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9.
“무, 무슨 소리 하는 거예요. 라이 형이거든요?”
“라이 형도 남자잖아. 아까 너무 야했단 말이야…….”
나는 할 말을 잃고 입만 뻐끔거렸다. 도대체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모르겠네. 굳은 채 가만히 있자 정이한은 “다음엔 절대 그냥 두면 안 돼. 알았지?”하고 내게 다짐을 받아 내려는 듯 단호하게 말했다.
평소에 이런 이상한 고집을 부린 적이 없었는데. 꼭 질투라도 하는 것처럼……. 음? 정말 질투인가?
“……형, 혹시 질투했어요?”
“응. 나는 무대 보면서 하온이랑 거리감이 너무 느껴졌는데, 라이 형은 너를 막 만지니까…….”
기다렸다는 듯 단번에 긍정하니까 오히려 내가 당황해 버렸다. 또 말이 막혀서 입을 다물고 있던 나는 어딘지 간절해 보이는 정이한을 보고 웃음을 터트렸다. 이게 저렇게까지 심각하게 부탁할 일인가? 심지어 때와 장소도 가리지 않고 말이야.
“라이 형은 그냥 제가 힘들어해서 도와준 거예요. 질투할 일이 아니었어요.”
“……하지만 나는 이 밑에 있고, 하온이는 위에 있었잖아. 사실은 그 무대에 있는 모든 사람을 다 질투했어.”
정이한은 자신이 함께 서지 못하는 무대에 서서, 기쁜 듯 웃는 나를 보고 슬펐다고 토로했다. 우리 느와르 컨셉이라 그렇게 막 해피해피한 얼굴은 아니었을 텐데? 내 얼굴에 티가 났나? 아닌데. 나는 신경 써서 표정 관리를 했다. 딱 한 번, 표정 관리를 하지 못했던 순간에는…….
“형, 혹시 제가 웃는 거 봤어요?”
“응. 너무 행복해 보이는 예쁜 미소였어…….”
“그때 저랑 눈 마주친 것 같지 않았어요?”
정이한은 깜짝 놀란 듯 입고 있는 슈트의 단추만큼 눈을 키웠다.
“어, 어어. 맞아. 나는 기분 탓인 줄 알았는데?”
“저도 기분 탓인 줄 알았거든요.”
정이한의 눈에 이채가 돌았다. 저 눈동자가 반짝거리는 건 무대에서 쏟아지는 조명이 휘황찬란하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그럼 나랑 눈 마주친 거 맞아?”
“그런 것 같죠? 그리고 우리 느와르 컨셉이잖아요. 사실 웃으면 안 되는 건데 실수했어요.”
“그럼 나 보고 웃은 거야?”
정이한은 기대에 찬 표정을 하고 있었다. 내가 긍정이라도 해주면 당장에라도 입꼬리가 치솟아 오를 것처럼 씰룩거렸다. 진짜 사람이 이렇게 귀여워도 되나? 심지어 작업할 때는 멋있으면서.
“맞아요. 저도 모르게 웃어버렸거든요.”
정이한은 소리도 내지 않은 채 함지박만 한 미소를 지었다. 저렇게 좋을까.
“됐어요? 라이 형 질투 안 해도 돼요.”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지.”
넘어갈 줄 알았는데 또 고집을 부린다. 진짜 싫었나 보네. 나는 정이한을 달래기 위해 “알았어요. 앞으로는 조심할게요.”하고 대답했다. 정이한은 그제야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문득 머릿속에 물음표 하나가 떠올랐다. 나는 싱글벙글한 얼굴로 무대를 보는 정이한의 팔을 툭툭 두들겼다.
“그런데 형.”
“응?”
“만약 형이랑 제가, 어. 그렇게 되면요.”
사귄다는 말이 입 밖으로 안 나와서 대충 뭉뚱그렸다. 처음에는 의아해하던 정이한이 뒤늦게 의미를 파악한 듯 “아!”하며 뺨을 붉혔다. 나는 부끄러워서 도망치고 싶어질까 봐 빠르게 말을 이었다.
“다른 형들이랑 제가 평소 하던 대로 하면 질투할 거예요?”
“우리 멤버들?”
“네.”
