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드모드 아이돌-302화 (302/320)

302.

12월 31일. 오늘을 마지막으로 몸이 열 개라도 부족할 것 같았던 시상식 시즌이 끝났다. 쉬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았지만, 연말이었기에 숙소로 돌아와 꾀죄죄한 몰골을 재단장하고 W라이브 방송 준비를 했다.

11시에 방송을 시작했을 땐 분명 다들 기뻐서 방방 뛰었는데, 갑자기 이서호부터 눈가가 촉촉해지더니 또 눈물바다가 됐다. 고맙고, 감사하고, 사랑하고. 그런 말들이 몇 번이고 우리 입에서 나왔고, 채팅창 또한 같은 말로 도배 되었다.

이렇게 좋은데 울긴 왜 울어. 나는 눈가 안쪽이 찌릿한 걸 꾹 눌러 참으며 웃었다. 우리는 디어리와 새해 카운트다운을 하고, 새로운 해를 함께 맞았다.

내가 성인이 된 걸 축하한다는 메시지가 채팅창을 터트릴 것처럼 쏟아졌다. 우리는 내년에도 함께 카운트다운 하자는 약속을 하고, 토크 시간을 조금 더 보내다가 방송을 종료했다.

“이한이, 강현이, 서호, 하온이. 한 해 고생 많았고, 앞으로도 우리 평생 함께하자.”

“아, 라방하면서 그렇게 말했는데 또 말해? 참나. 당연한 소리 그만하라고.”

이서호는 괜히 부끄러운지 툴툴거렸다. 그러면서도 “형들도 고생했어.”하고 작은 목소리로 말을 얹었다.

“앞으로도 계속 다 같이 모여서 새해를 맞자.”

“올해도 잘 부탁해.”

정이한과 강현 형의 인사가 끝나고, 멤버들의 시선이 모두 내게 모였다. 나는 어색하게 뺨을 긁적이다가 방긋 웃었다.

“음. 뭔가 조금 부끄러운 것 같기도 한데, 형들 제 멤버가 되어줘서 고마워요. 앞으로도 잘 부탁해요.”

라방에서 할 때는 방송이라서 괜찮았는데, 카메라 없이 말하려니까 되게 쑥스럽다. 그래도 이 간질간질한 느낌이 좋았다.

“그리고 하온아. 스무 살이 된 걸 축하해.”

유찬 형이 내게 상자를 내밀었다. 이런 건 또 언제 준비했대…….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는데.”

유찬 형은 조금 긴장한 것 같았다. 그런데 선물을 내민 유찬 형뿐 아니라 다른 형들도 마찬가지였다. 다 같이 준비한 건가? 나는 상자를 받아 들고 만지작거렸다.

“빠, 빨리 풀어 봐. 빨리.”

이서호가 침을 꿀떡 삼켰다. 다 같이 준비한 게 맞나 보네. 조심조심 포장지를 벗기니 고급스러운 케이스가 들어 있었다. 손목시계였다.

“어…….”

“마음에 들어?”

“너무 비싸 보이는데요…….”

브랜드 같은 거에 관심 없는 내 눈에도 명품이라는 걸 뻔히 알 것 같았다. 그만큼 디자인이 우아하고 세련됐으니까.

“좋은 시계, 사주고 싶었어.”

정이한이 불쑥 말했다. 유찬 형과 강현 형도 고개를 끄덕였다. 아아. 그렇구나. 정이한이 내게 처음으로 사줬던 시계는 스토커 때문이었으니까. 그때 다음엔 더 좋은 걸로 사준다고 했던 걸 빈말로 넘겼었는데…….

나는 시계를 만지작거리다가 다시 케이스에 조심스럽게 담았다.

“마음만 받을게요. 너무 비싸 보여서 미안해서요.”

“아, 진하온. 미안하지만 그거 반품이 안 돼. 너 안 차면 버려야 됨.”

“뭐? 왜?”

“시계 안쪽 봐봐.”

