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드모드 아이돌-240화 (240/320)

240.

박유찬은 답답한 마음으로 정이한을 보고 있었다. 할 말이 있다고 모은 장본인이 연달아 한숨만 쉴 뿐, 아무 말도 안 하고 있으니 점점 답답함이 가중되었다.

하지만 직감적으로 오늘 있었던 일을 말하려는 걸 알기에, 채근하지 않고 정이한이 말해 줄 준비가 될 때까지 묵묵하게 기다리고만 있었다. 진하온과 무슨 일이 있었길래 둘이 눈만 마주치면 서로 얼굴을 붉히며 시선을 피하는지. 솔직한 심정으로는 궁금해 미칠 것 같았다.

“……잠결에.”

오랜 기다림 끝에 드디어 정이한이 입을 열었다. 박유찬은 곧바로 그에게 집중하며 “응.”하고 대답했다.

“내가 하온이를 추행했어…….”

“……무, 뭐?”

예상치 못한 ‘추행’이라는 단어에 박유찬은 순간 잘못 들은 줄 알았다. 하지만 이내 자신이 제대로 들었다는 걸 깨달음이 들자, 곧 머리가 띵해질 정도의 충격이 엄습했다.

“아, 아니. 잠깐. 어쩌다가?”

눈썹 끝이 축 처진 정이한은 무척 시무룩해 보였다.

“꿈이랑 착각해서…… 내가 하온이를 만졌어.”

“어디를?”

“허리…….”

“그리고 또?”

심각하게 묻는 박유찬에게 돌아온 건 “또라니?”하고 되묻는 순박한 질문이었다.

“……그게 다야? 허리 만진 거?”

대수롭지 않은 듯한 반응에 정이한의 목소리에는 억울함이 담겨 있었다.

“셔츠 안으로 손 넣었단 말이야!”

박유찬은 오히려 헛웃음을 흘렸다. 추행이라는 말에 정말 말 그대로 진하온을 덮친 줄 알았었다. 그런데 고작 허리 좀 만진 걸로 이 난리를 피우다니. 상상했던 최악의 사태가 아니라 그런지 상대적으로 별거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둘 다 순진하네.’

박유찬은 피식거리며 웃음소리를 흘렸다.

“그래서 하온이가 도망친 거야?”

“……아니. 내가 꿈인 줄 알았다고 빌었지. 그랬더니 괜찮다고 했는데 그, 알잖아. 아침에…… 생리현상…….”

정이한은 두 손으로 머리카락을 쥐어뜯을 듯 움켜쥐며 엎드렸다.

“……그걸 가렸는데 오해한 것 같아.”

“푸하학! 야한 꿈 꿨다고?”

“웃지 마! 나 심각하단 말이야. 아씨, 왜 그때 가려서……!”

“진짜 야한 꿈 꾼 건 아니고?”

눈매를 샐쭉하게 접은 채 짓궂게 구는 박유찬을 향해 정이한은 억울함을 가득 담아 외쳤다.

“아니야! 진짜 아니야. 그냥, 하. 처음엔 고양이 안고 있는 꿈이었어. 그래서 쓰다듬고 있었을 뿐이라고! 어쩐지 고양이가 하온이를 닮았더라니……!”

절규하는 정이한은 정말 심각해 보였다. 그래서 박유찬도 차마 바로 앞에서 웃고 싶진 않았지만 정이한의 말을 들을수록 새어 나오는 웃음을 막을 수 없었다.

“푸흫, 흡, 흠, 으흑, 흨.”

“아, 유찬 형…….”

“미안, 미안. 진짜 미이히힉, 흐으, 흑.”

흐느껴 웃는 박유찬을 노려보던 정이한의 눈썹이 축 처졌다.

“하온이가 나를 변태처럼 볼 거 아니냐고…….”

온몸의 기운이 빠진 듯 중얼거리는 목소리에 힘이 하나도 없었다.

“으하학!”

결국 터져 버린 박유찬의 웃음소리가 높아졌다. 정이한은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박유찬을 보다가 도움을 구하듯 백강현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고개를 돌리고 있는 백강현도 웃음을 참으려는 듯이 가느다랗게 어깨를 떨고 있었다.

“……강현이 너마저.”

