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7.
정이한의 동공이 하염없이 흔들렸다. 나는 정이한의 눈동자 속에 빨려 들어가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그의 입술을 혀끝으로 핥았다. 그러자 갑자기 정이한이 내 어깨를 확 밀어냈다.
뭐야. 벌써 정신 차린 거야? 좀 아쉬운데…….
갑작스레 떠밀린 내가 눈만 끔벅거리고 있자, 금방이라도 터질 것처럼 얼굴을 붉게 물들인 정이한이 팔등으로 입을 가렸다.
“무, 뭐, 뭐, 뭐야? 바, 바바, 방금?”
“제가 형한테 키스한 거죠.”
“왜?”
“좋아하니까요.”
“……!”
정이한의 눈이 더는 크기를 키울 수 없을 만큼 커다래졌다. 저렇게 놀랄 일인가……? 아니, 잠깐. 설마 진짜 몰랐던 거야? 내가 좋아하는 걸 짐작도 못 했다고?
“이한 형, 설마 몰랐어요?”
“……그, 나를 의식하는 건 알았는데 기분 탓인 줄……. 네가 날 선택할 리 없다고 생각해서…….”
“…….”
황당함에 할 말을 잃었다. 나도 둔한데 너도 둔하구나. 나는 헛웃음을 지었다. 정이한의 눈동자가 우왕좌왕 헤매며 데굴데굴 굴러다녔다.
“그럼 제대로 말해야겠네.”
나무 꼭대기를 보는 것처럼 치솟았던 눈동자가 서서히 제 자리를 잡았다. 혼란스러워 보이는 눈을 마주하고 나는 정이한의 두 손을 붙잡았다.
“이한 형, 좋아해요. 제 남은 목숨을 다 줘도 행복할 만큼.”
“……내가 할 말인데.”
“제 마음도 지지 않는다는 거죠. 그래서 그랬어요. 그러니까 이건 양보 못 해요. 나는 형이 살았으면 좋겠거든.”
정이한의 눈동자에 맑은 눈물이 고였다. 툭툭 떨어지는 눈물이 안타까워서 손으로 닦아냈다.
“……하온이, 잔인하다.”
나도 안다. 온전히 내 만족만을 위해 고백한 거니까. 이제 마지막이라는 생각에, 이제야 알아차린 내 마음을 꼭 전하고 싶었다. 그게 정이한에게 상처가 되리라는 걸 알지만…….
“제가 그랬잖아요. 저 이기적이고 못된 사람이라고. 형들이 보는 것처럼 착한 사람 아니라니까요.”
“……차라리 그 사람 부르지 마.”
“네?”
“나랑 여기서 평생 함께 지내자. 너와 나, 둘이서만.”
정이한은 나와 헤어지는 건 너무 끔찍하다며 또 눈물을 쏟았다. 나는 그런 정이한을 품에 안고 머리를 쓰다듬어줬다. 너무 매혹적인 제안이었다. 모든 걸 모른 척하고 손을 잡고 싶은…….
하지만, 나는 들어버렸는걸. 정이한의 어머니께서 외치는 가슴을 쥐어뜯는 듯한 절규를. 내가 사라진들 평생 내 죽음에 가슴 아파할 사람은 없었다. 어쩌면 정이한은 남들보다 더 오래, 날 기억하고 괴로워할지도 모르지만…….
삶이란 원래 그런 거잖아. 지나간 일들은 결국 희미해지다가 잊혀진다. 상처는 나아 딱지가 되고, 단단히 봉인된 딱지는 웬만해선 벗겨지지 않는다. 그렇게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새로운 인연을 맺고, 새로운 사랑을 하면 지나간 사람은 그저 추억으로 남을 뿐이다.
우리 사이에 남은 추억이 많기에 나는 정이한을 돌려보낼 준비가 되어 있었다.
“유찬 형, 이한 형, 서호 형, 정곤 형, 상주 형, 혜미 실장님. 우리 디어리.”
“…….”
“그리고 형 어머니.”
“…….”
“모두 형을 기다리고 있는데 계속 모른척할 수 있어요?”
게다가 정이한은 천성이 순하고 착한 사람이었다. 모든 걸 버리고 나와 이곳에 머물 수 있을 정도로 독한 사람이 될 수 없었다. 죄책감에 허물어질 정이한의 미래는 겪어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할 수 있어. 너만, 있으면 돼. 나는 너만.”