시계 안쪽에는 ‘D.H’라는 이니셜이 음각되어 있었다. D, H? 이거 잘못 온 것 같은데?

“디아스의 하온. 성으로 하려고 했는데 그럼 D.J라 좀 그렇더라. 그래서 H로 했어.”

“……아.”

“너 안 받는다고 할 줄 알고 우리가 아예 환불 불가로 이니셜 콱 박았는데 버릴 거야? 진짜? 진짜로?”

“아, 아니. 그러면 받아야지…….”

환불이 안 된다는데. 나는 형들의 마음이 담긴 시계를 한참 만지작거렸다. 그러자 이서호가 답답하다는 듯 가슴을 두들겼다.

“어휴, 진하온. 선물 처음 받아 보냐?”

“아, 아니거든?”

“손 이리 줘 봐.”

이서호가 내 팔목을 끌어당기고는 내가 꼭 쥐고 있던 시계도 가져가더니 그대로 팔목에 채워줬다.

“오, 사이즈 딱 맞네. 빨리 형들한테도 보여줘.”

어색하게 팔을 내밀자 형들이 만족스럽다는 듯 웃었다.

내 두 번째 스무 살.

전생에는 그 누구에게도 의미가 될 수 없었는데, 이번 생은 아니라는 게 이상했다. 아니, 아니다. 이상한 게 아니었다. 성인이 된 걸 축하받는 느낌이 좋았다. 벅차오르는 감동이었다.

“감사해요. 잘… 쓸게요.”

어쩐지 먹먹해져서 나는 잠시 숨을 고르고 말을 이었다. 그리고 지금 내 마음이 전해지길 바라며 밝게 웃었다.

“아우, 분위기 낯간지럽다! 그나저나 진하온 겁나 독하네. 나 이번에는 너 울 줄 알았는데! 우리 첫 음방 1위 했을 때도 안 울었지? 신인상 받을 때도 그렇고.”

이서호가 갑자기 말을 멈추더니 고개를 좌우로 까딱거렸다. 기억을 더듬는 것처럼 위로 솟구친 눈동자가 데굴데굴 굴렀다.

“그러고 보니 너 우는 걸 못 봤네. 원래 눈물이 없는 편이야?”

“그런가? 딱히 슬플 만한 일도 없었고. 그냥 나는, 좋으면 웃고 싶어서. 나 행복하다고 티 내려면 웃는 게 좋잖아.”

나는 그렇게 대답하면서 또 한 번 미소 지었다. 사실 우는 건 아주 어릴 때 졸업했다. 울어봐야 나만 손해였으니까. 나는 눈물을 참는 법을 배웠고, 그 대신 울고 싶을 때 웃을 수 있게 되었다. 그때의 내 미소는 방어의 수단이었지만, 이제는 정말 기쁘고 즐거워서 웃는다.

그럼 된 거잖아.

우리는 새해의 첫날을 도란도란 둘러앉아 보냈다. 매일 같이 있는데도 무슨 할 말이 이렇게 많은지. 그러다 두 시가 넘어가자, 다들 졸음을 이기지 못하고 꾸벅거렸다.

이서호는 뻘겋게 충혈된 눈으로 더 놀고 싶다고 고집부렸으나, 유찬 형이 “방에서 게임 해도 돼.”라는 말 한마디에 신나서 제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형들도 방으로 들어가고, 나도 자러 가려던 때 문득, 거실 찬장에 주르륵 나열된 트로피가 눈에 들어왔다.

음악 방송 1위를 하고 받은 트로피 위쪽으로 이번에 받은 신인상 트로피들이 새로 자리를 잡았다. 내 기적 같은 순간이 고스란히 담긴 트로피였다.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값진 추억이 이렇게 또 한층 견고하게 쌓였다.

새로운 추억이 층층이 쌓일 때마다 가장 밑바닥에 있던 안 좋은 기억들이 더욱 깊은 곳으로 가라앉는 것만 같았다. 이러다 보면 가족의 얼굴도 잊게 되고, 아팠던 기억들도 전부 사라지겠지. 퀴퀴한 것들을 전부 털어내면 멤버들과 디어리의 애정으로 만들어진 새로운 내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왠지 올해에는 좋은 일만 있을 것 같은걸.

