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5.
“하온이가 게임에 참가했다는 게 무슨 소리야?”
정이한이 옆에서 끼어들었다. 여전히 데우스를 잔뜩 경계하는 태도였다. 곧 죽는다는데, 고작 내가 게임에 참가했다는 게 궁금한 걸까?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요.”
“중요해. 하온이랑 관련된 거라면 그게 뭐든지.”
“형이 죽…….”
나는 차마 뒷말을 잇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아랫입술을 짓씹었더니 정이한이 내 입술을 엄지로 살살 쓸었다.
“그러다 상처 나겠어.”
“……형은, 저랑 데우스가 한 말 이해 못 했어요?”
왜 나만 보는데? 왜 내 안위만 중요하다는 듯 구는 건데? 본인의 목숨이 달린 일인데!
“이해했어. 나는 죽는다는 거잖아.”
한없이 가벼운 어조였다. 마치 이승에 아무런 미련도 없다는 듯 훌훌 털어버린 듯한 태도에 몸속에서 불길이 일었다.
“그런데 왜 그렇게 가벼워요? 남겨진 사람들은 생각 안 해요? 살아날 방도를 찾아야죠!”
“하지만 운명은 바꿀 수 없다며. 그리고 나는 행복해. 내가 널 만난 것도 운명이고, 내 삶이 널 살리기 위해 존재했다는 것처럼 들려서.”
정이한은 그보다 더 기쁜 일은 없다며 청렴하게 웃었다.
“……디아스는요? 형 꿈은요? 그런 거 다 필요 없는 거예요? 저만 있으면? 저만 살아 있으면 된다고요? 정말 그렇게 생각해요? 정말?”
이성을 잃었다. 그렇게밖에 표현할 수 없었다. 나는 상처 입은 들짐승처럼 으르렁댔다. 정이한은 그런 날 강제로 품에 안았다. 화가 나서, 나를 버리고 가려는 정이한이 너무 미워서 나는 온힘을 다해 정이한의 품에서 벗어나려고 했다. 하지만 그럴수록 정이한은 더 강한 힘으로 날 옭아맸다.
“나도 살고 싶지. 하온이 곁에서 오랫동안, 네가 행복하게 웃는 걸 보고 싶어.”
“…….”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온몸의 힘이 풀렸다.
“하지만 그럴 수 없다면, 최소한 널 지켜 냈다는 자부심을 안고 갈래. 그 또한 내 행복의 하나니까.”
“……누가, 도와 달라고 했어요? 제가 알아서 할 수 있었어요…….”
거짓말이었다. 나는 소파남에게 힘으로 밀리고 있었고, 정이한이 막아주지 않았더라면 경찰이 오기 전에 가슴에 칼이 꽂히는 건 나였을 터였다. 하지만, 하지만 그래도 그게 정이한에게 향하는 것보다 나았다.
……이거였나.
정이한이 하고 싶은 말이, 지금 내 심정과 같은 거였던 걸까. 불같이 일어나 응축됐던 감정이 산산이 조각나 흩어졌다. 남은 건 뻥 뚫린 가슴뿐이었다.
“알아. 하온이는 강하니까. 그러니 이건 내 이기심이라고 봐야겠지. 그리고…….”
나는 머뭇거리는 정이한의 허리를 꽉 안았다. 정이한의 숨결이 내 머리카락에 닿았다. 흔들흔들, 살랑이는 머리카락이 이마를 간지럽혔다.
“내가 못 됐다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내가 기쁜 건……. 하온이가 평생 날 잊지 않을 테니까. 아니, 잊지 못할 테니까. 나는 그래서 기쁘고 행복한 거야.”
그의 마음은 이해했으나, 헤어짐을 말하는 정이한은 너무 미웠다. 그래서 내 입 밖으로 나온 소리는 고약하기 짝이 없었다.
“……잊어줄 거예요. 형은 전부 잊고 다른 사람 만나서 행복하게 살 거라고요.”
“그래도 좋고.”
“……진짜 미워.”
정이한이 야트막하게 웃었다. 밉다고 했는데 왜 웃는 거야……. 더 미워할 수도 없게…….
“저기요? 날 잊지 말아 줄래요? 난 안 된다고 안 했는데?”
데우스가 고개를 까딱거리며 우리 사이에 끼어들었다.
“안 된다면서요?”
“잘 생각해 봐. ‘안 된다.’라고는 안 했어.”
