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드모드 아이돌-284화 (284/320)

284.

나는 주인 없는 작업실 의자에 앉아 벽에 기댄 채 생각을 정리했다. 삭막하고 단조롭기 그지없는 메인 미션이 다가올 미래를 암시하는 것 같아서 그저 불길하게만 느껴졌었는데, 다른 쪽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는 걸 이제야 깨달았다.

생각해 보니 이전에도 비슷한 경험이 있었다. 데뷔 쇼케이스 때 돌발 사건이 터진다는 서브 미션이 떴을 때. 그때도 계속 신경 쓰이고 불안했지만, 사건이 터진다는 걸 미리 알고 있었기에 나는 대비할 수 있었고 결국 사고가 터지는 걸 막았다.

이번 메인 미션에는 ‘언제, 무엇이, 어떻게.’가 전부 빠져 있어서 그때의 서브 미션과 다르긴 했지만, 본질은 똑같은 게 아닐까?

내게 경고를 해주려는 의미.

게다가 선택할 수 있다는 건 기회를 준다는 거잖아. 신중히 생각하고 결정할 수 있는 기회를.

그러니 전전긍긍할 필요가 없어 보였다. 내 앞에 어떤 선택지가 놓이더라도 내게 가장 중요한 건 우리 멤버들이었다. 그건 미션이 있든 없든 달라지지 않을 우선순위였다.

뭐야, 그냥 지금처럼 하던 대로 하면 되는 거였잖아?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훨씬 편안해졌다. 이런 단순한 걸 놓치고 있었다니. 허탈함에 헛웃음이 나왔다.

그동안 넘치는 사랑과 애정을 받으며 안온함에 안주하고 있었더니 정신상태가 나약해진 거 아닌가? 그러니 트라우마도 생기고, 지레 겁을 먹어서 정이한의 작업실까지 쪼르르 달려온 거겠지.

스스로를 질책하는 한편으로는, 힘들 때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게 좋았다. 이럴 때마다 내가 혼자가 아니라는 게 절실하게 느껴졌다. 가슴을 가득 채우는 따스함에 가만히 가슴에 손을 얹고 있을 때였다.

“와…….”

난데없는 탄성에 나는 벽에 기대고 있던 허리를 똑바로 세웠다. 정이한이 열린 문 앞에 서서 연신 탄성을 내지르고 있었다. 안 들어오고 뭐 하지. 저 큰 키로 입구를 떡하니 막고 가만히 서 있는 정이한을 의아하게 바라봤다.

“안 들어오고 뭐 해요?”

“아니, 하온이가 내 작업실에서 날 기다리고 있다는 게 새삼 감격스러워서.”

……정말이지. 정이한이 아니면 누구한테 한결같다는 말을 쓸 수 있겠냐고. 나는 내버려 두면 언제까지나 저기 서 있을 것 같은 정이한을 위해 직접 움직였다. 내가 일어서자 가는 줄 알았는지 순간적으로 울상을 지었다.

“가려고?”

대답 없이 정이한에게 손을 내밀었더니 훈련이 잘된 강아지처럼 내 손바닥 위에 제 손을 곧장 착 올려놓는다. 정이한의 손등을 내 손가락으로 덮어 끌어당기자 정이한은 아무런 저항도 없이 내 쪽으로 끌려왔다. 나는 그대로 정이한을 의자에 앉힌 뒤 양어깨를 두 손으로 짚었다.

“작업해요. 전 방해 안 되게 뒤쪽에 앉아 있을게요.”

열려 있는 작업실 문을 닫고 돌아서니 이번엔 정이한이 내게 손짓하고 있었다.

“거기 말고 여기 앉으면 안 돼?”

정이한은 제 옆자리를 가리키며 눈웃음을 지었다. 긴 의자라지만 집중할 때 옆에 사람 있으면 거슬리지 않나. 뒤에 있는 게 방해 안 될 것 같은데.

“그럼 방해되잖아요.”

“하온이가 내 뮤즈라니까. 도움이 되면 됐지 절대 방해는 안 되지. 게다가 마우스는 오른손으로 쓰잖아. 왼손은 거들뿐!”

