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7.
“저는 상관없는데……. 왜 그렇게 좋아해요?”
내 방 고르는 게 재밌나? 정이한은 정곤 형을 힐끔거린 뒤 “비밀.”이라며 여우처럼 웃었다. 뭔지 몰라도 더는 묻지 않는 게 좋겠다. 다른 사람 앞에서 대답할 수 없는 내용이라면, 내가 또 고장 날지도 모르니까.
“사실 이미 생각해 둔 방이 있긴 한데, 보러 갈래?”
“어딘데요?”
정이한이 나를 위해 추천해주는 방이라니 호기심이 동했다.
“여기.”
거실 욕실 바로 옆에 있는 방이었다. 방으로 들어가니 제일 먼저 창문을 거의 가리고 있는 커다란 소나무가 보였다. 밖의 풍경이 가려져 잘 안 보이는 대신, 사계절 내내 푸른 잎을 볼 수 있다는 건 마음에 들었다.
“마음에 들어?”
나는 방을 둘러보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럼 하온이가 이 방 쓰고, 남은 건 큰 방과 이 옆방인데 이한이가 큰 방 쓸래?”
“형이 쓰는 게 낫지 않아?”
주거니 받거니 대화하는 두 사람은 서로에게 큰 방을 양보하는 중이었다. 도저히 끝날 것 같지 않은 공방이 계속됐다.
“형들 차라리 가위바위보 하는 게 어때요? 이긴 사람이 원하는 방 쓰기.”
서로에게 방을 양보하던 두 사람이 멀뚱히 서서 눈을 마주쳤다.
“……그럴까?”
“그러자.”
“심판은 제가 볼게요. 단판이에요.”
정이한과 유찬 형이 등을 맞대고 섰다. 내 신호에 맞춰서 한 가위바위보의 결과는 유찬 형의 승리였다.
“유찬 형이 이겼어요.”
“어……. 그럼 난 하온이 옆방 쓸게. 이한이가 큰 방 써.”
“……응.”
정이한은 넓은 방을 게슴츠레한 눈으로 보고, 나를 본 뒤 유찬 형의 방이 된 내 옆방을 눈에 담았다. 왜 그렇게 양보하나 했더니 내 옆방을 쓰고 싶었던 건가? 어차피 벽으로 막혀있는데 옆방인 게 무슨 의미가 있다고.
하지만 이상하게도 기분이 좋았다. 별거 아닌 일에 의미 부여하는 정이한이 귀엽기만 했다.
“이한 형, 박스 안 옮겨요?”
“옮겨야지…….”
정이한이 털레털레 걸어갔다. 길 잃은 새끼 여우 같네.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내 이름이 큼지막하게 적힌 개인 박스를 안아 들었다.
“아, 방 정하셨어요?”
“네. 정했어요.”
어떻게 옮기면 되는지 묻는 직원분에게 나와 유찬 형, 정이한의 방을 알려줬다. 내 방의 짐이 적으니 먼저 옮겨주겠다면서 직원분 몇 명이 동시에 달라붙었다. 순식간에 거실에 있던 내 짐이 전부 방으로 사라졌다.
우와. 진짜 빠르네…….
“뭐 없어진 거 있으면 말씀하세요.”
“앗, 네. 감사합니다.”
나는 붙박이장을 열어 분주히 박스에 담긴 짐을 정리했다. 짐이 별로 없다고 생각했는데 정리가 끝나니 자정이 넘어 있었다. 피곤해서 이대로 자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다.
하지만 아직 잘 수 없었다. 나는 졸린 눈을 비비적거리며 메시지를 확인했다. 어제 교주에게 새로운 일거리를 찾았다고 메시지를 보내놨다. 통화 가능할 때 알려달라고 했는데 여전히 답장은 ‘ㅇㅇ’ 뿐이었다. 이번에도 똑같겠거니 했는데 교주에게 새로운 메시지가 도착해 있었다.
‘?’ 한 글자가.
정말 의미 없다. 나는 곧장 교주에게 전화를 걸었다. 기다렸다는 듯 통화가 바로 연결되었다.
- 어제 왜 전화 안 했어?
“오늘 이사라서 개인 물품 챙기고 하느라 혼자 있을 시간이 없었어.”
- 어. 새로운 일은 뭔데?
