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0.
무대에 오를 준비를 마친 우리는 이서호가 바이올린 케이스를 챙기는 걸 확인하고 백스테이지를 향했다. 또 한 번 저 무대에 설 수 있다니. 게다가 이번에는 춤 스탯도 승급했으니 더할 나위 없이 완벽했다.
“얘들아. 긴장하지 말고, 다치지 말고, 연습한 대로만 하자. 알았지?”
그렇게 말하는 유찬 형이 제일 떨려 보였다. 나는 유찬 형에게 양팔을 쭉 내밀어 벌렸다. 순식간에 리더의 얼굴이 사라진 유찬 형은 내 팔 안으로 몸을 구겨 넣어 꼭 끌어안겼다.
“으어어, 긴장돼…….”
“막상 올라가면 잘할 거면서.”
나는 유찬 형의 등을 토닥였다.
“그래그래, 이거지.”
이서호가 이제는 이 풍경이 없으면 디아스 같지 않다며 장난스레 말했다. 스태프로부터 무대에 오를 준비하라는 소리가 들렸다. 유찬 형이 바짝 긴장했다가 천천히 풀어지는 게 느껴졌다. 느릿하고 긴 템포로 숨을 들이마셨다가 내쉰다.
“후우……. 좋아. 난 준비 됐어.”
유찬 형이 내 품에서 벗어나며 형형하게 눈을 빛냈다. 마침내 우리의 시간이었다. 퍼포먼스 팀과 무대에 오를 때와는 또 다른 기분이었다. 형들과 동생들에게는 미안하지만, 그 무대는 온전히 내가 즐거운 무대였다. 하지만 멤버들과의 무대는 함께라서 즐거운 무대라는 게 달랐다.
***
겨울 느낌을 자아내게 편곡된 썸머 베케이션의 전주가 흘렀다. 여름 방학을 만끽하는 듯한 통통 튀는 귀엽고, 신나는 선율이 겨울의 차갑고 쓸쓸한 분위기로 바뀌었다. 그리고 시작된 바이올린 소리. 이서호의 바이올린 연주에 맞춰 MR의 볼륨이 줄어들었다.
뚜벅. 뚜벅.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이서호가 어둠 속에서 무대 중앙으로 걸어갔다. 움직이는 동안에도 그의 손끝에서 만들어지는 바이올린 음은 한 치의 흐트러짐이 없었다. 이서호의 등장과 함께 들려온 탄성은 나직하고 아름다운 바이올린 음에 사그라들었다.
이서호의 얼굴이 카메라에 클로즈업되었다. 프로 바이올리니스트처럼 진지한 얼굴은 미간이 살짝 패여 있었고, 내리깐 눈썹에 바른 자잘한 펄이 반짝거렸다. 그건 꼭 눈물처럼 보이기도 했다.
‘장꾸’라는 별명이 붙은 이서호가 만들어 낸 분위기라고 하기에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침착하고, 고독한 느낌에 나는 만족스럽게 웃었다.
“이렇게 보니까 서호 분위기 있네.”
유찬 형이 작은 목소리로 감탄했다.
“그렇죠? 확실히 무대 의상 제대로 입고하니까 더 좋네요.”
흐뭇함이 배어 나는 내 목소리에 유찬 형이 웃음소리를 흘렸다.
“가끔 하온이는 서호한테 형처럼 구는 거 알아?”
“……귀엽잖아요. 서호 형.”
“하긴 하온이는 서호가 투덜거릴 때도 귀엽다고 했었지.”
음. 그때와는 의미가 조금 다른 ‘귀여워.’지만, 딱히 오해해도 상관없어서 정정하지 않았다. 그저 웃어 보였을 뿐이었다.
그 사이 무대 중앙에서 독주를 하던 이서호가 반대편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유찬 형이 뒤로 빠지면서 내 등을 두들겨 응원했다. 동시에 내 리프트가 움직였다. 이제 내 차례다.
