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2.
오늘은 실장님과 면담이 있었다. 갑자기 나를 호출하셔서 영문도 모른 채 생긴 일정이었다. 내가 뭘 잘못했나 곰곰이 생각해 봤지만, 딱히 마음에 걸리는 건 없어서 편안한 마음으로 실장님을 뵙기로 했다.
매니저 형도 같이 갈 줄 알았는데, 서류 처리할 일이 있다고 사무실이 있는 층에서 내려버렸다. 이상하네. 보통 같이 들어가는데.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실장실 문을 두들겼다. 실장님은 나를 기다리고 있었는지 손수 문을 열어주셨다.
“실장님!”
“어서 와. 컨디션은 어때?”
“아주 좋아요!”
실장님은 살갑게 웃으며 나를 안으로 이끌었다. 책상이 아닌 소파 상석에 앉으시길래 나는 실장님의 대각선 자리에 앉으며 생글거렸다.
“요즘 힘든 건 없고?”
“네. 없어요.”
머리 아팠던 가족 일도 해결됐고, 교주 일이 좀 남긴 했지만 걱정스러운 일은 아니니까. 아무런 고민 없이 내 일에 집중하며 지내고 있었다.
“내일부터 연말 특별 무대 연습하는 거지?”
“맞아요. 저 다른 그룹 멤버들이랑 하는 건 처음이라 좀 긴장되긴 해요. 특히 스칼렛 선배님들…….”
나는 두 손에 얼굴을 묻으며 앓는 소리를 냈다. 나 혼자만 스칼렛 선배님들과 함께 무대에 오르게 됐다. 도대체 왜 나 혼자만……. 뭘 할지 감이 오는 게 더 슬펐다.
“아하하. 이번 광고 때문에 예전 영상이 다시 이슈 돼서 그래.”
그래. 그게 문제다. 광고 조회수가 폭발적으로 올라가고 있다는 건 나도 들었다. 뭔가 얼떨떨하기도 하고, 영상 속 날 보는 게 낯부끄러워 들어가 보진 않았지만. 무대 영상은 분석할 목적으로 보니까 괜찮은데 광고는 처음이라 그런지 느낌이 다르더라…….
“음. 하온이를 부른 건 다른 게 아니라.”
“네!”
실장님 앞에서 우는소리 했다는 자각이 뒤늦게 들어서 힘차게 대답했다.
“멤버들이 널 걱정하더라고.”
“……네? 저를요? 왜……요?”
내가 걱정 끼칠 일을 했던가? 딱히 없었던 것 같은데.
“그래서 아는 지인한테 내가 먼저 조언을 구해 봤는데, 자각이 없다고 증상이 없는 건 아니니 본인이 인지하고 괜찮다는 걸 이해하면 나아질 거래. 아니면 더 심해질 수 있다고 하더라고.”
무슨 소리를 하시는 건지 감이 오질 않았다. 영문을 알 수 없는 소리에 갸웃거리자 실장님은 굳은 표정을 하고 날 진지하게 보셨다.
“하온아, 낯선 사람이 많이 무섭니?”
“……아?”
낯선 사람……. 그러고 보니 무서워하긴 했는데. 그게 왜 문제가 되는 거지?
“언제부터 무서웠어?”
“원래부터 어려워하긴 했는데요.”
지금처럼 무서웠던 건 아닌 것 같은데. 내가 언제부터 이랬지? 기억을 더듬어보던 나는 그 분기점에 도달해 버리고 말았다. 그 순간 손끝부터 열이 사라지며 몸이 가늘게 떨렸다.
어, 어라?
갑자기 손등에 따듯한 온기가 느껴졌다. 화들짝 놀라 고개를 숙여 보니 실장님이 내 손등에 손을 얹고 있었다. 힘이 잔뜩 들어가 마디가 새하얘진 내 손이 바지를 움켜잡고 있었다. 내가 온몸에 힘을 주고 있다는 것도 지금 알아차렸다. 나는 의식적으로 몸에서 힘을 빼며 물었다.
