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드모드 아이돌-217화 (217/320)

217.

“결국 올 게 왔네.”

유찬 형은 미간을 찌푸린 채 중얼거렸다. 어쩐지 비장한 각오마저 느껴졌다.

“그러게.”

눈썹 끝을 바짝 세워 올린 정이한도 진지한 태도로 대꾸했다. 예상했다는 듯한 저 반응은 뭐지? 형들이 불안해하는 것보다 낫긴 하지만 이건 이것대로 또 싱숭생숭한 기분이었다.

심지어 강현 형까지 팔짱을 낀 채 검지로 팔뚝을 툭툭 두들기며 그 말에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거리고 있었다. 와중에 이서호만 코 평수를 움찔거리며 “어? 뭐야? 나만 놀란 거야?”하고 어리둥절해했다.

유찬 형이 이서호의 어깨를 짚으며 “하온이를 봐. 스토커가 안 생기게 생겼나.”하고 말했다. 그러자 이서호가 나를 지그시 응시했다. 샅샅이 훑어보는 듯한 시선이 부담스러워질 무렵, 이서호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어. 완전 이해함.”

이걸 좋아해야 하는 걸까. 슬퍼해야 하는 걸까. 어쩐지 갈피를 잃은 듯한 느낌에 매니저 형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복잡해 보이는 형의 얼굴을 보니 내 심정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기도 하고…….

“정곤 형.”

“……어, 어?”

강현 형의 부름에 매니저 형이 뒤늦게 대답했다. 강현 형은 팔짱을 풀고 앞으로 한 발짝 걸어 나오며 물었다.

“대책 마련은 된 건가요? 아니면 그냥 조심하라는 경고?”

“……지금은 손쓸 방법이 없어. 미안하다.”

매니저 형은 죄라도 지은 것처럼 고개를 숙인 채 말했다. 이런 편지만을 가지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건 나도 잘 안다. 누가 보낸 건지 신원 확인조차도 쉽지 않을뿐더러, 실제로 피해가 발생하지도 않았으니 지금 신고해봤자 처벌도 안 되겠지.

“피해 보지 않도록 조심하는 수밖에 없어.”

“알았어요. 우리가 하온이 확실하게 지키면 되는 거죠?”

“우리한테 맡겨요.”

멤버들이 자신감을 보이며 웃자, 그제야 매니저 형도 표정을 풀었다. 그리고는 내게 알려줬던 것처럼 팬 미팅 때를 주의하라며 내 스토커의 말버릇을 멤버들에게 강조해줬다.

“이거 완전 변태 새끼네.”

편지까지 돌려본 뒤 이서호가 진저리 쳤다. 나와 똑같이 뭐라도 묻은 것처럼 편지를 내팽개치는 걸 보니 웃음이 터졌다.

“야, 왜 웃어. 지금 웃음이 나오냐?”

이서호가 어이없다는 듯한 얼굴로 날 봤다.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형들이 내 껌딱지 해줄 거잖아. 그런데 그 사람이 뭘 어쩌겠어.”하고 말했다.

“……그건 그렇긴 한데.”

이서호는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눈을 끔벅거렸다.

“하온이도 스스로 조심해야 해.”

그때 유찬 형이 날 향해 진중한 어조로 말했다. 조심은 하겠지만, 딱히 뭔가 큰일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어차피 형들이랑 항상 같이 있을 텐데 어떻게 나를 데려가겠는가,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네, 조심할게요.”

그래도 대답은 착실하게 해야지.

***

어느새 이번 컴백 일정의 마지막 날이 되었다. 그동안 스토커가 접근하지 않을까 열심히 경계했으나, 방송국까지 침입하는 건 어려웠는지 별다른 일 없이 하루하루가 지났다.

6주 연속 강행군이라 그런지 거의 매일 새벽 기상을 반복한 멤버들은 저마다 대기실에서 몸을 꾸긴 채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나도 피곤한 건 마찬가지라 정이한에게 기댄 채 반쯤 자고 있을 때였다.

톡톡, 하고 무릎을 두들기는 느낌에 눈을 떴다. 졸린 눈을 비비며 “왜요?”하고 물으려고 했는데, 매니저 형이 검지를 세워 입술에 댔다. 반사적으로 벌린 입을 그대로 다물었다.

