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천마-350화 (350/391)

350화

일시에 이령산맥이 크게 들썩였다.

새들이 힘찬 날갯짓과 함께 저 멀리 날아갔고, 근방에 있던 들짐승들은 겁먹은 울음소리와 함께 도망치기 바빴다.

숫제 곧 자연재해라도 일어날 것만 같은 광경이었다.

‘기세가 대단한데?’

천휘가 눈앞의 광경을 마주하곤 짧게 감상을 남겼다.

이령산맥의 하늘이 뭉뚱그려졌다.

살갗을 따갑게 하는 강렬한 존재감이 산맥에 가까워진 순간부터였다.

‘저 기운이 사흑련주겠어.’

총 일곱의 존재감 중 유독 강렬하게 흘러나오는 기세를 읽으며 생각하는 그때.

“……아예 숨길 생각이 없군.”

용주개가 씹어 내듯이 말을 뱉었다.

미간을 찌푸린 그는 존재감을 흩뿌리는 곳을 보며, 탐탁지 않아 했다.

천무공과 종남검성 그리고 용천객 또한 그 말에 동의하는지 위아래로 작게 고갯짓을 해 보였다.

종전에 대한 협정이었다.

평화롭게 해결하기 위해 모이는 자리거늘, 자신의 힘을 과시하듯 기세를 풍기는 것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은 탓이었다.

“쯧쯧, 짐승들이 영역 다툼을 하려는 것도 아니고, 뭔 기세를 이렇게나 풀풀 풍기는 건지.”

노려보던 용주개가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한창 투덜거리는 그때였다.

“저는 괜찮아 보이는데.”

천휘로부터 반박하는 말이 흘러나왔다. 쏘아지는 주위의 시선을 받은 천휘의 입꼬리에 미소가 걸렸다.

흥미와 투기가 범벅된 미소였다.

“무인답고 좋잖아요.”

천휘는 점차로 가까워지는 측정 불가의 기세를 읽으며, 말을 덧붙였다.

“자신의 무위에 자신감이 없었다면 저렇게 못 했을 테니까.”

“……무인답다고?”

전혀 생각지 못해 본 말에 용주개를 비롯한 세 명이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 멍한 표정을 짓던 그때였다.

저벅.

묵직한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새와 짐승들이 떠나며 고요해져 그런 건지, 발걸음 소리는 유난히도 크게 메아리치며 울렸다.

한 걸음, 한 걸음.

발걸음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고.

스윽―

마침내 일곱의 인영이 능선 끝에서부터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오호라.’

천휘의 입매가 더욱 비틀렸다.

문사의 복장을 한 사내를 제외하고, 각양각색의 복장을 한 여섯의 남녀들이 풍기는 기세가 심상치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천휘는 그들 중 선두에 있는 자에게만 시선을 고정했다.

금빛의 용이 수놓아진 자색 장포를 입은 사내.

사흑련주로 짐작되는 이였다.

스르륵―

천휘의 눈꺼풀이 반쯤 잠겼다.

반개한 눈은 오직 사흑련주에게 꽂힌 채 그의 전신을 빠르게 훑었다.

그가 흘리는 기의 파동은 주위 여섯의 것과는 비교조차 되지 않았다.

아예 격이 다른 탓이었다.

약간의 흔들림도 없는 걸음으로 다가오는 사흑련주의 전신에서 흘러나온 기파가 용의 꼬리처럼 길게 늘어졌다.

순간 그의 등 뒤에서 쬐는 신명의 햇볕조차 삼켜질 정도의 기파였다.

‘상당한걸.’

간단한 감상을 남긴 천휘가 이번엔 세심한 눈으로 그를 살폈다.

장포가 흔들리며 언뜻 비치는 신체조차 비범함을 드러내고 있었다.

쇠의 힘줄처럼 잘 짜인 근육.

잔잔한 눈동자 속 그 끝을 알 수 없이 깊이 가라앉은 새파란 광망.

