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9.
정이한은 엎어진 내 등에 팔을 둘러 꽉 끌어당겼다. 이런 잠버릇은 처음인데? 깬 거 아니야? 나는 고개를 빼꼼 들어 정이한의 얼굴을 들여다봤다. 닫힌 눈꺼풀 안에서 눈동자가 이리저리 움직이는 게 보였다.
……진짜 자는 건가? 이러고 있다가 깨면 놀라겠는데? 장난기가 동한 나는 짓궂은 미소를 띤 채 정이한의 가슴팍을 토닥토닥 두들겼다.
“이한 형.”
“으응. 하온아…….”
정이한은 내 이름을 한 번 더 중얼거렸다. 그런데 내 등에 올라가 있던 손이 슬금슬금 등을 훑고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등줄기를 따라 미끄러지며 떨어지는 감각에 깜짝 놀라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그러자 정이한은 더 강한 힘으로 다시 나를 제 가슴팍 쪽으로 끌어당겼다. 등 뒤에서 정이한의 팔이 교차했다. 그 탓에 정이한과 완전히 밀착되어 꼼짝달싹할 수 없게 되었다.
뭐, 뭐야? 당혹감에 입을 뻐끔거리고 있을 때였다. 허리춤까지 내려간 손이 서서히 내 셔츠를 밀어 올렸다. 피부에 직접적으로 느껴지는 다른 사람의 체온에 등줄기가 오싹했다. 불쾌함과도 다르고, 간지러운 것도 아닌 묘하게 두피가 삐죽 솟을 것 같은 소름이었다.
“이, 이, 이한 형!”
정이한의 가슴을 내리치며 큰 목소리를 냈다. 힘 조절을 잘못했는지 퍽! 하는 소리가 꽤 크게 들렸다.
“억! 아파…….”
인상을 찌푸린 정이한의 눈꺼풀이 들려 올라갔다. 초점이 없는 흐릿한 동공에 내 얼굴이 비쳤다. 깜박깜박. 나를 보고 눈을 깜박거리는 속도가 점점 빨라졌다. 그러다 마지막에는 제 눈을 크게 홉 뜬 채 속눈썹을 파르르 떨었다.
“하, 하, 하온이?”
“형, 일단 팔 좀 풀어봐요.”
“방금 꾸, 꿈, 꿈 아니었어?”
“……아니에요.”
“억! 미, 미미, 미안, 미안해!”
정이한이 허둥지둥 날 풀어준 뒤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내가 밀려 올라간 셔츠를 정돈하며 일어나자 그걸 본 정이한의 얼굴이 핼쑥해졌다. 그러더니 대뜸 납작 엎드려서 연신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저렇게까지 미안해하니까 화낼 마음도 안 든다. 애초에 잠결에 그런 거니 딱히 화가 나지도 않았고. 나도 형을 빨리 깨우기는커녕 놀리려고 했으니 화낼 자격은 없었다.
“좀 놀라긴 했지만 괜찮아요. 그보다 무슨 꿈을 꿨길래 그렇게 막 더듬었어요?”
침대에 걸터앉으며 묻자, 정이한은 민망한 듯 웃으며 시트를 스륵 끌어와 하체를 가렸다. 아, 알아버렸어! 괜히 물어봤잖아. 나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문 쪽으로 시선을 돌린 채 떠듬거리며 말했다.
“아, 아니. 아니에요. 대답 안 해도 되니까 밥 먹어요. 밥 먹이려고 깨우려던 거니까.”
“어어. 금방 씻고 갈게…….”
나는 도망치듯 방을 나섰다. 문이 닫히기 직전 정이한의 앓는 소리가 내 귀에 선명하게 들어와 박혔다.
“이한이 일어났어? 큰소리 나던데.”
유찬 형이 날 향해 고개를 빼꼼 내밀며 물었다.
“아, 네. 일어났…….”
“어? 하온이 왜 그렇게 빨개?”
유찬 형이 얼굴을 굳힌 채 내게 성큼성큼 걸어왔다. 그리고 내 뺨에 손을 올려본 뒤에는 더 심각한 얼굴이 되었다.
“열나는 것 같은데? 병원 갈까? 너 한번 아프면 심하게 앓잖아.”
“하온이 아파?”
식사 준비를 끝낸 강현 형도 주방 수건으로 젖은 손을 닦으며 나왔다.
“열……은 아니고. 그냥. 좀.”