내가 갸웃거리자 형은 휴대폰을 가리키며 내게 눈짓을 보냈다. 졸고 있는 멤버들의 눈치를 살피는 걸 보니 은밀하게 전달해야 할 내용이 있는 것 같았다. 가방에 있던 휴대폰을 꺼내려고 몸을 움직이자 눈을 번쩍 뜬 정이한이 깜짝 놀란 얼굴로 날 봤다.

“하온이 어디가?”

정이한이 내 옷깃을 꽉 붙잡으며 물었다. 그 소리에 유찬 형도 부스스 고개를 들었다. 엎드려서 졸고 있던 이서호는 잠깐 우리를 보고는 다시 고개를 파묻었다. 발을 꼬고 앉아 팔짱을 낀 채 고개를 빳빳이 세우고 졸던 강현 형도 우리 쪽을 힐끔거린 뒤 다시 눈을 감았다.

강현 형이 제일 신기하다니까. 어떻게 저러고 자지? 나는 저렇게 자려고 하면 고개가 막 이리저리 꾸벅꾸벅 난리가 나는데. 머리를 꼿꼿하게 세우고 자는 것도 능력이었다.

“어디 안 가요. 가방에서 폰 꺼내려고요.”

“으응. 화장실도 혼자 가면 안 된다…….”

정이한은 금방이라도 고개를 바닥으로 처박을 것처럼 피곤해 보였다. 그런데도 두 눈을 부릅뜬 채 내가 움직이는 걸 시선으로 쫓았다. 정이한을 다시 재우기 위해서라도 나는 얼른 휴대폰을 챙겨 소파로 돌아갔다. 내가 자리를 잡고 앉자 정이한은 그제야 나를 붙잡고는 다시 눈을 감았다.

[박정곤 매니저님: 하온아 이따 몰카 있어]

몰카? 그래서 나한테만 조용히 신호를 준 건가. 매니저 형은 향해 고개를 들자 형은 두툼한 손가락으로 열심히 휴대폰을 두들기고 있었다.

[박정곤 매니저님: 오늘 막방이라서 1위 공약할 때 몰카 찍어달라고 요청왔거든]

[박정곤 매니저님: 하온이 혼자 다른 멤들 다 속이는 거래]

[박정곤 매니저님: 지금 하온이만 따로 빼낼 거거든 나랑 같이 움직이면 되는데]

[박정곤 매니저님: 혼자 따라나서야 한다]

[나: 네. 그럴게요.]

매니저 형은 작게 목을 큼큼거린 뒤 “하온아.”하고 나를 불렀다. 내가 아무것도 모르는 척 “네?”하고 대답하자 형은 만족스러운 듯한 얼굴로 “잠깐 나랑 어디 좀 가자.”하고 내게 말했다. 동시에 졸고 있던 멤버들이 동시에 고개를 들었다.

“하온이 어디 가는데요…….”

정이한이 하품하면서 스트레칭을 했다. 잠을 쫓으려는 행동을 보니 무조건 나를 따라올 듯한 기세였다.

“피디님이 하온이랑 미팅하고 싶다고 하셔서 잠깐 데리고 갔다 올게.”

“저도 같이 가면 안 되는 거예요?”

“아무래도 그렇지?”

정이한은 조금 처량하게 보이는 표정으로 날 물끄러미 올려봤다.

“이한아. 형 못 믿어?”

매니저 형이 팔을 접어 우락부락한 근육을 뽐냈다. 정이한의 시선이 그런 매니저 형의 팔에 머물렀다.

“……믿죠.”

정이한은 제 팔을 주물럭거리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옆에서 유찬 형이 “풉.”하고 막힌 웃음소리를 냈다.

***

“그럼 잘 부탁드려요. 하온 씨.”

“네. 열심히 하겠습니다.”

나는 허리를 꾸벅 숙여 인사한 뒤 회의실을 나왔다. 카메라가 그런 내 모습을 착실하게 담았다. 나중에 몰카라는 걸 밝히기 위한 촬영이었다. 이래서 회의실 가기 전에 누나들한테 메이크업부터 받았구나.

몰카 내용은 무척 단순했다. 1위 공약을 정할 때 내가 형들이 제시하는 걸 모두 싫다고 하면서 말도 안 되는 공약을 밀어붙였을 때, 멤버들이 어떻게 나오는지 보고 싶다는 거였다.

