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드모드 아이돌-234화 (234/320)

234.

이서호의 지원사격 덕에 순간적으로 형들의 관심이 스토커를 향했다. 나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재빠르게 끼어들어 조금 전 있었던 일을 설명했다. 날 보는 유찬 형의 얼굴에 ‘알만하다.’라는 듯한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그래서 내일이나 모레 연락해 주시기로 했어요.”

“그러니까 하온이가 혼자 헤맨 탓에 박현철 씨를 만났다는 거지?”

정이한의 결론이 이상했다. 나는 ‘탓이 아니라, 덕…….’이라고 정정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정이한이 할 말 많아 보이는 얼굴로 날 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2차전은 없을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봐.

“나 진짜 할 말 많은데…….”

날 응시하던 정이한이 운을 뗐다. 하지만 정이한은 말꼬리를 늘리다가 유찬 형을 한 번 보더니 다시 내게로 고개를 돌렸다.

“이미 유찬 형한테 쓴소리 들었을 테니까, 나는 더 이상 안 할게. 하지만 움직일 땐 항상 기억해줄래? 네가 나에게, 아니. 우리에게 얼마나 중요한 사람인지를.”

묵직하게 가슴에 박히는 단어에 벌어졌던 입을 다물었다. 중요한 사람. 내가, 정이한에게. 그리고 멤버들에게.

“……네.”

“그거면 됐어.”

정이한은 조금 씁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마지막 멤버인 강현 형의 눈치를 살폈다. 형은 무뚝뚝한 어조로 “두 번은 없다.” 하고 확실하게 경고했다. 나는 입술을 말아 문 채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녹화 중이니까 내 몫의 잔소리는 뒤로 미룰게. 일단 지금은 체육관으로 돌아가.”

아직 끝난 게 아니라는 매니저 형의 예고와 함께 우리는 대기실을 나섰다.

***

그동안 나보다 빠른 강현 형이나 이서호 때문에 몰랐지만, 내 달리기 실력도 나쁘지 않았나 보다. 100미터 달리기 준결승전에 진출한 나는 경기를 위해 대기 중이었다. 나보다도 먼저 경기를 끝내고 결승전 진출권을 따낸 이서호는 라인 바깥에 서서 그 큰 성량으로 나를 응원했다.

나도 결승전에 나가면 이서호랑 달리는 건가? 앞 팀의 경기를 지켜보던 중, 옆에서 누군가가 내 어깨를 툭 두들겼다.

“하온아!”

딥컬러의 흑강이었다. 잊을 만하면 한 번씩 마주치는 통에 열심히 머리를 굴려 이름을 외워놨다. 사실 오전에 이미 한 번 마주쳐서 인사했기 때문이긴 하지만. 어쨌든 나는 자신만만하게 웃으며 흑강을 반갑게 맞았다.

“너도 준결승전이야?”

“뭐야? 몰랐어? 서운한데. 난 알고 있었는데에에……!”

“미, 미안. 형들 따라다니느라…….”

흑강은 쾌활하게 웃으며 내 어깨를 툭툭 두들겼다. 어깨 치는 거 습관인가.

“농담이야. 그보다 너 인기 많더라.”

“……어?”

“우리 팀에서 너랑 안면 트고 싶다고 나한테 소개해 달라는 선배님이 몇 분 있었거든.”

“……블루 팀에?”

흑강은 아무렇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너 혼자 있을 땐 분위기가 오묘해서 말 붙이기가 쉽지 않더래.”

“분위기가 오묘한 건 뭐야…….”

내가 혼자 있을 때는 지금처럼 경기 대기 중일 때밖에 없는데. 긴장해서 그렇게 보이는 건가?

“그, 있어. 너 혼자 있을 때 표정 사라지는 거 알아? 무표정하게 있으면 뭔가 그 분위기가. 아무도 다가오지 못하게 철벽 치는 느낌 같은 거? 싸늘한 냉미남 포스를 흘리고 다니니 말 붙이기 쉽지 않지. 너네 멤버들이랑 있으면 허술해 보이는데 말이야.”

뭔 소린지 잘 모르겠다. 나 같이 흐물흐물한 사람이 또 없는데 말이지. 어쩐지 실제 나와는 거리감이 느껴지는 평가에 갸웃거렸더니 흑강이 파하하, 크게 웃으며 또 내 어깨를 툭툭 두들겼다.