“아니긴 뭐가 아니야. 뜨거운데.”
아, 진짜 아닌데. 자꾸 조금 전 일이 떠오르자 얼굴에 다시 열이 몰렸다. 나는 손부채질을 하며 “더워서 그래요…….”하고 대답했다.
“이 계절에 더위는 무슨. 그게 열나는 거야. 일단 병원부터 가자.”
유찬 형은 금방이라도 매니저 형한테 전화를 걸 것 같았다. 나는 유찬 형의 팔을 꼭 잡은 채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니, 진짜. 열나는 거 아니라…….”
그때 정이한이 주섬주섬 방에서 나왔다. 그러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숨을 들이켠 뒤 그 자리에 멈춰 섰다. 그런 정이한의 얼굴도 활화산처럼 붉게 물들어 터지기 직전이었다.
내가 어색하게 굴며 고개를 돌리자 등 뒤에서 후다닥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욕실 문 닫히는 소리가 들린 뒤에야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무슨 일 있었어?”
문제는 우리의 태도 때문에 유찬 형이 뭔가 이상하다는 걸 알아차린 거였다. 이건 또 뭐라고 해야 하지…….
“그, 이한 형 깨우러 갔는데 형이, 어, 음.”
“뭔데. 무슨 일인데. 제대로 말해 봐.”
유찬 형은 아예 팔짱을 낀 채 나를 다그쳤다.
“조금, 사고가…….”
“무슨 사고?”
아니, 이걸 내 입으로 어떻게 말해. 나는 입을 꾹 다문 채 모르는 척해달라는 필사적인 눈빛을 보냈다.
날 지그시 보던 유찬 형은 “별일 아니었어?”하고 확인하듯 물었다. 열심히 고개를 끄덕거렸더니 형은 한숨을 한 번 내쉰 뒤 식탁으로 방향을 돌렸다.
그런 형의 표정이 좀 안 좋아 보였다. 어쩐지 좀 미안하기도 하고, 신경이 쓰여서 유찬 형의 뒤를 쫄래쫄래 따라다녔다.
내가 따라다니는 걸 눈치챘는지 형은 뒤를 힐끔 보고는 방향을 틀어 거실 쪽으로 갔다. 나도 형을 따라 방향을 틀자마자 갑자기 유찬 형이 그 자리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형의 뒤에 바짝 붙어 따라다니던 나는 결국 제때 멈추지 못해 등에 얼굴을 박았다.
“억!”
“……너는 진짜.”
유찬 형이 고개를 숙인 채 어깨를 들썩거렸다. 웃는 건가……? 형의 어깨 너머로 머리를 기울여 얼굴을 훔쳐보자 주먹으로 입술을 가린 채 숨죽여 웃던 유찬 형과 눈이 마주쳤다.
“흠, 크흠.”
웃음을 참으려는 듯 입술을 꾹 다물고 있던 형의 입술이 바르르 떨렸다.
“으하하!”
웃음을 참는 데 실패했는지 형은 결국 큰 소리로 웃으며 내 목에 팔을 두르고 나를 끌어당겼다. 상체가 앞으로 기울어져 형의 가슴에 내 뺨이 닿았다. 꽉 끌어안긴 탓에 뺨이 짓눌리는 와중 유찬 형이 내 머리를 잔뜩 헝클어트렸다.
“아우, 진짜 하는 짓마다 왜 그렇게 예쁘냐. 우리 하온이는. 응?”
어쨌든 기분이 풀린 것 같아서 다행이다. 나는 형을 향해 방긋거렸다.
***
“……온, 야! 진하온!”
멍하니 생각에 잠겨 있다가 날 부르는 목소리에 퍼뜩 정신이 돌아왔다.
“어?”
“아, 뭐해! 너 때문에 죽었잖아!”
이서호와 함께 협동 게임을 하다 넋을 놓는 바람에 우리는 어느샌가 태초 마을로 돌아와 있었다. 나는 게임 패드를 다리 위에 내려놓으며 굳게 닫힌 형들의 방을 응시했다.
“아오! 또 언제 거기까지 가냐…….”
이서호가 열정적으로 게임 패드를 누르는 소리가 들렸다. 힐끔, 시선을 돌렸더니 이서호는 자신이 게임 패드와 연결이라도 된 것처럼 온몸을 움직이고 있었다.
“진하온 안 와?”
내 캐릭터가 움직이지 않아서인지 이서호가 내 팔을 건드리며 물었다. 나는 게임 패드를 만지작거리며 대답했다.