어제 텐스타 멤버 관계성을 찾아보니 강조와 사윈은 ‘찐친즈’라고 불리고 있었다. 그리고 준 선배님은 그 두 사람, 특히 강조와 친밀하게 노는 영상 하나 찾기가 힘들었다. 이번 인페르노 촬영을 같이한다는 걸 팬들이 신기하게 여길 정도로.
나는 교주에게 강조를 이용한 계획을 설명하고, 마지막으로 준 선배님은 마약 사태에 휘말린 피해자 같다는 의견을 전했다.
“……그래서 말인데, 그 당시에 준 선배님이 억울해 보이거나 하진 않았어?”
- 글쎄. 내가 텐스타 멤버들을 정확하게 기억하는 건 그때 회사 홍보 모델이었기 때문에 뒷수습하느라 짜증 나서거든.
교주는 싫은 놈들은 정확하게 기억하는 편이라며 무감한 어조로 말한 뒤 덧붙였다.
- 박상준은 관심 없고 강조를 이용해서 마약 게이트를 빨리 터트리고 싶다는 거지?
“아, 응. 어차피 터질 멤버. 프로그램이 엎어지든지, 재촬영하든지 빨리 결론부터 내고 싶어.”
- 그럼 촬영분 늘어나기 전에 작업해야겠네.
내 예상보다도 선뜻 오케이를 받았다. 교주가 원래 이런 사람이 아닌데……. 교주에게는 내가 지푸라기인 걸까. 지푸라기라도 쥐지 않으면 금방 빠져 죽을 것 같은, 그런 생각인 거지.
어째 간절한 사람 두고 괜히 나 편할 대로 이용해 먹는 기분이 들어 착잡해졌다. 그래도 내 예상대로 흘러가면 교주의 회귀 목표가 무엇인지 근접할 수 있을 것 같으니까.
“그리고 게이트 터졌을 때 강조가 준 선배님을 끌고 들어갈 계획이 있는지 확인해줘. 만약 그러면 못 하게 막아주고.”
- 내가 왜?
준 선배님에게 관심 없다는 걸 증명하듯 심드렁한 말투였다. 화가 난 것도 아니고, 하기 싫은 것도 아닌. 정말 왜 그래야 하는지 이해가 안 된다는 듯한 뉘앙스였다.
“테스트야. 준 선배님은 냉정하게 따지면 나와는 관계없는 사람이야. 그 사람이 어떻게 되든 내 활동에 영향을 주진 않아. 그러니까 네가 준 선배님을 도왔을 때 목표 수치에 변동이 있는지, 없는지가 궁금하거든.”
- 아직도 네가 열쇠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거야?
“내가 열쇠라고 철석같이 믿었다가 아니면 어떡하려고 그래? 이제 1년도 안 남았잖아. 너와 나, 두 사람 다 확신할 만한 답을 찾아야지.”
휴대폰 너머의 교주는 잠잠했다. 나는 쐐기를 박기 위해 말을 덧붙였다.
“잘 생각해 봐. 네가 날 도와줄 때마다 게이지가 올라갔지? 너는 ‘나’에 집중했지만, 내가 아니라 ‘돕는다’가 맞을 수도 있잖아. 그걸 확인해 보자고.”
- ……일단 알겠어. 어려운 일은 아니니까 해 보고 알려줄게.
“응. 부탁할게.”
- 이용당하는 기분이긴 하지만, 네 말도 일리는 있으니까.
“이용이라니. 그런…….”
이 자식이 남이 말하고 있는데 뚝 끊어 버리네? 어차피 더 할 말은 없……이 아니라, 있잖아! 나는 다시 전화를 거는 대신 간단하게 메시지를 보냈다.
강조와 김호채가 친분이 있으니 조심하라는 내용이었다. 김호채한테 더는 스킬을 쓸 수 없는데, 괜히 강조가 떠들다 신뢰가 깨지면 스킬이 풀릴 수 있는 위험이 있으니까.
이번에는 ‘ㅇㅇ’이 아닌 ‘ㅇ’ 하나만 띡 돌아왔다. 그래. 읽었다고 답장이라도 해주는 게 어디냐. 나는 헛웃음을 흘리며 협탁 위에 휴대폰을 올려놨다. 이제 씻고 자야겠어. 너무 피곤해.