그 심신은 완전무결에 가까운 듯했으니, 지금 그의 경지는 범인으로선 헤아릴 수 없는 곳에 도달했을 터였다.

인상곡과 무림맹주를 바라보던 사흑련주가 불현듯 시선을 돌려 천휘를 응시했다.

후욱!

초월적인 기세가 덮쳐 왔다.

사람의 것이 아니라, 해일이 다가오는 것처럼 물리적 압박감이 느껴지는 기세의 폭풍이었다.

살갗이 아릴 정도였다.

‘이것 봐라. 저릿저릿한데?’

천휘가 매화신공을 끌어올렸다.

새까만 눈동자에 적광이 어리고.

화아악!

순간 그를 덮쳐 오던 기세가 단숨에 화하며, 허공에서 흩어져 나갔다.

신비에 가까운 내공 운용이었다.

“…….”

가뜩이나 침잠해 있던 사흑련주의 눈이 끝을 모르게 가라앉았다.

잔잔한 호수와도 같던 눈동자가 한파라도 몰아친 듯 냉기를 품었다.

그때였다.

“매화향……!”

기함성이 흘러나왔다.

사흑련주의 뒤편에서였다.

“네놈이구나!”

늑대의 갈기처럼 긴 백발과 백미를 내버려 두듯이 기른 노인이 살기등등한 눈으로 천휘를 노려봤다.

당장에라도 달려들 기세였다.

“귀천사자……!”

노인, 귀천사자의 날카로운 반응에 무림맹의 호위로 온 이들 중 천휘를 제외한 네 명이 눈을 찌푸리며 기수식을 취하던 그때였다.

“약속을 잊었나?”

굵은 목소리가 사방에 번졌다.

내공이 실리지 않은 음성이건만 귓가에 중얼거린 것처럼 똑똑히 들리는 목소리였다.

목소리의 주인.

사흑련주가 귀천사자를 향해 경고하듯 말했다.

“……미안하오.”

귀천사자가 아랫입술을 잘근 깨물면서, 뒤로 물러났다.

그 모습에 용주개의 눈이 살짝 커졌다.

제아무리 사흑련주라 해도 귀천사자는 불사천교의 일사자였다.

아무리 불사천교주가 부재하는 상황이라곤 하지만, 그런 그가 곧바로 굴복했다.

‘사흑련주의 뜻에 따라서 사흑련과 오황문이 좌지우지된다더니…….’

말로만 들었던 일을 직접 목도하니 느끼는 바가 달랐다.

그때 가만히 의자에 앉아서 모든 상황을 지켜보고만 있던 무림맹주가 입을 열었다.

“오랜만이올시다. 련주.”

그는 마치 오랜 친우를 반기듯 사흑련주를 향해서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이군.”

하나, 사흑련주는 무심한 태도로 대답했다.

그 반응에도 무림맹주는 웃음을 잃지 않으며, 그에게 오라고 손짓했다.

“자, 이리 앉으시구려.”

사흑련주가 탁자와 의자 그리고 무림맹주를 보더니, 걸음을 내디뎠다.

그 뒤를 사뇌복룡이 따랐다.

저벅, 저벅.

둘은 거침없이 걸어갔다.

용주개와 천무공, 종남검성 그리고 용천객을 지나서 마지막으로 천휘를 지나쳐 가려는 순간.

사흑련주와 천휘의 눈빛이 교차했다.

짧은 순간이었다.

눈 깜빡할 시간보다 짧으리라.

하지만 그 순간은 천휘는 물론이고 사흑련주에게도 꽤나 긴 시간이었다.

한껏 느려진 그들만의 시간에서 둘은 서로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서로를 알아본 것이다.

이내 사흑련주가 천휘를 지나쳐 걸어가고, 일시적으로 느릿하게 흘러가던 시간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참 오랜만에 맡는 향인걸.’