“집중이 안 돼.”
“형들 때문에?”
“……응.”
이서호는 게임 패드를 내려놓고 내 쪽으로 몸을 돌려 고쳐 앉았다.
“야, 진하온.”
“응.”
“나는 이런 어려운 건 잘 모르겠는데, 딱 하나는 알거든.”
멋쩍은 듯하지만, 꽤 진지하게 느껴지는 어조에 이서호를 볼 수밖에 없었다.
“내가 멤버들을 진짜 잘 만난 축복받은 사람이라는 거.”
그건 나도 동의하지만, 지금 상황을 보면 아닌 것 같기도 하고…….
“그룹 내 치정사건이 벌어졌는데도?”
“푸하학! 야, 그렇게 말하니까 진짜 무슨 드라마에 나와야 할 것 같잖냐.”
드라마 소재로도 못 써먹을 이야기 아닌가. 나는 코끝을 찡그리며 한숨 쉬었다. 이건 전부 내 탓이다. 정이한이 식탁에 앉자마자 내가 또 티 나게 고장이 나는 버리는 바람에 지금 이렇게 된 것이다.
“……점심 먹을 때 형들 많이 이상했어?”
나는 정이한을 마주보기 민망해서 접시만 노려본 채 허겁지겁 먹고 도망치듯 일어나버렸다. 그래서 이서호가 게임 하자고 날 끌어낸 뒤에야 형들이 전부 방에 들어갔다는 걸 알았다.
“몰라. 김치볶음밥 맛있었다는 것밖에는. 그보다 내 말 안 끝났거든?”
“아, 으응. 말해.”
“난 형들 믿어. 넌 아니야?”
“당연히 믿지.”
“그럼 뭐 걱정할 거 없잖아.”
이서호는 입꼬리를 끌어 올려 태평하게 웃었다. 걱정 따위 하나도 없어 보이는 듯한 웃음을 보고 있자니, 황당하게도 더 이상 걱정하지 않아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점 거짓 없이 투명하고 깨끗한 감정을 드러내서 그런 걸까. 이서호는 사람을 편안하게 해주는 재주가 있었다.
“왜 사람들이 다 형을 좋아하는지 알겠어.”
“……어, 다 그런 건 아닐걸.”
이서호가 눈 밑을 긁적이며 웃었다. 그 미소는 조금 전과 달리 조금 씁쓸해 보였다. 이건 이서호답지 않은 대답인데. 당연하지 않냐며 신나게 웃어젖혀야 하는 타이밍이잖아?
“무슨 일 있었어?”
“나? 나한테 뭔 일이 있겠냐.”
이서호는 손을 휘휘 저으며 키득거렸다. 그러더니 내 허벅지 위에 올려둔 게임 패드를 들어 강제로 내 손에 쥐여줬다.
“게임이나 마저 하자! 나 이거 꼭 깨고 싶단 말이야!”
그러면서 이번에는 멍때리지 말라는 경고와 함께 장난스레 으름장을 놓았다.
“말 돌리지 말고.”
“……아오, 안 넘어오네. 사실은 있잖아.”
“응.”
나는 자세를 고쳐 앉으며 진지한 얼굴로 이서호를 마주 봤다. 이서호는 입술을 삐죽 내민 채 오물거리다가 헤실헤실 웃음을 터트렸다.
“아, 진짜 별거 아닌데.”
“뭔데 그래.”
“너 인페르노라는 게임 알아?”
게임 이름을 듣는 순간, 일시적으로 숨이 콱 막혔다. 내가 죽기 직전 공략했던 게임이 인페르노였다. 동명의 게임? 아니면…….
“알아? 몰라?”
“……몰라.”
“그거 지옥에서 도깨비나 귀신들 레이드하는 게임이거덩? 근데 나 어제 파티 들어갔다가 욕 오지게 먹음…….”
이서호는 다음엔 공략 영상 보고 도전할 거라며 씨근덕거렸다. 진짜 별일 아니었네……. 약간의 허무함과 안도를 느낌과 동시에 나는 기묘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따지고 보면 이전 생의 과로사 원인은 내 생활 패턴의 문제였겠지만, 인페르노가 그때 그 게임이라는 걸 알게 되자 어쩐지 찝찝한 기분을 털어낼 수가 없었다. 이번 생에는 절대 하지 말아야지. 괜히 부정 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