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5.
“하온아.”
낮게 날 부르며 읊조리는 목소리가 연달아 두어 번 들렸다. 내가 좋아하는 달콤한 저음이 기분 좋게 감겨왔다. 위화감을 깨달은 건 정이한이 나를 한 번 더 불렀을 때였다. 정이한의 허밍을 들으면서……. 들으면서?
그 뒤에 기억이 뚝 끊겼다. 동시에 내가 졸았다는, 아니. 졸았다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숙면을 했다는 걸 깨달았다. 그것도 정이한의 왼쪽 팔에 기대서.
화들짝 놀라 몸을 똑바로 세우자 곧장 목이 뻐근하게 아려왔다. 삐딱한 자세로 잤다는 명백한 증거였다.
“헐, 저 형한테 기대서 잤어요?”
미쳤어. 일하는 사람 방해하는 것도 가지가지지. 나 때문에 일 못 했으면 어떡하지? 정이한은 연말 무대 연습뿐 아니라, 경연까지 나가야 해서 나보다 더 바쁠 텐데…….
“미안해요, 형. 제가 방해했죠. 아, 왜 졸아서…….”
일을 방해했다는 미안함 때문에 고개를 푹 수그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나 때문에 이후 정이한의 일정이 꼬여 초주검 되는 미래밖에는 그려지지 않았다.
바닥을 향한 내 시야에 갑자기 정이한의 얼굴이 불쑥 끼어들어 왔다. 긴 의자의 빈 공간을 손바닥으로 짚고, 날 올려다보는 얼굴에 웃음기가 돌고 있었다. 그게 왠지 참을 수 없을 만큼 부끄러워서 허리를 바짝 세웠다. 나를 따라 일어난 정이한은 해사하게 웃고 있었다.
“방해 하나도 안 됐고, 오히려 곤히 자는 하온이의 귀여움에 힘입어 깔끔하게 끝냈지. 들어 볼래?”
상큼하게 돌아온 목소리에 후련함이 함께 느껴졌다. 방해가 안 됐을 리 없는데……. 정말 다 한 건가? 자신만만한 정이한을 보니 사실인 것 같기도 하고. 무엇보다 아까 흥얼거리던 허밍이 너무 좋았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이어서 흘러나온 멜로디는 저절로 박자를 타게 만드는 신나는 곡이었다. 아까 들었던 허밍이랑 완전히 다른데? 아까는 좀 더 포근하고 몽환적인 느낌이었는데. 잠이 솔솔 올 정도로…….
“어때?”
“완전 신나요.”
“그렇지? 잔뜩 신나서 방방 뛰는 것 같지?”
단순하게 반복되는 빠른 비트는 가사를 몰라도 금방 따라서 흥얼거리게 했다. 자칫 단조롭게 들릴 수도 있을 텐데 전자음으로 만든 것 같은 꽹과리와 북소리가 곳곳에 들어가기 때문에 심심한 느낌은 없었다.
우리나라 전통악기와 랩이라니. 서로 어울리지 않는 걸 또 이렇게 기가 막히게 어우러지게 만든 능력이 감탄스럽기만 했다.
“원래 쓰던 곡은 조금 우울한 느낌이었거든.”
아, 그 허밍인가 보다. 나는 내 머릿속에 선명하게 박힌 또 다른 멜로디를 입 밖으로 냈다. 내 짧은 허밍을 들은 정이한이 초승달처럼 예쁘게 눈을 접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그거. 원래 그 곡이었어.”
“그런데 왜 갑자기 바꾼 거예요? 물론 이것도 좋지만.”
“말했잖아. 하온이의 귀여움에 힘입어 마무리했다고.”
……저 소리는 일부러 못 들은 척했는데 또 하네.