등을 보인 채 한쪽 고개만 떨구고 서 있던 나는, 바이올린의 음이 높게 치솟았을 때 몸을 움직였다. 제 자리에서 반 바퀴 턴 하면서 팔을 높이 들고 상체를 뒤로 젖힌 채 세 바퀴 회전. 그리고 앙상한 나뭇가지에서 떨어지는 잎처럼 팔랑팔랑 팔과 몸을 떨궈 교차시킨 다리 위에 주저앉았다. 길게 늘어진 끈이 내 움직임보다 반 박자 늦게 떨어졌다.
내 장점인 우아함을 살린, 아니 극대화한 안무였다. 이걸 제대로 표현하기 위해 회사에선 내게 현대 무용과 발레 선생님까지 붙였다.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는 것도 좋지만, 디어리들이 좋아하고 내 가장 큰 강점으로 꼽는 춤 선을 보여주는 것도 중요하다는 강현 형의 의견으로 만들어진 안무였다. 나는 이서호의 연주에 맞춰 교차시킨 다리에 힘을 주고 일어났다. 자연스럽게 회전하는 방향에 인위적인 힘을 더해 정면을 보게끔 선 뒤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자꾸 나보다 반 박자 늦게 팔랑거리며 따라오는 끈이 거슬렸다. 저러다 괜히 목에 감기기라도 하면 되게 웃길 것 같은데. 나는 끈에 휘감기지 않도록 신경 쓰며 춤을 췄다.
이어서 바이올린 음이 한 단계씩 아래로 추락했다. 그에 맞춰 무대 외곽까지 움직인 나 또한 천천히 몸을 웅크렸다. 다가오는 겨울을 대비해 동면에 드는 동물처럼.
나를 비추던 스포트라이트가 꺼짐과 동시에 무대 중앙에 새로운 빛이 비쳤다. 정이한이었다. 정이한의 등장과 함께 박자가 빨라졌다. 복잡한 스텝이 어려운 안무였으나 정이한은 실수 없이 훌륭하게 마무리했다.
이어서 강현 형이 무대 왼쪽에서 뛰어내렸다. 쿠웅! 하는 효과음이 타이밍 맞춰 터졌다. 매섭고 빠르게, 몰아치는 듯한 춤사위는 마치 무언가와 싸움이라도 하는 것처럼 보였다. 거칠어진 바이올린이 비명이라도 지르는 것 같았다.
네 번째는 나와 똑같이 리프트를 타고 올라온 유찬 형의 차례였다. 팔, 다리를 쭉쭉 뻗지 않고도 대충 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도록 절제된 동작이 필요한 안무였다. 저걸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건 유찬 형이었다.
우리가 이 무대로 표현하고 싶었던 건 계절이었다. 가을의 끝에 걸린 나, 예상하지 못한 겨울을 맞닥뜨린 정이한, 몰아치는 한파를 표현한 강현 형, 봄을 기다리는 유찬 형.
그리고 마지막으로.
봄. 이서호.
유찬 형의 안무가 끝남과 동시에 나는 목소리를 냈다. 가사 없는 허밍으로 바이올린의 연주를 이어받았다. 그사이 중앙으로 이동한 이서호에게 스포트라이트가 비쳤다. 이서호는 온화한 얼굴로 천장을 올려보며 한 손으로 눈을 가렸다. 태양을 마주 본 사람처럼.
이서호가 살랑살랑 부드럽게 움직였다. 그러다 어느 순간에는 장난꾸러기의 면모를 드러내며 쿵쾅거리며 온 무대를 뛰어다녔다. 온 세상에 녹음을 맞이할 준비가 되었는지 묻고 다니는, 요정이라고 해주고 싶은데 미안하지만 내 눈에는 여전히 방방 뛰는 강아지 같았다.
모든 조명이 점멸하고, 나는 허밍을 계속하며 어둠 속에서 움직였다. 내 허밍에 유찬 형의 목소리가 얹혔다. 정이한의 허밍이 낮게 깔리고, 이서호와 강현 형의 목소리가 합세했다.
겨울의 선율은 조금씩 밝고 따스하게 바뀌었다. ‘우리는’으로 곡이 바뀌는 시점이었다. 그렇게 우리가 무대 중앙으로 모였을 때, 초록색과 노란색이 섞인 조명이 동시에 환하게 빛났다.
우리가 입은 하얀색 의상이 조명을 반사해 연한 녹색과 노란색으로 점점이 빛났다. 그야말로 봄이었다.