샤워하고 돌아왔는데 방에 정이한이 없는 게 이상했다. 내 침대는 똑같은데 맞은 편에는 정이한의 침대가 아닌 붙박이장이 있었다.
기분 되게 이상하네…….
***
이 주쯤 지나고 나서야 낯선 숙소에 좀 적응이 됐다. 첫날은 방에 혼자 있는 게 외롭고 무서워서 뒤척거렸는데, 인간은 역시 적응의 동물이라고 시간이 지나니까 괜찮아지더라.
나는 젖은 머리를 대충 말리고 침대에 앉아 휴대폰을 들었다. 오늘 연습하면서 녹화한 영상을 한창 집중해서 보고 있을 때 전화가 걸려 왔다. 교주였다.
“응.”
- 뭐야? 빨리 받네?
“폰 보고 있었어.”
- 아아. 내일 촬영 취소됐어?
“아니. 아직 연락 못 받았는데.”
- 그럼 내일 자백하러 가려나 보네.
반가운 소식에 나는 자세를 고쳐 앉으며 휴대폰을 귀에 딱 붙였다.
“작업 끝났어?”
- 어. 쉽더라.
“준 선배님은?”
- 그게 좀 애매해. 딱히 박상준한테 해코지할 계획이 있는 건 아니던데. 어쨌든 주변에 피해 주지 말고 깔끔하게 끝내라고 했으니 결과 나오면 알겠지.
조사 들어가면 알게 된다는 거구나. 일단 이건 내 손을 떠났으니 기다리면 될 일이고, 그보다 중요한 질문이 남았다.
“게이지는 올랐어?”
- ……어.
조금 떨떠름한 대답이었다. 내 생각이 틀렸나?
“언제?”
- 주변에 피해 주지 말고 깔끔하게 끝내라고 말했을 때.
“그럼 역시 내가 아니라 ‘돕는다’가 포인트였던 거 아니야?”
- ……남을 돕는 거랑 체인지가 무슨 상관인데?
나는 단번에 알겠는데 교주는 이걸 이해 못 한다고? 아니 그 전에 그럼 그 ‘체인지’랑 나를 어떻게 엮었던 건데?
“그럼 나랑 체인지는 무슨 상관이라고 생각했는데?”
- 너랑 나. 둘 다 삶이 바뀌었잖아.
이, 이것도 좀 그럴듯하긴 하네. 그래서 교주가 계속 나한테 집착했던 건가.
- 그래서 무슨 상관이냐고.
조금 신경질적인 목소리였다. 의도한 건 아니었는데 말을 끌어 버렸네. 나는 최대한 단순하게 설명했다.
“너 인성 바꾸라고.”
- 하?
짜증 섞인 한숨에 너무 단순하게 설명했나 싶어서 말을 좀 얹었다.
“아니, 네 영혼이 검은색으로 물들었다며. 네 이전 영혼이 죄를 많이 지어서 네가 죗값을 치르는 거라면, 그만큼 선행을 해야 하는 거 아닌가 싶어서.”
단순한 권선징악의 논리였다. 교주는 ‘벌’로써 남에게 봉사하라는 회귀 목표가 주어진 게 아닌가 하는.
“남을 이용하기 위한 목적으로 스킬을 쓰는 게 아니라, 돕기 위해서 쓰라는 거지. 그래서 네가 처음으로 ‘나를 위해’ 김호채에게 에프터 서비스를 해줬을 때 게이지가 올라간 거야. 그 결과 나한테는 적이 생겼지만, 네 의도 자체가 선행이었기에 목표에 부합되었다고 보는 거 아닐까?”
- 하지만 난 그냥 널 도운 게 아니라 내 회귀 목표를 위해 도운 건데? 그것도 의도가 있는 거잖아.
“거기에 악의나 음흉한 속내는 없었잖아.”
교주는 오랫동안 침묵을 지키다가 이거는 좀 더 확인해 보겠다면서 통화를 끊었다. 내 예상이 맞았으면 좋겠는데. 나중에 또 연락하겠지.
그보다 내일이면 강조가 마약을 했다고 자백하는구나. 인페르노 촬영을 하지 않았다면 이렇게 되진 않았겠지. 불길하다고 학을 뗀 것치고는 일이 술술 잘 풀리는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