“……저도 몰랐는데 형들은 어떻게 알았대요?”
실장님은 며칠 전, 내가 가족에게 다녀온 날 이서호가 비밀번호를 잘못 눌렀던 순간을 언급했다. 그러고 보니 그때 확실히, 문 너머에 있는 정체불명의 사람이 무서워서 겁에 질렸던 기억이 났다.
“그러고 보니 그랬었네요.”
“이전에도 몇 번 그랬다더라고. 그런데 이번에 확신했다고 하더라.”
대번에 실장님의 얼굴에 걱정의 빛이 스몄다. 별일 아니라고 생각했고, 잊어버린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보다.
스토커에게 끌려가 창고에 갇혔을 때, 나는 두 번 다시 멤버들을 볼 수 없게 될까 봐 두려웠다. 그때 느낀 두려움이 아직도 남아 있었던 걸까. 타인으로 인해 멤버들과 헤어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멤버들이 상담해 왔어.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다고. 괜히 말했다가 괴로웠던 기억을 다시 떠올리게 해도 괜찮은지 판단이 안 서더래.”
“아.”
가만. 그러고 보니 그날 새벽에 정이한이 날 보고 있었는데? 갑자기 퍼즐이 짜 맞춰졌다. 역시 고민 있던 거 맞았네. 내가 뮤즈니, 뭐니 하더니 순 거짓말이었잖아. 나는 철석같이 믿어서 부끄러운 것도 꾹 참고 얼굴 보여줬는데!
그날 밤을 떠올리자 동시에 정이한이 키스를 언급했던 것도 함께 수면 위로 떠올랐다. 지금 당장 이불을 뒤집어쓰고 빵빵 차고 싶은 마음이 득실거렸다. 정이한이 말 안 했으면 내가 그런 자세 했다는 걸 몰랐을 텐데……. 제, 제길.
“상담받아 볼래?”
실장님의 목소리에 그날 밤으로 날아가 있던 내 정신이 현실로 훅 돌아왔다. 나는 부끄러웠던 기억을 어떻게든 밑으로 내려보내며 고개 저었다.
“아니요. 그렇게까지 심각한 건 아닌 것 같아요.”
경기를 일으키는 것도 아니고, 그냥 그 순간 좀 무서워하는 게 전부잖아. 멤버들과 헤어질 일이 없을 거라는 확신이 들면 괜찮아지겠지.
“본인이 두려워하는 걸 인지하고, 마주 봐야만 트라우마를 극복할 수 있대. 동반자로 받아들이고 두려움을 안고 가거나, 그 상황이 되풀이되지 않을 거라는 확신을 갖고 두려움을 떨치거나.”
“시간이 해결해 줄 것 같기는 해요. 제가 뭘 두려워하는지는 제가 잘 알거든요.”
“그게 뭔지 물어도 될까?”
실장님은 무척 조심스럽게 질문했다.
“그때 제일 무서웠던 건 이대로 영영 형들을 못 보게 될지도 모른다는 거였거든요. 아마 그래서 그런 것 같아요. 타인이 저와 멤버들을 갈라놓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들면 괜찮아지겠죠.”
실장님의 걱정을 덜어드리기 위해 내가 내린 결론을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내 이야기를 진지하게 들어주신 실장님은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말씀하셨다.
“하온이 생각은 잘 알았어. 하지만 마음이 괴로워서 누군가에게 의지하고 싶어진다면 꼭 말해줘. 부담 갖지 말고.”
부담 갖지 말라고 해도 나는 내 고민을 남에게 제대로 털어놓지 못한다. 내 문제는 언제나 나만의 문제였고, 그걸 해결할 수 있는 것도 나밖에 없었으니까.
멤버들이라면 모를까. 처음 만나는 정신과 의사에게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없다. 그러면 시간 낭비지. 하지만 나는 이런 마음은 숨긴 채 그럴싸한 미소를 만들어 보였다.