천휘는 스치듯 지나가는 그에게서 너무나도 익숙한 향을 느꼈다.

언뜻 낯선 사기의 향기였다.

하지만 그 안에 담긴 진정한 본질은 어찌할 수 없었던 것인가.

난생처음 느끼는 사기에서 너무나도 익숙한 향이 피어 올라왔다.

한없이 깊고도, 진한 마(魔)의…….

귀혼마경(鬼魂魔經)의 향이.

‘이게 천봉항가의 귀천마경이지.’

천휘의 눈썹이 휘어졌다.

전에 봤었던 흑야차의 귀천마경과는 그 궤를 아예 달리하고 있었다.

천지 차이였다.

‘흠, 직접 보면 의문이 약간이라도 해결될 것 같았는데, 더 궁금해졌어.’

천휘가 사흑련주의 등을 봤다.

볼수록 더 흥미가 일었다.

어떻게 자신의 손에 멸문당한 천봉항가가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것인지, 그리고 어떻게 이 귀천마경을 마기 없이 익히고 있는 것인지.

‘나중에 따로 만나던가 해야 하나?’

천휘가 어떻게 해야 사흑련주와 따로 만날 수 있을지 생각할 무렵.

사락.

탁자에 당도한 사흑련주가 장포를 크게 펄럭이며 의자에 앉았다.

삽시간에 주위가 고요해졌다.

무림맹의 호위도, 사흑련의 호위도.

모두가 탁자에 집중했다.

잠시 후, 정적을 깨는 소리가 울렸다.

사흑련주의 뒤에 있는 인물.

사뇌복룡의 입에서 나온 목소리였다.

“그럼 협정을 시작하겠습니다.”

* * *

당연하게도 협정은 진지하게 진행되었다.

복잡한 사안들이 오가는 것을 보니 꽤나 시간이 걸릴 것처럼 보였다.

종전에 대한 협정이니만큼 아무런 탈이 없도록 하기 위해 더욱 철저히 따지는 것도 있었지만.

사뇌복룡과 제갈공.

두뇌로는 두말할 필요가 없는 지략가들의 설전이 계속해 이어졌기 때문이다.

“하암, 꽤 오래 걸리겠네요.”

하품을 내뱉으며 천휘가 지루하다는 듯 말하자, 용주개가 미간을 좁히며 대꾸했다.

“아마 세 시진은 걸리겠지.”

용주개는 제갈공으로부터 들었던 예상 시간을 전달하면서도 눈앞에 있는 다섯 명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그것은 그만이 아니었다.

팔짱을 끼고 있는 용천객도 무의식적으로 검파에 손을 올린 종남검성도, 기감을 극한까지 끌어올린 천무공도. 모두가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언제, 어느 때든 바로 출수할 수 있도록 기수식을 취하고 있었던 것이다.

상대는 사파의 연합, 사흑련.

언제, 갑자기 무슨 짓을 벌일지 몰랐기에 만일의 사태를 대비하기 위함이었다.

“흐음.”

그런 그들과 다르게 긴장은커녕, 태평하게 바위에 앉은 천휘는 턱을 괴면서 앞에 있는 다섯을 찬찬히 훑었다.

한 명은 낯이 익은 자였다.

탈혼제 백운.

그는 지금의 협정에 관심이 없다는 듯 병째로 술을 들이켜고 있었다.

“꿀꺽, 음?”

한창 연거푸 술을 마시던 백운은 천휘의 시선을 느꼈는지, 입에서 술병을 떼며 눈동자를 옆으로 굴렸다.

천휘와 눈이 마주친 그가 웃으며, 손에 든 술병을 좌우로 흔들었다.

백운의 손짓에 아까 전부터 천휘를 계속 노려보던 귀천사자를 제외한 셋이 놀라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수십 년간 백운을 보아 온 그들로서도 지금의 반응은 놀라운 것이었기 때문이다.

‘백운이 먼저 인사한다고?’

‘놀라운 일이군.’

