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8.
대기실로 돌아오니 형들이 전부 멀쩡한 정신으로 일어나 있었다.
“어! 진하온 왔다!”
이서호가 내 쪽으로 쪼르륵 다가와 피디님이 날 부른 용건이 뭐였는지 물었다. 나는 이걸 매니저 형에게 토스하기로 마음먹고 형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형이 한 변명이니까 형이 수습해줘요!
이서호의 시선이 나를 따라 자연스럽게 매니저 형을 향했다. 더불어 다른 멤버들도 모두 형을 바라봤다. 매니저 형은 “다른 프로그램 출연 섭외였는데 우리 스케줄이랑 안 맞아서 못 할 것 같다고 거절했어.”하고 태연하게 말했다.
“엥? 우리 주말 팬 미팅 이외에 스케줄 없지 않아요? 뭐 있었나?”
이서호가 우리에게 어떤 다른 스케줄이 있었는지 혼란스러워하자 매니저 형이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응. 그 팬 미팅이랑 겹쳐서.”
“아! 그럼 당연히 못 나가죠.”
이서호는 아무런 의심 없이 받아들였지만, 사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의심할 거리가 너무 많은 변명이었다. 다른 형들이 파고들면 분명 바로 들통날걸. 섭외를 이런 식으로 하는 경우도 있냐고. 하지만 가만 생각해보니, 매니저 형은 경험이 많으니까 ‘가끔 이럴 때가 있어.’라고 반박하면 다른 형들도 수긍할지도 모르겠다. 나라면 그렇구나, 했을 것 같거든. 그만큼 그동안 매니저 형과 쌓은 신뢰가 두텁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다른 형들이 어떻게 나올지 궁금했는데, 형들도 이서호와 같이 자세한 내용을 묻지 않고 바로 매니저 형의 말에 수긍해버렸다. 뭔가 더 캐물어 볼 줄 알았는데 의외네.
“그보다 우리 밥 먹자……. 배고파아!”
이서호가 배를 움켜쥐며 외쳤다. 때마침 디어리가 보내준 점심 서포트가 막 도착한 참이라 대기실에 맛있는 냄새가 솔솔 풍기고 있었다.
“……지금 먹을까?”
유찬 형도 도시락에 시선을 고정한 채 입맛을 다셨다. 목울대가 꿀렁이는 걸 보니 형도 엄청 배가 고팠나 봐. 사실 나는 별생각 없었지만 맛있는 냄새를 맡으니까 배가 고파오는 것 같은데…….
“도착하자마자 먹어야 제일 맛있단 말이야! 우리 디어리의 정성! 디어리의 마음이 가득 담긴 사랑의 도시락!”
이서호가 우렁차게 외치며 도시락을 끌어안을 듯 양팔을 크게 벌렸다.
“서호야. 그대로 정지!”
“저, 정지!”
매니저 형이 다급하게 말하자 이서호가 복창하며 움직이는 걸 멈췄다. 형은 휴대폰을 꺼내 들더니 그런 이서호를 열심히 찍어댔다.
“됐어. 아, 우리 서호 귀엽다.”
매니저 형은 흐뭇하게 웃으며 사진을 넘겨봤다. 나도 형의 어깨 너머로 사진을 들여다봤다. 먹을 걸 앞에 둔 이서호의 표정은 그야말로 햇살 그 자체였다.
“저도 보여줘요!”
날 듯이 달려온 이서호도 제 사진을 보고 만족스러워했다.
“형형, 이거 ‘밥 먹을 준비 완료!’라고 써서 올려줘요!”
“오케이.”
매니저 형이 짹짹이에 사진을 올리는 사이 우리는 도시락 포장을 해체하기 시작했다. 디어리가 보내주는 서포트에는 도시락과 후식, 거기에 정성스러운 손 편지까지 담겨 있었다. 나는 내 이름표가 붙어있는 도시락을 챙겨 앉은 뒤 팬레터부터 읽기 시작했다.
마음을 꾹꾹 눌러 담은 듯한 팬레터는 언제나 그렇듯 나를 사랑한다는 내용이 가득했다. 맛있는 거 많이 먹고, 예쁜 것만 보라는 건 여기도 쓰여 있네. 어떻게든 나를 행복하게 만들어 주고 싶다는 의지가 느껴져서 미소 짓고 있을 때였다.
“하온아.”