나는 정이한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거짓말쟁이.”
“……아니야. 거짓말 아니야. 나는 정말, 하온아. 너만 있으면 돼. 다른 건 아무것도 필요 없어. 아무것도.”
“우리 그냥, 키스나 한 번 더 할까요?”
“……전혀 굽힐 생각이 없구나.”
나는 대답 대신 미소 지었다. 그리고 천천히 정이한에게 다가갔다. 코끝이 스칠 정도로 가까워졌을 때 정이한의 커다란 손이 내 뒤통수를 감쌌다. 순식간에 거리가 좁아졌다. 다시 한번 입술이 맞붙었다. 나는 정이한의 등에 팔을 둘러 힘껏 끌어안았다.
내가 그랬던 것처럼, 정이한이 내 입술을 두들겼다. 이게 이런 느낌이었구나. 어쩐지 간지러워져서 푸하, 하고 웃음을 터트렸을 때였다. 갑자기 입속으로 물컹한 혀가 밀려 들어왔다.
“……!”
내 입속을 전부 탐하고 싶은 것처럼 정이한의 혀가 움직였다. 간지럽고 부끄럽지만, 기분 좋았던 행위가 점점 내가 모르는 영역으로 넘어갔다. 놀라서 굳어 버린 내 안으로 정이한이 깊숙이 파고들었다.
“흐, 으…….”
뾰족하게 세운 정이한의 혀가 내 혀뿌리를 푹 찔러 들어왔을 때, 갑자기 등줄기가 찌르르하고 울렸다. 깜짝 놀라서 정이한의 등을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흐읍, 읏!”
손가락 끝에 정전기가 일어난 것처럼 찌릿찌릿했다. 나도 모르게 얼굴을 뒤로 뺐는지, 정이한이 내 뒤통수를 꾹 눌렀다. 도망칠 수 없도록 내 얼굴을 고정한 채 갈급한 키스가 이어졌다.
“후으, 하,”
벌어진 입술 밖으로 한데 섞인 타액이 흘렀다. 정이한은 내가 반응하는 곳을 찾기라도 하려는 듯, 계속해서 내 입속을 건드렸다.
입천장을 긁을 땐 간지러워서 소름이 돋았다. 당혹스러운 마음에 정이한의 혀를 밀어내자 오히려 정이한은 집요하게 같은 부위를 건드렸다. 간지러웠던 기분이 조금씩, 미묘하게 바뀌었다.
“흐으, 읏, 혀, 혀엉, 잠, 까, 읍!”
입술이 조금 떨어지기 무섭게 정이한은 다시 입술을 붙였다. 나는 숨쉬기가 버거워 헐떡거렸다. 평소에는 말도 잘 들어주더니, 왜 이렇게…….
하지만 애처로울 정도로 내게 매달리는 몸짓을 보니 거부할 수가 없었다. 거부하고 싶지도 않았고.
젖은 속눈썹이 젖혀지고 열기에 가라앉은 눈동자가 드러났다. 나를 욕망하는 그 눈을 마주한 순간 온몸이 오싹했다. 그건 정신적인 쾌감이었다.
나는 속수무책으로 정이한에게 끌려갔다. 정이한이 내게 주는 안온함과 따스함, 포근함과 함께 두피에 소름이 돋을 정도로 날카로운 감각이 함께 쏟아졌다. 쿵쿵대는 심장이 더 빨라질 수 없을 만큼 거칠게 뛰었다.
내가 더는 도망가지 않는다는 걸 알았는지, 내 머리를 바치고 있던 손이 조금씩 아래로 내려왔다. 목덜미에 손가락이 스치고, 그대로 따스한 손길이 척추를 따라 아래로 내려갔다.
남이 만져봐야 간지럽기만 했던 곳인데, 지금은 그 느낌이 전혀 달랐다. 정이한에게 감전이라도 된 것처럼 몸이 짜르르 울었다.
“흐으, 응, 읏…….”
맞물린 입술의 좁은 틈새로 신음이 샜다. 나는 그가 내 몸을 만질 때마다, 입 속의 간지러운 부위를 스칠 때마다 움찔거리며 정이한에게 매달렸다.
정이한이 내 쪽으로 체중을 실었다. 그 무게에 못 이겨 몸이 조금씩 뒤로 밀렸다. 정이한은 내 뒤통수를 손으로 감싼 뒤 나를 완전히 밀어서 넘어트렸다. 넓은 통나무 의자에 등이 닿았다.