필사적으로 나를 설득하려는 정이한을 보니 그저 웃음만 나왔다.

“옆에 앉아주라~ 응?”

애교 섞인 목소리로 칭얼거리는 걸 보니 역시 정이한은 여우가 맞아. 저렇게 부탁하면 내가 거절 못 하는 거 알고 일부러 저러는 거겠지? 나는 정이한이 지정해준 자리에 앉으며 팔짱을 꼈다.

“뮤즈라는 거 거짓말이면서.”

“아닌데? 진짜야. 나 하온이한테 거짓말 안 해.”

거짓말한 거 다 들켰는데 안 하기는. 맹랑하게도 시치미 떼는 정이한을 게슴츠레한 눈으로 올려봤다.

“고민 없다면서요.”

앞뒤 싹 자르고 말했는데, 눈치 빠르게도 내가 언제를 말한 건지 알아차린 듯 정이한의 동공이 흔들렸다. 잔뜩 당황해서는 어벙하게 “어? 어어, 어?”하고 되풀이하는 걸 보니 웃음이 터질 것만 같았다. 거짓말을 저렇게 못 하는데 그날은 어떻게 속였대.

“지, 지금은 없지.”

“그날 밤에는요?”

키보드 위에 올라가 있는 정이한의 손가락이 눈에 띄게 흔들렸다. 그대로 굳어 있다가 슬그머니 아래로 떨어졌다.

“미안…….”

눈썹부터 어깨, 허벅지 위로 단정하게 떨어진 손까지 모든 게 처량하기 그지없었다. 저렇게 축 처질 정도로 눈치 줄 생각은 아니었는데. 날 위한 선의의 거짓말이라는 걸 모르는 것도 아니고. 그냥 좀 놀리려던 거였는데 과했네. 미안하게.

“오늘 실장님이랑 면담했거든요. 저 걱정해서 거짓말한 거 알아요. 그래서 사실 화 안 났는데 그냥 장난친 거예요. 미안해요, 형.”

“……화 안 났어?”

“그럼요!”

나는 최대한 밝게 웃으며 정이한을 똑바로 마주 봤다. 처량하게 내려간 정이한의 눈꼬리에 다시 힘이 실리기 시작했다.

“그럼…….”

정이한은 내 눈치를 보며 질문을 꿀떡 삼켰다. 궁금해하는 게 뭔지 뻔히 알기에 편하게 말해도 된다고 했더니, 금이 쩍 갈라진 얼음판 위를 걷는 것처럼 정이한은 무척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건 괜찮아? 상담받을 거야?”

나는 그의 걱정을 덜어주기 위해 가벼운 어조로 말하며 방긋 웃었다.

“제가 뭘 무서워하는지, 왜 그러는지는 알았어요. 아직 상담받을 정도는 아니고요. 이제 이유를 아니까 괜찮아지겠죠. 걱정할 필요 없어요. 심해지면 실장님께 말씀드릴게요.”

“힘들진 않아?”

“별로요. 다 잊은 줄 알았는데 트라우마가 남아 있었다니 좀 화가 나긴 해요. 제대로 싸워서 극복하려고요. 고작 범죄자 때문에 제가 바뀐다는 게 말이 안 되잖아요?”

그저 스쳐 지나간 별거 아닌 에피소드로 만들어야지. 주먹을 불끈 쥐며 의지를 담아 말하자 정이한이 안심한 듯 조금 긴 숨을 내쉬었다.

“나는 하온이 믿어. 강한 아이니까. 그래도 힘들면 내게 의지해줄래? 별로 의지는 안 되겠지만…….”

여전히 자신의 가치를 모르고 있네. 내가 제일 혼란스러울 때 찾아온 사람이 정이한이었다. 미소 하나만으로 내 팽팽해진 신경을 느슨하게 만들 수 있는데.

“저 형한테 의지 많이 해요. 형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도움도 많이 받고 있고요.”

“내가? 내가 뭘?”

“형은 항상 한결같잖아요. 절대 변하지 않을 것처럼.”