정이한은 밀려오는 배신감에 고개를 늘어뜨렸다. 진짜 이 오해를 어떻게 풀지. 괜히 언급했다가는 또 하온이가 도망 다닐 것 같은데. 그렇다고 오해하게끔 내버려 두자니, 계속 하온이를 상대로 야한 꾼 꿈 사람이 되어 버리고.

이도 저도 못 하는 상황에 정이한은 다시금 제 머리를 쥐어뜯으며 바닥에 엎드렸다.

“후우, 흠흠. 일단 이한아.”

그때 단비처럼 다가오는 박유찬의 목소리에 정이한이 고개를 들었다. 이제 다 웃었는지, 여느 때와 같은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고 있는 리더가 그 자리에 있었다.

“마음에 걸리면 하온이한테 사실대로 말해. 하온이 성격 알잖아. 오해 풀리면 그 뒤에는 신경 안 쓸걸?”

“……그럴까?”

정이한은 동의를 구하듯 백강현을 바라봤다. 고개를 끄덕이며 신호를 주는 걸 보고서는 자신감을 얻고 허리를 세웠다.

“그럼 지금 말하는 게 좋겠지?”

“타이밍 놓치면 말 꺼내는 것 자체가 어려워질 테니까?”

“좋아. 지금 말할게.”

“어어. 파이팅!”

박유찬이 주먹을 움켜쥐며 손을 들었다. 정이한은 박유찬의 주먹에 제 주먹을 맞댄 뒤 씩씩하게 일어났다. 정이한이 방을 나서기 무섭게 박유찬은 침대에 엎드려 숨죽여 웃었다.

“어쩐, 지힉, 고양이가, 하, 하온이를, 닮았, 크흑, 흑윽, 윽.”

“형, 그만 웃어. 나도 웃기니까.”

***

심각한 얼굴로 형들 방에서 나온 정이한이 나를 따로 불러냈다. 방에서 다들 무슨 이야기를 나눴던 건지 신경 쓰고 있던 참이라 나는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정이한과 함께 방으로 들어갔다.

“……그래서 그런 거야. 고양이 꿈이었어. 진짜. 이상한 꿈 꾼 거 아니야…….”

“아.”

그래서 그렇게 끌어안고 쓰다듬어댄 거였나. 아니, 왜 하필 그 타이밍에 거길 가려서 사람을 오해하게 만들어. 민망해하는 정이한 만큼이나 나도 부끄러워져서 헛기침했다.

“오해 풀렸어……?”

“네. 풀렸어요.”

정이한은 길고 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형.”

“응응.”

“형들이랑은 방에서 무슨 얘기 한 거예요? 꽤 오랫동안 안 나오던데…….”

“아.”

정이한의 뺨이 다시 붉어졌다.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리면서 “형들한테 상담……했어. 이거 말 꺼내기 어려워서.”라고 말하는 정이한은 심히 귀여웠다.

“그냥 말하면 되는데 뭘 그렇게까지 고민했어요.”

“그게 어려워.”

정이한은 나를 똑바로 보며 웃음 지었다.

“하온이를 좋아하니까. 혹시나 내가 말을 잘못해서 나를 싫어하게 될까 봐 조심스러워져.”

아니, 이런 부끄러운 말은 잘도 하면서!

“아, 안 싫어하거든요?”

지금의 나는 철면피처럼 행동할 수 없었다. 부끄러워 쏘아붙이듯 대꾸한 말에도 정이한은 헤실헤실 웃으면서 미소를 지어줬다. 내가 그렇게 좋은가. 맹목적으로 날 좋아해 주는 정이한이 신기하기도 하고, 또 한 편으로는 두렵기도 했다.

모든 감정에는 끝이 있는 거잖아. 정이한이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을 좋아하게 된다면, 그러면 그때 나는.

누군가를 향해 다정하게 웃어주는 정이한을 떠올리자 속이 꽉 막힌 것 같은 답답함이 찾아왔다. 그 순간, 나도 예상하지 못한 질문이 툭 튀어 나갔다.

“형은 언제까지 날 좋아할 것 같아요?”

“평생.”

시험하는 듯한 질문을 하고 당황한 나와 달리 정이한의 대답은 확신이 가득했다. 그 말을 듣고 나니 그럴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괜히 기분이 좋아졌다.