“하아, 하아…….”
부족했던 숨을 몰아쉬며 나를 내려보는 정이한을 응시했다. 번들거리는 입술이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다리 사이로 정이한의 다리가 밀고 들어왔다. 그대로 정이한이 상체를 숙이자 저절로 내 다리가 벌어졌다.
이, 이거 좀, 되게, 자세가…….
이상하지 않나, 생각할 때 정이한이 다시 입을 맞췄다. 그가 주는 기분 좋은 감각에 취해서 정신이 몽롱하게 풀렸다. 그 순간 아랫배에 낯선 감각이 느껴졌다.
어느새 셔츠 안쪽으로 손을 밀어 넣은 정이한이 내 배를 더듬고 있었다. 손이 조금씩 밀려 올라왔다. 정이한은 기어코 내 가슴까지 손을 밀어 넣었다. 그러다 어느 부위에 손가락이 스쳤을 때 허리가 떠올랐다. 이런 생경한 느낌은 처음이라 당혹감에 정이한의 어깨를 마구 밀어냈다.
“그, 하아, 혀, 형, 잠깐, 잠깐만요, 잠깐만-!”
정이한의 손길이 뚝 멈췄다. 그는 내 입술을 진득하게 핥아 올린 뒤 아쉬워하며 떨어졌다.
“……하아, 좀 더, 좀 더 너를 만지고 싶어.”
“아니, 그게…….”
“……안 돼?”
정이한이 고개를 기울였다. 보채듯 칭얼거리는 애교 섞인 목소리에 왜 안 되냐고, 된다고 대답할 뻔했다.
“그, 이성을 조금 찾고…….”
나는 내 쪽으로 쏟아지는 머리카락을 가만히 쓸어주며 곤란해했다. 내게 끈적한 의도를 가진 타인의 손이 닿아본 적 없어서, 놀랐다. 미지의 영역에 들어갈 마음의 준비도 안 됐고…….
하지만 지금이 마지막인데. 그, 그래도 좀 무서운 것 같기도 하고……. 어떻게 해야 할지 혼란스러워하고 있을 때, 정이한이 그런 내 마음을 알아차리기라도 한 것처럼 내 뺨에 가볍게 입을 맞추고는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리고 내 옆에 모로 누워 팔을 내 머리 아래로 밀어 넣었다. 정이한의 팔과 다리가 나를 옭아맸다. 거미줄에 걸린 먹잇감처럼 정이한한테 완전히 폭 싸여 버렸다.
“그럼 이렇게 안고 있는 건?”
“……좋아요.”
정이한은 나를 부서트릴 듯 강하게 안았다. 좋아한다고 끊임없이 속삭이는 목소리가 목덜미를 간지럽혔다.
“저도, 저도 좋아해요. 저도…….”
나는 정이한의 가슴을 파고 들어가며 웅얼거렸다. 내가 좋아하는 포근하고 아늑한, 설레는 품. 나는 이 공간이 좋았다. 내 마음을 깨닫고 난 뒤에는 이전보다 더, 눈물을 쏟고 싶을 만큼 좋았다.
“역시 나는 너 없이 살고 싶지 않아…….”
날 안고 있는 강한 힘과 다르게 가냘픈 목소리였다.
“이한 형. 형은 행복해질 거예요.”
“너 없인 안돼.”
“그럴 수 있어요. 제가 바라니까.”
나는 정이한의 뺨을 쓰다듬으며 고개를 들었다. 그러고 싶지 않다고 웅얼거리는 턱에 쪽, 입을 맞췄다. 그러자 응답이라도 하듯 내 얼굴 곳곳에 입을 맞췄다.
이마에 닿았다가, 눈두덩이에 닿았다. 코끝, 뺨, 그리고 다시 입술. 간지러워서 웃음을 터트리던 나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나도 함께하고 싶었다. 내가 조금 더 빨리 깨달았다면 이런 시간을 더 누릴 수 있었을 텐데. 눈이 시큰거렸다. 어떻게든 참아내려고 했지만, 이젠 제어할 수 없게 된 건지 기어코 눈물이 비집고 나오고야 말았다.
“……슬퍼?”
나는 고개를 저었다. 정이한이 내 눈가에 입술을 묻었다.
“그럼 왜 울어.”
“좋아서요……. 행복해서.”
나는 그렇게 말하며 웃었다. 정이한이 기억하는 내가 웃는 얼굴이길 바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