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8.
텐스타는 아직 안 왔네. 우리가 좀 일찍 오긴 해서 느긋하게 기다리던 중, 강조가 먼저 도착했다. 준 선배님이랑 따로 오나 봐? 그 생각을 하며 인사를 건네자 강조가 주저하며 내게 말을 걸었다.
“……저기.”
지난주까지만 해도 살벌하게 노려보던 사람이 오늘은 기세가 한풀 꺾여 있었다. 자기 인생을 제 손으로 종 치러 가는 날이니 그 속이 오죽 복잡할까 싶긴 해.
“네, 선배님.”
나는 깍듯하게 대답하며 방긋 웃었다. 머뭇거리던 강조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오늘은 내가 탱 해도 될까?”
“탱을요?”
“한 번이라도 우위에, 아니. 탱 해보고 싶었거든.”
탱에 집착했던 게 준 선배님에 대한 열등감 때문이었나. 그래서 나를 못 잡아먹어 안달이었고? 어차피 오늘로 끝인데 무슨 상관인가 싶어서 “그렇게 하세요.”라고 대답했다.
“정말? 그래도 돼?”
강조는 조금 들뜬 듯한 어조로 반문했다. 어린애 같은 모습을 보고 있으려니 내가 알던 강조가 아닌 것 같아서 이상했다. 이것도 교주의 스킬 효과 때문인가. 아니면 사실 이게 이 사람의 본성인 걸까.
“네. 저는 상관없어요. 탱 해보고 싶으신 거잖아요. 그럼 하면 되죠.”
“……너 좋은 놈이었구나?”
고작 이런 걸로 내 평가가 이렇게 바뀔 줄이야…….
“그동안 내가 은근슬쩍 괴롭혀서 미안했다. 아마 오늘 이후…… 아니다. 그냥 미안했다는 것만 기억해줘.”
강조는 내 대답을 들을 생각이 없는 듯 본인이 할 말만 하고는 휑하니 자리로 가버렸다. 걸어가는 걸음이 가벼워 보여서 어쩐지 복잡한 마음이 들었다.
“갑자기 왜 저러지?”
정이한이 갸우뚱거렸다. 나는 “그러게요.”하고 대답하며 모니터 너머로 삐죽 솟은 강조의 얼굴을 바라봤다. 항상 찌푸려져 있던 미간이 오늘따라 매끈했다.
“하온이~ 이한이~ 일찍 왔네?”
준 선배님이 뒤에서 나를 와락 끌어안았다. 인사는 우리 둘에게 했는데 왜 나만 안는 건데?
“선배님 무거워요…….”
등 뒤로 묵직하게 내려앉는 무게감이 끙끙거렸다.
“아, 선배님. 오늘 강조 선배님이 탱 보신대요.”
“뭐? 왜?”
등이 가벼워진 순간 나는 얼른 방향을 틀어 선배님을 마주 봤다.
“해보고 싶으시다고 부탁하시더라고요.”
“부탁한 거 맞아?”
“네. 맞아요. 그렇죠? 이한 형?”
준 선배님이 정이한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정이한이 끄덕이며 동의했다. 한 손으로 허리를 짚고 삐딱하게 서 있던 준 선배님이 강조를 힐끔거렸다.
“요 며칠 좀 순해진 것 같긴 하던데…….”
준 선배님이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러더니 “알겠어. 그럼 그렇게 하자.”하고 동의했다.
촬영이 시작될 때까지 평소보다 유한 분위기가 유지됐다. 그리고 시작된 촬영. 따로 연습이라도 한 건지 매번 보스한테 맞아서 이리저리 굴러다니던 강조였는데, 오늘은 꽤 안정적으로 버티고 있었다.
“뭐야? 강조 잘하네?”
“너만 안 죽으면 깰 듯.”
“내가 왜 죽냐? 난 원래 못하는 게 없거든~”
“그러시겠지. 그래도 게임은 내가 더 잘하거든? 인정?”
“아닌데? 내가 더 잘하는데?”