“여튼 그래서 경기 끝나고 잠깐 인사하러 갈래? 이 바닥 인맥 넓혀둬서 나쁠 거 없잖아.”

그건 그렇지만. 잘못 얽히면 또 곤란한 일에 휘말릴 가능성도 있어서 선뜻 대답하기 꺼려졌다. 내 침묵을 오해한 건지 흑강이 말을 덧붙였다.

“아! 당연히 남자팀이야.”

“우리 형들도 같이?”

멤버들이랑 다 함께 만나는 가벼운 인맥 정도는 별 문제 되지 않겠지. 어차피 한동안 혼자 다닐 수도 없으니 이건 확인을 해둬야겠다.

“상관없지 않을까?”

“어, 그러면 씨름 끝나고 가도 돼? 강현 형 출전했거든.”

“완전 가능! 혹시 나 없어도 우리 애들 있으니까.”

“알았어. 아, 내 차례다.”

“어어! 이겨라! 홧팅!”

“나 적인데?”

“친구잖냐!”

흑강은 쾌활하게 웃으며 내 등을 떠밀었다. 확실히 흑강은 이서호 과였다. 처음부터 친근하게 굴고 마주칠 때마다 항상 내게 반갑게 인사해줬다.

나는 그저 동갑인 타 그룹 멤버일 뿐이라고만 생각했는데. 흑강에게 나는 처음부터 친구였나보다. 조금 신기한 마음이 들었다. 친구란 게 이렇게 간단하고 쉽게 되는 거였어? 뭔가 특별한 계기 같은 게 있어야 하는 줄 알았지…….

친구, 친구라. 나와 동갑인 친구가 나도 모르게 생겨 있었다. 얼떨떨하기도 하고, 괜히 좋기도 해서 출발선 앞에 서서 미소 짓고 있을 때였다.

“뭐 좋은 일 있었나 봐요?”

옆자리에 선 블루 팀 선수가 내게 말을 걸기에 얼굴을 확인하려고 하고 고개를 젖혔다. 정이한이랑 비슷할 정도로 크네. 텐스타 멤버인 준이었다. 선이 짙은 미남으로 유명했었던가.

텐스타는 나도 잘 아는 그룹이었다. 내가 있던 세계에도 이 그룹이 있었거든. 분명 이쪽 멤버 중 몇 명이 마약으로 걸려들어 갔었지. 두 명이었나. 세 명이었나. 저 때 대규모 마약 파티가 터져 한동안 연예계가 들썩거려서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었다. 문제는 텐스타는 그 이름대로 멤버가 열 명이나 있어서 마약으로 잡혀들어간 사람이 그중 누군지는 정확히 기억이 나질 않는다는 거였다.

어쨌든 결론은 친해져 봐야 득이 될 것 없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아, 안녕하세요. 선배님.”

“딱딱하게 선배는 무슨. 그냥 형이라고 해요.”

“아하, 하…….”

준 선배님은 바로 앞에 출발한 팀의 진행 상황을 보듯 힐끔거린 뒤, 다시 내게 속삭였다.

“이따 우리 쪽에 인사하러 온다고 했죠? 그럼 우리 그룹 대기석으로도 와 줄래요?”

나와 흑강이 나눈 대화를 듣고 있었던 건가. 뭔가 느낌이 좋지 않았다. 하지만 이미 다른 팀에게 인사 가는 걸 아는데 여기서 제안을 거절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애매하게 웃으며 “그럴게요.”하고 대답했다. 그래도 촬영장이니 지켜보는 팬들도 많고, 형들이랑도 같이 갈 거니까 괜찮겠지.

다행히 대화는 더 이어지지 않았다. 스태프가 곧 출발한다고 알려준 덕이었다. 나는 출발 자세를 잡고, 신호를 기다리며 다리에 힘을 줬다.

탕!

직선으로 쭉 이어진 라인을 따라 열심히 뛰기만 했다. 함께 뛰는 선수들은 의식하지 않고, 오직 앞만 보며 발을 굴렀다. 100미터의 끝은 순식간에 다가왔다. 넓은 보폭으로 결승선을 통과한 내 몸은, 속도를 이기지 못하고 곧 푹신한 벽에 파묻히듯 부딪혔다.

