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드모드 아이돌-306화 (306/320)

306.

정이한이 찰싹 달라붙어서 정신이 아득해지는 바람에, 도대체 어떻게 숙소로 돌아왔는지 모르겠다. 평소에 하던 모습들 때문에 아무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는 것만 기억난다.

나는 차가운 물로 샤워하며 반쯤 가출한 정신을 다잡았다. 내일 새로운 숙소로 이사 가면 내 방이 생기니까 좀 괜찮아지려나. 찬기에 머리가 띵하게 울렸다. 나는 아픈 머리를 부여잡으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하지만, 이상하게 자꾸 몸이 달아오르는 걸 어떡해……. 뜨거운 물로 샤워할 자신이 없었다. 씻겨져 내려가는 거품 사이의 피부가 빨갛게 변해 있었다. 이게 물이 차가워서 그런 건지, 아니면 아직도 내부의 열이 덜 식은 건지 모르겠다.

“하온아, 아직도 씻어?”

정이한이 문을 두들겼다. 놀란 심장이 부서질 것처럼 소란을 피웠다.

“씻고 있어요!”

괜히 대답 안 했다가 지난번처럼 쳐들어올라. 후다닥 마무리하고 나갔더니 욕실 문 앞에 정이한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욕실에서 나오는 나를 본 순간 대번에 인상을 와락 찌푸렸다.

어……?

왜 저런 얼굴을 하지? 나 뭐 잘못했나? 갑자기 오한이 드는 것처럼 온몸이 차가워졌다. 몸 안의 혈액이 다 빠져나간 듯한 서늘함이었다. 너무 찬물로 씻었나…….

“너 찬물로 샤워했어?”

“아? 네, 그랬는데…….”

정이한이 내 팔목을 확 잡아채고는 가뜩이나 찌푸려져 있던 얼굴을 더욱 험악하게 구겼다. 정이한의 날 선 반응에 당황한 나는 속절없이 끌려갔다.

나를 방으로 데려간 정이한은 곧장 침대 위에 날 앉히고는, 이불을 끌어당겨 돌돌 감싸놓았다. 정이한은 나를 애벌레처럼 만들고 나서야 굽혔던 허리를 세웠다. 그러는 동안에도 정이한의 인상은 펴질 줄 몰라서 입술을 벌린 채 얼굴만 뚫어져라 쳐다봤다.

“감기 걸리면 어떡하려고 이 겨울에 찬물로 샤워를 했어?”

다정한 목소리가 돌아왔다. 부산스럽게 움직이는 정이한의 손에는 드라이기가 들려 있었다. 정이한은 콘센트에서 휴대폰 충전기 케이블을 뽑아내고는 빈자리에 드라이기를 꽂았다.

위이이잉.

익숙한 소음을 들으며 고개를 들었다. 나를 마주 보고 선 정이한이 내 머리카락을 흔들었다.

“……형, 저한테 화난 거 아니에요?”

“어? 내가 왜 화를 내?”

무슨 소리냐는 듯 반문하는 정이한은 어리둥절해 보였다. 깊은 안도감과 함께 억울한 마음이 뾰족하게 솟았다.

“아까 저 보자마자 인상 썼잖아요.”

괜히 안심돼서 툴툴거렸더니, 정이한이 다시 인상을 썼다.

“당연하지. 가뜩이나 몸도 약한데 찬물로 샤워했다니까 걱정되잖아. 한여름에도 따듯한 물로 씻으면서. 왜 그랬어?”

드라이기 열기가 나를 녹인 건지, 날 걱정하는 정이한의 태도가 녹인 건지 모르겠다. 갑자기 한결 포근해진 온도에 얼굴 근육이 풀렸다.

“이한 형, 저 보고 찡그리지 마요. 놀랐잖아요…….”

“놀라? 왜 놀랐는데?”

드라이기의 소음이 사라졌다. 정이한은 협탁에 드라이기를 올려놓고는 내 옆에 앉아, 잠깐 사이 흘러내린 이불을 다시 꽁꽁 싸매줬다.

“……화난 줄 알고.”

아무리 생각해도 억울하다. 걱정했으면 걱정했다고 말하지, 아무 말 없이 험악하게 구니까 내가 놀라잖아. 나는 머리로 정이한의 가슴을 때리듯 툭 두들겼다.