끊임없이 두 사람의 유치한 투닥거림이 들렸다. 하지만 지난주처럼 묘하게 살벌한 느낌이 아니라, 정말 친구 사이에 스스럼없이 대화하는 듯한 분위기였다.
뭔가 좀 씁쓸하네. 쓸데없는 질투나 열등감이 없었으면 저렇게 지낼 수도 있었을 텐데. 하지만 선택할 수 있었던 수많은 미래 중, 잘못된 길을 선택한 건 강조 본인이다.
나는 내 옆에서 집중하고 있는 정이한을 봤다. 갑자기 내 그룹, 내 멤버들이 너무 애틋하게 느껴졌다. 나는 내 사람들한테 잘해 줄 거야. 슬픈 미래가 오지 않도록.
“어? 하온아!”
“네? 아? 어라? 저 죽었…….”
정이한을 보다가 보스의 입김에 맞아 날아간 내가 절벽 아래로 떨어지고 있었다. 캐릭터는 낙사했고…….
“으흫흑. 하온이 굴러가는 거 너무 웃겨!”
“버스 태워 줄 테니 구경이나 해.”
준 선배님과 강조 때문에 나는 수치사할 것만 같았다.
***
촬영을 모두 끝내고 주차장으로 내려왔는데, 우리 벤 앞에 웬 번쩍번쩍한 스포츠카 한 대가 이중주차를 해 놓았다. 사이드까지 꽉 채워 놨는지 아무리 밀어도 밀리지 않았다.
“아, 어떤 인간이야!”
매니저 형이 신경질을 내며 차량을 살폈으나 전화번호도 없어서 차주에게 연락할 방법이 요원했다. 나와 정이한은 벤에 올라탄 채 건물 관리인과 통화하는 정곤 형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방문 차량이면 확인이 안 됩니까? 네. 아……. 그럼 혹시 방송은 가능합니까? 다음 스케줄이 있어서요. 네, 네. 감사합니다.”
정곤 형이 통화를 끊은 지 몇 분이 채 되지 않아 이중 주차한 차량을 이동해 달라는 안내 방송이 나왔다. 그러고도 한참을 기다렸으나 끝내 차주는 나타나지 않았다.
차가 움직일 때는 히터가 틀어져 있어도 괜찮은데, 주차장에 서 있는데 히터 바람이 나오니까 숨이 턱턱 막히는 것 같았다.
“정곤 형, 저 밖에 있어도 돼요?”
“답답해?”
“네. 조금…….”
“나는 차주 오면 바로 차 빼야 해서 기다려야 하니까 멀리 가지 말고 근처에 있어.”
“저도 같이 갈게요.”
벤에서 내리니까 좀 살 것 같았다. 그렇다고 주차장 공기가 좋은 건 아니지만 히터 때문에 텁텁한 차보다는 나았다. 나는 찌뿌둥한 몸을 쭉 늘여 뻗었다. 멀리 가긴 그래서 근처를 서성거릴 때였다.
“닥쳐! 기다리긴 뭘 기다……!”
유리문이 열리며 짜증 섞인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강조와 눈이 마주쳤다. 그는 나를 보고 잠시 멈칫하더니 통화를 끊어 버렸다. 휴대폰을 주머니에 쑤셔 넣는 그 찰나의 순간에 상대로부터 또 전화가 걸려 오는지 웅웅거리는 소음이 들렸다.
“……왜 아직도 여기, 아니. 뭐 상관없나. 그, 뭐냐. 나 먼저 간다.”
“조심히 가세요. 다음 주에 봬요.”
“……어, 으응. 다음 주…….”
강조는 계속 나를 힐끔거리며 빠른 걸음으로 지나쳤다. 그러다가 갑자기 우뚝 서더니 뒷머리를 헝클어트리며 되돌아왔다.
“너 호채 알지?”
“네? 아, 네. 알죠.”
“걔 조심해라.”