정이한은 고민할 가치도 없다는 듯 단번에 대답했다.
“하겠지. 하지만 막지 않을 거야. 음. 아니다. 막을 수 없다고 봐야겠네. 하온이에게 우리가, 우리에게 하온이가 얼마나 소중한지 잘 알잖아.”
“그럼 멤버 외 사람은요?”
“매니저 형들 빼곤 절대 사수할 거야.”
정이한의 눈에 불꽃이 튀었다. 마치 진짜로 그런 일이 일어난 것처럼. 푸흐. 그것 봐요. 강현 형. 형들이랑 내 사이를 갈라놓을 사람은 내가 좋아하지 않을…….
어?
뭔가 지금 결론이 이상하지 않나. 왜 이런 결론이 난 거지? 내가 진짜 정이한한테 마음이 있나? 아니면 정이한이 여우처럼 대답을 유도해서 헷갈리는 건가?
이걸…… 뭐라고 해야 해? 누구한테 상담하지? 상담할 사람은 이서호밖에 없는데, 이서호는 또 엄한 소리나 해댈 것 같고.
……교주한테 물어볼까.
잠깐 교주에게 연애 상담하는 걸 떠올렸다가 얼른 접었다. 내가 미쳤지. 상담할 사람이 따로 있지. 지금이야 교주랑 잘 지내지만, 혹시 알아? 교주는 회귀 목표를 채우는 열쇠가 내가 아니면 언제든지 내게서 돌아설 수 있는 사람이다. 그때 약점이 될 수도 있잖아.
결국 내 마음은 스스로 확인하는 수밖에 없나. 하지만 이걸 어떻게 해야 확신할 수 있지? 애초에 그 방법도 잘 모르겠다. 당장 내 머릿속에 떠오르는 건 이서호가 말한 키스뿐이었다. 그건 부끄러워서 못 하겠는데, 그럼 사랑이 아닌 건가?
정이한은 내가 상의 탈의한 걸 보고 자기의 마음을 자각했다고 했는데, 그럼 나도 정이한 목욕할 때 쳐들어가 볼까……. 사고가 점점 말도 안 되는 방향으로 치닫고 있을 때 불쑥 들어온 질문에 나는 엉뚱한 생각을 저 멀리 치워버렸다.
“그런데 갑자기 왜 그런 걸 물어?”
“아, 아니요. 그냥 궁금했어요.”
정이한은 고개를 기울였다가 해맑게 웃었다. 때마침 컨트롤에스가 무대에 올라왔다. 막내 다윈의 그룹이었다.
“아, 다윈이다.”
“……이런 건 참아야겠지.”
정이한이 혼잣말을 했다. 의자가 징징 울릴 정도로 볼륨이 큰 음악이 나오고 있는데, 신기하게도 작게 중얼거린 그 말이 조금 전까지 서로의 귓가에 속삭였을 때처럼 선명했다.
***
KMA은 시상식 중 가장 규모가 큰 만큼 다들 만반의 준비를 한 모양이었다. 나는 다른 그룹의 무대에 푹 빠져서 때로는 같이 박자를 타기도 하고, 때로는 멍청하게 입을 벌리고 집중하기도 하며 KMA의 무대를 즐겼다.
그리고 마침내 디아스의 차례가 왔다. 우리가 일어나자 기대에 찬 디어리의 흥분 어린 함성이 들렸다. 나는 디어리에게 손을 흔들며 입을 뻥긋거렸다.
‘다녀올게요.’
알아듣지 못했을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인사를 하고 싶었다. 디어리에게 배웅받는 기분을 느끼면서 나는 걸음을 서둘렀다. 백스테이지를 빙 돌아 대기실로 간 우리는 빠르게 옷부터 갈아입었다.
나는 실크 재질의 하얀색 블라우스를 입었다. 옷이 상당히 얇아서 그런지 살색이 비치는 것 같았다. 코디 누나가 끈치고는 면이 넓은 긴 끈을 내 목에 두어 번 감아줬다. 배꼽에 닿을 정도로 길게 늘어진 끈은 워낙 가벼워서 내가 움직일 때마다 살랑거리며 흔들렸다.
거울을 찬찬히 들여다보고 있자니 조금 위화감이 느껴졌다. 블라우스 기장이 좀 짧은 것 같기도 하고? 팔을 들면 배가 보일 것 같은데…….