“나야말로 놀라운데.”

정이한이 그런 나를 품에 꼭 안아줬다. 아, 따듯하다. 아까는 정이한의 접촉에 안절부절못했는데, 지금은 또 봄날에 햇볕을 쬐는 듯 포근하고 평온했다.

“나는 절대 하온이한테 화내지 않…….”

응? 뭐야? 왜 말을 하다 말아? 나한테 화가 날 때가 있었나? 고개를 번쩍 들어 올렸더니 정수리에 뭔가가 콱 찍혔다.

“악.”

“윽.”

정이한이 제 턱을 부여잡고 있었다.

“헉. 형, 미안해요. 괜찮아요?”

“어, 괜찮아. 하온이도 머리는 단단하구나…….”

“머리가 물렁거리면 죽어요.”

정이한이 크게 웃으며 턱을 문질렀다.

“괜찮아. 그보다 내가 하온이한테 화날 때가 언제냐면, 네가 네 몸 살피지 않고 무리할 때. 위험한 데 혼자 가려고 할 때. 아픈 거 숨기고 혼자 앓을 때…….”

뭐야, 전부 나 걱정할 때뿐이잖아……. 말을 하던 정이한이 갑자기 또 입을 다물었다. 그러더니 머쓱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생각해 보니 이것도 아니네. 이건 네가 아니라 나한테 화가 나는 거구나.”

정이한은 그럼 나한테 화나는 일은 없다며 배시시 웃었다.

“……제가 멋대로 구는 건데 왜 형이 형한테 화가 나요?”

“네가 의지할 만한 사람이 되지 못했다는 거니까.”

정이한이 그건 좀 슬프다며 눈썹을 늘어트렸다. 가슴이 콕콕 쑤셔왔다. 지금까지 내가 한 행동들이 정이한에겐 상처였구나 싶어서.

나를 생각하는 정이한의 마음이 내게 스며드는 것만 같았다. 정이한이 나를 어떻게, 얼마나 좋아하는지 너무 절실히 알 것만 같았다.

가슴 안쪽이 꽉 조여들었다. 기쁜 것 같기도 했고, 슬픈 것 같기도 했다. 왜 이런 감정이 느껴지는지 이해가 안 됐다.

“그, 아무튼. 하온이한테 화낸 건 아니었어. 하온이는 도대체 왜 찬물로 샤워한 거야?”

정이한이 내 뺨을 손바닥으로 감싸며 물었다. 나는 ‘그냥…….’이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정이한은 나를 물끄러미 보다가 안타까운 한숨을 흘렸다. 그리고는 따듯한 손으로 내 뺨을 문지르며 쓰게 웃었다.

“걱정되니까 다음엔 그러지 마.”

“그럴게요.”

“정말?”

“그럼요. 저도 형이 속상해하는 거 싫어요.”

정이한은 정말 기쁜 듯, 무대를 빛내는 조명보다 밝게 웃었다. 저렇게 화사하게 반짝이는 웃음이 나로 인해서라는 사실에 묘한 뿌듯함이 차올랐다.

***

에스트반은 녹록지 않은 사람이었다. 그는 자신이 그린 이미지를 우리가 정확하게 표현해주길 바랐고, 그래서 연습은 더욱 혹독했다. 큰 동작이야 그렇다 쳐도 미세한 손가락 각도, 시선 처리, 표정, 호흡까지 모든 것에 지적이 들어왔다.

그 깐깐한 기준에 부합하기 위해 에스트반이 퇴근한 이후에도 우리는 계속 연습실에 남았다. 하지만 영상 속 우리 모습이 점점 나아지는 게 보이니 안 할 수가 없었다. 원래 이런 맛에 연습하는 거기도 하고.

“얘들아, 오늘은 이만 끝내고 가자.”

정곤 형이 연습실 문을 열며 들어왔다. 이삿짐센터 계약 시간이 끝나기 전에 가서 방을 정해야 한다는 게 그 이유였다.