“그럼요. 심해지면 꼭 말씀드릴게요.”
“그래. 믿고 있어도 되지?”
“네. 전 극복할 거거든요.”
그동안 몰랐으니 내버려 둔 것뿐이다. 이제 알았으니까 내 두려움과 싸워야지. 그런 범죄자가 나한테 조금이라도 흔적을 남긴다는 것 자체가 마음에 안 들었다. 내 머릿속에서 싹 몰아내 주고 깨끗하게 잊어주겠어.
***
실장님과 면담을 마친 뒤 나는 내 마지막 개인 스케줄을 소화했다. 광고 때문에 들어온 토크쇼였다. 촬영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지만 계속 내 외모 칭찬을 하는 바람에 나는 얼굴의 불을 끌 수 없었다. 우씨…….
다들 내가 부끄러워하는 걸 알고 더 하더라. 진짜 귀신 같은 사람들. 어쨌든 내 마지막 스케줄이 끝났다. 이제 시상식이 끝날 때까지는 특별 무대 연습만 하면 된다. 다만 그 무대가 한두 개가 아니라는 게 문제지.
방송사마다 최소 두 개 이상의 무대를 준비해야 했다. 하지만 방송 시기는 며칠 차이가 나지 않으니 동시에 준비해야 하는 무대가……. 나는 손가락으로 하나하나 꼽아 보다가 질려서 손을 내렸다. 이런 걸 하나하나 생각하면 연습이 힘들어질 거다.
그냥 매 순간을 즐기자. 내가 좋아하는 무대에 많이 오를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하라고. 배가 불렀어. 진하온.
“숙소로 갈 거지?”
매니저 형이 차에 시동을 걸며 물었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
“네. 내일 일찍 이동해야 하니까 오늘은 쉴래요.”
“그럼 바로 숙소로 갈게.”
“네!”
차는 매끄럽게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창문에 팔꿈치를 괸 채 창밖에 시선을 뒀다. 바람이 크게 불자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있던 나뭇잎이 우수수 떨어졌다. 이리저리 휘청거리며 떨어지는 잎이 왜 갑자기 눈에 들어오는지 모를 일이다.
마침 신호에 걸린 듯 차가 멈춰 섰다. 바람이 불 때마다 쓸려 다니는 낙엽은 지나다니는 사람들에게 밟혀 짓이겨졌다. 가로수의 잎들이 추락하는 걸 지그시 응시하던 나는 주머니에 넣어둔 휴대폰이 울리자, 그제야 창밖에서 시선을 거뒀다.
교주의 연락을 기다리고 있었던 참이라 곧장 휴대폰을 확인했다. 모르는 번호인데. 사생……은 아닌 것 같고. 짤막하게 보이는 내용이 사생과는 거리가 있어 보여 전문을 확인했다.
[그때 일은 미안했다. 사과하고 싶으니까 만나자. 언제 시간 돼?]
……뭐지? 이렇게 보내면 내가 누군지 어떻게 알아? 급격히 관심이 식어 심드렁한 눈으로 휴대폰을 들여다봤다. 상대가 자신이 누군지 확신하는 어투인 걸 보니 잘못 보낸 것 같네. 그렇게 생각하고 넘기려던 때, 내 머릿속에 갑자기 한 인물이 또렷하게 떠올랐다.
설마 이거 소파남인가?
아닐지도 모르지만, 맞다면 내 번호는 어떻게 알았지? 일단 이걸 보낸 사람이 소파남이 맞는지부터 확인해 봐야 할 것 같기는 한데. 나는 휴대폰 액정을 검지로 톡톡 두들기며 답장을 보낼지, 차단할지 고민했다.
[아, 혹시 몰라서 덧붙이는데 나 김호채야.]
차단해야겠다. 소파남은 무조건 차단이지. 정말 끝까지 질척거리는 인간이네. 차단 버튼을 누르려고 했는데 소파남이 무슨 짓을 할지 모르니 조심하라고 했던 교주의 경고가 머릿속에 윙윙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