아……. 그래서 정이한이 떠오른 거였나. 트라우마도 그렇고, 메인 미션을 보고 혼란에 빠진 건 다시 혼자가 될 수 있다는 두려움에서 비롯된 거였다. 그래서 절대 변하지 않을 것 같은 애정을 내게 퍼부어 준 정이한이 보고 싶었던 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건 강현 형이나 유찬 형도 마찬가지인데. 그런데 왜 유독 정이한에게 그런 생각이 들었던 걸까……. 우리가 헤어지게 된다면 가장 타격을 많이 받을 것 같기 때문이었던 걸까.

“그건 자신 있어.”

정이한의 얼굴에 해바라기 같은 맹목적인 미소가 걸렸다. 내 얼굴을 향해 뻗어오는 손이 뻔히 보이는데, 나는 정이한의 미소에 사로잡힌 것처럼 꼼짝할 수 없었다. 이윽고 내 뺨에 조금 서늘한 손가락이 닿았다.

“나는 죽을 때까지 널 좋아할 거야. 하온아.”

빨려 들어갈 것 같은 눈동자에 갇힌 것만 같았다.

쿵쿵쿵. 쿵쿵쿵.

뭐, 뭔데? 왜 갑자기 심장이 이렇게……. 뭐가 또 무서운 건가? 거칠게 뛰는 심장 때문에 가슴이 뻐근할 지경이었다.

“어, 얼른 작업이나 해요. 끝날 때까지 기다릴 테니까…….”

나는 정이한의 시선을 피해 눈을 내리깔았다. 얼굴이 홧홧했다. 진짜 뭐냐고, 이거.

“응. 나 좀 늦을 것 같은데 피곤하면 도중에 먼저 들어가도 괜찮아.”

정이한의 손이 내 뺨에서 떨어졌다. 그런데도 빠르게 뛰는 심장은 그대로라 이상했다. 이건 전부 메인 미션 탓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알겠다고 대답하려고 했는데 내 입에서 나온 건 정반대의 말이었다.

“……기다릴래요.”

“그럼 최대한 빨리 끝내 볼게. 그래도 피곤하면 꼭 먼저 들어가기다. 연습 힘들 텐데 잠 푹 자야 하잖아.”

나는 대답 대신 고개만 끄덕거렸다. 바로 작업에 들어갈 줄 알았는데 정이한은 미동 없이 가만히 앉아 있었다. 고개를 숙이고 있어서 얼굴을 볼 수 없었던 나는 결국 궁금함에 슬쩍 턱을 들었다.

그러다 나를 지그시 보고 있던 정이한과 눈이 딱 마주쳤다. 눈동자에 별이라도 숨겨 뒀나. 반짝거리는 눈이 참 예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 지금 되게 행복하다?”

“……갑자기 뭔데요.”

“그냥. 하온이가 내 옆에 있어 주기만 하면 항상 행복해. 그리고.”

정이한의 눈웃음이 짙어졌다. 날 보고 웃는 게 의미심장했다. 꼭 나도 모르는 내 모습을 파헤치는 것 같은 웃음이었다.

“음. 아니다. 이건 내 추억으로 남겨 둘래.”

“……뭔데요.”

“비밀.”

활짝 웃어 보인 정이한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작업에 들어갔다. 곧 콧노래와 함께 정이한의 표정이 사라졌다. 나는 진지하게 돌변한 얼굴로 모니터를 보는 정이한의 옆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봤다.

그동안 귀엽게만 보였는데 저러고 있으니까 멋있는 것 같기도 하고. 정이한에게는 또 어떤 얼굴이 있으려나. 내가 모르는 얼굴이 있을지 궁금해졌다.

나는 집중하는 정이한을 위해 말을 걸지 않고, 조용히 옆을 지키고 앉아 있었다. 간간이 들리는 낮은 허밍의 운율이 듣기 좋았다. 진짜 목소리 엄청 좋다니까. 내가 좋아하는 깊게 가라앉은 풍성한 목소리.

여전히 빠르게 뛰는 내 심장 박동과 묘하게 어우러지는 느낌이었다. 그래서인지 엄청 포근하고, 편안했다. 신기하네. 심장이 이렇게 뛰는데 편안하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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