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3.
정규집 컴백과 이사에 들떠있던 내 기분이 순식간에 바닥으로 추락했다. 전생에 내가 플레이하다가 죽었던 게임 인페르노…….
갑자기 모든 불온한 것들이 나를 중심으로 모여드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괜히 입안이 바짝 말라서 마른침을 삼키며 시계를 만지작거렸다. 그러자 신기하게도 불안했던 마음이 조금씩 진정되고 있었다.
“어! 저요! 저 알아요!”
이서호가 손을 번쩍 들었다. 좋아하는 게임이 언급되어 기쁜 듯한 눈치였다.
“그랬어? 서호가 인페르노 해 봤니?”
이서호는 갖고 싶었던 장난감을 선물 받은 아이처럼 얼굴을 환히 밝히고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장송곡처럼 음울하고 단조로운 비파 음이 들렸다. 귀에 익다 못해 구역질이 나올 것 같은 인페르노 BGM이었다.
“짜잔! 저 만렙이에요!”
뿌듯해 보이는 이서호를 보는 것만으로도 게임에 가진 애정이 얼마나 큰지 알 것 같았다. 게임 화면을 물끄러미 들여다본 실장님이 내게 물으셨다.
“하온이는? 하온이도 해 봤니?”
질리게 해봤지만, 이번 생에 한 건 아니니까 대답한다면 ‘아니오.’인데 좀 고민이 됐다. 갑자기 나한테 저 게임 플레이 유무를 묻는다는 건, 관련된 스케줄이 잡혔다는 거잖아.
광고라면 디아스 그룹으로 섭외가 올 것 같으니 아니겠고. 나만 언급했다는 건 개인 섭외라는 소리인데 그러면 OST나 게임 플레이 관련일 것 같았다. 하지만 OST는 게임을 하든 안 하든 상관없으니까 게임 플레이 여부를 물어보진 않았겠지? 남는 건 게임 플레이네.
그렇다면 거절하기 쉬운 쪽으로 대답하는 게 나았다. 이야기를 듣기도 전부터 거절할 생각부터 하고 있네. 불현듯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저 게임과 더 이상 얽히고 싶지 않았다.
“아니요. 한 번도 안 해 봤어요.”
그러니 게임 플레이 스케줄이라면 안 해본 나보다 만렙인 이서호가 낫지 않겠어? 자연스럽게 이서호에게 스케줄을 미룰 요량이었으나 실장님의 반응은 내 예상과 전혀 달랐다.
“그래? 안 해 봤어? 어우, 다행이다. 하온이도 이미 해 봤으면 어떡하나 했는데.”
“……네?”
아, 뭔데? 해봤다고 대답해야 했던 거야?
“인페르노가 요즘 되게 핫한 게임이잖아. 이번에 신규 플레이어 유입을 위해 프로그램 기획을 했더라고. 물 들어올 때 노 젓는다는 거지.”
실장님은 정직한 프로그램명을 가진 <인페르노> 기획에 관해 설명해 주셨다. 기획 자체는 단순했다. 인페르노를 전혀 해보지 않은 아이돌의 4인 레이드 공략. 10대부터 30대까지를 타겟으로 성별을 나눠서 촬영 및 방영한다고 했다.
컨셉 자체가 ‘뉴비의 레이드 도전.’이라서 인페르노는 하지 않았으되, 게임에 대한 이해도가 있는 사람이 필요하다고 했다. 예전에 라디오에서 이서호가 내가 게임 잘하는 데 같이 안 해준다는 언급을 한 적 있어서, 나에게 직접 섭외가 들어왔다고.
게임을 처음 접한 사람이 하기에 인페르노는 하드코어한 게임이고, 보통 게임을 좋아한다면 인페르노를 했을 확률이 높아 출연진 찾는 데 애를 먹고 있다고 했다.
“하온이가 게임 즐기진 않아도 잘한다면서? 게다가 인페르노도 안 해봤다면 딱 좋지.”
인페르노 레이드는 1인, 4인, 6인으로 나뉘는데 공략 인원수가 적을수록 난이도가 올라갔다. 내가 저 1인 하드모드 공략을 올리겠다고 고생하다가 과로사한 거고.
