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9화
호북 남단, 이령산맥(二靈山脈).
여기저기 뻗어난 푸르른 초목들이 옷처럼 입혀져 있는 산의 곳곳에 솟은 봉우리들은 저마다 자신이 높다 자랑하듯 하늘을 향해서 치솟아 있었다.
약초꾼들조차 한 번 산을 타기 위해서는 상당히 준비해야만 할 정도로 아주 가파르고, 험준한 산세였다.
그런 산으로 이른 아침의 바람이 불어왔다.
풀잎들이 흔들리며 새벽에 맺힌 이슬들이 부서져 아래로 떨어졌다.
마치 여우비가 내린 듯했다.
떠오른 햇살이 산산이 부서지는 이슬들에 반사되며 산중을 밝힐 무렵.
저벅.
산에 발을 들이는 자들이 있었다.
무림맹주와 군사 그리고 그들을 호위하기 위해 따라온 다섯이었다.
입산한 그들의 발걸음은 가벼웠다.
산에 밝은 약초꾼들조차 조심히 오르는 경사였건만, 그들 전부 평지를 걷듯 가볍게 산을 탔다.
‘썩 그다지 볼 건 없네.’
일행의 말미에서 유희라도 온 듯이 주변을 구경하던 천휘는 흥미를 잃은 표정으로 하품을 내뱉었다.
근방에서 험준하기로 유명한 이령산맥이었지만, 아무런 감흥도 없었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가 전생과 현생에서 터를 잡고 머문 곳은 천산과 화산이었다.
두 곳 다 천하에서 험준함으로는 손에 꼽히는 곳이지 않나.
근방에서 험준하다 알려진 이령산맥도 그 두 산에는 비교하기 민망할 정도였다.
‘그런데 돈 좀 썼겠어.’
협소한 산길을 오르며 남은 하품을 뱉은 천휘가 눈을 실처럼 가늘게 떴다.
산세가 유달리 고요했다.
지나오는 동안 그는 사람의 인기척을 단 하나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아무리 험난한 산이라 할지라도 이런 지기(地氣)를 품은 산에 약초꾼 한 명이 없는 것은 말이 되지 않았다.
‘이 근방을 포위한 무림맹의 무인들이 들어오려는 약초꾼들을 막고 있을 텐데. 그래도 정파니까 돈으로 해결할 테고.’
대강 파악이 됐다.
무림맹과 사흑련의 비밀 협정이었다. 최대한 숨겨야 했고, 혹여나 언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니 최대한 일반 백성들에게는 해가 가지 않도록 철저하게 준비한 것이다.
‘뭐, 상관없으려나. 어차피 돈은 천하상단에서 준 것일 거고.’
여기까지 오는 길에 지원한 것만 봐도, 천하상단은 지금 이 협정이 잘 성사되기를 바라고 있음이 분명했다.
전쟁이란 불안 요소를 제거하기 위함도 있겠지만, 이번 협정 중 사흑련이 제안한 것이 꽤 매력적이기 때문일 터였다.
사흑련이 강북 무림에 진출하지 않겠다는 것은 그들과 손을 잡은 대은상단이 강북에서 기를 펼 수 없게 되는 것과 일맥상통한 일이니.
그때였다.
턱.
앞서 걷던 맹주와 군사가 멈췄다.
그와 동시에 중얼거림이 들려왔다.
“저것은 여전하군.”
그러며 천휘의 옆에서 나란히 걸어가던 용주개의 시선이 왼쪽으로 움직였다.
‘저것……?’
복잡한 감정이 섞인 용주개의 말에 그를 따라서 왼쪽으로 고개를 돌린 천휘의 눈이 순간 반개했다.
끝을 알 수 없이 높게 솟은 절벽에 거대한 흔적이 새겨져 있었다.
언뜻 절벽이 지진에 의해 갈라진 것처럼 보였지만, 어느 정도 무공을 익히고 있는 무인이라면, 흔적에 새겨진 진의를 바로 알 수 있었다.
‘검흔.’
천휘의 눈에 이채가 어렸다.
검흔의 길이만 해도 대충 오 장이었고, 파고든 깊이 역시 상당했다.
용주개는 오랜만에 보는 검흔을 지그시 응시하며 감탄을 터트렸다.
“그런데 전보다 더 깊어진 것 같기도 하고, 묘하단 말…… 응?”
새겨진 검흔을 보며 머리를 긁적이던 용주개는 옆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천휘를 발견하고는 눈을 빛냈다.
‘이놈이라면 이 흔적에 대해서 무언가 알아냈을 수도…….’
그가 알기로 아직 그 정체를 명확히 아는 자가 없었으나, 혹시 몰랐다.
그동안 온갖 불가능하다 여겨지던 일을 모두 해낸 놈이지 않은가.
“네가 보기에 어떠냐?”
“미완(未完)인 검식이네요.”
“뭐?”
용주개가 두 눈을 크게 뜨며 되물었다.
여태껏 이곳에 방문한 여러 무인으로부터 많은 감상을 들어 왔지만, 이러한 대답은 처음 들은 것이다.