“하온이가 아무 이유 없이 나 보러 온 거 처음이잖아. 작업 끝날 때까지 기다려 준다고도 했고, 옆에 얌전히 있다가 내 어깨에 툭 기댄 채 새근새근 자는 걸 보니까 가슴이 두근거리는 거야. 너무 좋아서 어쩔 줄 모르겠는 거지.”
우와……. 부끄럽지도 않나 봐. 어떻게 저런 말을 저렇게 상기된 얼굴로 기쁘다는 듯 말하지. 정말, 미치겠네. 얌전해졌던 심장이 다시 날뛰기 시작했다.
“이 기분을 잊고 싶지 않아서 만든 곡이야.”
“……몇 시간 안 지났는데요?”
“응. 머릿속이 꽉 차서 거의 받아쓰기 느낌으로 했어.”
정이한도 이런 경험은 처음이었다며 배시시 웃음 지었다. 쿵쿵거리는 내 심장 소리가 정이한한테 들릴 것만 같았다.
“그, 그런데 형. 이 곡 너무 좋아서 경연에서 또 이기면 어떡해요?”
신경을 돌리기 위해 아무 화제나 꺼내려고 한 거였지만, 막상 말하고 나니 확실히 걱정되긴 했다. 곡이 좋아서 이길 것 같은데, 그러면 다음 경연도 나가야 한다.
형이 지금 하는 프로그램에서는 총 6명의 랩퍼가 경합을 벌이는데, 상위 3위에 들면 다음 경연에 또 참여하게 되니 이겨도 곤란했다.
최소한 시상식 시즌이 끝날 때까지만이라도 정이한이 쉴 수 있으면 좋겠는데. 그렇지 않으면 도중에 쓰러질 것 같아 걱정된다고.
“왜? 이기면 좋은 거잖아. 나는 다음 경연도 나가고 싶은데?”
“연말 무대 연습도 해야 하는데, 경연 준비까지 하면 쓰러져요.”
“나 운동 빼먹지 않고 해서 체력 좋아졌어.”
나는 고개를 뒤로 물려 눈대중으로 정이한의 몸을 훑었다. 별로 달라진 것 같지 않은데. 처음 봤을 때처럼 마른 몸이었다.
“형 말랐는데요…….”
“나 복근도 있어!”
예고도 없이 정이한의 셔츠가 쑥 올라갔다. 자랑스럽게 내게 배를 내보인 정이한은 당당하기만 했다. 안 보려고 해도, 자꾸 시선을 잡아채서 어쩔 수 없이 볼 수밖에 없었다. 확실히 맵시 있게 갈라진 근육이 뚜렷한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런데 왜 내가 부끄럽냐고. 도대체. 나는 뛰는 가슴을 손으로 누르고 싶은 본능을 억눌렀다. 그리고 최대한 태연한 척하면서 물었다.
“시간도 없었으면서 이런 건 언제 만들었어요?”
“짬 내서 계속 운동했지. 앞으로 더 예쁘게 만들 거야. 최소한 강현이만큼.”
“……강현 형이요?”
확실히 강현 형 근육이 예쁘긴 하지. 보디빌더 같은 울퉁불퉁한 몸매를 꿈꾸는 사람이 아니라면, 누구라도 이상형으로 꼽을 만한 슬림하고 탄탄한 근육이었다.
“하온이 네가 강현이 몸이 멋있다고 했잖아.”
“……제, 가요?”
항상 그렇게 생각하긴 했지만, 입 밖으로 낸 적이 있던가. 최소한 형들한테 고백받은 뒤에는 절대 말한 적 없었던 것 같은데. 도대체 언제?
“기억 안 나?”
“……제가 언제 그랬을까요.”
“예전에 우리 무인도 촬영 갔을 때 하온이가 강현이 유심히 보길래 물어봤었거든. 그때 강현이 근육이 좋댔어.”
그으, 랬던가? 그러고 보니 그랬던 것 같기도 하고? 너무 오래전 일이라 가물가물했다. 무인도에서 등목하겠다고 상의 탈의했던 건 기억 난다. 정이한이 그때 날 보고 감정을 자각했다고 해서 잊으려야 잊을 수가 없었다.