그리고는 빠른 걸음으로 도망치듯 가버렸다. 소파남 조심하라는 소리를 강조한테 들을 줄이야. 어차피 소파남은 마약도 한 데다가 유통까지했으니 이번에 같이 잡혀 들어갈 터였다. 소파남까지 조사하는 데 시간이 걸린다 해도 오래 걸리진 않겠지.
나는 멀어지는 강조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보며 생각을 이었다. 그런데 강조가 가는 곳이……. 너였냐. 우리 벤 앞에 이중주차 한 사람이?
“아, 어……. 죄, 죄송합니다.”
강조는 잔뜩 화가 나 있는 정곤 형을 보고는 사색이 되어 허리를 꾸벅 접었다. 저렇게 예의 바르게 굴 수도 있는 사람이었군. 상대가 텐스타 멤버란 걸 알아차린 정곤 형은 가까스로 화를 내리눌렀다. 그러나 목소리에 분노가 그득그득했다.
“빨리 빼 주십시오.”
“네, 네!”
겁에 질려 사색이 된 강조가 허둥지둥 운전석 문을 열었다. 말 그대로 꽁지가 빠진다는 표현이 딱 맞을 정도로 출발은 빠르게 이루어졌다.
“얘들아, 빨리 타. 가자.”
시간이 많이 지체됐다. 에스트반이 회사에 도착할 시간이 다 되어가서 매니저 형이 초조한 손길로 핸들을 두들겼다. 나도 서두를 생각만 하다가 습관적으로 맨 뒷자리 창가에 앉았다. 아, 앞쪽에 앉으려고 했는데. 이미 정이한은 자연스럽게 내 옆에 앉아 벨트까지 맨 상태였다.
“벨트 맸어?”
“아, 네!”
나는 어정쩡하게 쥐고 있던 벨트를 채웠다. 차가 막 출발했을 때 어쩐지 신경질적으로 들리는 클랙슨 소리가 길게 울렸다.
“하, 눈까지 오냐. 예보에 없었는데…….”
정곤 형의 시름이 한층 깊어졌다. 설국이라고 불러도 될 정도로 주차장 밖은 이미 눈이 가득 쌓여 있었다. 차들이 전부 거북이가 된 것처럼 기어갔다. 주차장에서 도로로 끼어들며 차가 삐딱하게 섰다.
“내가 우리 좀 늦을 것 같다고 연락할게.”
정이한이 꽉 막힌 도로를 보며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별생각 없이 고개를 돌렸을 때, 정이한의 어깨 너머로 검은색 고급 세단 한 대가 주차장을 나오는 게 보였다. 길을 잘못 들어 주차장을 한 바퀴 돌고 나온 것처럼 차 곳곳에 녹지 않은 눈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정곤 형, 멤버들한테는 제가 늦을 것 같다고 전했어요.”
“어! 이한아 고맙다!”
차가 꾸물꾸물 움직였다. 뒤에서 짧게 끊어친 클랙슨 소리가 연달아 들렸다. 조금 전에 주차장에서 시끄럽게 군 차가 저 차였나? 문득 궁금해져서 뒤를 돌아봤다. 주차장에서 나온 그 검은 세단이 무리하게 끼어들었는지 뒤 차의 원성을 사고 있었다.
아니었나?
“왜? 뒤에 뭐 있어?”
정이한이 나를 따라 뒤를 돌아보며 물었다. 평소에는 관심 두지 않았을 것들이 오늘따라 왜 자꾸 눈에 들어오는지 모르겠네. 나는 고개를 한 번 갸웃거린 뒤 영문을 알 수 없는 관심을 거뒀다.
“아, 아니요. 클랙슨 소리가 신경 쓰여서 봤어요.”
“아, 저 차가 무리하게 끼어들었나 보네. 거의 박을 뻔했나 본데.”
나는 어깨를 으쓱인 뒤 휴대폰을 잡았다. 몸을 움직이지 못하는 지금, 무엇보다 중요한 건 이미지 트레이닝이다.
“형도 같이 볼래요?”
“멀미나기 전까지만…….”
정이한이 약한 소리를 내며 웃었다. 우리는 금방 영상 속 우리의 모습에 빨려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