“그걸 어떻게 장담해요. 나중에 다른 사람을 좋아하게 될 수도 있는데. 만약 그러면 꼭 저한테 말해줘야 해요.”

“너 아닌 사람은 눈에도 안 들어오는데?”

“형이 저한테 실망할 수도 있잖아요. 제 대답을 기다리다가 지칠 수도 있는 거고.”

아니면 시간이 흐르면서 나를 좋아하는 감정이 자연스럽게 소멸될 수도 있지. 연소할 게 사라지면 흩어지는 불처럼. 영원히 타오르는 불씨는 없다. 설령 그런 경우가 있다고 해도 그게 나는 아니다. 나는 누군가에게 오랫동안 사랑받을 만한 사람은 아니니까.

그래서 나에겐 지금이 소중했다. 어쩌면, 형 중 그 누구도 선택하지 못하는 건 지금 이 상태가 좋아서, 형들과의 관계를 깨고 싶지 않아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불쑥 들었다. 나 욕심쟁이네.

“글쎄. 그럴 수도 있겠지. 그런데 너 말고 다른 사람을 좋아하는 나는 상상이 안 돼.”

정이한은 곰곰이 생각하다가 싱그럽게 웃으며 말했다.

“나한테 하온이는 습관 같은 거야.”

“……습관이요?”

“응. 그것도 무척 고치기 어렵고, 고치고 싶지도 않은 습관이야.”

“…….”

“그러니까 하온이는 마음 놓고, 하고 싶은 대로 하면 돼. 나는 항상 네 편이야. 이게 내가 널 사랑하는 방식이야.”

“그, 그렇게 진지하게 대답해 줄 필요는 없었는데…….”

얼굴에 열이 몰려와서 고개를 돌리며 회피하듯 말했다. 정이한이 내 손가락을 더듬거리다가 손을 얽혀왔다. 정이한의 열기가 전염이라도 된 것처럼 잡힌 손이 뜨거웠다.

“좋아해, 하온아. 한 번 굳어지면 평생 가는 습관처럼, 나는 널 좋아할 거야.”

가슴 안쪽의 어딘가가 울렁거리는 것 같았다. 손댈 수 없는 부위가 간지러워서 괜히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지금 내가 느끼는 기분을 정이한에게 설명해주고 싶은데, 이걸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

“미안해요.”

“나 또 차인 거야?”

정이한이 장난기를 섞으며 울먹거렸다. 그 모습에 나는 미소와 함께 고개를 흔들었다.

“형의 마음은 전해졌어요. 그런데 제가 말주변이 없어서 이럴 때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그게 미안해서요.”

“에이, 이럴 땐 말이야.”

정이한이 내게 속닥거렸다. 나는 정이한이 원하는 대로 환하게 웃으며 “고마워요, 형.”하고 말했다. 그러자 내게 무척 기뻐 보이는 맑은 미소가 돌아왔다.

타이밍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 그때 어디선가 진동음이 들렸다. 정이한이 내 손을 놓아줬다. 열기가 떠나간 체온에 조금 허전함을 느끼며 나는 곧바로 휴대폰을 찾아 발신자를 확인했다. 이름이 저장되어 있지 않은 번호였다.

아, 상자남인가 보다.

“누구야?”

“그, 박현…….”

“철?”

“네, 그분일 것 같아요.”

내가 말하기도 전에 정이한이 벌떡 일어나 먼저 문을 열었다. 정이한은 빠른 걸음으로 거실을 가로질렀다.

“서호야. 박현철 씨 전화 왔어. 게임 끄자.”

“어? 진짜?”

이서호가 고개를 빼 들었다. 내가 휴대폰을 흔들며 소파에 앉는 순간, 형들이 방에서 나왔다.

“스피커로 받을게요.”

“응.”

거실 테이블에 휴대폰을 올려 둔 채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 안녕하세요. 박현철입니다.“

“네, 안녕하세요. 그런데 지금 스피커 폰으로 받고 있거든요. 형들도 같이요. 괜찮으세요?”

- 그럼요. 괜찮죠. 어차피 멤버분들이랑 같이 오실 거잖아요. 저야 약속 날짜 확실하게 잡히면 좋죠.

우리의 약속은 이번 주말로 잡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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