그보다 저런 근육은 하루 이틀 만에 만들 수 있는 게 아닌데. 자의식 과잉일 수도 있겠지만 혹시 나 때문인가? 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어……. 그럼 혹시 그때부터 운동한 거예요?”
“응. 본격적으로 한 건 그 이후부터.”
설마. 설마 아니겠지. 설마…….
“……설마 저한테 잘 보이려고요?”
“그 이유 말고 다른 이유가 있어야 해?”
너무 당연하다는 듯한 대답에 할 말을 잃은 건 내 쪽이었다. 나는 분명 큰 의미 없이 지나가듯 말했을 확률이 높았다. 그런데 그걸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그 이후로 지금까지 쭉 노력했다고? 고작 나한테 잘 보이고 싶어서? 내 마음 하나 얻고 싶어서…….
정이한의 노력만큼 갈라진 근육이 왜인지 무척 멋있어 보였다. 그리고 황당하게도 강현 형보다 더 예쁜 것 같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럴 리 없는데.
“하, 하, 하온아!”
정이한이 내 손목을 덥석 붙잡았다. 빛을 보지 못해 하얀 얼굴이 홍시처럼 익어 있었다. 정이한은 무척 당황해하며 시선을 아래쪽으로 내렸다. 그 시선을 따라가니…….
“헉.”
내 손이 주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정이한의 배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황급히 손을 내 가슴 쪽으로 회수했다. 나는 못된 짓을 한 손의 손목을 꽉 움켜쥔 채 굳어 버렸다.
기묘한 적막이 좁은 작업실 내부에 가득 찼다. 정이한이 침을 꿀꺽 삼키는 게 유달리 선명하게 보일 지경이었다.
“수, 숙소로 돌아갈까요?”
내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외치자 정이한이 어색하게 대꾸하며 따라 일어났다.
“어, 어어. 그러자. 그래…….”
도망치듯 작업실을 나간 건 내 쪽이 먼저였다. 평소에는 여우처럼 굴더니 왜 이번에는 저렇게 뻣뻣한 건데. 차라리 평소처럼 굴었으면 이렇게 어색하진 않을 텐데!
나는 괜히 죄 없는 정이한을 탓하면서 뜨거워서 녹아내릴 것 같은 얼굴을 두 손에 파묻었다. 내가 미쳤지. 미쳤어.
“어? 하온아!”
“아. 유찬 형…….”
“너 얼굴이 왜 그렇게 빨개? 열 있어?”
유찬 형이 내 이마에 손을 얹었다. 차가운 손이 열을 앗아가는 것처럼 시원했다.
“엄청 뜨거운데.”
“열……은 아니고요.”
그때 짐을 챙긴 정이한이 작업실 문을 열고 나왔다. 나만큼이나 새빨간 얼굴이었다.
“아, 유찬 형.”
유찬 형은 나와 정이한을 한 번씩 번갈아 보고는 입술을 일자로 다물었다. 어쩐지 들키면 안 되는 일을 하다가 들킨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머뭇거리기만 할 뿐, 선뜻 말을 건네지 못했다.
“정말 열은 아닌가 보네.”
그렇게 말하는 유찬 형의 목소리가 이상했다. 어, 어떡하지. 아무 일 없었다고 하면 더 이상하지 않나?
아니, 정말 아무 일 없, 지는 않았지. 내가 정이한 배를 만지작거리긴 했는데, 아니. 이게, 그러니까.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서 중구난방으로 생각이 튀었다.
“이한이 작업 끝났어?”
“어, 응. 이제 숙소 가려고.”
“같이 가자. 톡 안 보길래 와본 건데 하온이도 있는 줄 몰랐네. 이렇게 얼굴 보니까 좋다.”
그렇게 말하는 유찬 형은 평소처럼 나긋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