게임에 죄가 없다는 건 나도 안다. 지금은 전생과 달리 내가 저 게임을 하다가 죽을 일이 없다는 것도 안다. 다 아는데, 그래도 기분이 좋지 않은 걸 어떡하냐고. 평소 스케줄 거절은 안 하는 편이지만, 이번에는 안 되겠어.
“……거절할 수 있어요?”
“왜? 이유가 있니?”
“첫 정규 앨범이라, 그쪽에 집중했으면 해서요…….”
내 스케줄을 파악하고 계신 실장님이니, 지금 떠오르는 변명거리는 이게 전부였다.
“설마 내가 그런 것도 고려하지 않았겠니.”
실장님이 가볍게 웃으며 설명했다. 이미 걸그룹 편은 팀 구성이 완료되어 촬영 중이라고 했다. 그게 2월에 방영되고, 보이그룹 편은 3월. 우리 컴백과 겹치는 일정이었다.
“너희 컴백 2주 전까지만 홍보용 스케줄 잡을 거야. 일주일에 많으면 두 개 정도로 제한할 거니 컴백 무대 준비는 문제없지? 당연히 이번 것도 그 전에 촬영 종료될 수 있도록 협의할 거고.”
굳이 이렇게까지 완벽하실 필요는 없는데. 나는 공교로움을 느끼며 눈을 내리깔았다. 그러자 자연스럽게 내 팔목에 채워진 시계가 보였다. 나는 무의식중에 시계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그래. 정규 앨범이니까 절대 망하면 안 되잖아. 할 수 있는 건 다 해야지. 그때도 내가 과로한 게 원인이었잖아? 이번엔 체력 시스템 때문에 과로하고 싶어도 할 수 없으니 괜찮지 않을까. 나는 시계를 엄지로 문지르며 불안한 마음을 눌렀다.
“그럼, 할게요. 촬영은 언제부터예요?”
“섭외 완료되면 바로 시작할 수 있도록 협의할게.”
……별일 없겠지?
“실장님, 저희 그룹에서 한 명만 출연할 수 있어요?”
그때 정이한이 실장님께 물었다.
“글쎄. 확인은 해봐야겠지만 이한이도 하고 싶니?”
“네. 저도 서호 덕에 게임은 어느 정도 할 줄 알고, 인페르노도 안 해봤으니 출연 조건은 되잖아요.”
어……. 정이한이 같이 간다고? 그 순간 잔뜩 긴장했던 몸의 힘이 탁 풀릴 정도로 안도감이 들었다. 정이한과 함께라면 정말, 괜찮을 것 같았으니까. 남몰래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데 실장님과 눈이 딱 마주쳤다.
“그럼 이한이도 같이 하는 걸로 하자. 일정은 협의되는 대로 정곤 매니저님 통해서 전달할게.”
실장님은 정이한이 같이 출연하는 게 확정이라도 된 것처럼 말씀하셨다.
“아아! 부럽다! 나도 하고 싶은데!”
이서호가 입맛을 다셨다.
“서호는 먹는 것도 좋아하지?”
“네? 그럼요! 엄청 좋아하죠!”
실장님이 대답을 미루는 것처럼 정곤 형을 쳐다봤다. 형이 입을 열었다.
“서호는 <맛있는 게 좋아> 쪽이랑 이야기 중이야. 대만 2박 3일 특별편으로.”
“앗싸아!”
폴짝 뛰어오른 이서호의 머리가 천장에 닿을 것만 같았다. 내내 콧노래를 흥얼거리는 이서호를 보니, 부러울 지경이었다. 나도 쓸데없는 생각 좀 안 하고 살아야 할 텐데. 도대체 왜 이렇게 인페르노가 싫은지 모르겠네.
죽은 건 온전히 내 탓이었는데.
***
인생지사 새옹지마라는 고사성어가 떠오른 건, 컴퓨터에 앞에 앉아 있는 텐스타의 멤버 두 명과 여느 때처럼 딱풀 상태인 정이한 덕이었다. 하필이면 저 두 사람이야.