“하온아, 안 자?”

“자야죠.”

우리의 방문 앞에 비스듬히 서 있는 정이한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

문자를 본 건 우연이었다. 계속 쌓이기만 하는 스팸과 사생들의 문자를 삭제하려고 열었을 뿐인데, 하필 제일 위에 남겨진 문자가 소파남이 보낸 거였다. 미리 보기만 봐도 소파남이었다.

[신인상 받았더라. 이번엔 차단하지 말고…]

와우. 와중에도 축하한다는 말은 없네. 곧 죽어도 남 잘되는 꼴은 못 보겠다는 건가? 미리 보기만 본 거니 뒤에 내용이 더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뻔한 용건이라 내용이 궁금하지도 않았다.

나는 속으로 코웃음 치며 고민하지도 않고 새로운 소파남의 번호를 차단했다. 계속 보내 봐라. 내가 답장하나. 이대로 소파남이 휴대폰을 구매하느라 재산을 탕진할 때까지 차단해줄 수 있었다.

깨끗하게 정리된 문자가 시원해 보였다. 어차피 또 금방 쌓일 테지만, 이게 한 번씩 거슬린단 말이지.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고 카시트에 기댄 채 창밖을 봤다. 지난 며칠 동안 유례없는 한파와 폭설로 난리였다. 그 탓에 곳곳에 눈의 흔적이 지저분하게 널려 있었다.

눈도 처음에 내렸을 때는 하얗고 예뻤을 텐데. 이제는 미관을 해치는 쓰레기 취급을 받고 있다. 그게 꼭 소파남의 인생 같았다. 그도 처음부터 이렇진 않았을 테니까. 뭐, 내 알 바 아니지.

나는 도시 풍경에 흥미를 잃고 고개를 돌렸다. 쓸데없는 생각에 시간 낭비할 필요는 없었다. 나는 내 손목에서 번쩍거리며 빛나는 듯한 시계를 만지작거렸다. 좋은 생각이나 해야지.

“시계 차주니까 기분 좋다.”

언제나처럼 내 옆에 앉아 있던 정이한이 문득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선물을 받은 날 밤. 정이한의 주도하에 시계를 고른 건지 물었을 때, 정이한은 저 혼자 사주면 어떻게든 거절할 것 같아서 멤버들을 끌어들였다고 했다.

그런데 다들 이미 선물로 손목시계를 생각하고 있어서 돈을 모아서 좋은 걸로 해준 거라고. 다들 내가 트라우마를 이겨냈으면 하는 마음에, 좋은 기억으로 덮어주고 싶었다고 했다. 그래서 시계를 볼 때마다 가슴이 간지러웠는데, 이걸 차니 아주 단단한 방패를 든 것처럼 든든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날 지켜줄 것만 같았다.

정이한과 이야기를 하다 보니 어느새 회사에 도착했다. 우리는 곧장 정곤 형과 함께 실장실을 향했다. 새해 인사와 덕담 시간이 지난 뒤 실장님은 본건을 이야기하셨다.

3월에 잡힌 컴백은 우리의 첫 번째 정규 앨범이자, 강현 형과 페어 댄스 커버를 했던 에스트반이 직접 창작한 안무로 한다고 했다. 에스트반이 내한한다는 소식에 강현 형이 제일 기뻐했다.

1월 중순으로 잡힌 이사 이야기에는 우리 모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래, 이사. 완전히 잊고 있었다. 정곤 형이 내년에 이사할 수 있다고 했으니 그게 지금 맞네. 시간이 빨리 지나갔다는 걸 새삼스럽게 실감했다.

“이사는 우리가 알아서 할 테니까 중요한 것만 따로 챙겨둬. 그리고 하온아. 혹시 인페르노라는 게임 아니?”

……저 게임이 지금 왜 나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