피디님은 이 ‘말도 안 되는 공약’이 절대 해서는 안 되는 종류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다른 1위 후보 그룹을 붙잡고 앵콜 같이 하기’ 같은 예시를 들어줬다. 이번에 우리와 함께 1위 후보에 오르는 그룹은 우리와 똑같이 데뷔 후 첫 컴백을 한 걸그룹이었다. 그나저나 그 걸그룹 멤버를 억지로 붙잡고 앵콜 무대에 같이 서겠다고 하면…….

와, 이거 진짜로 하면 논란 터져서 나락 갈 것 같네. 하지만 몰카니까 이 정도 자극은 줘야 하는 게 맞나. 내가 이런 말을 했을 때 형들이 나를 어떻게 설득할지 궁금하기도 한데.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이게 내가 평소에 절대 뱉지 않을 말이라 형들이 내 상태가 이상하다는 걸 금방 눈치챌 것 같기도 했다. 고민 좀 해 보고 그래도 좋은 아이디어가 안 나오면 그냥 이걸로 해야겠다.

“끝났어?”

“네.”

기다리고 있던 매니저 형이 곧장 내게 다가왔다. 대기실로 돌아가기 위해 나란히 걸어가는데 맞은 편에서 박스를 두 개쯤 쌓아 들고 있는 스태프 한 명이 걸어오고 있었다. 저러고 가면 앞은 보이나. 하나도 안 보일 것 같은데.

매니저 형이 벽 한쪽으로 비켜서자 나도 형을 따라 벽 쪽으로 바짝 붙었다. 그런데 남자가 들고 있던 상자 중 하나가 아슬아슬하게 기울어져 있는 게 보였다. 금방이라도 내용물이 와르르 쏟아질 것 같은 느낌에 나도 모르게 손을 뻗어 박스를 받쳐줬다.

“……어?”

“아, 쏟아질 것 같아서요.”

“아! 고맙습니다! 안 그래도 불안했어요.”

남자는 내게 꾸벅 인사를 했다. 동시에 나는 소리를 지를 수밖에 없었다. 남자가 인사를 하며 허리를 숙이는 바람에 결국 위에 올라가 있던 박스가 바닥으로 떨어져 버렸기 때문이다.

떨어진 박스에서 데굴데굴 굴러 나온 건 파티에서 쓸 법한 소품이었다. 당황한 남자가 들고 있던 박스를 내려놓는 사이 나는 뒤집힌 박스를 들어 올렸다. 매니저 형이 옆에서 쏟아진 소품을 주워 담는 걸 도왔다.

“에고, 도와주셔서 고맙습니다.”

“아니에요.”

나는 남자가 내려놓은 박스 위에 내가 든 박스를 올려놓으려고 했다.

“앗, 그냥 저 주셔도 됩니다.”

내 쪽으로 손을 뻗길래 아무 생각 없이 남자에게 박스를 건네줬다. 그 순간 내 손가락에 남자의 손이 닿았다. 남자는 손가락을 한 두어 번 더듬거린 뒤 박스를 받아 들었다.

“정말 감사합니다.”

남자는 씩씩하게 박스를 다시 쌓아 들어 올린 뒤 걸음을 옮겼다. 나는 이상한 기분이 들어서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며 남자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하온이 왜? 저 사람 수상해?”

매니저 형이 남자를 보며 물어왔다. 이걸 수상하다고 해야 하는 건가? 하지만 일련의 행동은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다. 내가 박스 가운데를 잡고 있었으니 박스를 받아 가는 사이 손가락이 닿는 건 별일 아닌 것 같았다.

하도 스토커 생각을 해서 예민해졌나.

“아니요. 별일 아니었어요.”

“뭔데?”

“상자 넘겨줄 때 손가락이 좀 닿아서요.”

“불쾌했어?”

매니저 형은 금방이라도 튀어 나가 남자의 멱살을 낚아채 올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형의 팔을 잡아 누르면서 고개 저었다.

“아뇨, 그냥 옮기면서 우연히 닿은 느낌이었어요. 불쾌감은 없었어요.”

과민반응이겠지. 특징이라 할 말버릇도 없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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