“네?”
무의식중에 날 부르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을 때였다. 매니저 형이 내게 휴대폰 카메라를 들이대고 있었다. 나는 카메라를 보자마자 바로 손 하트를 만들며 방긋 웃었다.
“응. 됐다.”
“……?”
셔터음이 안 들렸는데?
“팬레터 보는 하온이 눈에서 꿀 떨어지길래 영상 찍었지.”
“아! 저 사진 찍는 줄 알고 포즈 잡았는데!”
매니저 형은 너도 결과물을 보면 만족할 거라면서 내게 방금 찍은 영상을 보여줬다. 유찬 형과 정이한도 고개를 빼꼼 내밀어 짧게 촬영된 영상을 함께 봤다.
거기에는 팬레터를 읽는 내 옆 모습이 담겨 있었는데, 영상 속의 나는 연인이라도 보는 듯한 눈을 하고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벅차오르는 내 감정이 전해졌다. 남이 의도해서 억지로 만든 게 아닌 내 솔직한 감정이 영상 너머로 고스란히 드러나 보이니까 왜인지 모를 부끄러움이 몰려왔다.
심지어 마지막에 매니저 형이 부르자 멍청한 표정으로 돌아본 후, 사진을 찍는다고 착각해 뒤늦게 포즈 잡는답시고 헤실거리는 내가 있었다. 나 이렇게 멍청하게 굴었어? 이 정도면 거의 흑역사 급인 것 같은데…….
“……으. 이거 그냥 지우면 안 돼요?”
“왜? 디어리가 좋아할 거 같은데?”
“진짜 잘 나왔다. 정곤 형 작품 중에서도 역대급인데?”
유찬 형과 정이한이 연신 칭찬하며 감탄했다. 나는 또 디어리가 좋아한다는 말에 혹해서 올려도 되냐는 매니저 형의 물음에 “되죠!”하고 대답해버렸다. 괜찮아. 디어리만 좋아하면 돼.
***
점심을 먹고 시간이 흐르는 동안 몰카 때 내세울 억지 공약을 생각해봤지만, 마음에 드는 공약을 찾지 못했다. 결국 나는 카메라가 들이닥칠 때까지 피디님이 제시한 것보다 더 충격적인 건 떠올리지 못했다.
“음료수 마시면서 노래 부르기 어때! 춤출 때 한 방울이라도 떨어트리면 지는 거지!”
이서호가 제일 먼저 의견을 제시했다.
“……1위 공약인데 승패는 왜 가리는 거야.”
그보다 애초에 누구와 겨루는 건데. 몰카를 의식한 반대가 아니라 진짜 순수한 궁금증에 의한 말이었지만 이서호는 “별로인가.”하고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맨발로 앵콜 무대 하기는?”
유찬 형이 재미있어 보이는 의견을 제시했다.
“어? 그거 재밌을 것 같다.”
“나도 마음에 들어!”
정이한과 이서호가 나란히 찬성했다. 솔직히 나도 몰카만 아니었으면 저걸로 하자고 했을 테지만……. 이번에는 철저히 몰카를 염두에 둬야 했기 때문에 “발 더러워지는 건 싫어요.”하고 대답했다.
“엥…….”
이서호가 이상하다는 듯한 눈초리로 날 봤다. 나는 뻔뻔함으로 무장한 채 오히려 “왜?”하고 되물었다. 살짝 고개를 기울인 채 날 보던 이서호가 어깨를 으쓱이고는 다시 정면에 설치된 카메라를 바라봤다.
“안무 포함 파트 바꿔 부르기.”
강현 형이 평소에 이한 형 안무 파트를 해 보고 싶었다며 운을 띄웠다. 그 말에 다소 긴장했는지 대답하는 정이한의 목소리 끝이 작게 떨리고 있었다.
“나 내 파트 이외에는 못 출 텐데…….”
이서호가 자신 없어 하는 정이한의 등을 팡팡 두들겼다.
“아, 이한 형. 이런 건 원래 못해야 재밌는 거야! 괜찮아!”
“……강현이도 괜찮을까?”
두 사람이 동시에 강현 형을 봤다. 형은 그저 평소처럼 묵묵히 서 있을 뿐이었다. 그러다 강현 형이 고개를 정이한과 이서호 쪽으로 돌리자, 지레 찔렸는지 두 사람은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헙.”
