 보여주면, 핵심 관계자와 대화할 수 있을 거예요.”
“그렇군요.”
“아니면 이것도 나쁘진 않겠네요. 여기로 연락해도 좋고요.”
유청화가 명함 한 장을 더 내밀었다.
이번에는 자기 이름과 번호가 적힌 내용이었다.
“개인 명함입니까?”
“맞아요. 편하게 연락 줘요. 먼저 다가오는 만큼, 그 이상으로 마음을 열어 줄게요.”
그녀의 붉은 입꼬리가 말려 올라가더니, 그녀의 묘한 눈빛이 강후에게 스며들었다.
누가 보아도 노골적인 추파였지만, 강후는 딱히 그런 추파에 감흥을 보이지 않았다.
“잘 챙겨두죠.”
“또 봐요.”
“인연이 닿는다면.”
그렇게 유청화와의 만남이 끝났다.
예상치 못한 만남이었지만, 자연스럽게 잘 마무리된 자리였다.
열세 개의 별 중 한 명과 이렇게 접점이 생겼다.
공격적으로 이용을 해 볼까, 아니면 없었던 일처럼 기억 속에 묻어둘까.
이 부분은 곰곰이 생각을 해 볼 문제인 듯싶었다.
결국은 적이 될 그들을 더 가까이서 살피느냐, 아니면 멀리서 살피는가 하는 문제는.
옳고 그름이 아니라, 어떤 전략을 선택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신중해야 했다.
* * *
서울역에서 임진강역이 있는 파주 방면으로 향하는 경의중앙선을 기다리는 동안.
강후는 서울역 인근에서 이뤄지고 있는 대규모 시위를 보며 생각에 잠겼다.
“헌터 치안청은 조속히 심연을 토벌하라! 해체하라!”
“당장 대장 이현석을 구속하고 사형시켜라!”
“스스로 해낼 능력이 없다면 정화 길드의 도움을 받아서라도 군벌을 무너뜨리자!”
이런 규탄 시위는 비단 한 곳에서 벌어지고 있지는 않았다.
심연(深淵).
수도권에 가장 가까이 있는 군벌 중에 하나로 정화 길드와 장시환에게는 눈엣가시인 군벌이다.
왜냐면 심연은 정화 길드의 정체성과 악행에 대해, 끊임없이 의문을 제기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원작에서는 장시환이 자신에 대해 근거 없는 소문을 퍼뜨린다며 불쾌해하는 서술이 나오지만.
마왕 부역자 엔딩을 생각하면, 심연의 말은 근거 없는 소문이 아닌 확실한 진실이었다.
‘내가 만약에 제대로 줄을 대고 싶다면, 심연에 대는 게 맞지. 정화 길드가 껄끄러워하기도 하고.’
심연은 어설픈 규모의 용병단도 아니고, 체계가 덜 잡힌 범죄 조직과는 차원이 다르다.
하나의 거대한 군조직이다.
그래서 큰 조직의 영향권 안에서 활동하고 싶다면, 심연도 아주 괜찮은 선택이기는 했다.
물론 심연의 대장인 이현석은 철저한 실력주의기에 지금은 가도 푸대접을 받겠지만 말이다.
무심결에 문자 메시지 창을 살피던 강후에게 스팸 문자에 밀려나 있던 문자 하나가 보였다.
발신자 이름을 살펴보니 안영호였다.
의미와 가치가 있는 이름이기에 저장해 둔 녀석이었다.
[선규 형님, 잘 지내시고 계신가요? 저는 일전에 형님이 구해 주셨던 안영호입니다.]
[일본에는 언제 오시나요? 외삼촌께서도 선규 형님을 꼭 보고 싶어 하세요. 언제든 오세요.]
[그때 약속드렸던 모든 혜택은 지금도 변함이 없습니다. 일본에서 활동하기 편하실 거예요.]
“그래, 일본이 있었지.”
강후가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비단 꼭 국내로 생각을 가둬놓을 필요가 없는 것이다.
안영호와 좋은 인연이 생긴 덕분에 국외로도 얼마든지 생각을 확장할 수 있었다.
그것은 어떻게든 성장에 끊임없이 추진력을 불어넣고 싶은 강후의 입장에서는 최고의 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