분명 데우스는 운명이 정해져 있으니 신과 계약한 계약자가 아니라면 순리를 비틀 수 없다고 했는데? 그게 안 된다는 말 아니었어? 그럼, 그럼 가능성이 있나? 정이한을 살릴 수 있는 방법이?
나는 희망을 품고 데우스를 바라봤다. 눈가를 긁적인 데우스가 말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지금 그대로는 안 돼.”
나는 인상을 찡그렸다. 날 가지고 노는 것도 아니고 왜 자꾸 희망 고문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힌트를 좀 줄까? 환생자에게 정해진 운명은 없어.”
내 운명은 정해지지 않았다는 건, 나와 만나면서 정이한의 운명이 바뀌었다는 건가? 날 만나지 않았다면, 나를 지키기 위해 몸을 내던지지 않았다면 정이한은 온전한 자신의 삶을 누리고 있었다는 거 아니야? 그렇다는 건 결국 내가 정이한에게 닥친 불행이자 사신이라는 소리잖아…….
“그건 아니야. 환생자가 끼어들어 운명의 방향이 비틀린 건 맞아. 하지만 정해진 시간까지 바뀌진 않아.”
무슨 소리지? 그럼 내가 아니었어도 이 시기에 정이한이 죽었을 거란 말이야? 도대체 왜? 어쩌다가?
그러자 자연스럽게 내가 없었다면 디아스가 어떻게 됐을지 궁금해졌다. 이에 대해 한 번도 의문을 가진 적 없었다. 막연하게 원래 교주가 있었던 자리라고 생각했는데, 생각해 보니 교주도 아이돌을 하는 건 이번이 처음인 거잖아.
“궁금해? 보여줄까? 네가 없었을 때 그들이 겪은 과거이자 미래를.”
데우스가 손가락을 튕겼다. 강제로 주입된 영상이 머릿속에서 빠르게 흘러갔다.
***
디아스의 마지막 멤버로 곰치가 논의되었으나, 사장님과 실장님의 반대로 마지막 멤버 한 명의 자리가 비었다. 현재 상태로 4인 그룹으로 데뷔시켜봤자 빛을 보지 못할 거라는 게 사장님과 실장님의 공통 된 의견이었다.
유찬 형의 멘탈, 멤버들에게 마음을 내주지 않는 강현 형, 삐거덕거리는 정이한의 댄스 실력이 문제였다.
시간이 훌쩍 건너뛰었다. 몇 년이 지났는지 모를 어느 날, 유찬 형은 결국 연습생을 그만뒀다. 이서호가 울며 잡았고, 강현 형은 무심한 눈으로 힐끔 보고 말았다. 내내 리더로서의 중압감에 짓눌렸던 형은 꿈을 포기하고 난 뒤 홀가분한 마음으로 살길을 찾아 떠났다. 그렇게 유찬 형은 음악과 연이 없는 회사원이 되었다. 작곡가로서의 재능은 꽃피워보지도 못하고…….
팀에 융합되지 못하고, 끝까지 멤버들에게 선을 그었던 강현 형 또한 연습생 생활을 그만뒀다. 이서호 혼자 짐을 챙겨 떠나는 강현 형을 봤다. 형은 해외로 건너가 에스트반의 제자가 되어 창작 안무가로서 명성을 떨쳤다.
……왜 정이한은 안 보이는 거지?
다음은 이서호였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은 이서호는 결국 25살이라는 늦은 나이로 데뷔했다. 하지만 악플로 인해 멘탈이 터져서 우울증을 겪었다. 그로 인해 무대에서 실수하고, 또 조롱거리가 되는 악순환이 이어졌다. 이서호는 그토록 원하던 무대에 섰지만, 무대 뒤에서 바스러져 갔다.
아, 정이한이다. 아직 데뷔조 멤버들이 모두 남아 있는 시기였다. 지금과 전혀 다른 생기 없는 연습실에서 정이한은 어색하게 몸을 움직였다.
교주에게 정신 공격을 당하지 않은 정이한은 희망을 잃지 않았다. 언젠가 꿈을 이룰 수 있을 거라 굳게 믿었다. 최대의 결점인 춤을 연습하기 위해 늦은 시간까지 연습실에 남아 있을 정도로.
인적이 드문 새벽 4시가 넘어서 회사를 나서는 모습이 보였다. 반쯤 졸면서 비틀비틀 걷던 정이한은 파란 불에 횡단 보도를 건너다가 눈이 먼 차에 치였다. 그 순간 나는 비명을 질렀다.
“헉, 허억…….”
“방금, 뭐였어?”