“누나, 저 블라우스가 짧아진 것 같아요.”
바로 옆에 있는 코디 누나를 불렀다. 갑자기 누나의 표정이 확 밝아졌다.
“눈치챘어? 일부러 조금 줄였어. 원래 춤출 때 살짝살짝 보이는 게 좋은 건데, 이전에는 잘 안 보이더라고.”
……누나한테는 다 계획이 있었구나. 나는 골반 아래에서 끊기는 블라우스 밑단을 만지작거렸다. 그러다 거울을 보며 슬쩍 블라우스를 들어 올렸다.
음. 복근 운동 좀 해 둘걸…….
너무 밋밋하지 않나. 이런 걸 보여줘도 되나. 디어리가 내 배 말랑말랑하다고 실망하면 어떡하지. 나는 아랫배를 만지작거리며 거울 속을 빤히 들여다봤다.
“하, 하, 하온아아!”
정이한이 들어 올린 내 블라우스를 확 잡아 내렸다. 벌겋게 변한 얼굴은 잘 익은 홍시 같았다. 어? 아…….
뒤늦게 내가 사람 많은 대기실에서 뭘 했는지 깨달았다. 밀려드는 수치심에 헛기침할 때 거울 너머로 멤버들의 모습이 비쳤다. 유찬 형은 목덜미를 불그스름하게 물들인 채 고개를 돌렸고, 강현 형은 한 손으로 얼굴을 덮고 있었다. 왜인지 모르지만, 이서호까지 입을 떡 벌린 채 눈을 질끈 감고 있었다. 같은 남자 배 좀 본 것 치고는 다들 반응이 과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형들의 마음을 아니까…….
그런데 이서호는 왜 저러는 거야.
나는 민망한 마음을 꾹 숨기고 태연한 척 말했다.
“그런데 저 배가 말랑말랑한데, 우리 디어리가 싫어하면 어떡해요?”
코디 누나는 내가 뭘 모른다며 혀를 쯧쯧 찼다.
“하온이 배가 말랑하니까 좋은 거야.”
확신을 담은 단언에 나는 실크 너머로 배를 동그랗게 만지작거리며 물었다.
“그, 그래요? 그럼 복근 생기면 싫어할까요?”
“응? 아니. 복근 생기면 또 하온이 배에 복근 있으니까 좋은 거지.”
“……그게 뭐예요.”
건성으로 대답한다는 생각에 볼을 부풀렸다. 코디 누나는 크게 웃음을 터트리더니 마지막으로 내 의상을 손봐주며 말했다.
“우리 하온이가 아직 팬심을 모르네. 원래 팬심이란 건 말이야. 내 새끼가 뭘 해도 예뻐 보이는 거야. 유명한 말 있잖아. 입덕했을 때는 흐르는 땀도 청량하지만, 탈덕하면 육수라고.”
처음 들어 보는데 정말 유명한 말 맞아? 약간 의심 어린 눈초리로 쳐다보자 코디 누나가 깔깔거리면서 웃었다. 그래도 어떤 느낌인지는 알 것 같긴 해.
“일단 하온이는 다 됐고, 강현아!”
코디 누나가 바쁘게 움직였다. 준비가 끝난 나는 다른 사람들에게 방해되지 않게 자리를 옮기며 생각했다. 정말 그런가. 나는 각인 된 새끼 오리처럼 나를 따라 오는 정이한을 휙 돌아봤다.
“으, 으응? 왜?”
“형도 그래요?”
“무, 뭐가?”
못 알아듣는 척하는 거야. 정말 못 알아들은 거야. 나는 정이한을 위해 차근차근 풀어서 다시 물었다.
“형도 제 배가 말랑하든, 단단하든 다 좋아요?”
“아. 응. 당연하지. 나는 배 나온 하온이도 귀여울 것 같아.”
배 나온 나…….
“그건 제가 싫어요.”
“난 좋은데.”
“전 싫다니까요.”
아이돌은 자기 관리 또한 일이다. 프로의식을 잃었다는 증거나 마찬가지인 배는 절대 용납할 수 없었다. 내 인생의 마지막 무대에 오를 때까지 관리할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