준과 강조. 둘 다 마약 게이트에 연루되는 사람이었다.
물론 소파남과의 인연이 끊어져 이번 생에는 마약 게이트에 연루되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마약의 유입 경로가 소파남 한 명뿐이다.’라는 가설에 의지한 미래였다. 정말 그런지는 게이트가 터져 봐야 알겠지.
그러나 굳이 튼튼한 돌다리를 두고, 얇은지 두꺼운지도 모르는 빙판으로 강을 건널 필요는 없잖아. 그러므로 마주치지 않는 게 최상이었으나, 하필이면 <인페르노> 출연진으로 엮이다니. 마약 게이트가 3월에 터지니 이 프로그램의 미래가 어떻게 될지 걱정된다.
……응? 잠깐.
마약 게이트가 3월이었네? 우리 컴백이랑 겹치잖아! 무려 에스트반까지 초빙한 정규 앨범이다. 이런 큰 사회문제와 겹쳐버리면 묻힐 수도 있을 텐데. 사회적 분위기라는 게 있잖아. 컴백 시기는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아니라 갑자기 머리가 지끈거렸다.
2월로 컴백을 당겨도 활동 중간에 게이트와 겹칠 거고. 그렇다고 게이트 사태가 어느 정도 진정된 후에 컴백하면 공백기가 너무 길지 않나?
차라리 게이트가 빨리 터지면 좋을 것……. 이거, 할 수 있을지도? 마약한 사람 중 교주가 스킬을 쓸 수 있는 사람만 있으면 되는 거 아냐?
교주를 나 좋을 대로 이용해 먹는 기분도 들었지만, 내겐 교주보다 디아스가 중요하니까 어쩔 수 없다. 보답은 나중에…… 꼭. 잊지 않고 챙겨주는 수밖에.
“어? 이게 누구야! 하온이 아니야!”
나를 발견한 준 선배님이 벌떡 일어났다. 선배님은 일자로 길게 놓인 책상을 돌아 성큼성큼 내게 다가왔다.
“안녕하세요, 선배님.”
“우리 하온이도 게임 좋아했구나?”
……이게 천성이라니. 남한테 관심 없다는 사람이, 마치 관심이 풍부한 것처럼 구는 것도 재능이다 싶었다.
“……조금은요.”
“하온이랑 같이 촬영하니 좋네.”
천진난만하게 웃는 준 선배님을 보니 새삼 정말 악의는 없는 사람이라는 게 느껴졌다. 그래도 찝찝한 건 어쩔 수 없다.
광고 촬영할 때 보였던 모습 때문인지 정이한은 준 선배님을 경계하는 듯 보였다. 나를 반쯤 가린 채 정이한은 준 선배님에게 먼저 살갑게 말을 건넸다.
준 선배님의 시선이 내게서 정이한에게 옮겨갔다. 그때 앉아 있던 강조 선배님이 우리 쪽으로 느긋하게 걸어왔다.
“디아스 꼬맹이들, 반갑다. 아추대 때 이후로 처음이네.”
“안녕하세요, 강조 선배님.”
나와 정이한이 깍듯하게 인사했다. 그때도 인사만 나누고 대화는 거의 섞어 보지 못한 멤버라 어려웠다. 이왕이면 귀여운 다인 선배님이 나왔으면 얼마나 좋아. 그럼 눈이라도 호강했을 텐데.
“난 원래 게임 좋아해서 인페르노 해보고 싶었거든. 바빠서 못 했는데 일로 할 수 있다니 최고다 싶네.”
강조 선배님은 그렇게 말하면서 “못 하면 가만 안 둔다.”하고 은근히 압박을 줬다. 그러더니 이내 “농담이야.”하고 혼자 웃었다.
우와. 성격 나빠 보여…….
역시 나는 인페르노가 싫다. 이제는 왜 싫은지 따지지 않기로 했다. 나는 괜히 정이한의 팔만 꾹 잡았다. 그런 내 손등 위로 곧 다정히 내려앉은 온기에 짜증이 좀 가라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