강현 형의 눈치를 살피던 둘은 작은 목소리로 ‘이건 하지 말자고 하자.’라면서 속닥거렸다. 정작 강현 형은 아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말이지.
“아, 그런데 저는 파트 바꿔 부르는 건 좀 재미없을 것 같아요.”
내가 끼어들 타이밍은 아니었지만 일단 몰카는 해야 하니까. 그러자 정이한이 “하온이는 뭐가 하고 싶어?”하고 물었다. 나는 방긋 웃으면서 어수룩해 보이는 표정을 가장하여 말했다.
“저희랑 같이 1위 후보인 그룹이랑 함께 앵콜곡 부르는 건 어때요?”
정이한은 순간 말문이 막힌 듯 입을 벌린 채 굳어 버렸다.
“그건 다들 싫어하지 않을까?”
“왜요?”
당사자인 걸그룹 헤라, 헤라의 팬덤, 그리고 디어리까지 모두 싫어할 거라는 걸 잘 알면서도 나는 모르는 척 시치미를 뗐다.
“……어으음. 유찬 형 생각은 어때?”
유찬 형은 잠시 눈동자를 굴리면서 생각에 빠졌다. 이게 고민할 문제였나? 당연히 안 된다고 해야지! 조금 당혹스러움을 느끼고 있을 때였다.
“괜찮을 것 같은데? 재밌겠다.”
어?
“어……. 그럼 그걸로 할까?”
뭐?
“강현이랑 서호는?”
설마. 강현 형이라면 안 된다고 해주겠지?
“그래.”
“난 좋아!”
자, 잠깐만! 이거 아니잖아!
“혀, 형들?”
“응? 왜?”
형들은 되려 순박한 얼굴로 날 돌아봤다. 이거 언제 끊어야 해? 몰카 실패라고 지금 나와야 하는 거 아닌가? 당황한 나는 카메라 감독님들 뒤에서 스태프인 척 자리를 지키고 서 있는 AD님을 눈으로 찾았다. AD님? 저 어떻게 해요?
하지만 AD님은 웃음을 참느라 필사적인 얼굴을 하고 있을 뿐이었다. 이게 지금 그렇게 웃을 때가 아니라고요! 강 건너 불구경하듯 바라보는 AD님이 원망스러웠다.
속으로 한숨을 삼키는데 갑자기 우리 대기실 문이 소리도 없이 조심스럽게 열리고 누군가가 들어왔다. 낯익은 사람. 아까 박스를 옮기던 그 스태프였다. 그래, 역시 과민반응이었네. 스토커가 아니라 진짜 방송국 스태프였잖아.
“하온이 왜?”
내가 불러놓고 말을 하지 않자 정이한이 나에게 말을 걸었다. 잠깐 사이 형들은 이미 헤라한테 미리 이걸 말해둬야 할지 논의하는 중이었다. 이대로 가면 1위 공약이 저걸로 확정되어 버린다.
“형들, 차분히 마음을 가라앉히고 잘 생각해보세요. 그래도 제 의견이 좋아요?”
“난 좋은데.”
“하온이가 좋다면 괜찮겠지.”
정이한은 그렇다 치자. 그런데 유찬 형까지 왜 이러는 거야? 나는 도움을 청하는 눈빛을 하고 강현 형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차라리 형이 몰카라는 걸 눈치채 주는 게 나을 것 같다!
“하온이가 하고 싶다며. 하자.”
“…….”
몰카라는 걸 절대 내 입으로 밝히면 안 된다고 했는데……. 말하고 싶다. 아직도 말하면 안 되나? 사실 몰카였다고 밝히고 제대로 된 공약을 내세우고 싶었다. 아무리 몰카라고 해도 걸그룹을 끌어들여 앵콜곡을 같이 하자고 했는데. 이걸 멤버들이 찬성했다는 게 방송에 나가면 안 되는 거 아니야? 이거 내가 잘못한 건가? 공약을 바꿨어야 했나?
“차, 차분히 생각해보라고요…….”
나는 결국 머리를 감싸며 주저앉았다. 아, 몰라! 입으로 밝히진 않았지만 ‘뭔가 있다.’는 티를 팍팍 내버렸다. 그런데 주저앉은 내 머리 위로 미처 참지 못하고 새는 듯한 유찬 형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순간 묘한 기분이 들어 고개를 휙 들어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