1등인 것 같…….

“컥.”

갑자기 커다란 무언가가 나를 덮쳤다. 마치 곰에게 습격당한 듯한 느낌이었다. 벽과 사람 사이에 끼인 내 귀에 디어리들이 놀라 외치는 소리가 선명하게 박혀 들었다. 충격에 정신을 차리려고 고개를 흔들자, 누군가가 내 양어깨를 붙잡고 나를 돌려세웠다.

“괜찮아요? 미안해요!”

조금 전 대화를 나눈 준 선배님이었다. 선배님은 놀란 얼굴로 발이 걸려서 방향이 틀어졌다며 연신 내게 사과하셨다. 조금 놀란 것뿐이지 어디 아픈 곳은 없었기에 나는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벽이 푹신해서 그런지 다친 곳은 없는 것 같아요. 정말 괜찮습니다.”

예의 바르게 대답하자 선배님은 정말 미안하다고 다시금 사과하셨다.

“진하온! 괜찮아?”

놀란 이서호가 한달음에 달려왔다. 이서호는 선배님을 향해 얼른 고개 숙여 인사한 뒤 내 몸을 살폈다.

“응응. 괜찮아. 선배님, 저 정말 괜찮습니다!”

나는 선배님을 향해 허리를 꾸벅 숙인 뒤 놀란 얼굴로 날 살피는 스태프에게도 괜찮다는 신호를 줬다. 그 뒤에야 이서호를 데리고 결승점에서 벗어났다.

“야, 너 진짜 괜찮은거임?”

“응. 좀 놀라긴 했는데 아픈 덴 없어.”

“교통사고는 후유증이 심각하댔는데…….”

이서호가 미간을 찌푸리며 진지하게 웅얼거렸다.

“이게 교통사고랑 같아?”

“거의 그 급이야. 심지어 화물차랑 경차랑 사고 난 거라고. 나는 너 짜부라져서 팔랑팔랑 쓰러질 줄 알았단 말이야!”

“그 정도는 아니다. 이 이야기는 여기서 끝. 강현 형 응원하러 가야지.”

“어어. 이한 형도 끝난 것 같아.”

“유찬 형은?”

이서호가 까치발을 들고는 체육관을 휘둘러봤다. 그리고는 한 곳을 가리켰다.

“저기 온다.”

사람들 틈을 비집고 유찬 형이 경보라도 하듯 빠른 걸음으로 이쪽으로 오고 있었다. 형의 가슴팍에서 짤랑거리는 은메달이 조명을 받아 한껏 반짝거렸다.

“와! 유찬 형!”

은메달이다! 형의 은메달 소식이 기뻐서 한껏 함박웃음 지으며 유찬 형을 마중했다.

“하온아! 너 괜찮아?”

하지만 형은 은메달을 자랑하기는커녕 내 몸을 먼저 살폈다.

“완전 괜찮죠. 저거 되게 폭신해요.”

나는 파란색 벽을 가리키며 방긋거렸다.

“진짜야?”

“그럼요. 진짜죠. 그보다 형 은메달 축하해요! 보고 싶었는데 경기 겹쳐서 아쉽다…….”

“조금이라도 아픈 데 있으면 바로 말해야 해. 숨기지 말고. 알았지?”

말 돌리려던 시도는 장렬하게 실패로 돌아갔다. 나는 유찬 형에게 거듭 약속한 후에야 다시 자유를 찾을 수 있었다.

“아, 형.”

“응?”

“흑강이 블루 팀으로 인사하러 오랬어요. 선배님들 소개해 준다고.”

“그래? 언제?”

“강현 형 씨름 끝나면요.”

“아, 알았어. 그럼 강현이 씨름 끝나면 같이 가자.”

우리는 함께 씨름 경기가 펼쳐지는 구역을 향했다. 도중에 합류한 정이한도 소식을 들은 건지 날 보자마자 괜찮냐는 말부터 해서 머쓱해졌다.

“괜찮습니다. 진짜요! 정말정말정말!”

“푸흡. 알았어.”

정이한이 웃으며 내 머리를 쓱쓱 쓰다듬었다. 그때 씨름판에서 사람들의 비명이 들렸다. 응원의 목소리라고 하기에는 결이 달랐다. 곧이어 심상찮은 웅성거림이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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