‘……매화신협이라 했던가.’

한데 그들의 놀라움은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천휘가 돌연 발걸음을 뗀 것이다.

“어디 가려는 것이냐?”

“소협!”

“자네!”

“……!”

그 행동에 놀란 용주개를 비롯해서 셋이 기겁하며 손을 뻗으려 할 때.

탁.

천휘가 발을 멈췄다.

무림맹과 사흑련이 각자 위치한 곳의 딱 절반 거리를 두고서였다.

“이놈이 간 떨어지게…….”

그 행동에 지켜보던 이들이 안도할 무렵.

털썩.

천휘가 바닥에 그대로 주저앉았다.

“……뭐지?”

“무슨 짓거리를?”

그 기이한 행동에 무슨 의미가 있는지 모두 의아해하며 바라보던 그때, 천휘가 검지 손가락을 까딱였다.

“……저놈이!”

“어린놈이 당돌하군.”

“매화신협이라고 난리더니, 머리가 회까닥 돈 놈일 줄이야.”

명백한 도발에 귀천사자의 눈에 당장 핏발이 섰고, 그 손가락질을 지켜보던 백운과 다른 이들이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뱉었다.

무림맹 쪽도 당황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무슨 짓을 하려는 거냐?”

“자네, 지금 무슨…….”

놀라서 천휘를 말리듯 말을 꺼낸 용주개와 종남검성은 물론이고 말을 잃은 듯한 천무공과 용천객 역시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천휘를 바라봤다.

하지만 천휘는 그런 그들의 모습은 신경도 안 쓴다는 듯 태평하게 입을 열었다.

“거. 시간도 아직 많이 남아서 심심한데, 나랑 논검 할 사람 없어?”

“…….”

순간 정적이 드리워졌다.

모두가 지금 천휘가 하는 말에 사고가 따라가지 못하는 상태였다.

사흑련과 무림맹의 종전 협정 자리에서 논검을 하자?

자신이 잘못 들었나 몇몇은 귀를 후벼파면서, 천휘를 바라볼 정도였다.

그때.

“푸핫!”

백운이 폭소를 터트렸다.

“재밌는 놈이야.”

말과 함께 그가 땅을 박찼다.

보신경을 펼쳐 단숨에 천휘의 앞에 도달한 그의 모습에 기겁한 용주개와 종남검성도 보신경을 펼쳤다.

어느새 내공을 끌어올리면서였다.

하지만.

“저부터 하고 다음에 하시죠?”

천휘는 다가온 그들을 슬쩍 올려다보며, 입을 달싹였다.

“허어, 내가 논검을 하러 온 것 같으냐? 지금 이 상황에서 뭔…….”

용주개가 무슨 말이냐며 어처구니없어하는 그때.

털썩.

백운이 땅바닥에 앉으며, 물었다.

“한데 이 바닥에서 논검할 건가?”

“여기면 충분하잖아.”

천휘가 당연한 걸 묻는다는 듯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우리 정도면.”

“하하핫! 그것도 그렇군.”

웃던 백운이 무릎을 손으로 쳤다.

기꺼운 듯한 모습이었다.

그와 동시에 그의 전신에서 은은한 기세가 피어오르더니, 그가 곧 웃음을 그쳤다.

대신 투기가 발현되었다.

그 변화를 목도한 용주개와 종남검성이 긴장하며 경계할 때였다.

“선수는 누가 할 거냐?”

백운이 물어왔다.

진지한 목소리였다.

그 음성에 백운이 또 장난이나 치려 한다고 생각했던 사흑련의 호위들이 기겁하며, 표정이 급변하였다.

“선수라…….”

그리고 그런 주위의 반응은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천휘가 턱을 매만지면서, 나직이 대답했다.

“그쪽이 정해.”

천휘의 말에 백운이 차가운 안광을 발하며, 곧바로 입을 달싹였다.

“그렇다면 내가 먼저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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