정이한의 안색이 새파랬다.
“……형도, 봤어요?”
“보여줄 거면 같이 보여줘야지.”
데우스가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나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정이한의 얼굴을 더듬거렸다. 그가 엉망이 되었던 순간이 너무 생생했다. 굳은 얼굴로 서 있던 정이한은 모든 걸 이해했다는 듯 허망한 헛숨을 흘렸다. 그러다 내 손등에 손을 겹쳐 올렸다.
“너를 만나지 못했다면 내 삶은 아무런 의미도 없고, 가치도 없었네…….”
정이한이 토해내듯 읊조렸다. 그리고는 새파란 하늘을 닮은 청명한 미소를 지었다.
“역시 넌 내 구원자였어. 하온아. 나는, 너를 사랑해. 내 목숨보다도 더. 그러니까 꼭 행복해져.”
“……싫어요. 나는 형을 이렇게 보낼 수 없어.”
나는 방향을 틀어 데우스와 똑바로 마주했다. 아직 선명하진 않았지만, 흐릿하게 감이 왔다.
“메인 미션. 선택하라고 한 거. 그거 알 것 같아요.”
데우스가 흥미롭다는 듯 눈을 반짝였다.
“그래? 뭐 같은데?”
내가 게임에 참가한다고 했을 때처럼 무척 신이 난 듯한 어조였다. 나는 조용히 머릿속을 정리했다. 데우스는 이미 내 소원이 뭔지 알고 있었다. 내가 소원을 빌었을 때 나를 이곳으로 부른 이유는 정이한을 만나게 해주려고 그런 거겠지.
내 소원을 들어줄 수 없다면 이렇게까지 판을 짤 이유가 없었다. 부정적으로 본다면 날 괴롭히는 게 목적일 거고, 긍정적으로 본다면 작별 인사할 시간을 주려는 배려일 터였다.
하지만 그 어느 쪽도 정답 같지 않았다. 사실 이 장소 그 자체가 데우스가 주는 ‘힌트’가 아닐까. 내가 없는 디아스의 과거이자 미래를 보여준 것도, 그리고 그 끝에 정이한의 죽음까지 보여준 이유. 내가 소원을 빌려고 했을 때 내 입을 막았던 이유까지.
막혔던 수로가 뚫린 것처럼 머릿속이 개운해졌다.
“소원은 말해 버리면 끝나는 거죠? 들어줄 수 없는 소원일지라도.”
“정답. 허망하게 기회만 날리는 거지.”
즉, 데우스가 말한 「지금 그대로는 안 돼.」라는 말의 의미는 ‘정이한을 살려주세요.’만으로는 들어줄 수 없다는 거였다. 신은 정해진 순리를 비틀 수 없으나, 계약자는 할 수 있다는 말의 의미까지 더듬어 본 나는 빙긋 웃었다.
“제가 정이한 대신 그 세계에서 사라질게요. 저를 대가로 정이한을 살려주세요.”
정이한과 나. 둘 중 한 명을 고르는 건 너무 쉬운 문제잖아. 네가 나를 위해 온몸으로 막아냈듯 나도 그럴 수 있었다.
선택하라는 메인 미션.
이미 거기서부터 데우스는 내게 힌트를 주고 있었다. 정이한의 목숨이 끝에 도달해 있었으니까.
“하온아!”
정이한이 내 팔을 잡아당겼다. 몸이 거칠게 돌려세워졌다. 나는 잔뜩 화가 나 있는 정이한을 보고 웃음을 터트렸다.
“저한테 화 안 낸다면서요?”
“지금 뭐라고 한 거야? 너 대신 내가 살아난다고 기뻐할 것 같아? 절대 싫어. 나는 싫어!”
나는 거부하는 정이한을 두고 데우스를 봤다. 정답을 맞혔는지 확인할 시간이었다.
“그건 가능해. 들어줄 수 있어.”
“진하온!”
정이한이 노성을 터트렸다. 이렇게 화내는 거 진짜 처음 본다. 조금 신기했다. 하지만 정이한이 살 수 있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안정되었다.
비로소 나는 평소의 나로 돌아갈 수 있었다.
“그럼 그렇게 해주세요. 그런데 조금 시간을 줄 수 있어요? 꼭 해야 할 말이 있거든요.”
데우스는 그 정도야 문제없다고 말한 뒤 안개가 흩어지는 것처럼 스르륵 사라졌다. 때가 되면 불러달라는 말과 함께.
<시스템: 메인 미션 완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