어제 미리 들었던 내용이라 우리는 얼른 짐을 정리하고 정곤 형을 따라 주차장으로 내려갔다. 이전에 비해 회사와 숙소의 거리가 더 멀어진 것 같은데. 낯선 풍경을 보다 보니, 숙소가 아니라 어디론가 여행이라도 가는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도착한 숙소는 주차장부터 입을 떡 벌리게 했다. 고급 빌라라서 그런지 호수별로 개인 주차장이 딸려 있었는데, 번호판을 인식한 주차장의 철문이 육중한 소리를 내며 올라갔다.

차량 네, 다섯 대 정도는 충분히 댈 수 있을 만한 넓은 주차장에는 창고로 쓸 수 있을 법한 공간까지 딸려 있었다.

전용 엘베를 타고 올라오니 우리 숙소 현관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두 개 층을 통으로 쓴다더니. 이런 거대한 규모의 집은 처음 봐서 나는 연신 감탄하며 두리번거렸다. 어쩐지 과한 호사 같다는 생각도 들어서, 신기루가 아닌가 싶기도 했다. 적응하려면 시간 좀 걸리겠네.

“너희 편한 대로 방부터 고르면, 짐 날라줄 거야.”

이삿짐센터 직원분들이 분주히 주방과 거실을 정리하는 중이었다. 거실 한쪽에 우리의 짐이 층층이 쌓여 있는데도 남아도는 넓은 공간은 축구를 해도 될 것만 같았다.

“거실에서 모여 자고 싶을 때 소파 안 치워도 되겠네…….”

유찬 형이 중얼거리며 거실을 둘러봤다. 어느새 쪼르륵 움직였던 건지 이서호가 방 안에서 고개를 내밀었다.

“여기서 다 모여도 될 것 같은데? 여기가 큰 방인가 봐!”

호기심에 우르르 몰려갔다. 혼자 쓰기에는 과하게 넓은 방이었다. 방에 문이 하나 더 있어서 열어 보니 붙박이 화장대와 드레스룸, 그리고 또 문이 하나 나왔다. 욕조가 있는 큰 욕실이 이 안에 숨어 있었다.

“여기 다른 방이랑 떨어져 있어서 늦게까지 작업하는 이한 형이나 유찬 형이 쓰면 될 것 같은데? 다른 방에 소리 안 들릴 듯.”

이서호는 익숙한 것처럼 공간을 둘러봤다. 벽을 콩콩 두들겨 보더니 방음도 잘 된다며 끄덕였다. 맞다. 이서호 부자였지.

“난 2층 쓰고 싶은데 2층 쓸 사람 있어?”

강현 형이 고개를 내밀고 물었다. 이서호가 손을 번쩍 들었다.

“나!”

나를 포함한 세 명은 어디든 상관없다고 해서 두 사람에게 2층 방을 고르라고 했다. 층간 소음에서 해방이라며 이서호가 쌩하니 올라갔다. 유찬 형이 멤버 간에도 층간 소음은 조심해야 한다고 빽 소리쳤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너무 넓고 낯선 공간에 있는 것 같았는데, 평소와 다름없는 두 사람의 대화를 들으니 여기가 우리 숙소 맞구나 싶었다. 하긴. 어디에 있더라도 멤버들이랑 같이 있으면 거기가 내 집인 거니까.

“우리도 골라야지. 하온이가 먼저 고를래?”

방이야 침대 하나랑 옷장 하나만 있으면 되니까 난 아무거나 괜찮았다. 그런데 유찬 형의 질문에 대답한 건 내가 아닌 정이한이었다.

“하온이한테 큰 방 주고 싶긴 한데…….”

말꼬리를 늘린 정이한이 나를 보고 눈웃음 지었다.

“하온이는 개인 욕실 안 쓰는 게 좋겠어.”

유찬 형이 푸핫, 웃음을 터트리며 동조했다.

“맞아. 혼자 욕조에 들어갔다가 또 잠들면 어떡해? 언제라도 우리가 건져줄 수 있게 지켜봐야지.”

“……이제 안 그래요.”

“그래. 그게 좋겠다. 문 수리하면서 얼마나 황당했는지 알아?”

정곤 형이 대뜸 끼어들었다. 으윽. 아니, 애초에 내가 욕조 있는 방 쓰고 싶다고 한 것도 아닌데 이렇게 몰아가다니.

“그럼 제 방은 이한 형이 골라줘요…….”

“그래도 돼?”

정이한이 눈을 반짝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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