***
무대의 여운이 가시질 않아 나는 바닥에 주저앉은 채 기분 좋게 숨을 헐떡였다. 아크로바틱 무대를 했을 땐 일어나지도 못했는데, 지금은 그렇게까지 힘들지 않았다. 그렇다고 벌떡 일어나서 돌아다닐 정도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내 마음에 가득 퍼지는 충만한 만족감을 느끼는 이 순간이 좋았다. 오랜만에 멤버들과 함께 무대에 올라서 그런 걸까. 백스테이지라는 것도 잊고 나는 헐떡거리며 헤실헤실 웃었다.
“으어어, 진짜 ‘우리는’은 언제 춰도 힘들어…….”
이서호가 물을 꿀떡꿀떡 마신 뒤 캬하, 하고 아저씨 같은 소리를 냈다. 여기저기서 정곤 형에게 좀비 같은 손이 뻗어졌다. 형은 바쁘게 움직이며 멤버들에게 물을 가져다줬다.
“하온이는 괜찮아? 움직일 수 있어?”
“조금만, 헉, 흐으, 쉬면요…….”
나는 폐를 쥐어짜 대답하며 형이 내미는 물을 받아 마셨다. 물이라도 마시니까 살 것 같다. 차가운 바닥에 앉아 있었더니 금방 냉기가 올라왔다. 땀이 식으면서 체온이 떨어지는 것 같았다. 아까는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밤이 깊어지면서 온도가 더 떨어진 걸까. 하지만 일어나기엔 아직 회복이 덜 됐는데…….
“얘들아, 너희 계속 그러고 있으면 감기 걸려. 대기실로 이동하자. 못 움직이는 사람?”
정곤 형이 걱정 어린 목소리로 우리를 불렀다. 이서호가 제일 먼저 벌떡 일어났고, 강현 형도 자리를 털었다. 유찬 형은 여전히 조금만 더 쉬겠다고 숨을 골랐고, 당연히 힘들어서 널브러졌을 줄 알았던 정이한이 벌떡 일어났다.
“그럼 유찬이는 내가 데리고 가고, 상주야. 하온이 데려가.”
“넵.”
“저, 전 아직, 대답 안, 했는데요?”
정곤 형은 대답 안 들어도 안다는 듯한 눈빛으로 나를 봤다. 이렇게 억울할 수가! 그런데 그게 사실이라 더 억울해!
성큼성큼 내게 다가온 상주 형이 내 겨드랑에 팔을 넣어 나를 쑥 일으켜 세웠다. 상주 형도 진짜 힘 좋다니까…….
“가자.”
형이 나를 안아 들려는지 내 앞에서 허리를 굽혔다. 나는 다급하게 상주 형의 어깨를 잡고 도리질 쳤다.
“제, 제가 걸을게요.”
“아악! 정곤 형! 내, 내가 걸을 수 있어!”
유찬 형이 뒤에서 비명을 질렀다. 뒤를 돌아보니 정곤 형에게 들쳐 메인 유찬 형의 얼굴이 붉은색 조명 밑에 서 있는 것처럼 벌겋게 변해 있었다.
“정말 괜찮겠어?”
상주 형의 물음에 나는 고개를 원래대로 돌리며 끄덕거렸다.
“네, 부축만 해주세요.”
나는 많이 들려봐서 안다. 고양이가 사냥할 때 엉덩이를 흔들 듯, 나를 들려는 사람은 갑자기 내 앞에서 수그린다는 것을! 아니, 뭐 당연한 이야기긴 하지만. 어쨌든. 상주 형이 날 들지 않았다는 거에 감사해야겠다. 여기 보는 눈이 얼마나 많은데 부끄럽게.
“하온이는 가끔 말을 잘 안 들어.”
“아, 강현혀어어억!”
제, 제기랄. 나는 순식간에 뒤로 다가온 강현 형에게 들려버렸다. 거의 형의 팔에 앉혀진 듯한 자세 덕에 시야가 높게 떴다. 나는 형의 어깨를 짚은 채 고개를 푹 떨궜다. 등 뒤에서 기습하는 건 반칙이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