“미완인 검식?”
용주개가 당혹스러워하며 다시 한 번 되물었지만, 천휘는 대꾸 없이 그저 가만히 검흔을 응시했다.
어느새 흘러나온 매화신공의 공력이 두 눈을 감싸며, 안광이 일었다.
무채색의 안광이 검흔을 담아냈다.
절벽 곳곳에 자라난 꽃들이 그 안광에 덜덜 떨듯이 작게 흔들렸다.
‘파검식(破劍式)인가? 검에 경력을 실어서 폭발시켜…….’
천휘의 사고가 빠르게 회전했다.
심오하게 가라앉은 눈과 의식은 단숨에 검흔을 해체하고, 읽어 냈다.
다른 이들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의식의 속도였다.
곧 천휘의 안광이 점점 가라앉더니, 이내 평소의 눈이 드러났다.
찰나지간이었다.
“아쉬운걸.”
천휘가 검흔에서 시선을 뗐다.
파괴적이고, 강렬한 흔적이었다.
하지만 부족했다.
“완성되기 직전이었나.”
새겨진 검흔을 모두 읽어 낸 천휘가 안타깝다는 투로 짧게 감상을 내뱉었다.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었다.
저것은 분명 새로운 검법을 창안하기 전, 대종사를 앞둔 자의 흔적이었다.
아마 이 검흔을 새기고 난 후 그만의 검법을 창안하고 완성했으리라.
천휘가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이거 누가 한 거죠?”
“……모른다.”
천휘의 말에 잠시 말을 잃었던 용주개가 고개를 흔들며 대답했다.
이 흔적에 대한 정보는 개방도 파악하지 못한 상태였다.
본래 아무런 이름도 없는 협곡이었으나, 백 년 전 발견된 저 흔적으로 인해 천하 곳곳에 인상곡이라 불리게 되었다는 것이 전부였다.
한때는 그 덕분에 많은 무인들이 방문하는 성지와도 같았으나, 지금에 와서는 기억에서 잊힌 명소가 된 채였다.
용주개의 대답에 천휘가 턱을 긁적이며, 미간을 살짝 좁혔다.
개방이 모른다면 이 흔적의 주인을 알 수 있는 방도는 없다시피 했으니까.
“무슨 검법인지 보고 싶었는데.”
아쉬움에 입맛을 다셨다.
이 정도의 검흔을 남긴 자가 완성한 검법이 무엇일지 궁금했지만, 그것을 확인하는 건 불가능에 가깝게 되어 버렸다.
용주개는 곧장 관심을 거두는 천휘를 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너는 대체 저 검흔에서 무엇을 보았기에 미완이라고…….”
하지만 그의 목소리는 불현듯 들려온 단단한 목소리에 덮였다.
이 기나긴 여정에서 말 한마디 없었던 용천객의 음성이었다.
“자리가 없군.”
“협곡에 무슨 자리가 있겠나.”
용천객의 말에 무림맹주는 허허롭게 웃으며,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내가 만들어도 되겠소?”
“마음대로 하게나.”
그 대답이 끝나기 무섭게 용천객의 몸이 흔들린다 싶더니, 훅 꺼졌다.
마치 예상치 못한 바람에 꺼져 버린 촛불처럼.
‘오호라.’
천휘가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초목이 우거지게 자란 곳으로 시선을 돌린 그때, 날카롭게 세운 용천객의 손날이 거목을 향해서 휘둘러졌다.
거목이 잘리며, 기우뚱한 순간.
스륵―
용천객의 몸이 여럿으로 나뉘었다.
절정에 다다른 보신경을 펼친 그의 의복이 나부끼며, 흙먼지를 일으켰다.
‘세밀해.’
천휘가 그 움직임을 읽어 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총 칠십이 방위를 밟는 그의 발놀림부터 날카롭게 서 있는 그의 손날에 세 치가량 치솟은 수강까지.
단 하나도 놓치지 않았다.
괜히 무림맹의 무군이 아니었던가.
그의 내공 운용은 세밀했고, 언뜻 드러나는 무학의 깊이는 상당히 깊었다.
‘만약 이게 나를 노리는 수법이었다면…….’
천휘의 눈이 한없이 깊어졌다.
일견 가볍게 움직이는 손속과 몸놀림처럼 보이지만, 살의를 담아 상대를 노리는 살수가 된다면 말이 달랐다.
일순 벌어진 수백의 변화.
지금 그가 펼친 수법은 보신경과 함께 회피 불가의 묘리를 선보였다.
‘한 번 겨뤄 보고 싶은데?’
천휘가 그를 바라보며 그 몸놀림들이 어떠한 살수로 변모할지 따져 보길 한참.
턱.
어느 순간, 용천객의 움직임이 멎으며 은은한 미풍이 천휘의 뺨을 간질여 왔다.
곧 짙게 드리워졌던 흙먼지가 사라지며, 넓은 평야가 눈에 들어왔다.
초목은 모두 사라져 있었다.
장소를 채우고 있던 그것들을 대신해 자리하고 있는 건 나무로 만든 원탁과 두 개의 의자였다.
원탁과 의자를 만든 용천객은 마음에 든다는 듯한 표정과 함께 고개를 끄덕이더니, 무림맹주를 응시했다.
“이거면 충분할 것이오.”
“허허, 고맙네.”
무림맹주가 부드럽게 웃었다.
용천객은 그 말에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이면서, 팔짱을 끼고 물러났다.
“저놈은 평소와 같군.”
용주개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러기를 잠시.
“다음에 저 검흔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싶은데, 가능하겠냐?”
시선을 돌려 천휘를 본 그가 물었다.
심각한 표정으로였다.
“검흔요?”
진지한 물음에도 천휘가 귀찮다는 표정을 내비치자, 용주개가 다급하게 말했다.
“그에 걸맞은 보상을 하마.”
개방주의 보상이라…….
그 말에 천휘가 잠시 고민할 때.
“음?”
위에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그 주인공은 매였다.
허공에서 활공하던 매는 갑자기 밑으로 강하하더니, 곧 제갈공의 팔뚝에 조신하게 착지했다.
제갈공은 정갈한 손짓으로 팔뚝에 앉은 매의 발에 달린 종이를 풀어헤친 뒤, 적힌 내용을 입에 담았다.
“왔습니다.”
* * *
“곧 온다.”
협위대주가 숨을 삼키며, 말했다.
사흑련주와 그 일행이 지금 이 마을에 도달했다는 것이 이령산맥을 포위하고 있는 자들에게 알려졌다.
매우 빠른 속도였다.
『모두 긴장의 끈을 놓치지 마라.』
협위대주가 숨어 있는 모두에게 경고했다.
꽤나 거리가 있는 데다 포위한 이들 한 명, 한 명이 무림맹 내에서도 실력으로는 뛰어난 자들이었지만, 상대가 상대이니만큼 그는 아주 신중한 어조로 명령했다.
『최대한 기척을 죽이고…….』
쿵!
이어서 명령을 내리던 그의 가슴이 순간적으로 덜컹 내려앉았다.
그만이 아니었다.
이령산맥의 초입을 포위하던 무림맹의 무인들은 하나같이 심장이 크게 뜀을 느껴야 했다.
저 멀리 풍경이 어그러져 있었다.
측정 불가의 기세가 원인이었다.
숨이 턱 막힐 지경이었다.
일시에 경계하던 모든 시선이 불투명한 기파를 흘리는 곳으로 쏠렸다.
협위대주의 눈이 거세게 흔들렸다.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흔들리는 그의 눈이 일렁거리는 기세를 훑었다.
총 일곱의 남녀가 걸어오고 있었다.
한 명, 한 명 기세가 넘실거렸다.
하지만 지금 협위대주의 눈에는 오직 선두에서 오는 자만이 뚜렷이 보였다.
걸을 때마다, 긴 머리가 찰랑거리는 사내는 오뚝한 콧날과 냉소적인 표정이 눈에 띄는 수려한 자였다.
언뜻 남자다운 얼굴처럼 보이면서도 한편으론 여성스러운 느낌이 스쳐 지나갔다.
마치 한 명의 얼굴에 여러 명의 모습이 보이는 것 같았다.
협위대주는 그자를 목도하자마자, 그 정체를 곧바로 파악했다.
어찌 모르랴.
천하에 오직 한 명이거늘.
‘저자가…… 사흑련주!’
사내, 사흑련주가 가까워져 왔다.
화려한 금빛의 용이 수놓아진 자색의 장포를 입은 사내는 기나긴 머리카락을 아래로 축 늘어트린 채였다.
기나긴 장포와 머리카락이 휘날리면서 그의 존재감을 더더욱 부각시켰다.
주륵―
협위대주의 이마에서 땀이 흘러내렸다.
‘이런 존재감이라니……!’
지닌바 분위기부터 달랐다.
비범함과 신비로움의 극치였다.
사는 세계가 다른 것만 같았다.
숨죽이며 그를 바라보던 그때.
저벅, 저벅.
묵직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그것은 이상한 일이었다.
너무나도 거리가 멀어 들리지 않을 터인데도 불구하고, 협위대주와 무인들의 귀에는 선명하게 들리고 있었으니까.
마치 꿈결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마침내 사흑련주와 그 일행이 이령산맥 안으로 들어간 순간.
“허업!”
그제야 협위대주는 목 끝까지 차올랐던 숨을 내뱉을 수 있었다.
하나 계속 참아 온 탓일까, 그의 안색은 이미 파리하게 질린 상태였다.
하지만 숨을 고를 겨를도 없이 협위대주는 그들이 들어간 이령산맥을 바라봤다.
험한 산을 바라보는 그의 눈이 요동쳤다.
이령산맥으로 들어서는 동안 사흑련주와 일행은 자신은 물론이고 주변 무인 그 누구에게도 눈길을 주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직감하고 있었다.
‘……이미 다 들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